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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우회 (외환은행 1970년 입행동기 모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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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게시판 스크랩 대하드라마:불멸의 이순신
아름다운사람아 추천 0 조회 2,175 05.08.16 17:49 댓글 4
게시글 본문내용

대하드라마 불멸의 이순신

김학규의 평가:임진왜란의 전란상황이 잘나타나 있고,그 인물의 역사를 알수있다.

 

 

주요인물들

이순신(김명민)(1545 ~ 1598 / 7세-54세)
자는 여해.
옥골선풍의 외모에 섬세한 감수성의 소유자.
십대 후반에서 이십대 중반까지 협객으로 팔도를 주유한다.
장안의 협객, 팔도야인들과 교유하며
남해안에 출몰하는 왜구와 맞서기도 하고
조무래기 탐관오리들을 응징하기도 하지만
그것으로 세상을 바꿀 수 없음에 끝없이 절망한다.
출사 후,
녹둔도 전투의 패전으로 무관으로서의 자질을 끝없이 의심받고
지나치게 강직한 성품은 때로 동료들의 표적이 되기도 하지만
모든 난관을 극복하고, 임진, 정유 두 왜란을 통해
23전 23승 불패의 신화를 창조하는 조선 최고의 지장(智將)으로 자리매김한다.

원균(최재성)(1540 ~ 1597 / 12세-58세)
자는 평중.
직선적인 성품에 선 굵은 불도저형 인물이다.
여진과의 싸움에서 메가톤급 괴력을 발휘하여
종성부사 시절, 육진의 수호신이라는 칭송을 받기도 한다.
당대 최고의 무장인 신립과 이일의 신망을 얻어
무관으로서는 엘리트 코스를 걷는다.
이순신과는 건천동 시절 유년을 함께 보냈으며,
필생의 라이벌로서 왜란이 발발하자 극단적으로 대립하기도 하지만
누구보다도 이순신의 사람됨과 능력을 잘 알고 있는 인물이기도 하다.
이순신이 최고의 지장(智將)이었다면 그는 당대 최고의 맹장(猛將)이었다.

유성룡(이재룡)(1542 ~ 1607 / 10세-50대까지)
자는 이현(而見), 호는 서애(西厓)다.
나이 여덟에 공맹의 이치를 깨달은 명철한 두뇌의 수재형의 인물.
이황의 학맥을 이어받은 거유이자, 전란 조정을 이끈 명재상이다.
유년시절 이순신과 건천동에서 함께 보낸 것이 인연이 되어
이순신 평생의 지음이 된다.


선조(최철호)(1552 ~ 1608 / 16세-40대까지)
등극과 함께 개혁의 깃발을 높이 든 문치주의자다.
이황을 스승의 예로 대하며, 중종, 인종, 명종 조에 복지부동하고 있었던
사림들을 현실정치에 과감히 등용하는 개혁군주다.
그러나 권력의 속성상 그의 목표는 애민 이전에 강건한 왕권의 구축이었다.
붕당의 모순을 해결해 가는 과정과 임란을 거치며 개혁성향은 점차 퇴색해 간다.
임란 시, 도성을 버리고 평양, 의주로 몽진해 가야 했던 비운의 제왕.
이순신이 전라도를 중심으로 선정을 베풀고 민심을 크게 얻자
권좌를 위협받을 지도 모른다는 공포마저 느끼며, 끝없이 이순신을 경계한다.

임천수(김규철)(17세-)
아산시절 청소년기를 이순신과 함께 보낸 절친한 지기.
아비가 소금을 둘러싼 분쟁에 휘말려 억울한 죽음을 당하자
이순신과 함께 상경하게 되어 허도주 상단의 짐방(짐꾼)생활을 하게 된다.
원래 선량했던 성품을 지닌 자였으나
허도주 상단에서 소금을 둘러싼 정재계 비리의 행동대장으로 활약하게 되고
이 과정에서 가장 절친했던 지기 이순신을 배신하기에 이른다.
결국 돈 이외엔 아무것도 믿지 않는 샤일록 같은 냉혈한으로 변해간다.

방연화(최유정)(생몰연대 미상 / 10대 후반-50대)
이순신의 처. 활달한 성품의 지혜로운 여인이다.
평생 한직으로 떠도는 남편에게 지청구 한마디 하지 않는 속 깊은 여인.
젊은 날, 남편의 정인이자 사매인 미진으로 인해 마음을 다치기도 하지만
내색치 않고 안으로 삭힐 줄 아는 넉넉함도 지녔다.
전란 시 아들의 죽음을 목도하고서도
삼도 수군을 이끌고 있는 남편의 심사를 어지럽힐까를 먼저 염려하여
기별을 하지 않는 여장부이기도 하다.

박미진(김규리)(18세-)
남궁두의 양녀. 윤원형의 모함으로 역도로 몰린 가문의 딸이다.
눈앞에서 죽어간 부모의 원수를 갚기 위해
절치부심의 시간을 보내며, 무공을 닦는다.
이순신과 사형, 사매하는 사이지만 속으론 연정을 품는다.
가문이 신원되고, 한때 이순신의 여인네가 될 꿈으로 달뜨지만
마을을 침범한 왜구와 싸우다 포로가 된다.
사무라이에게 능욕당해 초희를 낳고 한 많은 삶을 마감한다.

