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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날은 간다 3
2014. 3. 금계
개나리 만발한 우리 집 부근 시내버스 정류장. 환장하게끔 밝고 투명한 햇살이 자꾸만 날더러 밖으로 나오라고 꾀어낸다.
3월 24일 월요일, 아침을 일찍 먹고 어디로 갈지 잠시 머뭇거리다가 청자의 고장 강진으로 행선지를 결정한다. 무엇보다도 거기에는 김종대 선생이 3월 1일자로 고등학교 발령을 받았으니 최소한 점심은 때울 수 있다.
버스 기사들은 자리가 많이 비었는데도 앞좌석에 앉는 승객들을 그리 달가워하지 않는다. 그래도 나는 앞자리를 선호한다. 앞이 툭 트여 도로를 전망하기 좋고 때로는 사진도 찍을 수 있기 때문이다.
도로가에 늘어선 가로수들이 나를 반긴다. 어디든 여행길은 늘 내 가슴을 설레게 한다. 하기야 인생 자체가 나그네길 아니던가.
독천 버스 정류장 부근의 하천. 시내를 통과하기 때문에 그리 맑은 물은 아니지만 나는 씨방을 다 날려버리고 봄바람에 서걱거리는 앙상한 갈대들이 멋쩍게 서 있는 하천 풍경을 좋아한다. 멀리 산발치에 어른거리는 희미한 이내가 봄의 권태로움을 한껏 부추기는 듯하다.
- 이 비 그치면 내 마음 강나루 긴 언덕에
서러운 풀빛이 짙어 오것다. (함평 이수복)
영암군 학산면 독천리는 지금도 갈낙탕 (갈비 + 낙지) 이 유명하지만 예전 같은 성황은 기대할 수 없다. 영암호를 막는 바람에 마을 건너편 미암 문수포에서 엄청나게 잡히던 낙지가 바람과 함께 사라지고 말았기 때문이다. 국민식품의 반열에 오른 목포낙지는 수요에 비한 공급량이 워낙 딸려서 지금 목포에서도 값이 천정부지로 치솟고 있는 중이다.
차창을 스쳐가는 전원풍경이 참 다사롭다. 이내에 감싸여 흔들리는 멀고 가까운 산줄기, 풀빛이 짙어가는 논밭, 얕은 구름이 어슬렁거리는 하늘 - 사방에 봄빛이 무르녹아 질질 처지는 모양새다. 어떤 시인은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느냐고 탄식했지만 나는 선조분들 덕분에 해방된 들판에서 태어나 일흔 해 가까이 봄 아지랑이를 즐기고 있으니 이보다 더 큰 행복이 어디 있으리오.
버스가 강진군 성전면 정류장에 도착한다. 시골 아주머니들이 장바구니를 들고 우르르 버스로 몰려든다. 저분들도 나처럼 봄바람을 쐬고 싶어 오금이 쑤시는 모양이다.
강진버스여객터미널. 단정한 명조체가 아니라 비뚤배뚤 휴먼편지체를 닮은 정류장 간판이 마음에 든다.
넓은 정류장 안이 이따금 버스 한두 대만 들락거릴 뿐 괴괴하다. 승용차가 늘어나면서 버스는 예전 같은 호황을 누리기 어려워졌다. 그래도 여전히 버스는 시골 사람들의 가장 중요한 발 노릇을 하고 있다.
번화가 로터리에 단아한 소나무 한 그루가 봄볕을 담뿍 받고 있다. 산속에 우두커니 서서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던 소나무들이 요즘 들어서는 정원수, 가로수로 각광을 받고 있다.
나는 신호등을 엄격하게 지켜야 하는 사거리보다는 이렇게 차량이 조심조심 꼬리에 꼬리를 물고 뱅뱅 도는 로터리를 더 좋아한다.
봄 조개, 가을 낙지라는 말이 있다. 요즘 낙지는 귀하고 비싸고 맛도 별로다. 요즘 바지락은 산 채로 막 까서 매콤 달콤 새콤하게 무쳐먹으면 둘이 먹다가 하나 죽어도 모른다.
좌판에 널려진 새조개, 고막, 다른 조개와 낙지들이 침샘을 자극한다. 봄에 정력을 증강시키고 싶은 사람들은 조개나 고막을 살짝 데쳐먹으면 십전대보탕보다 낫다.
문병태 선생이 강진 근무할 때 함께 따라간 곳이 시장 통의 ‘1번지 주막’이었다. 주인할머니는 우리가 주문하면 부랴부랴 시장으로 나가서 산 바지락을 사다가 까서 무쳐주었다. 삶은 고막도 황홀한 맛이었다.
