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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조/명
나 호 열 시인
│시인 프로필
1953년 충남 서천 출생
1986년 『월간문학』으로 등단
?시 집
『눈물이 시킨 일』, 『타인의 슬픔』,
『당신에게 말걸기』 외 10여 권
?문화평론집
『굴레와 해방』
?수상
시와시학 중견시인상
녹색시인상
한민족문학대상
한국문협 서울시문학상
<시인이 뽑은 대표시>
북 외 4편
나호열
북은 소리친다
속을 가득 비우고서
가슴을 친다
한 마디 말 밖에 배우지 않았다
한 마디 말로도 가슴이
벅차다 그
한 마디 말을 배우려고
북채를 드는 사람이 있다
북은 오직 그 사람에게
말을 건다 한 마디
말로 평생을 노래한다
당신에게 말 걸기
이 세상에 못난 꽃은 없다
화난 꽃도 없다
향기는 향기대로
모양새는 모양새대로
다, 이쁜 꽃
허리 굽히고
무릎도 꿇고
흙 속에 마음을 묻는
다, 이쁜 꽃
그걸 모르는 것 같아서
네게로 다가간다
당신은 참, 예쁜 꽃
매화
천지에 꽃이 가득하다
젊어서 보이지 않던 꽃들이
이제서 폭죽처럼 눈에 보인다
향기가 짙어야 꽃이고
자태가 고와야 꽃이었던
그 시절 지나고
꽃이 아니어도
꽃으로 보이는 이 조화는
바람 스치는 인연에도
눈물 고이는 세월이 흘러갔음인가
피는 꽃만 꽃인 줄 알았더니
지는 꽃도 꽃이었으니
두 손 공손히 받쳐 들어
당신의 얼굴인 듯
혼자 마음 붉히는
천지에 꽃이 가득하다
눈물이 시킨 일
한 구절씩 읽어가는 경전은 어디에서 끝날까
경전이 끝날 때쯤이면 무엇을 얻을까
하루가 지나면 하루가 지워지고
꿈을 세우면 또 하루를 못 견디게
허물어 버리는,
그러나
저 산을 억만 년 끄떡없이 세우는 힘
바다를 하염없이 살아 요동치게 하는 힘
경전은 완성이 아니라
생의 시작을 알리는 새벽의 푸르름처럼
언제나 내 머리맡에 놓여져 있다
나는 다시 경전을 거꾸로 읽기 시작한다
사랑이 내게 시킨 일이다
촉도蜀道
경비원 한 씨가 사직서를 내고 떠났다
십년 동안 변함없는 맛을 보여주던 낙지집 사장이
장사를 접고 떠났다
이십 년 넘게 건강을 살펴주던
창동피부비뇨기과 원장이 폐업하고 떠났다
내 눈길이 눈물에 가닿는 곳
내 손이 넝쿨손처럼 뻗다만 그곳부터
시작되는 촉도
손때 묻은 지도책을 펼쳐놓고
낯선 지명을 소리내어 불러보는 이 적막한 날에
정신 놓은 할머니가 한 걸음씩 밀고 가는 저 빈 유모차처럼
절벽을 미는 하루가
아득하고 어질한 하늘을 향해 내걸었던
밥줄이며 밧줄인 거미줄을 닮았다
꼬리를 자른다는 것이 퇴로를 끊어버린 촉도
거미에게 묻는다
<시인의 최근 신작시>
스카이 댄서 외 4편
풍경은 서 있다 흔들흔들
벽을 뚫고 고개를 넣어도
풍경은 고무줄처럼 늘어날 뿐
쓰러지지도 모로 기울지도 않는다
나무가 뿌리로 날갯짓하며 하늘을 날아가는 듯
시한부 벽보의 웅크린 글씨로 응축되어 있는
출발선에 선 단거리 선수들의 가쁜 숨
등을 보이며 열 걸음 걸어가는 카우보이는
열 걸음을 걸은 후에도 몸을 돌리지 않는다
어디서 총알이 치명적인 사랑을 겨누었으나
탕! 풍경이 잠시 기우뚱하다가 오뚜기처럼 일어선다
풍경을 그린다는 것은 무모한 일
어쩐지 내세 같은, 무너진 폐허 같은
앞뒤가 없는 풍경을 무한히 뒤집어 보는 저 사내
행인들을 향해 쓰레기 줍듯
연신 허리를 굽히고 있다
세월이 하염없이 가엾다는 듯.
