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게시글은 <승리와 좌절의 인간군상 - 비정의 전국사>
난조 노리오(南條範夫) 저.카테고리 이동도위창의 블로그(^o^)
에 번역된 삿사 나리마사편을 읽고 내 나름의 소회를 밝히는 것이다.
거기 번역된 글을 요약하는게 아니라,번역된 글이 새삼 삿사를 둘러싸고
여러가지 상념들을 나에게 연상작용을 일으켜 한번 자판기를 두드려 보는 것이다.
토시이에(A)=나리마사(B),토시이에(A)=히데요시(C),,,그러나 B=/=C
마에다 토시이에(1538-1599)와 삿사 나리마사(1536-1588)는 그래도 명색이 각각 아라코성과 히라성의 성주 아들들이다.그러나 토요토미 히데요시(1536-1598)는 오와리 나카무라의 농민의 아들이다. 토시이에와 나리마사는 오다 노부나가의 친위대원(우마마와리)로서 오다가 동네 골목대장하던 시절부터 똥개마냥따라 다녔다.그러나 히데요시는 20살 무렵에 오와리 노천시장에서 바늘장사나 하다가 오다의 눈에 띄어 짚신지기가 되었다.
그런데 언제부터 이 세사람의 실력이 차이를 보이기 시작했을까?아마 모르긴 몰라도 히데요시가 1565년에 미노에 스노마타성을 수삼일에 완성한 때로부터 시작해서 히데요시가 가네가사키전투(1570)에서 신가리를 자청해서 오다의 마음을 사로잡고 최후에 기타오미의 아자이 나가마사의 고다니성을 히데요시가 정복했을때...히데요시는 오다의 눈도장을 확실히 받았다고 봐야 할 것이다.아마 1573년에 히데요시가 고다니성을 정복했을때 히데요시는 오다로부터 확실히 그 능력을 인정받아 원숭이가 항상 오매불망 소원하던 거성(나가하마)도 받고,중신회의(하야시 미치가츠,사쿠마 노부모리,시바타 가츠이에,니와 나가히데,다키가와 가즈마스,아케치 미츠히데)의 말석 꼬래비 자리에라도 앉을 수 있었을 때부터 히데요시는 토시이에와 삿사의 질투섞인 부러움을 받았을 걸루 봐야 할것이다.아마 내 기억에 원숭이가 자신의 성을 기노시타에서 하시바(니와 나가히데의 니와의 와 시바타 가츠이에의 시바를 합성하여 만든 성)로 바꾼 것도 이때쯤이었을 것이다.
그럼 히데요시의 출세에 A와 B의 반응은 어땠는가?A는 이를 그냥 인정해 버렸으나(속이야 편하지 않았겠지만)B는 이를 죽어도 인정할수 없었다.B는 왜 그랬을까?나도 모르고 며느리도 모르고 시어머니도 모를 일이다.결국 이게 A와 B의 운명을 바꿨으니 A는 시즈카타케 전투에서 히데요시와 잠시 척진적은 있으나 곧바로 꼬리를 내리고 히데요시에 알랑방구를 뀐 덕분에 승승장구하여 후에후에 가가 백만석의 대영주까지 되었고 명치유신후까지 살아남아 후작 가문으로 끝까지 살아 남았으나 B는 1588년에 히데요시의 자결명령에 할복,그 자식도 없어(장남 전사) 대가 끊겼다.단, 나리마사 딸의 딸은 도쿠가와 3대쇼군 이에미츠의 정실(미다이도코로)이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토요토미 가문은 이 지구상에서 유전자 하나 남기지 못하고 1615년 오사카 여름 전투로 영원히 멸종해 버렸으니 삿사 나리마사여! 이것으로 위안을 삼거래이~~!!