하루는 별호사 차로 단둘이 목포에서 강진까지 달려 ‘1번지 주막’을 찾았다. 바지락무침과 삶은 고막을 몇 점 맛 본 별호사는 다급한 목소리로 주인 할머니한테,
“여기 목포까지 대리 운전 구할 수 있을까요?”
그러니까 안주가 너무 맛있으므로 술 한 잔 걸치고 대리운전을 부탁하고 싶다는 바람이었는데 물론 그 당시로서는 불가능한 이야기였다. 하는 수 없이 바지락과 고막 안주만 먹은 별호사는 목포 덕인주점 와서야 소주를 마실 수 있었다.
나는 낯선 거리에 가면 간판 구경도 빼놓을 수 없는 재미다. 예쁜 색깔의 간판, 이름이 예쁜 간판, 이름이 색다른 간판. “예뻐지는 날”은 미장원 간판. 우리의 삶이 날마다 예뻐지면 오죽 좋겠는가. “꽃처럼 바람처럼”은 꽃집 간판. 우리도 꽃처럼 바람처럼 가볍고 멋지게 한 세상 살다가 스러졌으면 잠 좋으련만.
텔레비전 보니까 아이들은 빨간색 노란색 음식을 좋아한다고 한다. 음식이 맛있어서가 아니라 맛있어 보이기 때문이란다. 그래서 그런지 음식점 간판이 빨간색 노란색이 많다. 색투성이 미술은 미술학원이나 되는가. 진짜로 글자를 쓴 색깔이 색투성이다.
강진 고을에도 곳곳에 십자가가 눈에 띈다. 교회가 성업 중인 모양이다. 하기야 전혀 수고롭지도 않고 짐도 안 진 채 아주 멋지고 편안하게 한 세상 살다 가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내남없이 사람들은 누구나 나름대로 한 짐씩 짊어지고 수고롭게 살아가기 마련이다.
강진중앙초등학교 정원의 해묵은 배롱나무, 구부러져 배배 틀고 돌아 올라가는 고팽이마다 숱한 옛이야기를 품고 있음직하다. 얼추 나와 나이가 비슷하지나 않을까 짐작해본다. 오래 살다 보면 굽이굽이 사연도 많고 아픔도 많았겄다.
예전에는 저 기둥에 간지럼밥을 먹이면 우줄우줄 춤을 추기 때문에 ‘간지럼나무’라고 불렀다.
강진중앙초등학교 시청각실, 도서관의 표어는 ‘언제나 별빛처럼’
아까 어느 가게 이름은 ‘꽃처럼 바람처럼’이더니 이제는 또 ‘별빛처럼’이다. 우리는 어디서 왔는가. 백 몇 십 억 년 전의 빅뱅 현장에서 왔단다. 빅뱅은 하찮은 티끌 먼지에서 비롯되었단다. 나는 그 티끌이나 먼지가 물질이 아니라 어떤 의지, 어떤 열정, 또는 일종의 화냥기에서 시작되었다고 말하고 싶다. 꼴리지 않고는 아무것도 이루어질 수 없다.
예나 지금이나 학교에서는 독서의 중요성을 부르짖지만 독서의 한계도 잘 깨우쳐주어야 한다. 석가모니는 책도 안 읽고 보리수나무 아래에서 도를 깨우쳤지만 수십만 권을 읽은 인도의 라즈니쉬는 열광적인 신도들에 의하여 미국으로 초청받아 자가용 자동차 비행기로 온갖 호사를 누렸지만 결국 탈세혐의로 쇠고랑을 찼다.
요컨대 가치관이 중요하다는 말이겄제. 우리나라도 명색이 책을 많이 읽고 공부를 잘하고 서울의 명문대학을 나온 친구들이 독재정권에 빌붙어 온갖 알랑방구를 뀌며 세상이 깜짝 놀랄 만한 온갖 못된 꾀를 꾸민 놈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강진고등학교 가는 들머리에 약수터. 그 곁의 안내판에 ‘고성사’ 구례 화엄사, 장흥 보림사, 고흥 능가사는 모두 불교 냄새를 풍기는 이름들인데 이곳은 어쩌다가 스님들이 고함만 지르는 절인지 고개가 갸우뚱해진다.
약수터 부근의 담장에 벽화가 나붙었다. 그림이 아니라 아예 타일 조각에다 사진을 인쇄하여 이어 붙였다. 구텐베르크 직지심경 인쇄 시작 이래 장족의 발전을 한 셈이다. 벽화만 들여다보아도, 다산초당, 영랑생가, 청자도요지, 메주 만드는 곳을 직접 가보지 않고도, 강진의 대표적인 명소의 분위기나 냄새를 살짝 맡을 수 있다.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직 기둘리고 있을레요. 나의 찬란한 슬픔의 봄을.