시월
시월이라는 사람에게 편지를 쓴다
한껏 마음을 내어주는 하늘 편지지에
꾹꾹 눌러 숨겨둔 글자들
흰 구름 우표를 붙여
바람에 실려 보낸다
시월이라는 사람이 답신을 보내왔다
살얼음 낀 하늘에
기러기 한 줄
슬픔도 오래 되면 울울해진다
견디지 못할 슬픔도 있고
삭혀지지 않은 슬픔도 있지만
슬픔도 오래 되면 한 그루의 나무가 된다
가지를 뻗는 슬픔
잎을 내는 슬픔
뿌리가 깊어지는 슬픔
이 모든 상형의 못난 한 그루의 나무가
살아있는 사람들에게 위안이 되고
희망이 된다
울진 소광리의 못난 소나무
600년의 고독을 아직도 푸르게 뻗고 있다
나의 멘티에게
너에게 가르쳐 줄 것은 없다만
이제 신 대신 CCTV를 믿는 것만큼
나도 추문을 믿는다고 말해 줄 수는 있다
어느 날 밤의 은밀한 바람이
결국 욕정의 결말을 삐라처럼 뿌려놓은 뒤
별 볼일 없는 늙은이로 전락해 가는 걸 똑똑히 보아두어라
겉과 속이 어찌 같을 수 있겠느냐만
가시밭 길로 숨어들어 가는 나의 모습을 보면서
동백꽃 뚜욱뚝 모가지 떨어지듯 서늘해지는 뒷목을 치며
뭔가를 배웠다면 나는 고마워하리라
이래서는 안 되는데
저래서는 안 되는데
이것이 너희에게 주는 마지막 교훈이니라
태장리 느티나무의 겨울
부석사 가는 길에 서 있다
저, 외톨이 나무
이름 부르면 금방이라도 뛰쳐나갈 듯 하였으나
가닿지 못할 곳을 꿈꾸는 자에게만 흐름을 허락하는
길의 어깨 너머로
온 몸을 휘덮는 초겨울 어둠을 손사래 치니
비로소 주어만 남은 생이 남았다
어두워서 춥고
추워서 더욱 어두운 마을 밖에서
칼바람을 남루로 얻어 쓰고
저, 외톨이 나무의 꿈은
꺾어져 돌아가는 길 끝까지 걸어가 보는 것
그러나 엄마가 짜준 털옷을 입고도 오돌거리는
버림받은 새끼고양이 수만 마리를 가슴에 품었는지
몸만 가끔씩 틀어 움직일 뿐
천수관음千手觀音!
나호열 시인의 체험적 시론___
시는 나를 비추는 거울이다
광릉수목원에 갔었다. 겨울이 막 삭막한 도시에 불청객처럼 찾아온 어느 날이었다. 각양각색의 나무들이 운집한 숲은 적막하였으나 그곳 또한 생명의 싸움터이기는 마찬가지였다. 메타세콰이어와 같은 활엽수들은 잎들을 떨구고 선정에 든 듯 하였으나 침엽수들은 여전히 바늘 같은 푸른 잎을 내밀고 있었다. 나무들이, 숲들이 얼마나 치열한 생존 경쟁을 하는지 보려면 겨울이 되어야 한다는 숲 해설가의 설명이 귓가에서 떠나지 않았다. 참나무에 자리를 빼앗긴 메타세콰이어는 한쪽으로만 가지를 뻗었고, 어린 엄나무는 온 몸에 가시를 박아 제 몸을 추스렸다. 피톤치트를 내뿜는 전나무 숲 아래에는 풀들이 자라지 않았으니 인간들의 건강에 그리 좋다는 피톤치트는 사실 그 나무들이 해충과 풀들의 접근을 회피하려는 방어의 수단이었던 것이다. 숲에도 생노병사가 있어 이제 혈기가 돋는 젊은 숲이 있는가 하면 세월 따라 늙어 쇠퇴해가는 숲도 있으니 저마다의 본능과 재주를 다하는 뭇 생명들에게 경의를 표할 수밖에!
