델로스 섬 ( Delos )
1990년에 지정된 세계문화유산
- 그리스 신화에 의하면 태양의 신 아폴론는 Cyclades 군도의 이 작은 섬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 델로스의 아폴론 신전에는 오늘날 그리스 순례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으며 델로스는 한때
번영했던 무역항이기도 하다.
- 이곳에는 B.C 3000년부터 초기 그리스도 시대까지 지속되었던 에게 문명의 흔적이 아직도 남아
있으며 이 고고 유적은 상당히 광범위하고 풍부하여 당시 지중해의 거대도시 항구로서의 모습을
- 사진은 항구에서 아폴론 신전으로 통하는 성스러운 길에 늘어선 사자상. 이 사자상은 낙소스인이
봉헌한 것으로 아폴론의 탄생지 ‘성스러운 호수’를 지키듯이 강직한 표정으로 받침대 위에 앉아
있다. 기원전 7세기의 작품으로, 지금 이 곳에 남아 있는 것은 5개뿐이다.
델로스 섬
“야자나무를 가슴에 안고 어린 풀의 초록빛 융단 위에 무릎을 꿇었다. 대지는 그녀의 발치에서 웃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빛 쪽으로 달아났다. 그리고 모든 여신들이 기쁨으로 가득 찼다.”라고 그리스
신화에서 노래한 델로스 섬은 아폴론이 태어난 땅이다. 그 때문에 이 작은 섬 델로스는 델포이에
이어 아폴론 숭배지로서 고대 그리스인의 정신적 중심지가 되었다. 곶에 의해 외해로부터 격리된
3개의 만은 고대 중계 무역의 자유항이었다. 지금은 섬 전체가 풍부한 고곡학 자료가 되어 귀중한
야외 박물관으로서 세심하게 보호받고 있다.
에게 해의 중심 델로스 섬
다도해라고 불리는 에게 해의 중앙부에 위치한 델로스 섬은 지리적으로는 물론이고 고대사
속에서도 항상 종교, 정치, 경제 분야에서 에게 해의 중심지였다. 델로스 섬은 북쪽의 미코노스 섬,
남쪽의 파로스 섬과 낙소스 섬 등 진주처럼 아름다운 섬으로 둘러싸인 키클라데스(고리 모양)
제도의 중심축이다. 푸른 숲으로 둘러싸인 키클라데스의 아름다운 섬들에 비해 델로스 섬은
바위투성이 민둥산이며, 크기도 남북이 5km, 동서가 1.3km에 지나지 않는 작은 섬이다.
에게 해의 작은 섬 델로스가 역사적, 문화적 중심지가 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그리스 신화
때문이다. 전설에 따르면, 신들의 아버지 제우스의 애인 레토가 제우스의 아들 아폴론과 아폴론의
여동생이자 달의 여신인 아르테미스를 낳은 곳이 바로 이 섬으로, 덕분에 아폴론 섬으로 숭배받게
되었다고 한다.
델로스 섬에서 사람이 살기 사작한 것은 기원전 2000년경부터이며, 청동기 시대에는 소아시아
방면의 카리아인이 이주해 온 것으로 추측된다. 델로스 섬이 널리 알려지게 된 것은 기원전 1000년
경 대륙에서 키클라데스 제도를 찾아온 이오니아인들이 이 섬을 발견하면서부터이다. 그들은
델로스 섬에 아폴론 신앙을 확립하고 해마다 이 신에게 바치는 장엄한 제의를 거행했다.
‘델리아’라고 불리는 이 제의 때 봉납하려는 이오니아인이 모여들게 되자, 델로스 섬은 서서히
에게 해 중앙부의 다른 섬들에 사는 이오니아계 그리스인의 중심지가 되었다.
델로스 섬과 이오니아계 그리스인을 연결하는 중심은 일찍부터 경제적으로 발전했던 낙소스 섬의
주민들로, 이들은 델로스의 신역에 장대한 신전이나 봉헌품을 바치고 있다. 이처럼 키클라데스
제도에서 형제 관계를 맺고 있던 델로스 섬과 낙소스 섬은 자연 환경이 전혀 달랐음에도 불구하고
역사적, 문화적으로 굳게 결속되어 있었다.
고대의 자유항으로 번영
기원전 480년부터 이듬해까지 일어난 페르시아 전쟁에서, 델로스 섬은 아폴론 신을 모시는 종교의
중심지였기 때문에 전쟁의 피해를 면할 수 있었다. 델로스 섬은 기원전 478년에 맺어진
델로스-아티카 해양 동맹(통칭 델로스 동맹)의 중심지가 되어 회의소와 공탁금 보관소가
만들어졌다. 이윽고 델로스 섬은 델로스 동맹의 맹주인 아테네의 지휘를 받게 되었지만,
이미 정신적으로나 정치적으로 굳건한 그리스 세계의 중심지가 되어 있었다.