박초희(김규리)(16세-)
왜 사무라이와 미진 사이에서 난 딸로 반쪽짜리 조선인.
왜인에게도 조선인에게도 환영받지 못하는 비운의 여인.
대마도 시절, 천주학에 귀의하여 마음의 위로를 받고
교우였던 조선인 사화동과 부부의 연을 맺게 된다.
그러나 사화동이 조선으로 끌려와 참형을 당하고
임신한 몸으로 동행했던 초희는 일가친척들로부터도 냉대를 받는다.
결국 극도의 스트레스를 이기지 못하고 정신 줄을 놓아
핏덩이 아이를 제 손으로 죽여 버리고 마는 비운의 주인공.
존속 살해범으로 정읍현 감영으로 끌려온 그녀는 이순신에 의해 구명,
좌수영의 “잔다르크”로서 새로운 삶을 살게 된다.
이순신의 마지막 여인.

한호(박동빈)(1543 ~ 1605)
호는 석봉.
글씨 한 자 한 자에 예술혼을 담아 써내려가는 당대 명필로
명나라에까지 그 명성이 알려져 있다.
관직에 관심을 두지 않는 호방한 성격으로
도성 최고의 시기(詩妓) 청향에게는 깍듯한 스승 대접을 받는다.
일찍이 국제 정세에 눈을 떠 전쟁이 일어나기 전
왜인들이 제작한 지도 <동방도>를 입수. 전쟁의 기운을 감지하고
이를 유성룡에게 건네는 등 재야지식인으로서의 제몫을 톡톡히 해내는 인물이다.
임란 시, 유성룡의 부탁으로 명나라에 원군을 청하는 국서를 쓰면서
눈물을 흘리는... 가슴에 불을 지닌 인물이다.

청향(전예서)(20세-)
빼어난 자색과 시심을 겸비한 당대 최고의 기녀.
시를 읊을 때마다 석봉 한호의 붓끝을 움직인 도성 최고의 시기(詩妓)이다.
전란 시 한호와 함께 몽진하는 조정을 따라 피난을 떠난다.
명나라 장수 이여송의 수청을 들기도 한 그녀지만
이여송이 제멋대로 조선인들을 능멸하자 그에 맞서기도 한 당찬 여인네.
후일 통제영으로 흘러들게 된 그녀는 젊은 장수 이영남과
기약 없는 사랑을 나누게 된다.


천무직(이한위)(24세-)
허도주 상단의 짐방으로
이순신과 임천수가 아산을 떠나 한양에 올라와 처음 인연을 맺는 인물이다
후일 임천수 상단의 이인자가 된다.




홍이(안연홍)
한 번 본 것은 지형지물이건 사람이건 그대로 그려내는
그림에 천부적인 소질을 갖고 있는 고니시 유키나가의 스파이.
눈을 속이며 조선 팔도를 종이에 담아내기 위해
전국을 떠돌며 장사를 하는 천수, 무직이와 동행을 자처하고 있다.




날발(이한갈)(7세-30세 전반)
과묵한 성품. 그늘진 얼굴을 가진 이순신의 호위무사.
어린 시절 아비와 어미를 각각 탐관오리와 왜구의 손에 잃고
그만이 이순신에 의해 간신히 구명되고
후일 조선과 조선백성을 지키려는 이순신의 호위무사를 자처한다.



변씨(정애리)(30세-70세)
이순신의 모친. 어질고 현숙하며 생활력 강한 여인이다.
남편 이정의 무능으로 생활고의 어려운 부분을 메우기 위해 삯일도 마다치 않지만
남편에게 단 한 번도 지청구를 하지 않는 속 깊은 여인.
아들 넷을 가난하지만 반듯하게 키워냈다.
임란 시 백의종군하는 아들을 만나러 오다가
결국 만나지 못한 채 안타까움 속에서 눈을 감는 비운의 여인이다.

이완(안홍진)(19세-)
이순신의 형 희신의 넷째 아들.
임란시 이순신과 함께 참전,
마지막 전투에서 숙부의 임종을 지킨다.




이면(1577 ~ 1597 / 14세-20세)
이순신의 셋째 아들.
‘이순신 가족을 몰살하라’는 와키자카의 밀명을 받고
아산으로 침투한 왜군에 맞서 싸우다 장렬히 전사한다.

소은우(손종범)(24세-)
섬세하고 심약한 성품.
남궁두의 가마터에서 자기를 굽는 사기장.
미진에게 연정을 품고 있지만 차마 밝히지 못하는 우유부단한 성격.
왜구가 마을을 습격하자 그들의 괴력에 눌려 가마 속으로 숨어
결국 미진을 왜구에 손에 잡혀가게 했다는 자괴감에 시달린다.
임란 시 처자식을 왜구의 손에 잃고,
부산포 왜관으로 잡혀가 감시 속에서 사발을 굽게 되는 조선의 사기장.
이순신의 간자가 되어 부산포에 잠입한 초희의 탈출을 돕다가 죽어간다.


