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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이 천상병을 생각하면 흔히 순진무구한 시인이라고만 생각하기 마련이지만, 미군 통역관으로 복무하고 서울대에 입학하였으나 미련없이 중퇴한 것을 보면 알 수 있듯이 두뇌가 굉장히 명석한 천재였다. 작가 신봉승의 회고에 따르면, 천상병은 한동안 신봉승의 서재에 얹혀 살며 더부살이를 했는데 하루는 신봉승이 《서양문화사》[13]라는 책을 읽고 있는 것을 보자 책을 뺏들곤 "뭘 하다가 아직도 이런 쉬운 책을 읽고 있냐? 지금부터 내 강의나 들어봐라."라 하곤 그 자리에서 책의 내용을 줄줄히 외워 읊었다고 한다. 또한 신봉승의 가족들과 함께 TV 퀴즈 프로를 시청하면서 퀴즈들을 단 한 문제 오답도 없이 전부 맞혀버렸었다.
시인으로서의 천상병과 평론가로서의 천상병은 서로 완전히 다른 인물이었다. 천상병은 시를 비평함에 있어 조금의 자비도 베풀지 않고 매우 엄격한 자세를 고수했는데, 처음에는 시인들이 천상병에게 욕을 먹는 것이 두려워 그의 평론을 꺼렸으나 후에 그의 비평에 틀린 말이 없음을 알고는 앞다투어 자신들이 쓴 시를 보여주었다고 한다.
한창 젊었을 적 완전히 폐인 모습으로 살고 있던 천상병 시인. 머리가 하도 덥수룩하여 얼굴이 보이지 않을 지경이었다. 이를 딱하게 여기던 친구 한 명이 그냥 돈을 주면 술을 사먹을까봐 천상병을 데리고 이발소로 갔다. 거기서 이발비를 지불하고 천상병이 머리카락을 자르는 걸 본 친구는 안심하고 집으로 가게 된다. 그런데 친구가 나가자마자 천상병은 이발사에게 지금까지 이발한 비용을 제외하고 환불해달라고 요구한다. 어이없어진 이발사는 환불을 해주고 천상병은 그 돈으로 술을 사먹었다고 한다.
대학시절, 교수님 집에서 머무는데 화장대에 멋있어 보이는 병이 있어서 양주인 줄 알고 마셨는데, 이상하게 향이 심해서 '역시 좋은 술인 가보다.'라 생각했는데 알고보니 향수였다고 한다. (출처: 괜찮다 괜찮다 다 괜찮다.)
그가 동베를린 사건에 연루되었을 당시 그의 죄명은 그의 친구였던 강빈구에게 공갈로 36,500원을 갈취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그가 강빈구에게 술값으로 백 원, 오백 원씩 받아썼던 돈으로, 그것 때문에 하루 아침에 간첩으로 몰리게 되었다. 이 사건은 조작된 것임이 밝혀졌고, 45년 뒤에 전원 무죄판결이 나왔다.
천상병과는 술동무로 절친한 사이였던 시인 신경림의 회고에 따르면, 먹성이 좋고 주량도 엄청났던 모양이다. 또한 몸이 튼튼해서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험하게 살았음에도 어디서든 멀쩡히 잘 먹고 잘 살았던 탓에 때문에 주변 사람들이 "그 속이 무쇠로 되어있다"고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고... 그러나 동베를린 공작단 사건 당시에 고문을 당한 후유증 때문에 완전히 딴 사람이 되고 말았다. 젊은 시절의 먹성도 사라졌고, 술은 많이 먹었으나 주량이 줄어들어서 금방 취해 횡설수설하기 일쑤였으며, 평소 같았으면 쓰지 않을 이상한 글을 써서 동료 시인들이 무척 놀랐다고 한다. 고문 후유증으로 몸과 정신이 크게 쇠약해진 것은 주변 사람들의 증언이 일치한다.
천상병은 언제나 "사람은 탄탄한 조직에 들어가야 잘 살 수 있다"는 지론을 지니고 있었다. 때문에 친구였던 신경림 시인이 영어학원 강사로 근근히 살아가는 것을 보고는 안타까워하며 취직을 시켜주겠다면서 일자리 알선도 해 주었다고. 신경림은 일정한 수익이 없었던 천상병이 제 걱정은 않고 남 걱정만 하는 것을 보고는 우스워서 한마디 했더니, 천상병 또한 이에 지지 않고 "너와 나는 타고난 생리가 다르다"라는 말로 일축했다고 한다. 즉 자신은 남들보다 시를 잘쓰니 자기 힘으로도 충분히 먹고 살 수 있다는 확신이 있었다는 뜻이다.
