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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라한(阿羅漢, pali. arhat, skt. arahan) >
나한상
아라한은 초기불교에서 득도한 비구를 일컬으며, 부파불교(小乘)에서는 수행자들,
즉 부파불교의 성문4과(聲聞四果) 가운데 최고의 계위인 아라한과를 득한 출가자를 일컫는 말이다.
이는 소승에서 성문승(聲聞乘) 가운데 최고의 이상상(理想像)이었다.
‘arahan’이란 말에서 ‘아(a)’는 없다는 부정사이고, ‘라한(rahan)’은 탐심(貪心)이란 말이다.
따라서 아라한은 탐심이 전혀 없다는 뜻이다.
보통 해탈(解脫)이라 하면 우리를 괴롭히는 번뇌를 벗어난 상태를 말한다.
번뇌가 없다는 것은 탐욕과 성냄과 삿된 견해인 어리석음(탐⋅진⋅치)으로부터 자유로운 것을 의미한다.
아라한은 모든 번뇌(탐ㆍ진ㆍ치)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운 의식세계를 갖춘 분이다.
부파불교 아비담마에 의하면, 아라한은 10가지 족쇄(結, saṃyojana)를
완전히 제거한 완벽한 성자이다.
10가지 족쇄란
①유신견(有身見, sakkāyadiṭṭhi),
②의심(vicikicchā), ③계금취견(戒禁取見, sīlabbataparāmāso),
④감각적 쾌락에 대한 욕망(貪心, kāmacchando),
⑤악의(惡意, 瞋心, byāpādo),
⑥색계에 대한 탐욕(rūparāgo, 존재에 대한 갈애),
⑦무색계에 대한 탐욕(arūparāgo), ⑧자만(自慢, māno),
⑨들뜸(掉擧, uddhaccaṃ), ⑩무명(無明, 癡心, avijjā) 등이다.
그런데 10가지 족쇄를 다르게 말하기도 한다.
➀유신견(有身見), ➁계금취견(戒禁取見), ➂의심, ➃감각적 욕망, ➄악의,
➅존재에 대한 갈애, ➆질투, ➇인색, ➈이기심, ➉무명을 말한다.
이러한 열 가지 족쇄를 벗어난 이상적인 인간상이 아라한의 모습이다.
소승과 대승을 가르는 수많은 지표가 있고, 분분한 논란이 있지만,
가장 눈에 띄는 차이는 두 유파가 내세우는 이상이 달랐다는 점이다.
소승은 아라한, 대승은 보살이 그들이 내세우는 이상상이었다.
아라한의 길은 자신의 깨달음을 먼저 성취한 다음 그를 통해 얻어진 지혜로써
뒤에 중생을 교화하는 길이요, 보살의 길은 중생을 위한 자비행을 먼저 한 다음
그를 통해 얻어진 공덕으로써 자신의 깨달음을 뒤에 추구하는 길이다.
따라서 아라한의 목표는 깨달음에 있다.
그래서 아라한(阿羅漢)의 원뜻은 불교에서 완전해진 사람, 위대한 사람이다.
본질에 대한 통찰을 얻어 열반(涅槃), 또는 깨달음에 이른 사람을 일컫는다.
보살(菩薩)은 6바라밀을 수행해 나가면서 한편으로 방편력과 지혜로
중생을 제도한다. 위로는 부처의 깨달음을 추구하면서[상구보리(上求菩提)],
아래로는 중생들을 교화해 깨달음의 길로 나아가게 하는[하화중생(下化衆生)] 역할을 하는
일종의 중간자적 입장이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대승경전에는 무수한 보살들이 등장한다.
보살(菩薩, Bodhi-sattva)은 보리살타(菩提薩陀)의 준말로서,
보디 (Bodhi)와 사트바(sattva)의 두 단어가 합쳐진 합성어이다.
보디(Bodhi)는 보리(菩提) 즉 깨달음을 의미하며, 사트바(sattva-살타)는 유정(有情, 생명체)이란 뜻이다.
부처가 되기 위해 수행하는 사람, 또는 여러 생을 거치며 선업을 닦아
높은 깨달음의 경지에 다다른 위대한 사람이란 뜻이다.
보살은 대승의 최고 인격형을 가리킨 말이지만 아직 깨닫지 못한 경지에
이른 사람이다. 다만 보살로서 깨달음까지 이루어 부처가 될 경지에
거의 이른 분은 보살마하살(菩薩摩訶薩)로서 구분했다.
원래 초기불교에서는 여래의 10가지 명호인 여래10호(如來十號) 가운데 하나로
부처의 지위를 증득한 유정(有情), 즉 부처 또는 여래를 가리키는 호칭이었다.