왕실인물들

광해군(이준)(1575년- / 17세-)
공빈 김씨의 차자로 임해군의 동복 동생이다.
임란 발발과 함께 세자로 책봉되며,
후일 북방외교에 탁월한 능력을 발휘하는 개혁군주가 된다.
형형한 눈빛을 가진 카리스마가 강한 인물.
만인지상의 원대한 꿈을 꾸지만,
그 마음을 숨긴 채 오랜 시간 잠룡하기도 한다.
유성룡을 존경하며 허균과는 마음을 나눈 지기.
전란기간 중, 분조를 이끌며 조선의 현실을 직시,
백성을 지킬 강성한 힘을 갖춘 군왕이 될 것을 꿈꾼다.
선조의 밀명을 받고 하삼도로 내려가
독전을 하기 위해 이순신과 조우하기도 한다.

신성군(? ~ 1592 / 12세-)
인빈 김씨의 장남으로, 선조가 가장 아꼈던 완자이자 신립의 사위.
전란만 아니었다면 세자로 책봉되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는 인물.
전란시 의주에서 절명한다.

윤환시(기주봉)(50대 후반)
주태문의 후계자. 대전 내관
선조의 최측근으로 심성이 음흉한 인물.
수하에 있는 내관들을 간자로 활용,
선조의 비밀 정보원으로 활약한다.



의인왕후 박씨(1555 ~ 1600)
선조의 정비로 후사가 없어 일찍 어미를 여읜 광해군을 아끼는 인물이다.

인빈김씨(김미라)(30대-)
신성군의 모후이자, 선조의 후궁.

조정인물들

이산해(김준모)(1539 ~ 1606 / 30대 후반-)
자는 여수이고, 호는 아계(鵝溪).
선조 때 문장 8가(文章八家)라 일컬어 졌던 인물로
절대로 속마음을 드러내지 않는 노회한 정객.
서인천하의 조정에서 탄핵당하지 않고 영상의 자리를 지킬 정도로
뛰어난 처세술을 지녔던 이로 동인의 핵심인물이다.
임란 직전 영의정의 자리에 있었으나,
임란이 터지자 양사로부터 탄핵을 받아 파직당한다.
후일 동인에서 갈려 북인이 되고,
마침내 대북의 영수가 되는 인물.
유성룡과는 미묘한 관점차이로 갈등하는 인물이기도 하다.
이순신에 대해 반감을 가졌던 인물.

윤두수(정동환)(1533 ~ 1601 / 40세-)
서인의 영수로, 유성룡의 정적이다.
임란 시 전란조정을 이끈 또 하나의 재상으로
사감과 정치적 입장을 배제하고 유성룡 적극적으로 협력하기도 했던 이다.
평소 신립, 이일, 원균 등의 맹장을 좋아하고,
이순신의 수세적 전략, 전술에 강한 반감을 가졌던 인물.
이순신이 파직, 옥사를 당하게 되자,
삼도수군통제사로 원균을 적극 추천한다.

윤근수(이원발)(1537 ~ 1616)
윤두수의 아우로 서인의 핵심인물.
선조 24년 정철(鄭澈)의 건저문제(建儲問題)에 연루되어
형 윤두수와 함께 서인으로 몰려 삭탈관작 되었다.
이듬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예조판서로 등용되어 왕을 호종하는 한편.
전란 중 明과의 외교를 담당하였다.

정철(1536 ~ 1593 / 40대-)
서인의 거두로 당대 최고의 문인이다. 외골수에 고집불통.
약관의 나이에 당대 최고의 명신 율곡과 교유하게 되어
그 우정을 평생 지속한다.
기축옥사의 위관의 직분을 수행하는 중,
유성룡과 크게 갈등하게 되는 인물.


정탁(임혁주)(1526~1605)
이황의 문하생으로 동인에 속하나 당론보다 자신의 소신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인물이다.
전란 중 출동명령을 어긴 이순신을 죽이자는 대신들의 주장에 대항해
신구차(伸救箚)를 올려 이순신의 목숨을 구하는 인물이다.



이덕형(황준욱)(1561 ~ 1613 / 30세-)
자는 명복, 호는 한음이다.
뛰어난 순발력과 재치를 지닌 인물.
30세 이전에 당상관에 올랐던 뛰어난 수재.
일찍이 외교적 능력을 인정받아
임란시 왜장과 접촉하는 한편,
유성룡과 함께 명나라로 가서 원병을 요청, 성사시킨 인물이다.
후일 이순신의 전사 후, 행적을 조사, 선조에게 상찬할 것을 주청한다.

이항복(박병서)(1556 ~ 1618 / 30세-)
자는 자상이요, 호는 백사다. 일명 오성.
권율의 사위가 되는 인물로
젊은 나이에 출사했으나 산처럼 진중한 성품을 지녔다.
정여립 옥사를 수습한 공으로 평난3등 공신에 책록된다.
전란 시 과감히 몽진을 주청한 인물이기도 하며
국왕의 근왕병 모집에 주력하였다.

