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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11;19-30.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하니라. 2026. 10. 4.
1. 오늘 본문은 1-18절까지의 내용이 전재로 합니다. 이 내용은 10장에 있는 말씀을 요약한 내용이며 이 내용에 이어서 베드로가 사도들을 설득하는 장면이고 이어서 안디옥 교회의 탄생을 말씀합니다. 어떻게 안디옥 교회가 탄생을 하게 되고 어떻게 안디옥 교회가 초대교회의 부흥을 보여 주었는가? 11;1-18의 부분의 베드로의 설득입니다. 어디에서 누구를 향한 설득이고 누구를 위하여 설득을 하게 됩니까? 예루살렘에서 베드로가 설득을 합니다. 내용은 10장에 나오는 고넬료의 집과 욥바에서의 사건이었으며 무대는 예루살렘입니다. 왜 10장의 내용을 반복하여 이야기합니까? 반복해야 될 필요 때문인데 그 필요는 이방인에게 나타난 복음의 수용입니다. 행11:1 유대에 있는 사도들과 형제들이 이방인들도 하나님 말씀을 받았다 함을 들었더니. 이방인들이 하나님의 말씀과 복음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런데 예루살렘의 형제들과 사도들이 기뻐하지 않았습니다. 벗어나지 못하는 어떤 규범과 틀 때문이었습니다. 유대인과 이방인의 구별이었고 헤브라이즘과 헬레니즘의 영향입니다. 여러분, 한 하나님을 믿고 한 주님을 섬기면서도 유대인과 이방인의 구별이 있었습니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요? 주님의 행하신 일과 하실 일에 대하여 전적인 믿음이 없었기 때문인데, 이 것 때문에 복음의 무한한 능력이 제한되었습니다. 유대인들의 신앙의 관습이고 습관이고 의식이었습니다. 구별을 원하고 하나 됨을 원치 않았습니다. 그러면 편견의 틀과 구별 앞에서 어떻게 해야 합니까? 무엇보다도 의문을 갖는 신앙인에게 설명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신앙인이 아니면 설명을 해도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누가 하나요? 설명하려는 당사자가 신앙에 대한 체험이 된 사람입니다. 무슨 체험입니까? 성령의 위대한 체험입니다. 욥바에 있는 베드로는 10;20절에 의심치 말고 함께 가라는 성령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11;12절에서 처음 성령의 역사를 경험 했던 베드로는 또 다시 예루살렘의 사도들에게 그 때의 체험을 이야기 합니다. 성령이 내게 명하사 아무 의심도 말고, 함께 가라. 그런데 10;20절의 의심하지 말라는 표현의 원어의 뜻은 힐난하다는 의미 입니다. 11:2 베드로가 예루살렘에 올라갔을 때에 할례자들이 힐난하여. 비난했습니다. 베드로에게 망설이지 말고, 구별하지 말고, 차별하지 말고 함께 가라는 성령의 음성을 듣고 체험했던 베드로가 예루살렘에서 같은 믿음과 같은 생각과 같은 삶을 살아가는 유대인들로부터 힐난을 받았습니다. 할례를 받은 유대인과 이방인의 구분은 할례이었습니다. 할례가 무엇입니까? 아들이 태어난 지 8일 만에 표피를 제거하는 행위입니다. 양피를 벗기는 것으로 세례입니다. 예수를 믿는 유대인들은 할례 문제로 이방인을 차별했고, 베드로를 차별했으며 힐난하고 논쟁을 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고넬료의 집에 가서 숙식을 함께 한 내용과 성령의 역사를 간증하는데 어떻게 될까요? 사실 베드로는 얼마 전까지 머뭇거리고, 이방인과 히브리인들 간에 차별을 두었습니다. 오늘 예루살렘의 사도들과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은 성령의 음성을 듣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이전의 자신을 생각하여 유대인 형제들의 어려움을 덜어주기 위해서 자신의 경험을 말하고 간증을 합니다. 