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찾았다! 요놈!
우리의 대적은 무엇일까? 우리에게 정말 두려운 대상은 무엇일까? 어른들은 말했다. 귀신이 무서운 것이 아니라 사람이 무서운 것이라고. 사람이 왜 무서운가? 강아지는 무섭지 않다. 애완견에 물려 죽은 사람도 있기는 하다. 그런데 내가 기르는 푸들이 어느 날 돌변하여 나를 죽일 것이라고 나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사람은 다르다. 어느 날 특별한 상황이 생기면 사람은 나를 죽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일단 사람을 의심하기 시작하면 우리는 그 사람에게 피해를 입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그것은 본능이다. 일단 거리를 둔다. 그리고 그 사람에 대하여 나쁜 생각을 반복한다. 그 사람을 피하여 달아날 궁리를 한다. 적어도 그 사람에게 버림을 받아 상처를 받지는 말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를 제압할 힘이나 권세나 지위를 확보하지 못했을 경우에는 그렇게 하는 것이 상책이다. 36계는 달아나는 것이라고 한다. 찾아보니 정말 그렇다. 손자병법의 36번째 계책은 주위상(走爲上)이다. 상대가 너무 강하기 때문에 달아나는 것이 상책이라는 말이다.
손자병법은 전쟁의 상황에서 생존을 위한 길을 찾고자 꾀를 모은 것이다. 그 대전제는 이 세상이 전장이며 그 싸움에서 지는 사람은 희생물이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인류는 언제나 싸우기만 하는 존재는 아니다. 인류는 평화와 공존을 추구한다. 그러나 인류는 서로를 의심하고 살아남기 위해서 상대보다 더 강한 무기를 가지려고 애쓰면서 살아왔다. 더 유리한 곳을 차지하는 것이 더 안전한 길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종교는 끊임없는 전쟁 속에서 탄생했다고 한다. 그래서 종교의 가르침은 자비와 진실로 압축된다. 자비는 인도에서 아힘사라는 정신으로 나타났다. 이 말은 모든 살아 있는 것을 살생하지 말라는 것이다. 유대교에서 예언자들은 제사보다 자비를 원하시는 하나님을 선포했다. 그 메시지는 바로 아힘사의 정신과 상통한다. 상대방을 열등한 존재로 상정하거나 또는 우리 공동체에 해를 입힐 대상으로 여기기 시작하면 거기서부터 거리두기라는 배척이 일어나고 미워하는 혐오가 발생하며 더 나아가서는 그들을 격리하고 나중에는 제거하는 정책을 펼치게 된다. 그리고 그 끝은 파멸이다.
이번 파리올림픽의 개막식은 여러 면에서 파격이었다. 그 중에 마리 앙투아네트가 자신의 머리를 들고 창가에서 노래를 부르는 모습은 상당히 충격적이었다. 올림픽 개막식을 기획한 사람들은 그 장면을 통해서 어떤 메시지를 전하려는 것이었을까? 프랑스인들은 삼색기의 국민이다. 그 삼색은 파랑색과 흰색, 그리고 붉은색이다. 자유와 평등, 그리고 우애(박애)를 나타낸다고 한다. 프랑스인들은 이 세 가지 정신을 다음과 같이 규정했다:
"자유는 타인에게 해롭지 않은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속인적 권리이다. 그것은 자연을 원칙으로, 정의를 규칙으로, 법을 방벽으로 한다."
"평등이란, 보호를 제공함에 있어서도 처벌을 가함에 있어서도 법은 모든 인간에 대해 동일하다는 것이다. 출생에 의한 어떠한 차별도 권력의 어떠한 세습도 허용되지 아니한다."
"자유와 평등이 권리로 받아들여질 수 있는 반면 우애(박애)는 사람들 각자가 다른 사람들에 대하여 부담하는 의무이다. 따라서 이것은 윤리적인 슬로건이다."
프랑스인들은 군주제를 공화제로 바꾸는 과정에서 많은 희생과 혼란을 거쳤다. 그처럼 시대의 전환기에 상징적인 인물이 마리 앙투아네트였다. 우리나라가 1980년대 군부독재를 청산하는 과정에서 광주시민들의 희생을 기리는 것과 유사한 것은 아닐까 생각해 본다.