김성일(1538 ~ 1593 / 40대 후반-)
호는 학봉이다.
동인의 핵심인물로 임란 직전, 통신사(부사)로 왜국을 다녀왔다.
전란 발발 여부를 놓고, 정사 황윤길과는 달리
왜침은 없을 것이라 단언, 조정을 혼란에 빠뜨렸던 인물이다.
이에 책임을 지고 후일 진주성 전투에서 전사한다.


황윤길 (1536 ~ ? / 40대 후반)
호는 우송당 자는 길재다.
심약하고, 겁 많은 성품이다.
서인의 핵심인물로 왜국 통신사로(정사)다녀왔던 또 하나의 인물.
부산포에 내리면서부터 장계를 하여 왜침의 우려를 조정에 알린다.

전라좌수영 인물들

권준(박찬환)(생몰연대 미상 / 30대 후반-)
일찍이 문과에 급제하여 출사한 이로, 순천부사를 지냈다.
문신이기 때문에 제장들로부터 따돌림을 당하고 있지만
제장들의 성품과 장단점을 꿰고 있을 뿐 아니라,
천문과 병법에도 능통한 제갈공명 같은 인물.
이순신의 오른팔이다.


정운(안승훈)(1543 ~ 1592 / 40대-)
자는 창진, 본관은 하동이다.
임란 당시 녹도 만호.
전라 좌수영 내 최고의 강궁.
원균 같은 맹장이 되는 것이 장수 최고의 영예라고 생각하는 인물이다.
이순신의 정읍현감 시절부터, 크고 작은 문제로 갈등하는 인물로
원균이 파직된 전라좌수사 자리에 이순신이 부임하자
극력 반발, 동료 제장들을 선동하여 이순신을 곤경에 빠뜨리는 인물.
임란 시, 이순신의 지나치게 수세적인 전술에 강하게 반발한다.
그러나 사천해전에서 총탄을 맞은 이순신을 치료해 주는 과정에서
그와 돈독한 전우애를 쌓는다.
부산포해전에서 적탄에 맞아 전사한다.

신호(정진각)(1537년 ~ 1597 / 50대-)
자는 언원, 시호는 무장이다.
임란 당시 낙안군수. 별명은 죽도(竹刀).
병법에 밝고 신중하면서 대쪽같은 성격으로 이순신의 왼팔이다.
임란이 터지자 공을 세워, 통정대부로 승차되고, 1595년 조방장으로 승진된다.
1597년, 남원성을 지키다 전사한다.


이순신(전현)(李純信 / 20대 후반-)
자는 입부, 시호는 무의.
장창을 자유자재로 쓰고 바위보다도 과묵한 사내다.
전란 당시 방답 첨사로 이순신 휘하에서 중위장·전부장으로 활약,
옥포·당포·한산·부산 등에서 왜적을 대파했다.



김완(박철민)(1546년 ~ 1607년 / 40대 후반)
자는 언수다.
천성이 게을러 요령 피우는 데는 도사급이다.
1597년 원균의 삼도수군 통제사 시절, 원균의 조방장으로 활약을 했으나
칠천량에서 패하고, 일본까지 잡혀갔다가 탈출하게 되는 인물.



송희립(김명국)(40대-)
곰을 연상케 하는 엄청난 거구.
임란 당시 지도만호로서 특히 용고를 잘 치는 타고난 독전가다.
관음포 전투에서 적에게 포위되어 자신도 총탄을 맞으나
상처를 싸쥐고 끝까지 북을 치며 독전하던 맹장이다.



어영담(김진태)(? ~ 1594 / 50대 중반)
물길을 따라 천지를 주유하는 것이 필생의 낙인 낭만적인 인물.
젊은 날 이순신이 천하를 주유할 때 인연을 맺는다.
해전에서 물길을 잘 아는 것이 생명임을 익히 아는 이순신이
삼고초려해서 데려온 장수.
임란 시 광양현감으로 이순신 휘하에서 수로향도(水路嚮導)로 활약,
옥포해전에서 공을 세우고, 이듬해 이순신에 의해 조방장에 임명되었다.
차분하고 넉넉한 성정을 지닌 자.
군량을 준비함에도 종자 곡식과 백성 구급용의 곡식을 따로 준비해 둘 정도로
세심하고 지혜로운 사람이기도 하다.
94년 돌림병에 걸려 한산도 진중에서 세상을 떠나고 만다.

나대용(이상인)(1556 ~ ? / 30대-)
본관은 금성이요, 자는 시망(時望)이다.
배 만드는 일 외에는 아무것도 안중에 없는 괴짜군관.
이순신의 분노를 사 파직의 위기에 처하나
재주를 알아본 이순신에 의해 발탁 거북선 건조의 총 책임자가 된다.



조수창(김홍표)
대대로 배무이를 하는 아비에게서 태어나
배를 만드는 것을 천직으로 알고 자신의 일을 좋아하는 인물.
좌수영 선소의 도편수로 있던 중
좌수사 이순신의 눈에 띄어 판옥선 건조 지휘장으로 임명되고
신명을 다해 배를 만들던 중 '배'에 대한 무한한 열정과
천재성까지 겸비한 나대용이 등장하자, 그를 질투하게 된다.

