웅천 향교 하마비에 대하여 특강이 있어 갔다 왔다.
읍성의 누각에서 1시간 가량 하마비에 대하여 강의를 하였는데 거기서 많은 것을 얻어 왔다.
먼저 웅천읍성이냐 현성이냐 하는것인데
이에대하여 첫번째로 논하여 본다.
기록에는 1451년에 내이 고을 과 다른 고을을 합쳐서 웅천이라 정하였다는 기록이 있어
1451년이 웅천이라는 지명을 최초로 사용한 것으로 보이고 웅천의 옛 이름은 내이 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면 왜 많은 이름 중에 웅천이었냐 하는 것인데
추정하면 곰을 모시는 사당이나 곰과 관련이 있는지역으로 생각되지만
정확한 것은 아니다.
그 당시부터 縣으로 이름 받았는데 기록에는 읍성을 만들었다고 하니
지방의 이름은 웅천현 이지만 城으로 이름 부를 때는 읍성으로 불렀다고 생각된다.
기록을보면 웅천현에 읍성을 세워다고 하니 그렇게 생각되는 것이다.
조선왕조에 보이는 성곽 중 마을을 다스리는 城의 이름은 대부분 읍성으로 표현되어 있다.
다만 임금이 계신 곳이나 진성과는 차이를 두고 있다.
조선왕실록 기록
경상도 웅천현(熊川縣)은 정사년에 진(鎭)을 설치하고 절제사(節制使)를 두어 읍성(邑城)을 쌓았는데, 임신년에 〈진을〉 고쳐 현(縣)을 두었습니다. 그러나 성안이 좁아서 공해(公廨)와 군영(軍營)을 세울 수가 없고, 게다가 샘물이 적어서 혹시 사변이라도 있으면, 인민들이 입보(入保)하기가 어렵습니다. 또 왜인(倭人)이 조석(朝夕)으로 왕래하는 곳이므로 관사(官舍)가 없을 수 없으니, 청컨대 다시 성터를 살펴서 가을이 되기를 기다려 증축(增築)토록 하고, 아울러 해안[海子]을 파도록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두번째는 향교의 기록이다.
현이 생기면 향교를 건립하게 되는 것인데 1452년에 향교 부지에 관한 기록이 있기에
현이 생기면서 향교고 건립되고 임진왜란에 소실되어 정조시대에 다시 세운 것으로 생각된다.
남아 있는 웅천향교 하마비에서 향교를 세운 기록이 있기에 그렇게 생각한다.
조선왕조실록 기록
일찍이 제포(薺浦)와 부산포(富山浦)에 왜학 훈도(倭學訓導)를 설치하였으니, 청컨대 웅천(熊川)·동래(東萊)의 두 고을에 나누어 설치하여 학사(學舍)를 세우고, 훈도(訓導) 및 복종(僕從)·마료(馬料)는 여러 고을의 향교(鄕校)의 예(例)에 따르도록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위의 기록을 보면 웅천에 왜학을 가르치는 훈도를 보내라는 예조의 건의가 있었는데 그대로 하였다 하니
향교는 그 전에 건립되어 있다고 생각된다.
세번 째는
웅천 읍성의 누각에 보이는 글인데 현판에 見龍樓라 되어 있는데 안내판에는 견용루라 되어 있어 이것은
현룡루가 하여햐 한다는 것이다.
필자도 견룡루라 읽었는데 하마비 특강을 들으러 오신 어느 교수님의 말씀에 의하면 현룡루가 맞다고 한다.
마지막으로
객사이야기 이다.
웅천읍성의 객사는 현재는 남아 있는 건물은 없지만 학교로 사용하던 사진은 있다.
그리고 객사의 정문은 불곡사의 일주문으로 남아 있고
객사의 정당의 용도 있어 안타깝기만 하다.
웅천 객사에 남아 있는 것은 객사의 문과 正堂 천장의 용인데 현재는 주자정동 강당 대문에 있다.
객사의 정당의 건물에 장식을 하였는데 누군가 객사를 허물 때 중요성을 알아서 가져 왔지만
문위에 올리느라 귀를 잘라서 올려서 원형을 잃어 버렸다.
사진은 남아 있지만 아쉽고 아쉬운 처사이다.
웅천 남산에 있는 왜성은 왜성연구를 하는데 있는데 귀중 한 자원이지만 자주 가지는 못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