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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세기말 내물왕(재위기간 : 356~402)은 석씨계열 왕조를 대신하여 경주 김씨 계열의 왕조로 교체하였지만, 백제와 가야 왜국으로 구성된 3국 연합군의 공격을 받아 국가가 존망의 위기에 처하였다. 내물왕은 이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서기400년 고구려 광개토대왕으로부터 군사원조를 받았지만, 그로인해 고구려의 강력한 정치적 간섭을 받게 되었다. 그에 따라 내물왕은 조카인 실성을 고구려에 볼모로 보냈지만, 내물왕이 사망하자 고구려의 원조를 받은 실성이 왕위에 올라 이번에는 내물왕의 두 아들을 볼모로 보내게 된다.
실성왕 1년 402년에는내물왕의 셋째아들 미사흔(未斯欣)을,왜국으로 보냈으며, 412년에는 내물왕의 둘째아들 복호(卜好)를 고구려에 볼모로 보냈다. 이어 실성왕은 내물왕의 장자 눌지마저 암살하려 하였지만, 도리어 눌지가 실성왕을 살해한 후 스스로 왕위에 올랐다. 이렇게 치열한 왕위다툼 끝에 왕위에 오른 눌지왕(417∼458)은, 고구려와 왜국에 각각 붙잡혀 있는 두 동생을 하루라도 빨리 귀국시키는 일이 시급하였다.
그에 따라 눌지왕은 당시 양산(梁山)지방의 토착세력으로서 삽량주간의 직책을 맡고 있던 박제상(朴堤上)을 기용하였다. 박제상은 박혁거세의 후손이며 파사왕의 5대손인 신라의 대표적인 귀족으로, 강직하고 계책이 뛰어나기로 소문난 인물이었다. 눌지왕은 고구려가 후원하였던 실성왕을 살해 한 후 왕위에 올랐기 때문에 복호를 귀국시키는 일은 결코 쉬운 임무가 아니었지만, 눌지왕이 외교사절을 청하자 망설임없이 받아들였다.
박제상은 모말(毛末)이라고도 하며, 시조 혁거세의 후손으로 파사이사금(婆娑尼師今)의 5대손이다. 할아버지는 아도갈문왕(阿道葛文王)이며, 아버지는 파진찬(波珍飡) 물품(勿品)이다. 신라는 백제를 견제하기 위해 402년(실성왕 1년) 왜에 내물왕의 아들 미사흔(未斯欣)을, 412년에는 고구려에 미사흔의 형 복호(卜好)를 볼모로 보냈다. 내물왕의 큰아들인 눌지왕이 왕위에 오르자 볼모로 잡혀 있는 동생들을 구출하려 했다. 왕은 신하들의 천거를 받아 당시 삽량주간(歃良州干으로 명망이 높던 박제상을 보냈다. 먼저 고구려 왕을 회유해 복호를 구출해 돌아온 뒤, 왜에는 자신이 신라를 배반하고 도망온 사람처럼 속이고 들어갔다. 미사흔을 구출해 미리 고국으로 보내고 그들에게 잡혔는데, 왜의 협박과 회유에도 굴하지 않고 충절을 지키다가 죽었다. 이 소식을 들은 왕은 그를 대아찬으로 추증하고 그의 둘째 딸을 미사흔의 아내로 삼았다. 이제 그의 행적을 상세히 살펴 보고자 한다.
고구려로 간 박제상
그런데 고구려는 신라의 왕이 누가되느냐 보다 과연 고구려와 얼마나 우호적으로 지낼 수 있느냐에 더욱 큰 비중을 두고 있었으며, 박제상 역시 그러한 고구려의 입장을 잘 파악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박제상은 고구려의 장수왕과 대면한 자리에서 '질자(인질)를 교환하는 것은 말세에나 있는 매우 안 좋은 풍습이며, 지금 우리왕이 형제를 매우 그리워 하고 있기 때문에 대왕께서 은혜를 베풀어 준다면 크게 감사할 것입니다.'라고 설득하였다. 이에 동북아의 평화정책을 추구하고 있던 장수왕으로써도, 신라와의 우호관계를 생각하여 미사흔의 귀국을 허락하여 주었다.
그러나 정말로 어려운 문제는 왜국에 붙잡혀 있는 복호를 무사귀국시키는 일이었다. 당시 왜국은 백제의 영향력 아래에 있었을 뿐아니라, 오히려 백제보다 더 자주 신라국경을 침범하여 막대한 피해를 주고 있는 적대국이었다.
박제상 역시 '고구려는 대국이며 임금역시 어질어서 대화로써 원만하게 해결할 수 있었지만, 왜인들은 대화로 해결할 수 없으니 거짓 모책으로 왕자를 돌아오게 해야한다'고 눌지왕에게 아뢰었다.