광릉수목원에는 나무와 꽃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원숭이와 같은 잡식성 동물이 있는가 하면 고라니 같은 초식성 동물도 있었고, 멸종 위기에 처해 있는 최상위 포식자 호랑이도 있었다. 그러나 내 눈과 강렬하게 마주친 것은 늑대였다. 세간의 비아냥과는 상관없이 음흉하게 보이는 푸른 눈빛이 내게는 아름다운 보석과 같았다. 날렵하게 균형 잡힌 몸매와 우울이 배인 회색 털은 도도하기조차 하였다. 그러나 늑대는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는 매우 다른 습성을 가진 동물이다. 날카로운 이빨로 무장하였으나 비정해 보이지 않고, 호랑이처럼 이기적인 단독자로 살지 않는다. 언제나 가족애로 뭉쳐서 집단을 이룬다. 짝을 지으면 평생을 같이 살고 암늑대가 먼저 죽어도 숫컷은 자신의 반려를 잊지 않고 자신의 생을 마칠 때에는 암늑대가 숨을 거둔 곳에서 굶어죽기도 한다. 그래서인가! ‘꽃보다 사람이 아름답다’고 노래하는 어느 가수가 새롭게 발표한 ‘늑대’라는 노래를 거듭 듣는다.
우~우! 사람이 아름답다는 명제와 고독한 늑대의 아득한 거리야말로 내가 평생 동안 궁구했던 숙제였음을 나는 안다. 나무들 간의 치열한 자리다툼과 경쟁의 아우성은 들리지 않고, 동물과 곤충들의 먹이사슬에는 증오가 없는데 사람과 사이에 들끓는 아귀다툼과 온갖 협잡을 견디지 못해 숨어들어간 것이 ‘시’라고 하는 소도蘇塗이다. 아직도 내게 있어서의 인간은 꽃보다 아름답지 않으며 늑대의 가족애와 같은 관계의 건강성을 담보하지 못한 위험한 동물이다. 이런 생각이 인간적 성숙을 방해하고 스스로를 고독하게 한다는 사실을 아는 까닭에 나는 더욱 외롭다. 그러므로 나의 시 쓰기는 당연히 인간과 사회에 대한 환멸과 불신으로부터 벗어나서 따뜻하고 긍정적인 세계로 귀환하려는 것임은 틀림이 없는 사실이다. 일찍이 오규원이 그의 시 「용산에서」 읊었듯이 나의 시에는 근사한 이야기도 없고 따라서 조금도 근사하지 않은 생生의 증언밖에 없다.
나는 가끔 ‘용산’을 생각한다. 남루하게 떠나고, 남루하게 도착한 사람들이 유령처럼 떠돌던 역사와 과거를 알 필요도 물을 필요도 없는 사람들이 기계적 욕망에 몸을 섞는 붉은 골목길과 그 길을 지나쳐야만 도착할 수 있었던 강변의 우리 집을 떠올릴 때면 근사하지 않은 생을 뒤엎는 환상을 꿈꾸던 청춘의 시절을 떠올린다. 불현듯 펜을 잡고 밝고 아름다운 그래서 융단처럼 부드럽게 흘러나오는 노래가 되는 시를 써보고 싶어진다. 시대가 변하고 삶의 방식이 바뀌었다고 해도 시는 여전히 노래가 되어야 한다고 믿는 마음은 변함이 없다. 소통이 이 시대의 트랜드가 되어 있어도, 소통의 전제가 되는 유통流通에 신경 쓰고 싶지 않다. 그러니까 시를 잘 써야 한다든가, 좋은 시로 세인의 주목을 받고 싶어 하는 그런 유통 말이다. 의식적으로 그런 것은 아닐지라도 나는 즐거운 마음으로 문단의 은둔자가 되고 주변인이 되었다. 그 대신 나는 무아無我와 진아眞我 사이를 헤매는 삶의 모순을 증언함으로서 편견과 잘못된 신념으로 얼룩진 사유를 합리적 사유로 인도하는 즐거움을 얻게 되었다.