드디어 강진고등학교에 도착했다, 요즘 강진고등학교는 거점고등학교로 선정되어 성요셉고등학교와 일부 통합하여 학급 수 학생 수가 늘고 활기가 넘친다고 한다. 3층 국어교사실에 올라가 김종대 선생을 만났다. 그는 목포고등학교에 근무하다가 지난 3월초에 강진고등학교로 발령받아 2학년 주임을 맡았단다. 89년에 나는 목포여중에서 해직되고 김 선생은 영흥고에서 해직되었다. 그와 나와는 명동성당에서 일주일쯤 함께 단식투쟁을 벌이기도 했었다.
4교시에 수업이 있는데 한 시에 끝난다고 했다. 한 시에 다시 만나 점심을 함께 먹기로 하고 일단 학교를 빠져나온다. 고등학교 본관 건물로 들어가는 언덕길에는 바윗돌에 글귀가 새겨져 있었다.
즐탁동시 - 병아리가 알 속에서 껍질 쪼는 소리를 듣고 어미닭이 밖에서 그곳을 함께 쪼아준다. 강제로 가르치려 들지 말라. 학생들이 배우고자 할 때 궁금한 사항, 가려운 곳을 긁어주라. 이쯤 해석해야 하나.
또 바위 곁에 쓰여 있기를, 學而不厭 敎而不倦 - 배움을 싫증 내지 않고 가르침을 게을리 하지 않는다. 그 구절을 읽으며 돌이켜 생각해보니 나는 정말 학교 다닐 때 배움에 싫증을 많이 냈고, 가르침에도 게으름을 많이 피웠던 것 같다. 게으름에는 반드시 대가가 따르는 법이어서 오늘에 이르러 내가 무식을 면치 못한 원인이 모두 젊어서 배움에 등한했던 까닭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바둑, 당구, 낚시, 피아노, 테니스, 화투, 음주, 분재; 나는 불필요한 쾌락에 시간을 너무 펑펑 낭비했다.
현관을 나서니 학교 화단에 예쁜 꽃이 피어 있다. 내 눈에는 꼭 명자나무 같은데 푯말에는 홍매화라고 쓰여 있다.
역시 꽃은 붉은색이라야 제격이다. 풍만하게 무리를 이룬 붉은색 덩어리가 요염함과 화사함을 마음껏 뽐내고 있다.
학교에서 내려가는 언덕배기, 멀리 구강포가 보인다. 아홉 개의 강물이 만나 바다로 스미는 곳, 강물 냇물과 바다의 경계가 꿈꾸듯 모호하게 뒤섞이고 산과 물이 맞물려 어울린 경치가 서럽도록 아름다운 곳. 가슴이 답답한 사람들은 꼭 한 번 가볼 만한 곳.
강진고등학교 바로 옆이 의료원이다. 청자의 고장답게 의료원 뜰에 청자를 반으로 쪼갠 조형물이 맞붙어 강진의 이미지를 현대적으로 잘 나타내주고 있는 것 같다.
요즘 원격진료다 의료 민영화다 해서 의사들의 반발이 심하고 파업으로 시끄러운데 그것이 다 돈과 관계가 있다. 우리나라 의료 보험 체계가 꽤 선진국 수준이긴 하지만 북유럽 나라들에 비하면 아직 멀었다. 의료사업의 상업성에 초점을 맞출 게 아니라 의료원 같은 공공의료시설을 확충시키는 데에 힘써야 마땅하다는 생각이 든다.
의료원 앞 국밥집. 간판만 보아도 음식이 탐스러울 것 같다. 강진이 왜 예전에 탐진이었느냐고? 탐라(제주)에서 조세를 바치는 배가 머물렀기 때문에 탐진이었다던가.
탐진강은 장흥 쪽에서 내려오지만 강진 사람들은 탐진강이 강진 탐진강이라고 주장한단다. 그 주장의 근거인즉슨, ‘강진탐진강’을 거꾸로 읽어도 ‘강진탐진강’이기 때문이란다. 그런 말은 또 있다. ‘자지만지자’ ‘자지만좀만지자’
국밥집 부근에 라이브 까페 ‘추억의 쎄시봉“. 왜 서울의 쎄시봉이 강진에 와서 추억을 더듬는지 미련한 머리로는 이해가 잘 안 간다. 저기 들어가면 송창식의 ‘피리 부는 사나이’가 들려올 것 만 같다. -나는 피리 부는 사나이, 바람 따라 도는 떠돌이, 은빛 피리 하나 물고서, 언제나 웃는 멋쟁이.