그 내용은 베드로가 고넬료에게 전하고자 했던 그 이야기와 마음에 있는 말을 시작하기 전에 성령께서 듣는 사람들에게 임하셨다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오늘 함께 오순절 성령의 은혜를 받았던 사도들과 신앙인들의 편견과 차별과 구별에 대하여 베드로는 17절에서 내가 누구인대 하나님의 능력을 막겠느냐? 여러분, 이 물음 속에 모든 문제가 다 요약이 되어 있습니다. 여러분, 편견과 이해 못함과 단정들이 얼마나 무섭고 얼마나 위험합니까? 일어나서 다시 시작하려는 사람에게 얼마나 아픔을 갖게 하는 요소입니까? 가장 무서운 것은 분열이 아니라, 나에게 다가오는 복을 받아 누리지 못하게 하는 결과가 되는 구분과 힐난입니다. 분열은 두 번째입니다. 편견과 이해 못함과 받아들이지 못 하는 것과 자기 고집대로 하는 것은 나를 통해서 역사하실 그 놀라운 사실을 그르치게 하고 passing케 하고, 성령의 지시하심을 읽어내지 못하게 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강한 어조로 이 틀과 규범을 깨트렸습니다. 이것은 새로운 시대와 초대교회가 세상과 이방인에게 다가가는 과정에서 피할 수 없는 질문이었고 현실이었습니다. 여러분, 편견은 쉽게 해결하지 못합니다. 아브라함 때부터 지켜온 율법을 누가 깨뜨릴 수 있습니까? 전통을 깨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모세의 율법을 버리지 못하는 사람들이 베드로를 비난했습니다. 행11:3 가로되 네가 무 할례 자의 집에 들어가 함께 먹었다 하니. 먹는 문제로 베드로를 비난합니다. 이방인에게 설교하는 것은 문제 삼지 않았지만 그들과 함께 먹는 것을 비난했습니다. 여러분, 유대 사회에서 식탁을 나누는 것은 아주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눅15장에서 너희가 죄인들과 함께 먹는다고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과 제자들을 정죄했습니다. 그런데 함께 먹는 것은 상대를 받아들이고 교제한다는 의미입니다. 먹는 것도 잘 먹어야 하지만 누구와 먹느냐? 중요합니다. 성결의 율법을 무시하면서까지 식탁을 나눈 것이 힐난을 받고 비난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4-17절로 확고한 설명을 하는데, 베드로가 본 환상의 의미를 스스로 더 확고하게 했고 듣는 동료들에게는 확신을 주었습니다. 성령의 역사에 대한 설명과 간증으로 사도들이 복음을 받아들였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역사 안에서 자유 함과 담대함을 가지면 본성적인 것이 드러나지 않습니다. 성령의 역사를 알지 못하고 성령의 감화와 감동이 없는 사람들은 자신의 어떤 틀에 갇혀있습니다. 문제는 이것이 극복되지 않으면 신앙인으로서 자유를 누리지 못합니다. 11:17 그런즉 하나님이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에 주신 것과 같은 선물을 저희에게도 주셨으니 내가 누구관대 하나님을 능히 막겠느냐 하더라. 율법이 아니라 은혜를 강조합니다. 누가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막겠습니까? 편견을 깨야 하고, 어떤 의도를 갖지 않아야 합니다. 성령이 역사를 받아들이고 인정할 수 있는 선한 양심이어야 합니다. 때를 따라 돕고 누리게 하시는 성령의 역사를 수용해야 위대한 일을 하고, 새로운 일에 확신이 생깁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능력을 제일 우선하시는 하는 그래서 시대와 환경과 여건을 읽어내시는 믿음과 신앙의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2. 크고 놀라운 일과 지경을 확장시키는 사역 앞에 항상 예기치 않은 문제가 있습니다. 