마영갑(이두일)
좌수영 격군장.
바다에서 전투를 할 때 가장 노역이 심한 격군들의 애환을
잘 보듬으며 훌륭하게 이끌어내어 조선군의 승리에 기여를 하는 인물.

언복(김덕현)(20대 초반)
나대용 집안에서 감시용으로 딸려보낸 가복.
눈썰미 좋은 환쟁이로 나대용의 지시에 따라 설계도를 척척 그려낸다.

넙출네(박혜숙)(50대 중반)
좌수영 관아의 칼자(일종의 주방장)
후덕하고 쾌활한 성품에 맺고 끊는 것이 분명한 이다.
때로 어리고 철없는 좌수영 병졸들을 구박하기도 하지만
전투가 끝나고 돌아오는 그들을 누구보다도 기쁘게 맞아주는 어머니와 같은 존재다.


무산(16세-)
녹둔도 전투시 여진족인 아비를 이순신의 손에 잃고 고아가 된 소년.
아비의 원수 이순신을 죽이는 것을 필생의 목표로 삼고 살아가다
이순신이 좌수사로 온 직후 좌수영으로 흘러든 인물.
전란이 터지자 자진해서 왜군의 진영으로 가 간자가 된다.
와키자카의 밀명을 받고 이순신 암살을 위해 다시 좌수영으로 보내진 그는
항왜를 자처해 이순신의 신망을 받는다.
호시탐탐 이순신 암살 기회를 옅보던 그는 오히려 이순신의 인격에 감화를 받아
이순신의 목숨을 구하고 죽어간다.

공태원(40대 후반)
정해왜변 일본군에 맞서 싸우다 포로로 끌려갔다가 돌아왔다.
정읍현감으로 있던 이순신에게 일본의 실체를 알려주며 맺은 인연으로
이순신을 따라 전라좌수영에 자원입대한다.




짝보
좌수영 병졸 중 홍심을 뚫는 명중률이 가장 높은 사수.

대만, 상남
좌수영의 군졸들


경상우수영 인물들

우치적(이재포)(? ~ 1628 / 30대 후반)
기골이 장대하고 성질이 급한 장비형의 돌격장.
원균과는 종성부사 시절, 원균의 군관으로 인연을 맺는다.
전란시 영등포 만호로서 경상도로 몰려오는 왜적을 맞아
원균과 함께 용맹하게 싸웠으나, 중과부적으로 밀린다.
후일 이순신이 삼도수군 통제사가 되자 드러나 놓고 반감을 표해
이순신의 제장들과 끊임없이 갈등을 빚는 인물이다.
원균이 죽음을 맞는 최후의 전투,
칠천량 전투에서도 돌격장 역할을 마다치 않았던 그는
원균의 죽음을 뒤로 하고 전장에서 탈출, 이순신에게 원균의 유지를 전하게 된다.

이운룡(최준용)(1562 ~ 1610 / 30대-)
차분하고 용의주도적인 성품.
임란 시 옥포만호로서 경상우수영, 원균의 휘하였다.
상황에 주도면밀한 검토 없이 돌격전을 일삼는 원균에게
끝없이 제동을 거는 인물이다.
이순신의 차분함과 용의주도함을 동경하는 인물로
사사건건 우치적과 대립한다.
후일 이영남과 함께 이순신의 사람이 된다.

이영남(유태웅)(1571 ~ 1598 /20대 후반)
수려한 용모. 명철함과 우직함을 동시에 지닌 인물.
18세에 무과에 급제하여 약관에 이미 율포만호를 지낸 엘리트다.
27세 소비포 군관으로 참전,
원균의 명을 받고 원군을 청하러 간 것을 인연으로 이순신과 조우하게 된다.
이순신이 바로 원군을 보내주지 않자 강하게 반발,
좌수영 문밖에서 부복하고 삼일을 버틸 정도로 심지 굳은 인물이다.
후일 이운룡과 함께 이순신의 사람이 되며,
노량해전에서 이순신과 함께 전사한다.

기효근(1541 ~ 1596 / 50대 초반-)
자는 숙흠, 행주사람이다.
전란 시 남해현령으로 원균의 휘하였다.
이순신이 남해도를 소개해 버린 데 반감을 갖고 이순신에게 맞선다.

원사웅(생몰연대 미상 / 18세-)
원균의 아들.
타고난 무재를 지닌 전형적인 무관
전란이 터지자 원균과 함께 참전, 칠천량 전투에서 전사한다.



무관들

이일(이일재)(1538 ~ 1601 / 40대 후반-)
자는 중경. 신립과 함께 북방을 호령하던 무장이다.
녹둔도의 패전을 둘러싸고 이순신과 크게 갈등하게 되는 인물로
임란 시 경상도 순변사가 되어 상주에 내려가
왜적과 싸우다가 패하여, 도주한다.