강진에 이토록 우아하고 웅혼한 ‘삼일운동기념탑’이 있을 줄이야. 일찍이 변영로 시인은 ‘논개’에서 ‘양귀비꽃보다도 더 붉은 그 마음 흘러라‘고 읊조렸지만 강진 기념탑에서도 때가 오면 툭툭 미련 없이 떨어지고야 마는 홑 동백꽃이 붉게 타오르고 있었다.
나는 지금 4교시 수업을 하고 있는 김 선생과 점심을 먹으려고 고등학교 주위를 슬슬 배회하고 있다.
마당갈비. 간판이 희한하게 동양화다. 인쇄술이 참 발달했다. 저런 그림을 비바람 치고 햇볕 쨍쨍한 밖에 붙여 놓았는데도 끄떡없으니 말이다.
길가의 솟대 아래 꽂아놓은 바람개비. 바람이 별로 심하게 불지도 않는데 씽씽 신나게 잘도 돈다. 봄 햇살과 너무나 잘 어울리는 바람개비다. 여기도 봄이 허벌나게 무르익었음을 자축하는 모양새다. 뱅뱅 도는 모습을 들여다보고 있노라니 봄 햇살이 너무 아찔하여 어지럼증이 일어난다.
푸른 들 어린이 집 - 어쩌면 들판으로 아이들을 데리고 다니던 페스탈로치의 정신을 이어받은 어린이집이나 아닌지 모르겠다. 건물도 엘리자베스 여왕의 궁전처럼 화려하다.
통학차에 그림과 함께 쓰인 광고문을 들여다보니
- 아이들의 몸, 마음, 영혼을 살리는 생태 유아 공동체 (유기농 식단, 산책놀이, 텃밭 가꾸기, 세시풍속).
그 글귀만 읽어봐도 내 맘에 쏙 든다. 우리나라 교육은 바탕부터 글러버렸다. 성적과 점수만 중시하다보니 인성교육이나 인간화교육이 쏙 빠져버렸다. 푸른들 어린이집을 나와 봐야 학교 들어가면 말짱 도루묵이다.
최근에 어느 미국 기자는 세 나라의 교육이 발전했는데, 핀란드는 국가나 국민들의 뒷받침이 좋고, 폴란드는 학교나 교사의 자율성이 좋고, 한국은 찜통 교육, 어린이 철인경기에 비유했단다. 이건 칭찬인지 비아냥인지 모를 일이다.
그러니까 한국은 학생들을 압력밥솥처럼 찜통에 넣고 나긋나긋해질 때까지 폭 쪄버리고, 혓바닥 쏙 나오도록 철인경기를 시킨다는 뜻이렷다. 오호라, 슬프도다, 그런데도 벼락 오바마 대통령은 한국 교육을 본받자고 노가리를 깠다니.
강진은 유난히 다른 고을보다 예쁘고 멋진 집들이 더 많이 눈에 띈다. 아마도 물산이 풍부하여 돈도 잘 돌고 경제가 윤택한 모양이다.
드디어 점심시간, 김 선생의 차를 타고 따라간 곳이 한국관. 김 선생이 살치살을 주문했단다. 처음 들어보는 부위 이름. 살치는 갈비와 등심 사이의 부위란다. 소 한 마리에 한 덩이밖에 나오지 않는단다. 마블링만 보아도 먹음직스러워 군침이 돈다.
“자네 덕분에 오랜만에 목구멍 때 좀 벗길란갑네.”
아닌 게 아니라 숯불에 구우니 기름이 지글지글 입에 쩍쩍 달라붙는다. 에라 모르것다, 나는 요즘 위궤양 약을 먹느라 술 담배를 금하고 있지만 오늘만큼은 맛난 고기에 소주도 한 잔 곁들이고 덩달아 담배도 한 대 꼬나물기로 한다.
“예고도 없이 쳐들어와서 당황했제? 내 깐에는 ‘손가락으로 가리키면 어디든지 간다.’는 구호를 실천할 요량이었거든.”
해직 기간 김 선생은 한 때 정육점을 했다. 이문도 솔찬해서 선생 봉급이 부럽지 않았다 한다. 덕분에 우리는 김 선생 정육점으로 불려가 ‘간 옆 살’이니 ‘제비추리’니 최고급 부위로만 가난에 쪼들린 위장을 달랠 수 있었다.