합리적 사유란 무엇인가? 한 마디로 합리적 사유를 요약한다면 결과보다 과정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다. 시가 언어로 이루어진 구축물이고 시를 어루만지는 자를 시인이라고 할 때 그 인人은 언어를 속이지 않고, 언어를 속이려는 욕망을 제어하고자 하는 분투를 거듭하고 있는 존재이다. 다시 말해서 꾸밈이 없는 자신의 삶을 절차탁마하는 자가 시인이 아닐까 하는 것이다. 그러나 꾸밈이 없는 자신의 삶을 언어로 표현한다는 것이 또 얼마나 지난至難한 일인가! 수치를 무릅쓰고 초라하고 비루한 자신을 들여다본다는 것이 얼마나 몸서리치는 일인가!
한때 나는 시론이 없는 시인을 하찮게 생각한 적이 있다. 짧은 생을 살아가면서 이 거룩한 세계의 진면목을 바라보는 수단으로써의 시론은 마땅히 시인이 지녀야 할 덕목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 반듯한 시론을 지니고 있지 못하면 시인이 아니라는 주장을 슬그머니 내려놓고 싶다. 누구나 자신만의 목소리를 가지고 있듯이, 인생에는 정답이 없듯이, 꽃보다 사람이 아름답다는 명제를 체득하는 길은 무수히 많음을 뒤늦게나마 알아차린 까닭이다.
끝끝내 시는 ‘나’를 비추는 거울이다!
나호열 시인을 주목한다___강경희
고독한 북채로 울리는 공空의 노래
강경희
시인은 구도자가 아니다. 생의 지극한 경지에 도달하려는 고행과 수행의 길을 제시하지도 않는다. 때문에 시는 통달의 체험도 구원의 열반도 완성하지 않는다. 시인이 경건한 시간과 숭고한 순간을 포착하려는 행위는 종교가 되려는 몸짓이 아니다. 선禪에 대한 갈망은 오히려 탈신성화된 극악한 현실에 대한 반성적 역할에 가깝다. 현대시의 정신주의적 경향의 밑바탕에는 부정과 타락, 갈등과 반목의 파행적 삶에 대한 자기성찰이 내재한다.
자기 성찰은 본질적으로 내부지향적이다. 즉 문제적 현실을 외부가 아닌 내부로 되돌려 놓는다. 외적 세계에 대한 부정과 비판을 목적하지 않는다는 것은 두 가지 의미를 갖는다. 첫째는 외부세계가 본질적으로 개선될 수 없다는 짙은 허무주의이며, 둘째는 개별자의 주체적 깨달음이 선행되지 않고서는 모순이 극복될 수 없다는 자기인식이다.