하지만 박제상의 모책이라는 것은 그의 생명을 담보로 하는 것이었다. 그는 눌지왕에게 "신이 적국에 가면 청컨데 나라를 배반한 죄로 논의하여 저들이 듣게 하십시오"라며 비장한 각오를 드러냈다.
그가 떠나던 날, 아내는 배가 떠나는 포구까지 따라와 배웅하였다. 그리고 그에게 "잘 다녀 오십시오"라는 말을 하였지만 박제상은 "그대는 다시 만날 기약을 생각하지 마시오"라며 이것이 마지막임을 알렸다.
박제상의 아내는 떠나는 배를 바라보며 한없이 통곡하였지만, 이미 배는 왜국으로 향하고 있었다.
조국을 위해 오명(汚名)을 뒤집어 쓰다.
박제상이 예상대로 일본에서는 신라와 고구려에 대한 반감이 극에 달해 있었다. 또 왜국은 백제로부터 신라와 고구려가 연합하여 그들을 치려는 계획을 하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먼저 신라를 공격할 모의를 하고 있었다.
박제상은 이러한 왜국의 반신라 정서를 역이용할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박제상은 스스로 배반자라는 오명을 뒤집어 쓰고, 그것을 일본에게 믿게 하기 위해 자신의 가족은 물론 미사흔의 가족역시 옥에 가두도록 하는 조치를 취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왜국은 박제상과 미사흔이 신라를 배신하였다고 굳게 믿게 되었으며, 이들을 신라공격의 길잡이로 이용하려 하였다. 왜국의 신라공격 계획을 역이용하여 서기 418년 미사흔을 어떻게 왜병의 진영에서 탈출시키냐는 문제가 남았다. 더욱이 왜병 장수들은 신라를 없앤 후에는 박제상과 미사흔의 처자식을 잡아 그들이 딴 마음을 먹지 못하도록 하겠다는 모략을 꾸미고 있었다. 그야말로 왜인의 모략과 박제상의 지략이 맞서게 되는 상황이었지만, 박제상은 왜인들이 음모를 꾸미고 있다는 사실을 먼저 간파한 후 기민하게 대처하였다.
먼저 박제상은 미사흔과 뱃놀이를 하면서 오리나 고기를 잡는 등 왜인들을 방심하도록 만들었다. 그리고 미사흔으로 하여금 뱃놀이를 하는 척 하면서 신라진영으로 돌아가도록 하였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홀로 남겨질 박제상의 운명은 어떻게 되겠는가... 박제상을 아버지처럼 따르던 미사흔은 차마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박제상은 두 사람이 함께 떠나면 의심을 살 수 있기때문에 어쩔 수 없다고 설득하였다. 그러자 미사흔도 박제상의 의견을 받아들이고 목을 안고 울며 작별인사를 나누었다.
미사흔이 떠난 것을 확인한 박제상은, 느긋하게 실내에서 늦잠을 자는 대담함을 보였다. 매일같이 일찍 일어나던 박제상이 그 날따라 늦잠을 자자, 왜병장수들도 의심하였지만 '어제 늦도록 배를 타서 피곤하여, 일찍 일어 날 수 없었다.'며 태연스럽게 시간을 벌어주었다.
그리고 미사흔이 도주하였다는 것을 알았을 때는 이미 늦었다. 왜병들은 박제상을 결박하여 왜왕에게 돌려보냈지만, 자신을 속인 것에 화가난 왜왕은 박제상을 즉각 목도라는 곳으로 귀양보냈다.
하지만 왜왕의 복수심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왜왕은 사람들을 시켜 박제상을 화형시켰고, 그것도 모자라 불에 탄 시신의 목을 베었다.
그렇게 박제상은 두 왕자를 모두 무사귀국시켰지만, 자신은 타국에서 객사하고 말았던 것이다. 그 소식을 들은 눌지왕은 그를 대아찬으로 추증하고, 부인을 국대부인(國大夫人)으로 책봉하였으며, 박제상의 둘째딸을 미사흔의 아내로 삼게 하는 조치를 취하였다.
그러나 눌지왕의 조치는 다소 미흡한 면이 없지 않다. 신라의 국력이 극도로 약화되었다는 점을 고려한다 해도, 적어도 왜국에게 강력한 항의 정도는 했어야 되지 않았을까란 생각을 해 본다.
첫댓글 조국을 위해서 목숨을 아끼지 않고 행한 거룩한 마음
역사에 길이 남아서 역사의 참 교육으로도 중요하고
본 받아야 점이 많은것 같네요.
조국을 위해 오명(汚名)을 뒤집어 쓰다는 것이 누구나
할 수 없는일이 아닌가. 참으로 신라의 영원한 충절 박제상 선생이 아니런지요..
지금도 이런 충절 스런 애국자가 있어으면 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