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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경신 車敬信 (1892 ~ 1978) "미주지역 광복 지원 여성단체, 대한여자애국단 총단장"
1892년 평안도 선천도호부 수청면 가물남리(現 평안북도 선천군 수청리)에서 미곡상을 경영하던 아버지 차기원과 어머니 박신원 사이의 여섯 자매 중 장녀로 태어났다. 선천군은 평북 일대 뿐만 아니라 한반도 전역에서 개신교가 가장 활발한 지역이었다. 어머니 박신원은 선비 박취호의 딸로서 3대 독자인 차기원과 혼인한 뒤 아들을 낳지 못하고 딸만 여섯을 낳아 차씨 문중의 걱정거리가 되었다. 그녀는 이러한 정신적 어려움을 겪던 중 기독교가 주장하는 남녀평등관에 매력을 느껴 독실한 기독교인이 되었다. 박면 부친 차기원은 딸만 여섯을 낳은 부인을 저버리고 황해도로 떠나버렸고, 차경신은 홀어머니 밑에서 길려졌다.
1905년, 박신원은 정용경과 함께 가물남에 교회를 세웠다. 차경신은 이렇듯 기독교에 독실한 어머니를 통해 기독교를 접하고 이로부터 서양의 신사상과 개인의 자유 및 권리를 배웠다. 또한 그는 어머니와 함께 선천북교회를 다니면서 양전백 목사로부터 민족의식을 주입받고 조선을 잠식하고 있는 일제에 대한 배일의식을 가슴 속에 깊이 품었다.
1908년 보성여학교에 입학하여 강기일, 김성무, 오순애, 김신의, 김강석 등과 교제했다. 그녀는 이 학교에서 산술, 성경, 한문, 작문, 역사, 지리, 과학, 심리학, 동식물학, 윤리, 성서지리 등을 배웠고, 다른 학우들과 민족의 문제를 논의했다. 1910년 강기일, 김성무, 오순애, 김신의, 김강석 등과 함께 졸업한 차경신은 평북 강계읍에 설립된 장로교계통의 초등교육기관인 명신학교 교사로서 활동했다. 1914년 4년간의 명신학교 교사생활을 청산한 차경신은 정신여학교 사범과에 입학하여 1년만에 졸업했다.
정신여학교 졸업 후, 차경신은 함경남도 영생학교에서 1년 동안 교사로 재직하다가 1916년 원산 진성여학교로 자리를 옮겼다. 그러다가 좀 더 교육을 받고 싶다는 생각을 품은 그녀는 1918년 일본 요코하마 여자신학교로 유학을 떠났다. 그러던 중 그녀는 운명의 여인을 만나게 되니, 그녀는 바로 김마리아였다.
1919년 일본 요코하마 여자신학교에 재학 중이던 차경신은 김마리아와 대면했다. 당시 김마리아는 1915년부터 도쿄에 유학 중인 남학생들의 민족독립운동을 위한 모임에 참석하기 시작했고, 1919년 1월 조선청년독립단에 가담했다. 1919년 2월 8일 오후 2시, 조선기독청년회관에서 유학생학우회 총회가 열렸다. 이날 모인 학생들은 2.8 독립선언서를 발표했는데, 김마리아는 그 자리에 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차경신을 찾아가서 2.8 독립선언서 전문을 전달하고 이것을 국내로 반입할 계획을 논의했다. 두 사람은 논의 끝에 김마리아는 동경유학생 대표로, 차경신은 요코하마 유학생 대표로서 밀입국하기로 결정했다.
1919년 2월, 그녀는 김마리아와 함께 "국내에서 전국적인 독립운동을 일으키자"는 기도 제목으로 1주일 동안 새벽기도회를 가졌다. 국내로 들어오기 위해서는 관부연락선[2]을 타야 했지만 일본 경찰들이 까다롭게 검문 검색을 했기에 어려웠다. 이때 마침 아버지가 사망했다는 소식을 접하자, 차경신은 이를 구실로 김마리아와 함께 검문을 회피하고 국내로 들어올 수 있었다. 당시 그녀는 1년만 더 수학하면 졸업할 수 있었지만, 민족운동을 하기 위해 중도에서 학교를 그만뒀다.
그녀는 김마리아와 함께 2.8 독립선언서 10여 장을 미농지에 베껴서 국내로 들어왔다. 1919년 2월 15일 부산항에 도착한 두 사람은 백산상회를 찾아갔다. 이 곳은 안희제가 1914~1915년경 해외를 출입하는 민족운동가나 학생들이 비밀리에 모여 연락할 수 있도록 만들어놓은 비밀 장소였다. 두 사람은 이곳에서 독립운동을 꾀하는 학생들과 연락한 뒤 대구로 가서 서병호와 김순애를 만나 민족운동을 위한 여성 단체 조직을 의논했다.