[[ 돌담에 소색이는 햇발같이 풀 아래 웃음 짓는 샘물같이
내 마음 고요히 고운 봄길 위에 오늘 하루 하늘을 우러르고 싶다
새악시 볼에 떠오는 부끄럼같이 시의 가슴에 살포시 젖는 물결같이
보드레한 에메랄드 얇게 흐르는 실비단 하늘을 바라보고 싶다 ]]
중학교 국어책에 실린 이 시보다 더 유명한 시가 또 있을까. 비록 영랑은 떠났지만 오늘도 영랑 생가에는 봄볕이 포근하고 돌담에 속삭이는 햇발도 여전하다. 나도 오늘 하루 에메랄드빛 하늘을 우러르고 싶다.
영랑 생가 들어가기 전 못 보던 건물이 한 채 눈에 띈다. 시문학파 기념관. 영랑 선생과 같은 시대에 활동했던 시문학파 동인들을 기념하여 세운 건물인 듯하다. 나는 먼저 그곳에 들어가 보기로 한다.
시문학파 기념관 입구에는 1930년 시문학 동인지를 펴낸 시인들의 사진을 담은 휘장들이 나란히 펄럭이고 있었다. 모두 우리나라의 현대시를 견인한 면면들이라 할 수 있겠지.
기념관 안에 들어가니 역시 영랑과 비슷한 일제강점기에 활동했던 시인들의 사진이 걸려 있다. 그 중에서 우리한테 오랫동안 잊혀졌던, 내가 가장 좋아하는 백석의 사진도 걸려 있었다.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가난한 내가 /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 오늘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 / 나타샤를 사랑은 하고 / 눈은 푹푹 날리고 / 나는 혼자 쓸쓸히 앉어 소주를 마신다. / 소주를 마시며 생각한다. / 나타샤와 나는 / 눈이 푹푹 쌓이는 밤 흰 당나귀 타고 / 산골로 가자 출출이 우는 깊은 산골로 가 마가리에 살자. / 눈은 푹푹 나리고 / 나는 나타샤를 생각하고 / 나타샤가 아니 올 리 없다. / 언제 벌써 내 속에 고조곤히 와 이야기한다. /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 / 세상 같은 것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 / 눈은 푹푹 나리고 / 아름다운 나타샤는 나를 사랑하고 / 어데서 흰 당나귀도 오늘밤이 좋아서 응앙응앙 울을 것이다.
탐미적인 모란 시인 김영랑.
찬란해서 슬픈 봄, 슬퍼서 찬란한 봄.
찬란해서 슬픈 인생, 슬퍼서 찬란한 인생.
올봄도 나는 영랑 생가에서 봄볕이 너무 찬란하여 슬프다. 모란이 피면 꽃 꺾어 산 놓고 또 무진무진 먹어야 쓰겄다. 오메, 단풍이 들 때까지.
영랑 생가 방문은 봄철이 제격이다. 영랑 생가의 봄은 언제 와 봐도 찬란해서 슬프다.
강진군청의 학습목표는 ‘열린 마음, 큰 생각, 행복한 강진!’
우리의 학교들도 강진군청처럼 성적이나 점수 따위는 저만큼 내동댕이쳐버리고 학교 폭력도 밀어내고 서로 열린 마음으로 화엄 대동 세상에서 행복한 표정들을 지었으면 오죽이나 좋겠는가.
개가 이 세상을 판단하는 기준은 두 가지란다. 먹을 것인가, 못 먹을 것인가. 암컷인가, 수컷인가.
누군가는 사람을 세 종류로 나눴다. 남자, 여자, 그리고 사람도 아닌 사람.
강진 다방 이름은 어울림이지만 이 세상에는 남을 배려하거나 남과 어울리지 못하고 제 주장만 앞세우고 마이웨이만 외치는 팔푼이들도 적지 않다.
춘분을 넘긴 하루해가 참 길기도 하다. 목포로 돌아오는 길, 멀리 월출산이 웅장하다.
이 세상을 오래 사는 법에는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잘 참고 견디고 진득하니 나이를 많이 먹는 것이다.
둘째는 주어진 시간을 옴니암니 쪼개서 소중히 옹골지게 쓰는 것이다.
쳇바퀴처럼 정해진 일상을 벗어나 여행을 다니는 것도 짧은 인생을 길게 사는 좋은 방법이다. 그것도 비행기나 자동차를 타지 말고 반드시 천천히 걸어 다녀야 시간이 더디 흘러간다. 밥을 그냥 침 발라 우물우물 꿀꺽 삼키지 말고 열 번 스무 번 천천히 꼭꼭 깨물어 먹듯이.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