한편, 헬레니즘 시대에는 경제적인 융성기를 맞았다. 지리적으로 에게 해의 요충지로서 교통이
편리하고, 곶에 의해 외해로부터 안전하게 격리된 3개의 만에 항만 시설이 정비된 델로스 섬은
에게 해 중앙부뿐만 아니라 범그리스 세계에서도 손꼽히는 중계 무역항으로 번영해, 부유하고
문화적인 시민이 사는 항구 도시로 발전했다.
기원전 166년에 로마로부터 자유항으로 인정받은 델로스 섬은 지중해 중계 무역의 중심지로서
크게 번영했다. 그 뒷면에는 당시 절정에 달해 있던 도시 로도스의 경제력을 약화시키려는 로마의
계략이 있었다. 소아시아의 윤택한 도시에서 로마로 향하는 모든 상선의 중계지가 된 델로스 섬은
동지중해의 국제적인 자유 무역항으로 기원전 2세기에서 기원전 1세기 중엽에 걸쳐 가장 융성했다.
조세와 관세가 없던 델로스 시에는 지중해 전역에서 선주, 은행가, 상인들이 모여들어 상점과 창고,
집회장, 훌륭한 주거지 등을 건설했다.
프랑스의 고고학 연구소가 1873년에 시작한 발굴 조사로 델로스 섬의 유적에서 발견된 아폴론
신전이나 개인 주택과 공공 건조물이 있던 터의 대부분은 이 번영의 시대가 낳은 유적이었다.
또 자유로운 기풍을 가진 델로스 섬은 이 섬의 이교됴들에게도 종교의 자유를 인정했기 때문에
이집트 신들의 신역도 발견되었다.
그러나 델로스 섬의 번영은 오래 지속되지 못했다. 로마의 폭정에 대항해 봉기한 소아시아
폰투스의 왕 미트라다테스 6세의 기원전 88년과 69년, 두 차례에 걸친 점령과 약탈로 지중해에서
누리던 번영을 모두 잃었다.
남겨진 사자석상
프랑스의 고고학 연구소에 의해 1873년부터 행해진 델로스 섬 발굴 조사에서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특징적인 유적을 발굴했는데, 이것은 그리스 전역에서 발굴된 것 중 규모가 가장 큰 고고
유적이었다. 특히 기원전 5세기에서 기원전 3세기에 건설된 아폴론 신전은 힘이 넘치는 도리아식
신전 건축 뮤물이다. 그리고 기원전 2세기의 아르테미스 신전터나 주택터, 극장터 등도 발견되었다.
여러 차례에 걸쳐 실시된 발굴 조사로도 델로스 섬에서 탄생한 과거의 거대한 유산의 전체 규모를
세상에 알릴 수는 없었다.
델로스 섬이 번영하던 시대, 성지로서 수많은 참배객을 모았던 아폴론 신역은 현재 벽과 도리아식
원주만이 유물로 남아 있을 뿐이다. 당시 항구가 있던 섬 북서쪽에서 아폴론 신역으로 통하는
성스러운 길 오른쪽에는 아폴론이 태어난 ‘성스러운 호수’로 가는 길을 따라 기원전 7세기 말에
낙소스인이 바친 사자석상이 10개가 넘게 세워져 있었지만, 지금은 5개만 남아 있다. 낙소스 섬에서
나는 대리석으로 만든 이 상은 받침대와 사자상이 하나의 돌로 이루어져 있다. 기운찬 모습과
강직한 표정이 마치 ‘성스러운 호수’의 파수꾼과 같다. ‘성스러운 호수’는 1924년 당시 이 지방에
유행하던 말라리아를 예방하기 위해 메워졌다.
신전의 유적보다 주택터 유적의 복원이 먼저 진행되고 있다. 헤르메스의 아름다운 두상이 발견된
헤르메스의 집은 기원전 2세기에 만들어진 옥상 테라스가 있는 2층 건물로 헬레니즘 시대의 훌륭한
모자이크 바닥이 남아 있다.
사각형 또는 다양한 크기와 형태로 자른 여러 가지 색깔의 대리석 조합으로 이루어진 바닥의
모자이크에서는 회화 작품과 같은 섬세함과 인상적인 그림자가 자아내는 빛의 효과를 만끽할 수
있다. 지중해의 무역 도시로 번영하던 시대, 델로스 시민들의 세련된 취미와 부유함이 엿보이는
작품이다.
적막에 감싸인 영과의 그림자
2세기 그리스의 역사가로 [그리스기] 전 10권을 남긴 파우사니아스가 델로스 섬을 방문했을 때,
델로스는 이미 황폐할대로 황폐해져 아폴론 신전의 관리인 만이 사는 섬이었다고 한다.
미코노스 섬에서 배를 타고 1시간쯤 걸리는 델로스 섬에는 지금도 고고 유적의 관리인 몇 명만이
상주하고 있을 뿐이다.
많은 관광객을 실은 관광선이 델로스 섬에 다가가 깎아지른 해안에서 어느 정도의 거리를 두고
배를 멈추면, 관광객들은 배 위에서 잠시나마 지나버린 신성한 세계를 느낄 수 있다.
해가 저물기 시작하고 관광객들이 돌아가면, 에게 해의 투명한 빛에 감싸인 아폴론의 섬은 다시금
적막이 지배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