이후 김마리아와 김순애는 광주로 가고, 차경신은 영천으로 가서 자금을 모금한 후 서울로 갔다. 그녀는 서울에서 정신여학교 교장 루이스를 만나 여성계의 일을 의논했고, 뒤이어 함태영을 만나 독립만세운동에 대해 논의했다. 함태영은 그녀에게 선천지역 독립운동을 맡겼고, 차경신은 평양으로 가서 김경희 등을 만나 독립운동에 대해 논의했다. 김경희는 평양 숭의여학교 교사로 근무하면서 1913년 여성 비밀결사단체인 송죽회를 조직한 인물이었다. 차경신은 그녀와 의논한 뒤 만반의 준비를 갖추어 선천군으로 갔다.
선천에 도착한 후 신한청년당 회원 50여 명을 모집하고 선천 신성학교, 보성여학교, 선천읍교회 지도자들과 회합하여 독립선언서와 태극기 만드는 일을 논의했다. 이윽고 3월 1일이 도래하자, 그녀는 보성여학교 교사 황기성, 졸업 동기 김강석, 강기일, 오순애, 재학생 차진희, 정구한 등과 함께 선두에 서서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했다. 이후 그녀는 신변에 위협을 느껴 고향인 가물남에 머물면서 어머니와 함께 평안도 일대에서 상하이의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독립자금을 모금했고 붕대, 가휘, 홍전 등을 마련해 독립만세 시위를 벌이다가 부상을 입은 이들을 간호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한편, 김마리아는 삼촌 김필순의 집에서 안창호와 자주 만났고, 차경신에게 안창호를 소개시켰다. 이후 차경신은 안창호와 친밀한 사이가 되었고, 안창호는 차경신에게 편지를 자주 보내 그녀가 인정이 많고 근면하며, 진실하고 너그럽다는 칭찬을 해줬다. 차경신은 안창호의 부인 이혜련을 어머니라 불렀고 안창호의 안부를 전하는 편지를 보내곤 했다. 훗날 그녀가 미국에서 박재형과 결혼했을 때, 이혜련이 차경신의 손을 잡고 결혼식장에 입장하기도 했다.
일본 경찰의 감시가 심해지자 동생 차경수와 함께 만주로 망명했다. 1919년 11월 대한청년단연합회가 만주에서 설립되었을 때, 총무로 임명되었다. 대한청년단연합회 구성원 대부분은 평안도 지역 기독교인들이었고, <대한청년보>라는 협회보를 발간하고 임시정부가 관전현에 교통국을 설치할 때 적극적으로 협조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벌였다. 차경신은 대한청년단연합회 회원의 자격으로 평안도 일대에 여성단체를 조직하고 군자금을 모금해 임시정부에 전달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그러나 대한청년단연합회가 일제의 탄압으로 더 이상 활동할 수 없게 되자, 상하이로 피신했다. 이때 그녀의 모친 박신원은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심한 고문을 받다 온 몸에 화상을 입었다. 상하이로 온 뒤 마침 대한애국부인회를 이끌다가 일제에게 체포되어 징역 3년형을 언도받았다가 병보석으로 치료를 받다 국내를 탈출한 김마리아와 재회하여 그녀와 함께 면려청년회를 조직해 신앙을 통해 동포들에게 희망을 불어넣어주려고 노력했다. 또한 부인향촌회 등 국내 항일여성단체와 계속 연락하면서 군자금 모금과 연락망 구축을 위한 민족운동을 전개했다.
1923년 7월, 김마리아는 임시정부가 국민대표회의 이후로 쇠퇴하자 미국으로 망명했다. 이후 차경신은 김마리아의 권유를 받아들이고 1924년 1월 클리버린들 선편으로 샌프란시스코로 향했다. 차경신은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한 뒤 대한여자애국단의 대대적인 환영을 받았고, 그들 앞에서 "고국에 있는 동포들은 교육에 관심이 많지만 배우고 싶어도 배우지 못하는 실정이니, 미주에 있는 동포들이 이들을 교육시켜야 한다"는 내용의 연설을 발표했다.
이후 샌프란시스코에서 국어학교와 교회 주일학교에 다니며 샌프란시스코 여자애국단 단장으로 활동했다. 그러던 1924년 3월, 그녀는 연안선을 타고 로스앤젤레스로 이동했다. 그녀는 로스앤젤레스로 온 뒤 초기엔 생계를 유지하기 너무 어려워 어느 집의 요리사로 취업하려 했으나 실패했고, 가정부, 베이비시터 등을 했다고 한다. 그러다가 안창호의 권유를 수락하고 재미사업가 박재형과 결혼했다. 이후로 생계를 걱정할 필요가 없어진 그녀는 안창호와 계속 연계를 가지면서 대한애국단, 국민회, 흥사단에서 활동했고, 로스앤젤레스 국어학교 교장 등으로 활동했다.
