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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림의 소리 스크랩 원감국사의 우서(偶書)와 한단지몽
현림 추천 0 조회 62 18.07.06 07:26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원감국사의 우서(偶書)와 한단지몽

 

 

偶書/ 圓鑑國師

邯鄲之夢 事荒唐(한단지몽사황당)

寵辱眞同 夢一場(총욕진동몽일장)

盡道五能 窮此理(진도오능궁차리)

逢些順境 却顚忙(봉사순경각전망)

 

우서/원감국사

한단의 꿈애기는 황당하여도

영욕이야 한바 탕 꿈이 아니던가.

이 이치를 터득한 듯 내가 말하지만

순경(順境)을 만나면 비틀거린다네

 

<뜻풀이>

선가(禪家)는 수행으로 보임(保任)을 중시한다.

보임(保任)보호임지(保護任持)의 준말로서 찾은 본성을 잘 보호하여 지킨다는 뜻이다.

수행승이든 아니든 깨달음이란 누구에게도 일어날 수 있다.

다만 그 깨달음이 마음속에 머무는 시간이 깨달음을 얻는 순간보다 더 빨리 사라질 수도 있기에

 범부는 깨달아도 언제나 범부로 머무는 것이다.

깨닫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깨닫고 나서 그것을 보임하고

또 보임하는 정진이 따라야 한다는 것이 선가(禪家)의 가르침이다.

 

범부이던 성인이던 삶이란 언제나 세속의 유혹이 따르기 마련이다.

깨닫지 못한 범부야 범부대로 유혹의 허덕이게 되고,

한 소식 깨달은 사람이라면 신선이나 무언가 된 것 같은

오만과 자만의 함정에 빠지기 쉬운 것이 인간의 속성이다.

세속을 벗어나 수도한 사람이라면 역경에는 어느 정도 동요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

일이 뜻대로 잘 풀리고 또한 남들의 칭송을 받는 그런 위치에 오른다면

(), 불호(不好)에 초연하여 무심한 바위같이 동요하지 않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므로 원감국사께서 이 시에서 한결같은 마음을 유지하도록 계속 정진해야 한다는 것을 일러주고 있다.

 

<용어풀이>

@偶書(우서): 별생각 없이 우연히 지었다는 뜻.

@邯鄲之夢(한단지몽): 한단지몽은 당()나라 심기제(沈旣濟 750~800)라는 사람이 쓴 침중기(枕中記)라는 전기소설(傳奇小說)책 가운데 나오는 우화로 덧없는 일생을 비유한 고사성어다. 길을 가던 노생(盧生)이 주막집에서 주인이 밥 짓는 사이 도사 여옹(呂翁)의 목침을 빌어 잠깐 잠든 사이에 꿈속에서 부귀영화를 누리며 갖은 영욕(榮辱)을 겪다가 임종에 이르는데 잠을 깨서 보니 그의 꿈속에 긴 행로가 주막집 주인이 밥 짓는 짧은 순간에 불과했음을 알고는 인생의 부귀영화와 영욕이 모두 무상한 것을 깨달았다는 이야기를 주제로 삼고 있다. 한단(邯鄲)은 조()나라의 수도.

@총욕(寵辱): 은 사랑을 받아 부귀를 누리는 것을 의미하고, 은 모욕을 받아 역경에 처한 것을 의미.

@전망(顚忙): 넘어지는 것을 의미.

 

원감국사(圓鑑國師:1226~1292)는 고려 시대 선승(禪僧)으로,

성은 위(). 속명은 원개 (元凱), 본래의 법명은 법환(法桓)이다,

뒤의 법명은 충지(冲止). 자호는 복암(宓庵). 전라남도 장흥 출신.

아버지는 호부원외랑(戶部員外郞) 호소(號紹)이며,

어머니는 이부원외랑(吏部員外郞) 송자옥(宋子沃)의 딸이다.

어려서부터 선림(禪林)에 나아가 득도하기를 원하였지만,

양친의 허락을 얻지 못하여 관직에 몸을 담고 있었으나,

29세에 선원사(禪源社)의 원오국사(圓悟國師) 문하에 들어가 승려가 되었다.

@ 그는 유사(儒士)들처럼 천 명을 믿고 운명에 안주하는 유선조화(儒禪調和)의 사상 조류를 보였고,

상제상 천(上帝上天)의 신앙을 통하여 유도이교(儒道二敎)를 불교 속에 수용하기도 하였다.

그의 선풍은 무념무사(無念無事)를 으뜸으로 삼았고,

지관(止觀)의 수행문 중 지()를 중시하였으며,

 선교일치(禪敎一致)를 주장하여 지눌의 종풍(宗風)을 계승하였다.