차별과 구별의 문제이었지만 베드로의 설득 때문에 차별과 구별이 중단이 되고 보다 폭 넓은 사역을 감당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의문은 갖고 시작을 했지만 지혜와 은혜가 예루살렘의 형제들에게 나타났습니다. 18, 저희가 이 말을 듣고 잠잠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가로되. 하나님께서 이방인에게도 생명을 얻는 회개를 주셨도다. 사도들에게 주셨던 것처럼 이방인들에게도 주셨다는 내용을 받아드리고, 오히려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이것 또한 성령의 역사입니다. 수용하므로 신앙 양심이 주어지고 보다 폭 넓은 사역으로 방향 전환을 합니다. 그런데 17절, 18절에 성령의 임함과 함께 생명을 얻는 회개가 묶여 있습니다. 성령의 임재는 생명을 얻는 회개가 함께 있습니다. 성령이 임했다면 어떻게 회개를 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 성령의 은사에 당연히 회개를 동반합니다. 오직 주님만이 나의 구세주인 것을 믿고 주님이 하실 일과 주실 일과 만드실 일을 받아들이는 것이 회개로 부터 시작이 됩니다. 여러분, 위대한 꿈이 있고 그 꿈을 이루기 위한 road map이 있습니까? 폭넓은 지경을 원하십니까? 먼저는 예기치 않는 차별과 문제 앞에 당당하시고 회개와 함께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시면 새로운 사역이 드러나고 폭 넓은 사역이 되도록 길이 열려집니다. 그렇기 때문에 무엇이든지 가장 중요한 전환점입니다. 본문의 말씀은 초대교회의 새로운 역사이고 시대의 전환점입니다. 여러분, 성령의 역사는 18절에서 멈추지 않고 더 큰 방향으로 나아가는데 4가지로 나타납니다, 19-21절은 새로 일어난 기독교 운동의 발단이고, 22-24절은 이 운동을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들과 교회의 동의를 얻습니다. 25-26은 시작된 운동을 더욱 굳게 다지는 역사이고 27-30. 먼저 된 사람들과 나중 된 사람들의 연합과 협력입니다. 발단과 동의와 터전과 협력인데 이 내용이 무슨 의미입니까?
2-1. 새로 일어난 운동의 발단은 전환입니다. 스데반의 순교로 인한 핍박으로 인하여 흩어진 성도들이 주로 유대인들에게만 복음을 전했습니다. 19절, 때에 스데반의 일로 일어난 환난을 인하여 흩어진 자들이 베니게와 구브로와 안디옥까지 이르러 도를 유대인에게만 전하는데. 환난 때문에 도망을 갔고 흩어졌는데 이것이 새로운 역사의 시작이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알지 못하는 방법으로 일을 하실 때가 있고, 알게 하실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백성에게 알리지 않고는 일하심이 없습니다. 이렇게 흩어진 디아스포라 된 사람들을 통해서 일을 하시는데 처음에는 모르지만 나중에 알게 됩니다. 왜 모를까요? 자기의 틀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틀 안에서는 성령의 음성을 들을 수가 없기 때문에 모릅니다. 환난 때문에 흩어진 자들이라는 표현이 새로운 시작이었습니다. 베니게와 구브로와 안디옥까지 이르러 전하는데. 초기의 제자들의 증거의 방법은 다양했습니다. 담화와 일상적인 대담과 여행하는 사람들 간의 대화입니다. 복음을 전하는데 대화와 이야기입니다. 여러분, 설교는 다른 것이 아닙니다. 삶이고 이야기입니다. 나눔 속에 설교가 있고 주님의 뜻이 있습니다. 지금까지는 유대인에게만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러나 환난 때문에 흩어진 사람들이 복음과 씨앗을 뿌렸습니다. 20절에 그 중에 구브로와 구레네 몇 사람이 안디옥에 이르러 헬라인에게도 말하여 주 예수를 전파하니. 여러분, 여기서 19절의 전하는데 와 20절의 전파하니 가 다른 표현입니다. 전하는 데에서 뉴앙겔리죠로 발전을 합니다. 뉴앙겔리죠는 선포입니다. 복음의 명백한 선포입니다. 주 예수를 전파한 것이 새로운 시작이었습니다. 전에는 변론과 설명을 했습니다. 