나호열의 시는 이러한 두 가지 인식을 모두 보여준다. 그는 생의 근원적 허무주의와 씨름하는 동시에 그것으로부터의 부단한 탈주를 위한 자기극복을 감행한다. 그의 시가 하나의 명제로 귀결되는 경향은 이러한 그의 시적 세계관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견디지 못할 슬픔도 있고
삭혀지지 않은 슬픔도 있지만
슬픔도 오래 되면 한 그루의 나무가 된다
가지를 뻗는 슬픔
잎을 내는 슬픔
뿌리가 깊어지는 슬픔
이 모든 상형의 못난 한 그루의 나무가
살아있는 사람들에게 위안이 되고
희망이 된다
울진 소광리의 못난 소나무
600년의 고독을 아직도 푸르게 뻗고 있다
──「슬픔도 오래 되면 울울해진다」 전문
“한 그루의 나무”를 바라보는 시인의 인식은 나무의 내적 진실을 온전히 포착하려는 의지로 가득하다. “한 그루 나무”는 풍경이 아니라 존재이다. ‘나무’를 ‘나무’로 존재하게 하는 본질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슬픔”이다. 슬픔의 터전에는 ‘시간’이 아로새겨져 있다. “견디지 못할 슬픔” “삭혀지지 않은 슬픔” “가지를 뻗는 슬픔” “잎을 내는 슬픔” “뿌리가 깊어지는 슬픔”은 모두 고통의 시간을 암시한다. 순간의 고통이 아닌 지속적 고통을 통과해야만 얻어지는 것, 그것이 바로 “한 그루의 나무” 자신인 것이다. “600년의 고독”을 지탱해온 슬픔의 역사가 “울진 소광리의 못난 소나무”로 표상된다. 고통과 슬픔이 “살아 있는 사람들에게 위안이 되고/ 희망이 된다”는 역설은 지독한 고독과 상처의 시간이 곧 삶의 본질일 수밖에 없음을 시사한다. 지독한 생의 시간을 통과하는 것이 ‘목숨’이자 ‘희망’일 수 있다는 자기 인식은 아픈 깨달음이다. 푸름에 도달하기 위해 거쳐야 하는 지난한 시간을 소나무는 온몸의 “상형”으로 증언한다. 상처와 슬픔이 위안이자 희망의 거름이 된다는 진실은 아픈 진실이다. 진실을 모르기에 고통스러운 것이 아니라 아픔의 시간이 진실이라는 것을 깨달아 슬픈 것이다.
나호열은 슬픔과 고통에 예민하게 반응한다. 그는 순간의 찬란함에 현혹되지 않고 무상의 환희에 몰두하지 않는다. 삶이란 궁극적으로 오랜 시간의 집적集積이며 고난의 연속이라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일 것이다.
어느 날 밤의 은밀한 바람이
결국 욕정의 결말을 삐라처럼 뿌려놓은 뒤
별 볼일 없는 늙은이로 전락해 가는 걸 똑똑히 보아두어라
겉과 속이 어찌 같을 수 있겠느냐만
가시밭길로 숨어들어가는 나의 모습을 보면서
동백꽃 뚜욱뚝 모가지 떨어지듯 서늘해지는 뒷목을 치며
뭔가를 배웠다면 나는 고마워하리라
──「나의 멘티에게」 부분
시간은 속절없이 인생을 강타한다. 광풍처럼 몰아치던 “욕정의 결말”도 “별 볼일 없는 늙은이로 전락해”가는 시간의 장난처럼 존재를 압박한다. “뚜우뚝 모가지 떨어지듯 서늘해지는 뒷목”을 잡으며 “가시밭길”로 들어서는 생의 종점은 어둡고 우울하다. 시간의 도도한 흐름은 부정과 반항에도 끄떡하지 않는다. 주체의 의지를 벗어난 존재의 한계 상황을 시인은 주시한다. 나호열의 힘은 바로 이 ‘주시’의 시선에 있다. “전락해 가는 걸 똑똑히 보아두어라”라는 말이 의미심장한 이유는 그것이 회피와 거부의 시선이 아니기 때문이다. 정직하고 당당한 ‘응시’의 시선은 모든 허물어져가는 것들과의 처절한 싸움이다. 그의 시가 지닌 장렬함은 여기서 빛난다. 붉은 “동백꽃”이 “모가지”를 떨어뜨리듯 어두워가는 생의 시간 앞에서 장렬하게 몰락할 수 있는 자의 의연함을 그는 생의 “교훈”으로 삼는다. 아픔이 교훈이 될 수 있다는 진실은 오랜 고통의 시간과의 조우를 의미한다. 세월의 미학은 시간의 소비가 아니라 체험의 누적임을 보여준다. 켜켜이 쌓인 경험적 진실로 그는 외적 풍경을 존재의 미학으로 되돌려 놓는다.