 

1292110일 삭발 목욕한 뒤 옷을 갈아입고 문인(門人)들에게

"생사(生死)가 있는 것은 인생의 일이다.

나는 마땅히 가리니 너희는 잘 있거라."는 말을 남겼다.

정오가 지나자 분향하고 축원을 올린 뒤 선상(禪床)에 앉아 '설본무설(說本無說)'이라

설하고, 문인들이 청하는 바에 따라 마지막 게송(偈頌)을 남기고 입적하였다.

 

법랍 39세였다. 저서로는 문집인 <원감국사집(圓鑑國師集)> 1권이 남아 있으며,

< 동문선>에도 시와 글이 많이 수록되어 있다.

 충렬왕은 원감국사(圓鑑國師)라는 시호와 함께 보명(寶明)이라는 탑명(塔名)을 내렸다.

 

圓鑑國師(원감국사) 열반송

閱過行年六十七 (열과행년육십칠) 지내온 한평생 예순 일곱 해

及到今朝萬事畢 (급도금조만사필) 오늘 아침 모든 일 끝나 버렸네!

故鄕歸路坦然平 (고향귀로탄연평) 고향길 평탄하게 트여 있으니

路頭分明未曾失 (노두분명미증실) 그 길은 일찍부터 잊은 적 없네.




한단지몽(邯鄲之夢) 이야기

()나라 현종(玄宗) 개원(開元) 연간에 노생(盧生)이라고 하는 가난한 서생이

어느 날 조()나라의 수도인 한단(邯鄲)에 갔다가 객점에 들었다.

노생은 같은 방에 든 여옹(呂翁)이라는 도인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신세 한탄을 늘어놓았다.

여옹은 보따리에서 도자기 베개를 꺼내 주면서

이 베개를 베고 자면 꿈을 이룰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해 주었다.

이때 객점 주인은 노란 기장밥을 짓고 있었다.

노생은 베개를 베고 누운 지 얼마 안 되어 꿈나라로 들어갔다.

노생은 꿈속에서 청하 최씨의 딸에게 장가들고,

그 이듬해에는 진사 시험에 급제하고 벼슬길에 나섰는데,

계속 승진을 하여 절도사, 어사대부를 거쳐 10년 동안 재상을 지냈다.

그러나 어느 날 갑자기 역적으로 몰려 잡혀가게 되었다.

노생은 옛날 고항에서 농사를 짓고 살던 때를 그리워하며 자결하려 했으나,

 아내와 아들의 만류로 이루지 못했다. 그 후, 다행히 사형은 면하고 변방으로 유배되었다가,

 수년 후 모함이었음이 밝혀져 다시 재상의 자리에 올랐고, 조국공(趙國公)에 봉해졌다.

노생은 아들 오형제를 낳았는데 모두 명문대가의 딸들에게 장가들어 손자도 수십 명이 되었다.

 노생은 이렇게 부귀영화를 누리고 살다가 80여 세에 세상을 떠났다.

 

노생이 하품하고 기지개를 켜며 잠에서 깨어나

자신이 누웠던 방을 보니 옆에는 여옹이 있었으며,

주인이 삶고 있는 노란 기장은 아직 익지 않은 상태였고,

모든 것이 이전과 같았다. 노생은 벌떡 일어나 말했다.

모든 것이 꿈이었구나.”

(盧生欠伸而寤, 見方偃於邸中, 顧呂翁在旁,

主人蒸黃梁尙未熟, 觸類如故. 蹶然而興曰, 豈其夢寐耶.)

 

이 이야기는 심기제(沈旣濟 750~800)침중기(枕中記)에 나온다.

(침중기의 작자에 대해 송대(宋代)문원영화(文苑英華)에는 심기제라고 나와 있다.

 · 청대(明淸代)의 총서에는 이필(李泌)이 지은 것으로 되어 있는데,

현재는 문원영화에 따라 심기제 작으로 보는 것이 통설이다.)

한단지몽은 일명 한단몽(邯鄲夢), 황량지몽(黃粱之夢-기장쌀의 꿈), 황량몽(黃粱夢),

여옹침(呂翁枕여옹의 베게), 노생지몽(盧生之夢), 황량일취지몽(黃粱一炊之夢),

일취지몽(一炊之夢)등의 하는 말로도 쓴다.

황량은 메조(또는 기장)라는 뜻이며 일취(一炊)’'한번 밥짓기 위해 불 땐다'는 뜻이다.

~출처: 고사성어대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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