스데반이 유대인과 변론을 했습니다. 사울이 유대인과 변론을 하다가 다소로 갔습니다. 그런데 구브로와 구레네 몇 사람이 안디옥에서 유대인과 헬라인에게 그리고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했는데, 뉴앙겔리죠입니다. 선포로 복음을 전파했습니다. 믿든지 안 믿든지, 듣든지 안 듣든지? 선포를 했습니다. 여러분, 복음과 뉴앙겔리죠는 설득이 아닙니다. 받아들이면 복음이고, 안 받아 들이면 그 사람 몫입니다. 그래서 어느 때는 강하게 복음으로 권면을 하고 선포할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듣는 사람의 입장에서 아파도 받아들이면 성령께서 역사하셔서 그 방향으로 끌고 가고 안 받아들이면 거기서 멈추게 됩니다. 그 도시가 안디옥 입니다. 왜 안디옥일까요? 여러분, 로마제국의 3대 도시가 로마와 북아프리카의 알렉산드리아와 안디옥 입니다. 안디옥은 부유하고 웅장한 도시이었습니다. 알렉산드리아 다음가는 도시로 아시아의 심장부입니다. 그래서 로마의 총독과 공관이 있었고, 많은 유대인이 거주했습니다. 헬라 문명과 문화가 발달한 도시로 다프네의 신전이 있고, 이방 종교가 성행한 곳입니다. 매우 장엄하고 쭉 뻗은 도로가 4마일 이상 되는 계획된 도시이었습니다. 바로 이 대 도시에 구브로와 구레네 몇 사람이 복음을 전파했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경륜입니다. 왜냐하면 당시의 안디옥은 로마나 알렉산드리아보다도 로마 세계의 중심지로서 훨씬 더 긴요한 곳이고, 율법적인 헤브라이즘의 사상으로부터 자유로운 도시이었기 때문입니다. 복음전파의 전략적인 요충지와 적합한 도시이었습니다. 여기에 더 중요한 것은 사도들이 전한 것이 아닙니다. 안디옥에서 최초로 복음을 전파한 것은 성령님께서 선택하신 무명의 구브로와 구레네 사람 몇 명이었습니다. 무슨 의미입니까? 모든 형식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새로운 방법으로의 역사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무명의 개척자들이 장엄하고 관능적인 도시인 안디옥에 이르러 다른 사람들과 상의하지 않고 의논하지 않고 유대인에게만 아니라, 헬라인에게도 복음을 전했습니다. 21절에 주의 손이 그들과 함께 하시매 수다한 사람이 믿고 주께 돌아오더라. 주의 손이 그들과 함께했고, 수다한 사람이 믿고 주께 돌아오는 역사가 나타났습니다. 성도 여러분, 모든 역사는 사람이 하는 것처럼 보이나 실제적인 역사는 하나님이 주도하십니다. 전하는 자가 있어야 하지만 하나님이 언제나 역사하시고 주도하십니다. 이런 역사가 여러분의 삶의 현장에 나타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2-2. 새 운동을 예루살렘 교회의 동의를 받았다는 사실입니다. 여러분, 동의와 이해가 중요합니다. 이미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들은 베드로의 설명을 듣고 이방인에 대한 편견을 버렸습니다. 그러면 동의하고 이해하면 대안이 있어야 하잖아요? 어떤 사람과 어떤 지도자를 보내야 될까요? 바나바를 보냅니다. 22-24, 예루살렘 교회가 이 사람들의 소문을 듣고 바나바를 안디옥까지 보내니 저가 이르러 하나님의 은혜를 보고 기뻐하여 모든 사람에게 굳은 마음으로 주께 붙어 있으라 권하니 바나바는 착한 사람이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자라 이에 큰 무리가 주께 더하더라. 예루살렘 교회가 바나바를 파송합니다. 바나바는 사도가 아닙니다. 왜 바나바를 보냈을까요? 무엇보다도 바나바는 구브로 사람입니다. 행4;36절을 보면 바나바는 구브로에서 태어났고 이미 검증을 받은 사람입니다. 얼마나 세밀합니까? 여러분, 능력만 있다고 되는 것이 아니고, 영향력이 있느냐? 새로운 세계에 대한 비전이 있느냐? 이것이 중요합니다. 여러분,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여러 가지를 참조합니다. 