1926년, 국어학교를 설립해 한국인 2세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쳤고, 로스앤제렐스 성서학원에 입학하여 1931년에 졸업했다. 또한 대한여자애국단과 연계를 가지고 활동하여 1924년 8월 대한여자애국단 로스앤젤레스지부 기념식장에서 <애국단에 대한 감상과 희망>이라는 주제로 연설했으며, 1926년과 1929년에 로스앤젤레스 지부 단장으로 취임해 활발한 활동을 벌였다. 그리고 로스앤젤레스에 거주하는 여성들에게 민족의식과 여성의식을 고취시키기 위해 토론회를 개최하기도 했다. 이 토론회는 주제 발표를 듣고 이에 대해 찬성하는 파 2인, 반대하는 파 2인을 두고 토론을 벌이는 방식으로 운영되었다.
1933년, 대한여자애국단 총단장에 선출되었다. 대한여자애국단은 미주지역 최초의 조국 광복 지원을 위한 통합 여성단체로, 조직 목적은 "대한의 애국여자를 단합하여 여성 생활을 계도하며 실력을 준비해 대한 독립 운동을 힘써 진행하는" 것이었다. 대한여자애국단 초기 규칙엔 연설 혹은 토론회를 반드시 개최해야 한다는 조항이 기재되었고, 단원들에게는 의견제출권, 표결권, 선거권, 피선거권 등이 있음을 명시했다. 이러한 규칙들은 여성들에게 정치의식, 자유민주주의 의식 등을 고양시키는 데 큰 영향을 미쳤다.
대한여자애국단 총단장으로서 1933년부터 1939년까지 이끌며 많은 활동을 벌였다. 그녀는 김혜원, 임메불, 이성례, 김혜란, 최연실, 윤도연, 전그레이스, 임인재 등과 함께 대한여자애국단의 대표적인 여성 독립운동가였다. 그녀는 대한여자애국단이 3.1 정신을 계승하여 조직된 단체임을 밝히며 민족운동을 지속적으로 추진하고자 했다. 총단장을 맡으면서 다음과 같은 여러 업적을 거두었다.
첫째, 차경신은 미주지역에서만 존재했던 대한여자애국단 지부를 쿠바의 칼데나스지부, 마틴자스지부, 하바나지부, 멕시코 메리다지부 등 중남미 일대까지 확산시켰다. 둘째, 1934년 7월 25일에 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 가명통지서를 받고 그해 10월 1일 총임원회를 개최해 모든 단원들에게 통상회가 열릴 때마다 5센트씩 걷어서 총액을 1년에 1회씩 대일전선통일동맹 총본부에 보내기로 결정했다.
셋째, 항일중국군을 지원하는 국제적 활동을 전개했다. 1937년 6월 8일 총단임원회에서 중일전쟁 재난민과 부상병들을 돕기 위한 약품과 붕대 등을 모집하는 운동에 참여했고, 1937년 장제스의 부인 쑹메이링에게 중국항일동정금 638원 65전을 전달했으며, 1938년에는 재난민과 부상병을 돕기 위해 78원을 송부했다. 그리고 1939년에는 중국군을 위해 솜옷 마련 의연금을 모금했다.
넷째, 일화배척대회에 참가했다. 그녀는 1938년 12월 11일 헐리우드 영화 예술가조합이 로스앤젤레스 제퍼슨 블러버드의 슈라인 오디토리움에서 개최한 일화배척대회에 참가하여 한국의 존재를 홍보했다, 또한 그녀는 헐리우드의 남녀배우들, 캘리포니아주 부지사 피터슨, 영국 맨체스터 가디언지의 극동특파원들과 함께 일본 제국주의 타도를 외쳤고, 주최측으로부터 일화배척대회를 지원한 공으로 감사장을 받았다.
단장에서 물러난 뒤에도 1940년부터 1944년까지 대한여자애국단 서기로서, 그리고 1945년에는 단원으로 활동했다. 1943년에는 미국 재무성 주최로 로스엔젤레스 공원에서 각국 민족의 민중대회와 전시공채금 모금을 목적으로 한 아메리카데이 행사가 열렸는데, 그녀는 이 행사에 적극 참여하였고, 1945년 12월 31이 신한민보사와 함께 감사장을 받았다. 또한 1944년부터는 재미한족연합위원회에 대한여자애국단 대표로 가담했고, 1944년 4월 8일 국방과장을 맡았으며, 1944년 11월 9일 재무 등으로 선출되었다. 1945년 3월 3일, 차경신은 전쟁으로 인한 본국과 해외 난민 구제를 마련하기 위해 조직된 한인구제회에서 이사원으로 활동했다.
이렇듯 왕성한 활동을 벌였던 차경신은 8.15 광복 후에는 미국에서 조용히 지냈으며, 1978년 9월 28일 로스앤젤레스에서 향년 86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3년 차경신에게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