어두워서 춥고
추워서 더욱 어두운 마을 밖에서
칼바람을 남루로 얻어 쓰고
저, 외톨이 나무의 꿈은
꺾어져 돌아가는 길 끝까지 걸어가 보는 것
──「태장리 느티나무의 겨울」 부분
“외톨이 나무”는 시인 자신이다. 춥고 어둡고 “칼바람을 남루로 얻어” 쓴 나무의 초상을 통해 그는 자신을 본다. 여위고 아픈, 슬프고 고통스러운 자신을 끝끝내 지켜보는 행위에 그의 비범함이 자리한다. 누구나 회피하고 싶은 것이 어둠이다. 어둠의 정면을 돌파하는 것은 상처를 동반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시인은 “꺾어져 돌아가는 길 끝까지 걸어가 보는 것”이 바로 자신에게 주어진 길임을 수용한다. 수용이 아니라 의지에 가깝다. “끝까지”라는 말이 함축하듯이 그는 비장하다. 이러한 비장함이 일상을 지배하는 관습에 길들여지지 않으려는 시인의 의연한 세계관을 보여준다.
짜릿한 감각에 길들여지고, 익숙한 삶의 편린들을 쫓아가고, 적당한 중간지대를 옹호하려는 세태로부터 그는 단호한 선을 긋는다. “꺾어져 돌아가는 길”은 앞이 보이지 않는 위험한 지대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끝까지 걸어가 보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불확실한 삶의 위험한 곡예를 감내하려는 그의 단단한 정신은 타협을 모른다. 그저 묵묵히 걸어가 보는 것, 길의 끝을 마주하려는 정신의 모험을 중단하지 않는 것, 이것이 나호열의 삶의 철학이다. 그러나 그것은 외로운 길이다. 때문에 ‘고독’ ‘외톨이’ ‘눈물’은 외로운 자가 감수해야 할 형벌일 수밖에 없다.
스스로 형극의 길을 가겠다는 의지를 가능하게 만드는 원동력은 무엇일까? 무엇이 시인 자신을 이토록 외로운 길로 이끄는가? 존재의 해탈을 위한 수행의 과정인가? 고통 극복을 위한 자기실현의 의지인가? 모두 아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사랑’에 대한 믿음에 근거한다.
저 산을 억만 년 끄떡없이 세우는 힘
바다를 하염없이 살아 요동치게 하는 힘
경전은 완성이 아니라
생의 시작을 알리는 새벽의 푸르름처럼
언제나 내 머리맡에 놓여져 있다
나는 다시 경전을 거꾸로 읽기 시작한다
사랑이 내게 시킨 일이다
──「눈물이 시킨 일」 부분
“경전”은 진실의 요체이다. 경전은 가르침이자 깨달음에 이르는 길을 제시한다. 시인은 경전의 “힘”을 “완성”이 아니라 “시작”이라 말한다. 그는 관념의 경전을 버리고 체험의 경전을 온몸으로 읽는다. “나는 다시 경전을 거꾸로 읽기 시작한다”라는 말의 의미는 완성을 위한 종지부를 찍기 위해 경전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생의 시작을 알리는 새벽의 푸르름처럼” 자신을 새롭게 거듭나게 하는 힘이 경전임을 터득했다는 것이다. “억만 년”의 “산”을 “세우는 힘”, “하염없이 살아 요동치”는 “바다”를 만드는 “힘”은 모두가 “시작”에 대한 열망으로 하루하루를 살아냈기에 가능한 것이다. 이 열망의 밑바탕에는 “사랑”이 존재한다. 삶은 무서운 집념과 의지와 이성으로만 이끄는 것이 아니다. “사랑이 내게 시킨 일이다”라는 한 구절이 간절하고도 진실하게 다가오는 이유는 한없이 인간적이고 너무나 인간적인 나호열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지성으로 간파한 관념의 세계가 아니라 살갗과 끓는 피로 호흡한 삶의 애정이 고스란히 녹아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시인의 눈물과 고통은 진짜임을 증명한다. 관념의 포즈와 깨달음의 제스처를 동반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그는 일종의 정신주의 시가 범할 수 있는 초월의 함정을 벗어난다. 용해되지 않는 내적 관념을 무차별하게 살포하는 선시류의 강제적 깨달음의 주는 피곤함을 경험한 독자라면 나호열의 간절하고도 순수한 문법에 동화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이처럼 무거운 관념의 진실을 설파하려는 태도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다름 아니라 세월의 연륜이 그를 성숙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라 생각된다. 채움에 집착하고 깨달음에 몰입하고 해탈에 집중하는 것만이 ‘진실’일 수 있다는 중압감으로부터 그는 스스로를 자유롭게 만든다.