사람을 세우는 것과 사람을 보내는 것은 영적인 안목에서 보내고 파송을 해야 합니다. 지금 안디옥에 복음을 전파하는 사람이 구브로 사람과 그레네 사람 몇 명입니다. 같은 맥락에서 복음을 전하도록 했습니다. 적절한 인물을 파송했습니다. 그런데 바나바가 안디옥에 도착하여 복음을 받아들인 사람들을 보니까? 성령의 역사하심을 바나바가 보았습니다. 어떻게 하나님의 은혜를 보았을까요? 바나바 자신이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었고, 착한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착함은 신실하고 진정성입니다. 그래서 은혜를 봅니다. 여러분, 어떤 사람이 은혜를 은혜로 받아드리고, 어떤 사람이 맡겨진 일에 충성을 할까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착한 사람입니다. 양의 모습으로 죽을 수 있는 선한 사람, 예수님이 있는 사람입니다. 지금의 안디옥 상황은 바울이 에베소를 방문했을 때와 다릅니다. 바울은 에베소 성도들을 보았을 때 하나님의 은혜를 볼 수 없었습니다.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보았느냐? 그런데 바나바가 안디옥에 서 기쁨과 즐거움이 넘치는 하나님의 은혜를 보았습니다. 새로운 분위기가 되었고, 주님의 성령이 임재 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바나바가 안디옥에서 변화를 이끌어 냈을까요?
2-3. 터전인데 먼저는 권면입니다. 바나바는 사도적인 권위로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단장취의(斷章取義)라는 말이 있습니다. 앞뒤 다 잘라버리고 필요한 부분만 취해서 비난에 사용한다는 표현입니다. 바나바는 이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파라 클레토스, 권면과 안타까움 입니다. 여러분, 사도들이 왜 요셉이라는 사람을 바나바라고 불렀을까요? 바나바는 위로의 아들, 권면하는 사람이란 뜻입니다. 모든 사람에게 가르치지 않았고 권면과 함께 섬겼습니다. 모든 사람에게 주께 붙어 있으라. 주님께 붙어있는 것이 복과 문제 해결이라고 사랑으로 권면했습니다. 여러분, 하나가 되고 새로운 분위기가 되는 것은 먼저 된 사람과 앞선 사람이 권면을 해야 합니다. 주장과 가르침이 아니고 하나님의 은혜가 넘치게 해야 합니다. 이것은 예루살렘 교회와 안디옥이 같습니다. 영적인 단일성은 변함이 없습니다. 바나바를 통해서 예루살렘과 안디옥이 하나로 연결되었습니다. 여러분, 위대한 꿈과 비전을 이루시기를 소원하시고 폭넓은 사역을 원하십니까? 그 것은 오직 예수입니다. 사도행전의 시작과 끝이 오직입니다. 오직 예수님으로 복음을 붙잡고 오직 기도 속에 있던 초대교회의 성도들처럼 오직 기도로 승리하고 오직 성령 충만의 놀라운 역사를 오직 경험하는 것입니다. 위대한 비전을 가지고 출발한 신앙인의 가는 길에 어려움과 수많은 환란과 멸시와 깜깜함이 있으나, 그 속에서도 그리스도의 영광을 바라보며 가야하는 것이 언약의 여정입니다. 바울의 마지막 종착역은 로마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신앙인으로 열심을 다했으면 이제는 정교하게 다듬어 완성하는 시간표입니다. 오직에만 집중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2-4. 터전인데 가르침과 함께 그리스도인이라는 삶이 드러나야 합니다. 바나바를 통해서 어떤 결과가 주어지나요? 가르침이 있습니다. 그런데 가르침을 바나바가 하지 않았습니다. 바나바가 어떻게 합니까? 성령이 충만한 7사람을 뽑았습니다. 성품과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입니다. 안디옥에 있는 구브로와 구레네 몇사람과 동행하게 된 바나바가 많은 이방인들이 포함된 교회를 세웠습니다. 