이후 부파불교 시대에서는 고타마 붓다에 대한 존경이 커져서
불타를 신격화하는 경향이 강해져서 불타(佛陀)는 과거 수백천생(數百千生)의 장기간에 걸쳐서
갖가지 이타(利他)의 선행을 해온 특별한 인격이며,
석존(釋尊) 혼자만이 불타로 될 수 있는 것으로서 제자들은
이 인격완성자로서의 불타의 가르침을 듣고(聲聞) 그에 따라서 수행함으로써
성문으로서의 최고위인 아라한으로 될 수 있지만 불타는 될 수 없다고 했다.
그리하여 붓다와 수행자로서의 아라한과는 구분하게 됐고,
성문 4과의 최고위 유정을 통칭해 아라한이라고 부르게 됐다.
나아가 부파불교에서는 모든 유정은 성문으로서의 최고위인 아라한은 될 수 있으나
불타가 되지는 못한다는 견해까지 나타났고, 이에 대해 모든 유정이 성불할 수 있다는
대승불교가 출현하면서 대승불교에서는 아라한이라는 낱말을 소승(小乘),
즉 성문⋅연각의 2승(二乘)의 최고위의 성자를 지칭하는 것으로 국한해서 사용하게 됐다.
그리고 아라한은 태어남이 다한 분이다. 그래서 아라한이 되면 이렇게 노래한다.
“생은 다 했고, 청정한 삶을 살았으며, 해야 할 일은 이미 다했고,
이제 다른 생은 없다(더 이상 윤회는 없다는 뜻).”
아라한은 본래 부처를 가리키는 명칭이었는데,
후에 불제자들이 도달할 수 있는 최고 계위로 바뀌었다.
흔히 통속적으로 인격에 따라 범부ㆍ현인(賢人)ㆍ성인(聖人)으로 구분하지만,
초기불교에서는 성문사과(聲聞四果)라 해서
성인을 예류(預流)ㆍ일래(一來)ㆍ불환(不還)ㆍ아라한(阿羅漢)의 사위(四位)로 나누어
아라한을 최고 자리에 놓았다. 즉, 아라한은 성인(聖人) 4과중 맨 위 단계였다.
자신의 오온(五蘊)을 있는 그대로 통찰해, 이 오온에 ‘나’가 없고, 나의 자아도 없고,
나의 것도 아니라는 통찰지혜가 생겨, 몸과 마음에 대한 탐ㆍ진ㆍ치가 소멸해서
집착이 탁 끊어진 의식세계인 열반에 들었다가 나오는 것을 성인의 깨달음이라 한다.
이와 같이 열반을 경험한 사람은 그의 정신 세계가 수다원(須陀洹, 예류과 : 성인의 흐름에 든 분)이 된다.
이와 같이 열반을 경험하고 성인의 1단계라고 할 수 있는 수다원을 거쳐
다시 몸과 마음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려서 더 깊은 무상ㆍ고ㆍ무아를 통찰하면
사다함(斯陀含, 일래과)이 된다.
다시 오온을 알아차리는 수행을 해 더 깊은 무상ㆍ고ㆍ무아를 통찰해
아나함(阿那含, 불환과)의 도과를 거쳐 마지막으로 아라한과(arahan phala)에 들면,
그에게는 어떤 미세한 탐ㆍ진ㆍ치도 남아 있지 않는 아라한이 된다.
아라한은 십계(十界)에서 부처님⋅보살ㆍ연각ㆍ성문이라는 사오계(四悟界)의 깨친 경계이다.
그리하여 대승에서는 아라한을 성문승(聲聞乘)이라고도 한다.
<성문 4위(4과)>
수다원(須陀洹) ― 예류(預流)라고도 함.
사다함(斯陀含) ― 일래(一來)라고도 함.
아나함(阿那含) ― 불환(不還)이라고도 함.
아라한(阿羅漢) ― 성문승(聲聞乘)이라고도 하는 최고 경지.
아라한과(阿羅漢果, arahan phala)는 더 이상 배우고 닦을 만한 것이 없으므로 무학(無學)이라고도 하며,
그 이전의 계위는 아직 배우고 닦을 필요가 있는 단계이므로 유학(有學)이라 불린다.
아라한(阿羅漢)이란 제루이진(諸漏已盡), 즉 모든 번뇌가 이미 다한 존재란 말이다.
그리하여 초기경전에서 깨달았다는 점에서는 아라한과는 붓다와 동등하다고 했다.
그런데 아라한도 삼명(三明, tevijjaa)을 갖춘 아라한, 육신통(六神通)을 구족한 아라한,
네 가지 무애해(無礙解)를 구족한 아라한 등으로 다르다고 한다.