군주정이나 독재정을 민주정으로 바꾸면 나라가 새롭게 되는가? 완벽하지는 않더라도 더 나은 모습이라고 기대하기에 민주주의의 가치를 헌법 전문에 수록한 것이 아닐까? 다만 현재의 민주주의는 어떤 모습인가 반성해 볼 필요가 있다. 군주제의 사회에서는 시민들의 자유와 평등이 더 많이 억압되었다. 연대를 위한 시민의식도 뚜렷하게 드러나지 않았다. 그 시절에 비하면 이 세 가지 영역에서 많이 발전한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우리는 현재의 상태에 만족할 수 없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현재의 정치제도와 시대정신을 개선해 나갈 수 있을까? 나는 프랑스 혁명 이후로 전세계에 퍼진 자유와 평등과 우애의 삼각기둥이 어떤 기초 위에 세워져 있는지 생각해 본다. 그것은 사회계약이며 법이다. 우애나 박애도 사실은 사회계약을 맺은 당사자에게 요구되는 윤리적 의무다. 그것은 인간이 맺은 계약이 가장 중요하고 모든 것의 기초가 된다는 이성적 판단에 근거한다.
하지만 인간은 때때로 부패하고 어리석다. 그래서 개인보다는 집단의 판단과 상호견제를 통해서 우리의 체제를 유지하려는 것이다. 그것이 공화정이다. 그런데 그 집단에 속한 사람들이 서로를 어떻게 생각하는 것이 중요하다. 어떨 때 우리는 서로를 공동체의 일원으로 생각한다. 때로는 집단 안에서 우리는 서로를 경쟁자로 생각한다. 상황에 따라서 우리는 이렇게 공동체 안에 있는 사람에 대하여 달리 평가한다. 그리고 우애와 연대의식이 약해지면 공동체는 급격하게 불안해진다.
230년 전에 일어난 혁명의 결과로 민주공화정이 도입되었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인간이 이 땅에서 살아오면서 사회를 형성하고 사회를 운영하는 방식을 다양하게 도입했다. 그렇게 보면 왕정은 훨씬 오래된 운영체제라고 할 수 있다. 엄밀하게 말하면 그 어떤 사회도 순수하게 공화정으로만 운영될 수 없다. 거기에는 관례와 전통이 있고 장유의 구분과 소수자에 대한 배려가 필수적이다.
인간은 필요에 의하여 혁명을 하기도 하고 전에 채용하여 운영했던 제도를 다시 받아들이기도 한다. 거기에도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앞으로도 인간이 살아가는 사회에는 현재와는 다른 정치제도가 얼마든지 출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변화를 일으키는 원인은 과학기술의 발전이나 아니면 지구적 대격변과 같은 위기상황이 될 수도 있다.
그런데 어느 시대나 어떤 체제 속에서나 반드시 필요한 정신이 있다. 그것은 사람을 소중하게 생각하고 존중하는 마음과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이 우리에게 주어진 소중한 터전이며 우리는 이 터전을 가꾸고 돌보아야 하는 임무를 받았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이런 정신은 어디에서 올까? 이성을 추앙하는 사람들은 그것이 진화의 결과라고 설명할 것이다. 그런데 신앙을 높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그것이 인간에게 부여된 신의 계획이며 섭리라고 할 것이다.
프랑스 혁명이 일어나던 시기에 많은 성직자들이 죽임을 당하거나 도피를 해야 했다면 그 이유는 그들이 권력자들과 결탁하여 하나님의 뜻을 저버렸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성직자들의 불의를 척결하면서 하나님마저 공동체에서 몰아내버리면 사회를 세우는 근본이 되는 터를 약하게 만드는 셈이 된다. 오늘날 파리에서 치안을 우려하는 이유는 자유와 평등과 우애를 기치로 내건 사회에 무언가가 결핍되었음을 보여준다.
인간에 대한 신뢰를 잃어버린 사회에서는 더 많이 검문하고 의심이 일상화된다. 그 신뢰를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우리는 이렇게 서로를 모르며 두려워하며 다가가지 않으려 하는데… 최근에 나를 두렵게 하는 원수를 마침내 찾았다! 그 원수는 사람에 대한 의심과 속단이다. 우리는 함께 선한 뜻을 이루어갈 형제요 동역자이며 친구라는 사실을 나는 잊고 있었다. 그는 나에게 고마운 사람이며 나는 그의 성공을 바라고 우리가 함께하는 이 모든 시간은 은총이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