驟雨(취우)
허적(許積:1610~1680)
본관은 양천(陽川). 자는 여차(汝車), 호는 묵재(黙齋) · 휴옹(休翁).
조선후기 우의정, 좌의정, 영의정등을 역임한 문신으로 1671년 영의정이 되었으나, 이듬해 송시열의 논척을 받아 영중추부사로 전임되었다.
1674년(숙종 즉위년) 인선대비(仁宣大妃)가 죽어 복상(服喪) 문제가 다시 일어나자, 서인의 대공설(大功說: 9개월설)에 맞서 기년설을 주장하였다. 그 주장이 받아들여져 다시 영의정에 복직하고 남인이 집권하였다.
1678년 재정 고갈을 막기 위해 상평통보 주조와 통용을 건의하였다.
1680년 서자 허견(許堅0의 모역사건에 휘말려 사사(賜死) 되었다.
1689년 숙종이 그의 죽음이 무고임을 알고 무고한 서인 김익훈(金益勳)· 이사명(李師命)등을 죽이고, 관작을 추복 하였다.
사납게 바람이 소나기를 몰고 오더니
亂風驅驟雨 난풍구취우
앞기둥이 비바람에 흠뻑 젖었네
霑灑滿前楹 점쇄만전영
날리는 폭포처럼 처마아래로 쏟아지니
飛瀑緣簷下 비폭연첨하
여울처럼 섬돌을 둘러서 급하게 흘러가네
流湍遶砌橫 유단요체횡
이미 무더위도 씻어 사라지니
已滌炎威盡 이척염위진
시원하고 상쾌한 기운이 다시 돌아왔네
還多爽氣生 환다상기생
저녁이 되자 먹구름 걷히고
向夕陰雲捲 향석음운권
옷깃을 풀고 밝은 달과 마주하네
披襟對明月 피금대명월
*
무더위 속
매미 울음소리 지천인 8월 들머리에
충주 청룡사지(靑龍寺址)에 갔다
이곳에도 이런 깊은 골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산을 넘고
골짜기에는 여러 종교시설을 보았다.
전국 방방곡곡 神들이 숨바꼭질 하는 느낌이 들었다.
청룡사지는 고려시대 절터로 창건연대도 창건자도 모른다.
국보와 보물을 간직한 폐사지이다.
처음에 모르고 산으로 올라갔는데
그곳에는 근래에 창건한 청룡사가 있었다.
그곳에 비구니스님이 한 분이 계셨는데
청룡사지에 대해 물었더니, 상세하게 안내해 주셨다.
그곳에 임시로 지은 종각이 너무 허름해서
차후에 여력이 되면
종각을 지어주고 싶다고, 아내에게 말했더니,
아직 답이 없다. 못 들었는지, 아니면 모른 척하는지....
다시 내려와서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청룡사지로 갔다.
올라가는 길은 양탄자를 깔아놓은 것처럼
이끼가 길을 덮고 있었다.
정말, 마음이 묘해지고 경건한 마음이 들었다.
이곳에 온 목적은
국보 제197호인 보각국사탑(普覺國師塔)과
보물 제656호인 보각국사탑비(普覺國師塔碑)를 보기 위해 서다.
무엇보다 세련되게 새겨진 비문을 보고 경탄하면서도
탑비 아래 부분이 심하게 마모되고 떨어져 나간 것이 마음이 아팠다.
비석의 생명은 글자 한 자 한 자가 매우 중요하다.
저렇게 비바람에 방치한 것을 보면
너무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비문을 전부 해독할 실력은 없지만
비문을 세운 공덕주와
보각국사의 행적과 청룡사를 짐작할 수 있는 사격(寺格)이 대략 적혀 있었다.
내려오는 길에 이곳에서 젊은 시절
청룡사에서 수학했던, 허적(許積)의 묘가 있다.
찬란했던 청룡사도
조선말의 세도가 민대룡(閔大龍)이 소실의 무덤을 쓰기 위해
불을 질렀다는 이야기가 전해 온다.
공자가 판을 칠 때
부처님도 참으로 고생 많이 하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