※무애해(無碍解)---무애해란 온갖 경계 대상을 지각하고 깨닫는데
어떠한 장애도 없는 것, 혹은 이러 저러한 경계를 설하는데 어떠한 장애도 없는 것으로,
자유자재하며 거리낌 없는 이해능력 및 언어적 표현능력을 가리킨다.
경전을 이해함에 전혀 장애가 없음을 말하는데, 중국에서 이를 무애해라고 번역했다.
모든 아라한은 번뇌를 다한 누진통(漏盡通)을 성취해 아라한이 되지만
개인에 따라서는 다른 신통을 구족하지 못하는 분도 있고,
특히 무애해를 구족하지 못하는 아라한도 있다.
※누진통(漏盡通)---유자재로 번뇌를 끊어버리는 신통력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무애해를 구족하지 못한 아라한이 아라한이 되고나서 무애해를 구족하게 된다면
그런 경우에는 지혜가 더 깊어진 것으로 봐야 하겠다.
따라서 <금강경>에서 아라한이었던 수보리 존자가 부처님 말씀을 듣는데,
당연히 이에 따라 더 깊은 지혜가 생겼다고 말할 수 있다.
번뇌가 소멸돼 열반을 성취한 사람을 초기에는 아라한이라 했고,
그 후에는 불타(Buddha)라고 불렀다. 그리고 붓다의 깨달음은 정등각 지혜(sammā-sambodhi-ñāṇa)여서
이점이 아라한과 붓다의 다른 점이다.
즉, 붓다는 제자의 지혜보다 훨씬 월등하기 때문에 붓다라고 불렸으며,
붓다는 깨달음에 이르는 길을 개척한 선구자인데 반해서 아라한들은
붓다가 밟았던 길을 따라서 같은 경지에 도달한 사람들이다.
그래서 아라한들은 붓다누붓다(buddha nubuddha), 즉 완전히 깨달은 자(正等覺者) 다음에
깨달음에 도달한 사람들이라고 묘사돼 있다.
아라한은 견도(見道)와 수도(修道)의 과정을 거쳐 모든 번뇌를 다 끊어버려
항상 고요해 다툼이 없으므로 언제나 무쟁삼매(無諍三昧) 속에 머무르고,
모든 번뇌를 다 끊어 마땅히 공양을 받을만한 분이기 때문에 ‘응공(應供)’이라 부르기도 했다.
붓다의 직접 가르침을 받는 수행자 최고단계였다.
따라서 아라한의 계위를 얻는 것이 모든 출가 수행자에게 궁극의 목표였다.
※견도위(見道位)와 수도위(修道位)---초기불교에 있어서 성문의 수행단계인
삼도(三道), 즉 견도(見道) ․ 수도(修道) ․ 무학도(無學道)에서의 제2단계를 말한다.
근본불교나 소승불교에서는 해탈 중심의 수행 가풍이 있었다.
모든 욕망을 절제하고 극기의 수행을 해 번뇌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나자는 것이다.
수행의 단계 견도위(見道位)와 수도위(修道位)에 있어서
견도위에서 끊는 번뇌를 견혹(見惑)이라 하고, 수도위에서 끊는 번뇌를 (修惑) 혹은 사혹(思惑)이라 한다.
유식학파의 교리에 의하면 중생이 부처님과 같은 경지에 오르기 위해서는
다양한 수행의 단계를 밟아야 한다.
그 대표적인 수행단계가 자량위(資糧位), 가행위(加行位), 통달위(通達位), 수습위(修習位),
구경위(究竟位)의 5위인데, 여기서 통달위를 견도위(見道位), 수습위를 수도위(修道位)라고도 한다.
각각의 단계를 거침으로써 중생의 마음은 부처님의 마음으로 변하게 돼
마침내 구경위에 이르러 부처님 경지에 도달한다.
한편 아라한을 살적(殺敵-적을 죽인 자)라 의역하기도 하는데,
이것은 ‘죽음으로 대표되는 일체의 번뇌’라는 적을 물리친 자라는 뜻이다.
부파불교시대 아비담마에서는 비구들이 수행을 통해 오를 수 있는 최고 경지가 아라한이었다.
그러나 대승불교에 와서 ‘보살’이 생겨 아라한을 나한(羅漢)이라 부르며, 그 격이 보살 아래로 떨어졌다.
그렇다고 대승불교에서 나한을 존숭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대승사찰에서도 나한전(羅漢殿)을 따로 세워 오백나한을 정중히 모신다.
그리고 아라한이란 불교에서만 통용되는 것이 아니다. 힌두교나 자이나교에도 있었고,
기타 타 종교에도 비슷한 개념의 성자가 있었다.
그리고 아라한이 보살과 다름이 아니다. 아라한이란 성자라는 뜻인데,
성문, 독각(연각), 보살 역시 아라한이다. 차이가 있다면
대승경전에서는 보살은 꼭 아라한만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다.