천지에 꽃이 가득하다
젊어서 보이지 않던 꽃들이
이제서 폭죽처럼 눈에 보인다
향기가 짙어야 꽃이고
자태가 고와야 꽃이었던
그 시절 지나고
꽃이 아니어도
꽃으로 보이는 이 조화는
바람 스치는 인연에도
눈물 고이는 세월이 흘러갔음인가
──「매화」 부분
“젊어서 보이지 않던 꽃들이” “향기가 짙어야 꽃이고/ 자태가 고와야 꽃”이라는 세상의 잣대로부터 자유롭다. “꽃이 아니어도/ 꽃으로 보이는” “세월”의 ‘눈’을 그는 알게 된 것이다. 그는 당위의 세계로부터 존재의 세계로 이동했다. 개념과 명제가 가득한 세계로부터 그는 자기 구현과 완성의 세계로 발을 옮겼다. 그것은 자연스럽게 얻어진 결과가 아니라 “눈물 고이는 세월”을 스스로 끌어안고 살아왔음을 보여준다. 그저 흘러간 시간의 결과가 아니라 치열한 시간과의 싸움이 만들어낸 성장의 열매인 것이다. 그의 시의 ‘초연함’의 배경에 뜨거운 눈물과 고통이 서려있다는 사실을 외면하지 못할 것이다.
북은 소리친다
속을 가득 비우고서
가슴을 친다
한 마디 말 밖에 배우지 않았다
한 마디 말로도 가슴이
벅차다
그 한 마디 말을 배우려고
북채를 드는 사람이 있다
북은 오직 그 사람에게
말을 건다
한 마디 말로
평생을 노래한다
──「북」 전문
“한 마디 말로/ 평생을 노래”하는 경지에 도달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시간이 존재하는가. 하나의 언어로 자신의 모든 것을 말할 수 있다면 그 시인은 위대한 시인으로 기록될 것이다. 어쩌면 세상의 모든 시인은 단 하나의 언어를 위해 살아가는 존재인지도 모른다. 하나의 소리, 하나의 진실, 하나의 울림을 위해 시인은 허망하고 슬프고 아프고 고통스러운 현실과 조우한다. “평생의 노래”를 “한 마디 말”로 바꾸려는 간절함은 평범한 사람들에겐 얼마나 어리석은 것으로 보이는가. 하지만 단 하나의 소리도 남기지 못하고 살아가는 이 허무한 세계에 진실한 하나의 목소리를 전달하려는 시인은 그 존재만으로도 아름답다. 나호열은 “그 한 마디 말을 배우려고/ 북채를 드는 사람”이다. “북”의 “소리”처럼 “한 마디” 울림으로 그는 세상과 교신한다. “속을 가득 비우고서” 발성하는 ‘공空’의 언어가 가장 큰 소리임을 그는 우리에게 아프게 전달하고 있는 것이다.
강경희 / 2001년 <문화일보> 문학평론으로 등단했으며 저서 『타자의 언어학』, 『표류와 유출의 상상력』, 『살아있는 말들의 대화』, 『불온한 시대와 공존하기』가 있다. 현재 계간 『시인동네』 편집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