하나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있고, 주께 붙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안디옥에 온 바나바는 진심과 주님의 심장을 가지고 이끌고, 맡을 수 있는 사람을 필요로 했습니다. 바나바는 바울이 적격자라고 생각을 하고 바울이 있는 다소로 갔습니다. 11:25 바나바가 사울을 찾으러 다소에 가서, 26 만나매 안디옥에 데리고 와서 둘이 교회에 일 년간 모여 있어 큰 무리를 가르쳤고 제자들이 비로소 안디옥에서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더라. 그런데 찾으러 간다는 뜻은 뒤져낸다는 hunt up입니다. 사울은 쫓겨서 고향인 다소로 왔지만 다소에서 다시 새로운 길을 모색하지만 막연하게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바나바가 다소의 사울을 찾아 왔습니다. 왜요? 안디옥에서의 사역이 동역하는 사람 없이는 어렵다는 사실과 복음적인 가르침의 필요함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다소의 사울을 안디옥으로 모시고 와서 1년 동안 함께 안디옥의 사람들을 가르쳤는데, 이방인들이 그리스도인들이 되었습니다. 비로소 그리스도인으로 불렸지만 유대교로부터 핍박을 받았습니다. 여러분, 그리스도인을 어떻게 생각합니까? 신앙과 삶을 보고 다른 사람이 나를 신앙인이라고 하는가? 떠들고 말하는 것이 아니고 사람들이 보고 불렀습니다. 유대인들이 붙여준 호칭이 아니고, 스스로 부른 것이 아닙니다. 이방인과 안디옥의 사람들이 붙여준 이름입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까요? 주님의 작정과 섭리 때문이고, 두 번째는 예루살렘의 사도들이 가장 적합한 인물을 안디옥으로 보냈기 때문이고, 세 번째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나바가 다소에 가서 바울을 모셔왔기 때문입니다. 개인을 위해서가 아니고, 안디옥의 유대인과 헬라인들과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그렇습니다. 구브로와 구레네 몇 사람이 시작한 복음이 열매를 맺기까지의 바나바와 바울의 수고가 있었습니다.
2-5. 협력과 연합의 동역입니다. 예루살렘에 사도들이나 선지가가 없었습니까? 11:27 그 때에 선지자들이 예루살렘에서 안디옥에 이르니. 당시에도 선지자들이 있었습니다. 선지자들이 예루살렘에서 안디옥으로 왔습니다. 왜 왔습니까? 가르치기 위해서 내려왔는데 그 중에 한 사람이 11:28 그 중에 아가보라 하는 한 사람이 일어나 성령으로 말하되 천하가 크게 흉년 들리라 하더니 글라우디오 때에 그렇게 되니라. 아가보라는 사람이 예언을 했는데 무슨 말씀입니까? 교회의 일체와 하나입니다. 아가보가 큰 기근을 예언을 합니다. 안디옥의 그리스도인들은 이 사실을 받아들이고 이 예언 때문에 유대에 있는 형제들이 받을 큰 고통을 생각하고 공유를 하고, 돌보기를 시작했습니다. 구제의 사역이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고 물질을 예루살렘 교회에 보내기로 작정을 합니다. 이 일을 가르치고 권면했던 두 사람, 바나바와 사울에게 위임을 합니다. 여러분, 얼마나 멋있습니까? 교회의 하나 됨이 아닙니까? 영적인 분별력과 은사를 공유했습니다. 예루살렘 교회가 안디옥 교회를 가르침으로써 영적인 은사와 은혜를 공유하는 일이 있게 되고 안디옥 교회는 거기에 반응하여 유대에 가난한 형제들을 돕기 위해 헌금을 사울과 바나바를 통해서 보냈습니다. 라이너 쿤체의 두 사람이라는 시입니다. 두 사람이 노를 젓는다. 한 척의 배를! 한 사람은 별을 알고 한 사람은 폭풍을 안다. 한 사람은 별을 통과해 배를 안내하고 한 사람은 폭풍을 통과해 배를 안내한다. 마침내 끝에 이르렀을 때 기억 속 바다는 언제나 파란색이리라. 주의 뜻에 협력하고 연합하며 살아가는 믿음의 여러분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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