신립(1546 ~ 1592 / 40대-)
당대 최고의 명장으로 추앙 받는 이로
육진을 중심으로 큰 전공을 세운 사람이다.
선조의 등극과 함께 출사, 선조의 전폭적인 신뢰를 받는다.
후일 선조가 가장 아끼던 왕자인 신성군의 장인이 되기도 하는 인물.
왕의 후광을 믿고 권력을 남용하기도 하고,
드센 성정 탓에 부하들을 함부로 다뤄 반감을 사기도 한다.
그러나 한번 자신의 사람이라고 믿었으면 끝까지 그를 감싸고도는
인물로, 원균을 특히 아꼈다.
전란시, 한성판윤의 자리에 있었던 그는 선조의 특명을 받고
왜적을 물리치러 가 새재를 버리고 퇴각,
탄금대 앞에서 배수진을 치나 여지없이 무너져 전사해 버린다.

권율 (1537 ~ 1599)
자는 언신(彦愼)이요, 호는 만취당, 모악이다.
문관 출신으로 이항복의 장인이 되는 사람이다.
임란 시 행주산성에 주둔,
3만 명의 대군으로 공격해온 고바야카와의 일본군을 격퇴한후,
육군 총사령관인 도원수에 제수된다.
이순신이 그의 막하에서 백의종군했으며,
수륙 병진을 주장하는 원균의 의견을 무시,
부산포를 칠 것을 강권하던 끝에 항명하자,
원균을 장형으로 다스리기도 한다.


일본 측 인물

도요토미 히데요시(이효정)(豊臣秀吉, 1536 ~ 1598)
일본 전국을 통일하고 가도입명을 주장하며 조선침략을 자행한 인물.
급하고 잔혹한 성품의 전쟁귀신.
열등감 덩어리로 무모한 승부욕의 소유자.
주군 노부나가를 배신, 대권을 거머쥔다.
1585년 관백으로 취임, 태정대신이 되며
1588년 취락제에서 다이묘들의 충성을 서약받고,
조선침략의 뜻을 노골화한다.
조선을 사랑했던 차 선생, 센노리큐 등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조선 통신사를 맞아 오만불손한 국서를 보낸다.
결국 가장 사랑했던 가신 센노리큐를 할복 시키고,
전국의 다이묘들을 집결시켜 조선을 침공한다.
임란 시 몸소 조선에 올 꿈을 꿔 대 전선 고쇼마루를 건조하기도 하나
불패의 신화를 자랑하던 이순신으로 인해 발이 묶여,
단 한번도 조선 땅을 밟지 못한 채 정유년, 사망하고 만다.

가토 기요마사(이정용)(加藤淸正, 1562 ~ 1611)
임란 시 30대 초반의 맹장(猛將)
침략과 동시에 일사천리로 함경도까지 진격,
임해군과 순화군을 포로로 잡았으며,
조선의 호랑이를 잡아 히데요시에게 보내주기도 한다.
2차 진주성 싸움을 주도하기도 했던 그는
고니시 유키나가와는 끊임없이 쟁공하는 사이다.
이순신의 연전연승으로 보급로가 차단되자
이순신에 대한 적개심과 두려움을 동시에 갖는다.
사명당과 강화회담을 하기도 했던 그는
사기장 등의 조선 장인들을 가장 많이 잡아갔던 인물이다.

고니시 유키나가(정승호)(小西行長, 1558 ~ 1600)
사까이 출신으로 약재무역상의 아들.
가등청정에 비해 상대적으로 합리적이고 온건한 인물로 천주교 신자다.
당시 대조선 무역을 독점하고 있던 대마도주 소오 요시도시(宗義智)의 장인.
히데요시의 조선침략의 야욕을 감지,
히데요시의 가장 영향력 있는 가신, 이시다 미쓰나리를 움직여
전쟁을 막고자 하나 실패했다.
임란 시 제 1군의 장수로 18,700명의 지휘관이 되어 참전.
부산진성과 다대포진성을 함락시키고,
"싸워 죽기는 쉬우나, 길을 비켜주기는 어렵다"고
단호히 천명하고 죽기로 싸우던 동래부사 송상현마저 꺾고 북상,
가장 먼저 도성에 입성한 전공을 세운 자다.
그러나 평양성 전투에서 대패,
명예회복을 위해 행주산성을 4만 대군으로 공격하나 실패하여 퇴각,
웅천 남산에 왜성을 축성하고 조선군과 대치했다.
정유재란 시 다시 참전하나 노량해전에서 대패하여
수치심을 안고 본국으로 도망친다.

와키자카 야스하루(김명수)(脇坂安治, 1554 ~)
냉철하고 끈질긴 성격의 전형적인 사무라이.
18세에 히데요시의 눈에 들어 가신이 된다.
10대 후반 다완을 확보하라는 히데요시의 밀명을 받고,
조선으로 건너와 노략질을 일삼던 그는 곤양에서 이순신과 운명적으로 조우하게 된다.
첫 대결에서 이순신이 날린 철전이 얼굴에 스쳐
흉물스러운 상처를 갖게 된 그는 이순신에게 깊은 원한을 품어 필생의 라이벌이 된다.
포로로 끌고 갔던 박미진에게 연정을 품었던 그는
끝까지 마음을 열지 않는 그녀로 인해 상처를 받기도 한다.
임란 시, 스모도성의 성주로서 참전하게 된다.
용인전투에서 1500명의 기병으로 6만의 조선군을 대파한 후
히데요시의 이순신 제거작전인 한산해전에 긴급 투입된다.
그러나 연합작전을 펴라는 명령을 어기고 독자적으로 출전,
학익진 진법을 구사하며 맞선 이순신에 의해 다시 한 번 참패의 고배를 마신다.
이후 이순신을 암살을 기도, 자객을 보내기도 하는 등
끝없이 이순신의 목숨을 노린다.
명량, 노량해전에서 대패,
이순신에게 패배한 자신을 용서할 수 없어 할복해버린다.