[보충:파공자 타이가 <이에와 마츠>감상및 코멘트]
2002년 NHK대하드라마 <이에와 마츠>에서 1585년 자신의 거성이었던 옛추의 도야마성을 히데요시에게 빼앗긴 뒤[고마키-나카쿠테 전투에서 이에야스편에 섰다가 이에야스에게 뒷통수 맞고 히데요시에게 지대로 뺨맞은 꼴이라고 봐야죠!!] 삿사 나리마사가 삭발을 하고 히데요시의 차시중을 드는 장면을 보면서 내마음이 안 좋았던 기억이 지금 이글을 쓰는 순간에도 생생하구나!내 마음이 참 안좋았던 기억이 나는구나!! 이드라마에서 나리마사가 이에야스가 자신몰래 히데요시와 고마키 나카쿠테 전투를 종결짓는 화평을 맺었단걸 듣고 이를 되돌리기 위해서 한겨울에 일본의 알프스라고 불리는 다테야마를 넘는 것이 새삼 기억에 새롭구나!![이하는 <비정의 전국사>인용!!] 후세에 <삿사의 아슬아슬 넘기>로 유명한 일본의 북알프스를 넘는 계획은,도야마에서 이와쿠라, 다테야마 온천을 거쳐 자라고개, 히라노고야, 스즈노키 고개를 넘어 카고가와 계곡, 노구치 도로를 내려가 신슈(信州, 나가노 현)의 오오마치로 나오는 코스였다.이것은 엣츄에서 신슈로 넘어가는 제일의 험로(險路), 눈이 없을 때에도 곤란한 길로, 고작 나뭇꾼들만이 다니는 길만 있을 뿐이었는데 설상가상으로 엄동설한인 한겨울에 이곳을 지나간다는 것은 무리였다. 그러나 <반드시 간다>고 나리마사는 외쳤다. 11월 23일, 도야마성을 견고히 지키며 적이 와도 응전하지 말고 방어하라는 지시를 내린 뒤 나리마사는 부하인 다케베 뵤고노가미(建部兵庫守)이하 5천기를 거느리고 출발했다. 이렇게 고생고생 하며 이에야스의 하바마쓰 성까지 갔건만 이미 이에야스는 자신의 아들 오기마루(히데야스)를 원숭이에게 보내고 이미 화평을 맺어버린뒤라 삿사의 고생은 모두 한바탕 꿈이요,물거품이 되고 말았던 것이다.
인간사 이면을 들여다 볼짝시면, 진즉에 세사람(마에다,삿사,원숭이)이 아삼육이 되서 서로 인정할건 인정하고 굽힐건 굽히고 해서 서로 재미지게 어울리게 놀았으면 좋았을텐데.....삿사 나리마사는 그 성격상 근본적으로 이게 쉽게 되지 않았지요.바로 이 점이 안타깝고 안쓰럽다.친구이면서도 친구가 되지 못하고[드라마에서는 토시이에,나리마사,히데요시 세사람과 부부간에 모두 막역한 관계로 나옴]뭔가 배는 아프고 그렇다고 자객을 보내서 죽일 수는 없고,원숭이의 이꼴 저꼴 안보이는 곳으로 숨어 버리면 좋을텐데 그렇게도 안되고....아!세상사를 살다보면 이런 히데요시 같은 놈을 만나게 되죠.결국은 이 놈을 뛰어 넘을 수 밖에 없는데 본인 능력은 안되고....사회생활하면서 이런 놈을 만나게 되면 미쳐 버리는 거죠....학벌도,재산도 별로 없는 놈이 회사적응은 기가막히게 하면서 상사의 귀여움을 독차지하는 것은 물론이고,그 능력까지 인정받고...출세도 빨랑빨랑하고....정답은 인정할건 인정하고 굽힐건 굽히고 해야 하는데,....삿사의 고집,아집,집념,자존심,자만심,엘리트의식,이런 등등이 히데요시의 그 잘난 꼬라지와 부딪혔을때 나오는 반발심 같은 것은 그 무엇으로도 쉽게 해결되지 않았다고 봐야겠죠............더 극단적으로 이야기 한다면 원숭이가 나리마사 자신에게 히고의 국주까지 만들어주며 잘해줘도 마음 한 구석에는 동냥받는 것같고 개운치가 않았을 걸로 봅니다....한 마디로 삿사는 히데요시를 죽어도 인정할수 없었으며,겉으로는 매번 항복했지만 마음속으로는 결코 히데요시에게 지고싶지 않았을 걸루 봅니다.항상 삿사 나리마사의 마음 한구석에 자리잡고 있었던 마음은 <사루놈,저새끼는 벼락출세한 촌놈에 불과하다.>는 깔보는 마음이 삿사의 마음 속에는 죽을때까지 자리잡고 있었을 걸루 저는 봅니다.삿사의 이런 행동과 마음가짐의 옳고 그르고,싫고 좋고를 떠나서 그래,이게 삿사의 본마음이라는 걸루 저는 읽고 넘어가겠스므니이다.
나리마사는 히데요시의 명령으로 1588년 윤5월에 아마가사키 호우원에서 할복할때 배를 열십자로 가르며 장기를 손으로 끄집어 내어 공중에 내던졌다고 하며,그외에 오사카쪽을 노려보며 너무 분한 나머지 이를 앙물어 이빨이 서너개나 부러져 나갔다고 한다.히데요시에 대한 분노의 표시요,원통함과 분함의 표출이 아니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