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년 전 신학교에 가기 위해 입학원서를 작성한 적이 있습니다. 다른 것은 다 썼는데 한 가지를 못 쓰고 원서를 내러 갔습니다. 힘들었던 문제는‘신학교 입학동기’란을 채우는 것이었습니다. 원서를 내기 전 다시 곰곰이 생각해 보았지만, 특별히 이게‘답’이다할 만한 생각이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기도와 고민을 한 끝에 그 작은 칸에‘이끌림’이란 단어를 쓰고 아쉬운 마음으로 원서를 내고 온 기억이 납니다. 신부가 된지도 두 자리 숫자로 바뀐 지금 그때의 기억이 날 때마다 주님께 감사드리곤 합니다. 어린 나이에 그래도 괜찮은 답을 썼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에 가시어 복음을 선포하시며 호숫가에서 그물을 던지고 있는 시몬과 그의 동생 안드레아를 보시고“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하고 부르십니다.
그리고 좀 더 가시다가 제베대오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을 보시고도 같은 모양으로 부르셨습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부르신 네 명의 사도들이 얼마나 훌륭하게 복음을 선포하며 주님의 뒤를 따랐는지 알고 있습니다.
저는 복음에 등장인물로 예수님과 네 명의 제자들 그리고 남겨진 아버지와 삯꾼들이 있음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각기 어떤 역할을 하고 있는지 그 모습을 살피다가 이 인물들 속에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성취해야할 역할들이 전부 나타나 있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먼저 우리는 주님이신 그리스도의 말씀을 따라 제자로서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것이 결혼 성소건 성직∙수도 성소건 독신이건 상관없이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일입니다. 이들이 곧 주님의 뒤를 이어 사람 낚는 어부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엔 제베대오와 삯꾼처럼 떠나는 이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역할도 필요합니다. 그들을 위해 기도해 주고 어렵고 힘들 때마다 아무 조건 없이 품어 안아주는 가족들과 동료들이 있어야 합니다. 헤어지는 아픔과 슬픔을 묵묵히 견디어 내며 떠난 이를 위해 참아주며 삶의 자리를 지키는 이들 또한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예수님의 역할입니다. 복음을 실천에 옮길 수 있는 이를 발견하면 기꺼이 그에게“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라고 외칠 수 있는 사람으로 초대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 신앙인의 삶에는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세 가지의 역할이 모두 필요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역할을 해내야 합니다.
어느 피정 중에 떠오르는 해가 아름다워 무심코 바라본 적이 있습니다. 잠시 본 것뿐인데 고개를 돌려 숙소로 가려니 앞이 캄캄했습니다. 눈을 감고 있으면서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태양을 오랫동안 보면 앞을 볼 수 없듯이 하느님을 자주 바라보면 세상의 욕심이나 유혹들도 볼 수 없게 되겠구나, 혹 내가 세상의 유혹에 힘들어하는 것은 하느님을 자주 바라보지 않음을 뜻하는 것이었구나.’
내일은 우리의 고유 명절인 설날입니다. 새롭게 떠오르는 태양을 바라보며 다시 한번 오늘 복음의 세 가지 역할에 충실하겠다는 다짐과 주님을 자주 바라보겠다는 결심을 하는 시간이길 바랍니다.
ㅡ장광재 신부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