시마즈 요시히로(島津義弘, 1535 ~ 1619)
가고시마의 영주.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만오천명의 군사를 이끌고 참전하였다.
전쟁이 끝나고 일본으로 귀환하면서
대규모 조선 도공들을 납치하여 일본으로 끌고 갔다.

소오 요시도시(황준원)(宗義智, 1568 ~ 1615)
대마도주. 고니시 유키나가의 사위다.
조선무역을 독점하고 있었기에 조선어에 능통했다.
임란 발발 5년 전 히데요시로 부터
"조선왕이 일본으로 건너와 영토를 바치고 항복하게 주선하라"는 명자
조선 측에 히데요시의 속셈을 전하였다.
조일전쟁의 발발과 일본 측의 승리가
오히려 대마도 경제에 이로울 것이 없다고 판단,
끝까지 전쟁을 막고자 동분서주한다.

사화동(최당석)(30대-)
진주사람으로 관리들의 학정을 이기지 못하고 왜국으로 귀화한 이다.
종의지의 측근으로 조선으로 드나들던 상단의 길잡이 노릇을 한다.
종의지의 인도로 천주교에 귀의하고,
교우였던 박초희와 마음을 나눠 부부의 연을 맺게 된다.
통신사 문제로 왜와 조선이 줄다리기를 할 무렵,
선조의 요구에 따라 조선에 보내져 참형을 당한다.

세스페데스(40대-)
대마도에 머물며 선교활동을 했던 포르투갈 신부.
임란시 고니시 유키나카를 따라 종군,
부상병을 돌보는 한 편, 천주교 포교에 힘쓴다.

센노리큐(정욱)(千利休, 1521 ~ 1591 / 50대-)
노부나가와 히데요시의 차선생.
바람 없는 수면처럼 고요하고 맑은 성품을 지닌 이.
천하제일의 차인(茶人)으로
조선의 거유, 이황의 저술들을 아껴 읽었던 이다.
조선 막사발의 질박함에서 차도의 마음을 찾아 그 형식을 체계화한 이다.
조선의 문화에 대해 깊은 조예가 있어, 끝없이 조선을 동경했던 인물.
반전 평화주의자로, 히데요시에게 야욕을 접을 것을 강권하다 실패,
할복으로 삶을 마감한다.

쇼타이(김종결)(承兌, 생몰연대 미상 / 40대-)
히데요시가 전국을 통일한 후 기거했던
교토 취락제의 승려.
희데요시의 바둑상대이자, 책사.
승려신분으로 전쟁을 부축인 이율배반적 인물.
센노리쿠와 가장 강하게 갈등하게 되는 인물이다.


겐소(이경영)(玄蘇, 생몰연대 미상 / 40대-)
대마도의 승려.
요시도시(종의지)와 고니시(소서행장)가 믿는 승려,
도요토미의 국서를 위조해준다.
종의지와 함께 사신으로 파견되어 전쟁을 막기 위해 동분서주한다.


명나라 측 인물

심유경(沈惟敬, ? ~ 1597 / 30대- )
임란 당시 명나라의 사신.
세 치 혀끝으로 동양 삼국을 뒤흔든 국제 사기꾼.
명나라 병부상서 석성의 개인사자 자격으로 조선 조정을 능멸하고
일본과의 강화협상에 나서는 등 당시 조선 외교의 빈틈을 노려 사기행각을 벌인다.
1592년 조승훈(祖承訓)이 이끄는 명나라 원군(援軍)의 유격(遊擊) 장군으로 참전한다.
평양에서 일본의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와 강화회담을 가졌으며,
일본으로 건너가 히데요시를 만났으나,
사명을 다하지 못하고 귀국, 매국노로 몰려 처형당한다.

이여송(李如松, ? ~ 1598 / 40대 후반-)
중국 명(明)나라의 무장. 포악하고 거친 성품.
임란 시 제2차 원군으로 4만대군을 이끌고 조선에 들어와,
1593년 1월 평양성에서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의 일본군을 격파한다.
공을 부풀리기 위해 조선 백성을 도륙하는 것도 마다치 않았던 잔인한 인간.
조선의 장수와 대신들에게 발길질도 서슴지 않았던 광폭한 인물로,
전공에 미친 점령군 사령관.
벽제관싸움에서 고바야카와 다카카게[小早川隆景]에 패한 후
평양성을 거점으로 화의교섭 위주의 소극적인 활동을 하다가 그 해 말 철군한다.

