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 전선의 페치카 "최재형 선생"
나에게 소중한 사람은
대단한 능력을 지닌 사람이 아니라
함께 밥을 먹고 전화를 걸고
오늘의 이야기를 나눌수 있는 보통사람이다
그런 소중한 사람을 놓치지 않으려면 계속 관심하면서
부자생사랑으로 노력해야 한다
며칠전지인으로부터 문자편지를받았다
페치카 최재형 선생
독립운동가
대표적 독립운동가였던 안중근 의사는
1909년 10월26일 오전 중국 하얼빈역에서 국권 침탈의 원흉인
이토 히로부미를 총으로 쏴 암살했고 1910년 2월14일 오전 10시30분 사형선고를 받았다
안중근은 감옥에서 고초를 겪으면서도 배후 인물이 누구인지 절대 밝히지 않았고
떳떳하고 당당하게 31살의 나이로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안중근 의사의 숨겨진 배후이자 독립운동의 거대한 배후였던 인물은
바로 따뜻한 난로 페치카로 불리는 ‘최재형’이다
최재형은 함경북도에서 노비 아버지와 기생 어머니의 아들로 태어났다
9세 때 흉년이 들어 생계가 어려워지자
할아버지와 부모를 따라 시베리아로 이주했다
극심한 가난으로 한인학교에도 다닐 형편도 안되어
러시아학교에 다니면서 러시아어와 문화를 배웠다
11세 때 형수의 심한 구박과 굶주림으로 집에서 가출하여 상선의 선원이 되었고
6년간 두번의 세계일주를 하며 어학, 문학, 상식 등 견문을 넓혔다
17세가 되던 때 블라디보스토크에 장사를 통해 큰 돈을 모았고
많은 땅을 사들여 농장을 운영했고 한인마을에 소학교를 건립했다
조선이 을사조약으로 일본에 병합되자
최재형은 일본으로 건너가 박영효를 만나고
위기에 몰린 조국의 현실을 절감하였다
그는 의병을 모집하였고 안중근이 포함된 독립단체 동의회를 조직하여 총장으로 추대되었으며
항일의병 활동자금으로 거금을 내놓았다
그는 러시아 독립운동가의 대부로 상해임시정부 초대 재무총장으로 추대되었고
최운산장군과 더불어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독립군이자 사회공헌의 지도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