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베중앙신학교는 미국 남장로교 선교본부가 직영했던 신학교로서 이후 북장로교가 오사카신학원과 통합하여 발족한 것이 모체가 되었다. 당초 가가와 도요히코와 도쿠시마에서 만난 은사의 마이어 선교사 추천으로 도쿄의 메이지가쿠인 신학부 예과에 입학했다. 하지만 1906년에 메이지가쿠인에 파견돼 있던 남장로교 선교사 사무엘 풀턴과 같은 메이지가쿠인에서 가르치고 있던 우에무라 마사히사 사이에서 신학적 갈등이 촉발됐다. 폴턴은 우에무라가 자유주의 신학을 견지한 교과서를 사용한다고 지적하였던 것이다.(하지만 실제로 우에무라는 보수적인 정통주의 신학자였다.)이는 미국에서 전개되던 메이첸 신학의 논쟁이 일본에까지 영향을 미친 결과였다. 결국 그러한 신학 노선상의 문제로 남장로교 선교사들은 북장로교 학교인 메이지 가쿠인과의 협력 관계를 끊고 고베로 철수했다.
이후 중앙신학교는 한국인 유학생도 대거 받아들이면서 한국교계에도 많은 영향을 미쳤다. “기독신보” 주필과 연동교회 목사 등을 역임한 전필순 이나 그 동기생 김우현목사도 1922년부터 4년간 이곳에서 수확했고 안동교회 원로목사와 총회장을 역임한 김광현목사 대구지역 3.1운동의 지도자이자 박대선 전 연세대 총장의 부친인 박상동목사 김병영목사 선교사 영L .L . Yonug을 통해 전도자가된 대신교단의 창립자 김치선목사 그밖에도 정덕생, 김병구, 김영구, 양태승목사 등도 이 학교에서 공부했다.
하지만 중앙신학교도 1942년 영미와의 전쟁 개시와 함께 폐교되고 말았다. 하지만 오카다 미노루 교수는 폐교 이후에도 쇼와신학연구소로 개편하여 신학연구 활동을 지속해 갔다. 일본기독교단 적산관리위원회는 1942년에 강제적으로 중앙신학교의 토지와 건물을 모두 몰수했다. 패전 후 중앙신학교의 졸업생들은 일본기독개혁파교회 를 설립하면서 고베개혁파신학교 라는 이름으로 그 전통을 계승하는 신학교를 재건했다. 중앙신학교의 고즈넉한 건물들은 1945년 고베 대공습 당시 피폭되어 화재로 전소되고 말았다. 공습 피해가 극심했던 그 지역은 옛 모습을 많이 잃었다.
또 주께서 이르시되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과 맺을 언약은 이것이니 내 법을 그들의 생각에 두고 그들의 마음에 이것을 기록하리라 나는 그들에게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게 백성이 되리라.(히브리서8: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