진린(김하균)(陳璘, 생몰연대 미상 / 40대 후반-)
1597년 정유재란 시 명나라의 원군.
어왜도총관 전군도독부 도독으로서 수병 5천을 거느리고 참전,
이순신과 더불어 전공을 세웠다.
노량해전 직전 고니시와 비밀 협상을 맺어 일본의 연락병의 도주를 돕기도 한다.
전공과 작전을 두고 이순신과 갈등을 빚지만 언제나 이순신의 양보를 얻어낸다.
참전 중 이순신의 치밀함과 인격에 차츰 감화되어
이순신의 전사 소식을 듣고 세 번이나 쓰러지면서 통곡했던 인물이다.

유정(손호균)(劉綎, ? ~ 1619)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이듬해 원병 5천을 이끌고 참전하였다.
고니시 유키나가에게 매수당해 적극적인 공격을 펼치지 않아
이순신과 조선군에 오히려 걸림돌이 되는 인물이다.


전라우수영


이억기(1561 ~ 1597 / 30대-)
자는 경수요 시호는 의민이다.
왕실의 인척으로 20세에 무과에 급제하는 엘리트다.
원균과는 육진에서 인연을 맺고,
임란 시 전라우수사.
이순신, 원균과 연합함대를 구성, 당항포, 옥포에서 대승을 거둔다.
이순신의 옥사가 벌어지자 이항복등과 무죄변론을 하기도 한 인물.
정유년, 원균과 함께 칠천량에서 전사한다.

 조선시대의 고문  
작성일: 2005/07/08



조선시대의 형벌제도는 태,장,도,유,사((笞,杖,徒,流,死)의 5형제도를 기본으로 하고 있다. 매를 치는 태형과 장형, 징역형인 도형과 유형, 그리고 사형 이렇게 법률로 제정되어 있는 형벌 이외에 실제 조선시대 사법 현장에서는 온갖 혹형이 자행되었다. 바로 고문이다. 조선시대 ‘역적’이란 이름으로 국왕의 절대권력에 대항한 반역죄, 강도나 살인 같은 중죄에 대해 행해진 또 하나의 형벌, 고문.
조정을 속이고 임금을 업신여긴 죄, 적을 놓아주어 나라를 저버린 죄, 남의 전공을 빼앗고 남을 죄에 빠뜨린 죄라는 억울한 누명으로 의금부에 압송된 이순신 장군에게도 이와 같은 혹독한 고문이 가해졌다.

조선시대 대표적인 고문 몇 가지를 소개해 본다.

1) 압슬 - 무거운 판을 죄인의 양쪽 무릎 위에 올려놓고 내리누르거나 정강이를 막대기로 찍어 누르는 형벌이다. 중죄가 아닌 경우 함부로 압슬형을 쓰지 못하였다.

2) 낙형 - 쇠를 불에 달구어 몸을 지지는 단근질을 말한다. 역적을 심문할 때나 무고 사건 때 시행되었다. 낙형은 원래 발바닥만 지지도록 되어 있었으나 넓적다리에서 대퇴골에 이르는 부분까지 지져서 혹형이라는 논란이 일어나 영조가 즉위 후 압슬형과 함께 낙형을 폐지하였다.

3) 주리 - 일명 가위주리라 하였으며, 모질기로 악명을 떨친 고문이다. 두 개의 막대기를 수형자의 발목 사이에 끼워 넣고 정강이뼈가 활 등처럼 휠 때까지 비틀었다. 이런 모진 형을 당한 뒤라면 대부분 정강이가 부러져 불구가 되거나 평생 고통으로 신음해야 했다. 악몽을 꾸다 질식 위기에 몰린 것을 ‘가위눌렸다’고 하는 것이 바로 ‘가위주리’에서 나온 말이라고 한다.

4) 학춤 - 수형자를 발가벗기고 손을 등 뒤로 잡아 묶고 팔 안쪽에 막대를 넣어 공중에 매단다. 그런 뒤 혀를 빼어 물고 학학거릴 대까지 등짝을 채찍으로 치는 고문법.

고문은 범죄를 처벌하기 위한 증거가 없을 경우 ‘자백’을 받아내기 위해 신문과정 실시되었다. 문제는 이순신의 경우처럼 죄가 없는 경우에 행해질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는 점이다.

이 지구상에 모든 형구와 형장이 사라질 아름다운 세상을 꿈꾸며...



▣참고문헌
안길정, 《관아를 통해서 본 조선시대 생활사》, 사계절, 2000


 
가져온 곳: [김학규의 재미마당]  글쓴이: 미스터 킴 바로 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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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05.08.16 20:47

    첫댓글 조선시대의 고문이 무섭네요. 그때 안 태어나길 잘했네...

  • 05.08.17 05:18

    너무 늦게 올리셨습니다. 지금 막판인데 지금부터라도 신경 써서 보아야 겠습니다.

  • 05.08.17 16:55

    이순신은 당초 종영예정보다 4회를 연장하여 28일이 마지막으로된다는데 종영결말을 어찌할까 지금 목하 고민중이라고 합디다...

  • 05.08.17 16:56

    좋은 게시물이네요. 스크랩 해갈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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