아라한은 최고성자라는 뜻일 뿐, 보살은 아라한 과위의 위도 있고, 그 아래 아나함도 있다.
아라한은 중생을 삼계(三界)에 묶어놓는 족쇄(結, 번뇌)를 완전히 제거해
더 이상 어떤 존재로도 윤회하지 않는다.
따라서 아라한은 금생에서 오온(五蘊)이 다하면 반열반(般涅槃, parinibbāna)에 들어
영원한 평화를 누리게 된다.
아라한은 나이나 성이나 신분이나 승속(僧俗)의 제한을 받지 않는다.
7살의 나이 어린 사미가 아라한을 얻었다는 이야기가 있고,
또한 여성 아라한도 경에 많이 등장한다. 그리고 대략 400여명의 남성 아라한들이 경에 등장한다.
또 앙굿따라 니까야(A.iii.451)에는 재가(在家) 아라한의 이름들이 열거돼 있고,
야사(Yasa) 존자, 산따띠(Santati) 장관, 숫도다나(Suddodana)왕과 같이
재가자(在家者)로 아라한이 된 사람들도 드물지만 있었다.
그리고 아라한은 마지막 임종 시에 과거에 지은 모든 업(業)의 효력이 없어진다.
만일 아라한이 임종했는데도 모든 업의 효력이 그대로 남아있다면
또다시 태어나는 것이 되고 말기 때문이다.
업에 관한 한 아라한은 금생이 마지막 몸이 된다.
또한 아라한은 죽고 나면 세간의 언어로는 설명할 수 없는 무기(無記, avyākata)에 해당한다.
다음은 아라한에 관한 붓다의 게송이다.
『아라한에게 생사의 여행은 끝났다.
오온의 슬픔으로부터 해탈하고
일체의 얽매임을 다 파괴해버린 그에게
이제 더 이상의 괴로움은 없는 것이다.
아라한의 감각기관은 고요해
마치 잘 길들여진 준마(駿馬)와 같다.
그는 번뇌로부터 완전히 벗어난 사람,
천왕까지도 아라한을 극진히 받든다.
아라한의 마음은 고요하다.
언어도 고요하고, 행동도 고요하다.
아, 새들이 허공을 날아갈 때 그러하듯이
아라한이 가는 마음 길에는 자취가 없다.』- 김정빈 <경>에서
그리고 아라한은 자신만의 개성이 없다. 이 아라한이나 저 아라한이나 같은 내용의 말을 하고,
같은 느낌을 가지고, 같은 정황에서 같은 행동방식을 보인다.
그것은 모든 아라한들이 공히 일체의 조작을 벗어난 여여(如如, thatata)한 경지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그리고 대승에서는 아라한이 아공(我空)을 깨달아 해탈을 했으나
대승 보살의 7지(地) 수준이라고 보며, 초월적 경지에 이른 자로서, 깨달은 자, 진리에 도달한 자,
무아에 들어선 자, 도와 일체가 된 자로 본다.
아라한이 자신의 부모형제가 악도에 떨어져있는 것을 보고서 그냥 있을 수가 없다.
자신은 열반에 들어있어도 자신의 부모형제가 지옥에 떨어져 아우성치는 소리가 들리기 때문이다.
아라한이 된 목련존자도 선정에서 자신의 어머님이 지옥에서 지르는 고통의 비명소리를 듣고
어머님을 구하기 위해 붓다께 법을 청했다.
그런데 아라한들은 꽃을 보고 갈애를 일으키지 않지만
중생들은 갈애를 일으키며 취사분별을 하는 점이 다르다고 한다.
붓다나 아라한이나 모두 다 예쁜 것이나 추한 것이나 밥인지 된장인지 구분을 한다.
그렇게 하지 못한다면 세상을 살아가지 못할 것이다.
<청정도론>에서는 마음의 작용을 여러 가지로 구분해 설명을 해 놓았는데,
아라한의 마음은 "작용만 하는 마음"이라고 했다.
즉, 꽃이다, 여자다, 된장이다, 밥이다, 하고 구분은 하지만
그 대상에 대해서 갈애(탐욕, 욕탐, 번뇌, 취사선택)를 하는 마음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좀 더 쉽게 말해서 모든 대상이 눈에 보이는 현상으로써만 흘러갈 뿐,
그 대상에 갈애를 일으키지 않는다는 것이다.
따라서 불교의 수행은 수(受, 느낌)에 대해서 어떻게 대처하고 갈애를 일으키지 않아야 하느냐가 핵심이다.
예컨대, 12연기를 하나의 구슬을 꿰어놓은 목걸이라 한다면 중생이
「수 ― 갈애」에서, 즉, 수(느낌)에서 갈애로 넘어가지 않으면 아라한이다.
[출처] 블로그 아미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