천상병은 절친한 친구인 시인 김관식의 집에 자주 드나들었는데, 하루는 김관식도 골탕먹이고 술사먹을 돈도 벌 겸 김관식의 집에 있던 오래된 책 한 권을 몰래 봉투에 담아 이를 고서점에 팔려고 한 일이 있었다. 그런데 김관식이 이를 눈치채고는 천상병이 훔친 책을 몰래 봉투에서 빼내고선 대신에 낡은 원고지 한뭉치를 넣어버렸다. 이를 모르고 고서점에 책을 팔러 갔던 천상병은 되려 망신을 당하고 돌아왔는데, 김관식은 이 광경을 보고 배꼽이 빠져라 웃다가 기분이 좋아져서 천상병에게 따로 술을 대접했다고 한다.
동베를린 공작단 사건에 연루되어 취조를 받던 당시 그의 별명은 '천희갑'이었다고 한다. 그의 얼굴이 당시의 넌센스 코미디언 김희갑을 닮아서였다고 한다.
동베를린 공작단 사건 당시에 모진 고문을 받았는데 특히 전기 고문을 당한 후유증으로 아이를 가질 수 없게 되었다. 특히 아내 목순옥과의 사이에서도 자식이 없다. 고문 후유증은 이뿐만이 아니었기에 치아까지 상하여 음식도 제대로 못먹을 정도가 되어 이를 죽을 때까지 고통에 시달려야 했다. 특히 정신질환까지 발생해 정신병원에 수감되어 정신치료를 받아야 했고 아내가 평생 돌봐주어야 할 정도로 정신이 온전하지 못했다.
그가 무연고자로 오해받아 서울시립정신병원에 수감될 당시 그의 지인들은 그가 객사한 줄 알고 그가 남긴 시를 모아 유고시집 《새》를 남기기도 했다. 그런 까닭에 그는 살아서 유고시집을 남기는 진기록을 가졌다. 물론 93년에 진짜로(...) 죽은 뒤에도 유고시집 《나 하늘로 돌아가네》가 출간되었다.
천상병 시인은 생전에 지인들에게 세금(?)으로 500원, 1,000원[14]씩을 받아내곤 했었는데 징수(?)의 기준이 특이했다. 돈을 받는 사람은 꼭 지인 한정이었고 지인이 아닌 사람한테는 돈을 받지 않았다. 그리고 어른이라 생각하면 1,000원, 어른이 아니라 생각하면 500원씩을 받았다고 한다. 그 기준도 나이같은 게 아니라 결혼을 기준으로 한 것이라고 한다. 결혼한 사람에게는 1,000원, 결혼 안 하면 500원씩 받는 것이다(...). 주변 사람들은 천상병이 스스로 어지간히 친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아니면 돈을 걷지 않는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에 돈을 주면서도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고 한다. 이렇게 천상병이 걷어간 돈들은 대부분 술값으로 소모되었다고 한다. 평소 친하게 지낸 김동길 교수가 매일 술을 마시니까 이왕이면 좋은 술을 마시라고 비싼 조니 워커 위스키 한 병을 선물했는데 다음에 만났더니 "교수님이 주신 그 비싼 양주에는 입도 대보지 못했다, 아내가 비싼 술이니까 팔아서 막걸리나 사서 마시라고 해서 팔아서 막걸리를 마셨다"라고 천진난만하게 웃으면서 말했다고 한다.
1988년 간경변으로 춘천의료원에 입원했을 당시의 일이다. 당시 병원장과 천상병 시인은 친구 관계였다고 한다. 그를 만났을 당시 병원장이 천상병 시인에게 배에 복수가 차서 누워있는 시인에게 배가 왜 이렇게 불렀냐고 묻자 천상병 시인은 임신을 했다는 개드립 농담을 던진다.(...) 언제 죽을지 모르는 상황에서 그의포부가 드러나는 면이다. 하지만 그 역시도 죽음을 두려워하고 더 살고 싶었다는 마음이 간의 반란이라는 시에서 드러난다.
역시 춘천의료원에 입원했을 당시의 일이다. 당시 소설가 이외수가 문병을 왔는데 그때 초면이었던 이외수를 보자마자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외수야! 넌 이제 내 동생이다!(...) 이외수의 회고에 따르면, 평소에 천상병 시인을 존경하여 직접 만나 보고 싶었으나, 정작 그런 기회가 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다가 뒤늦게 병문안을 가면서 처음 만나게 되었다가 이와 같은 환대를 받자 무척 감격했다는 듯. 이후에 서로 연락도 하고 자주 만난 듯 하다.
1988년 간경변으로 춘천의료원에 입원했을 당시 그의 부인이었던 목순옥 여사가 춘천으로 오고가면서 천상병 시인을 5년만 더 살게 해달라고 기도했다고 한다. 놀랍게도 병원에서조차 가망이 없다던 그의 병은 완쾌되었고 더 놀랍게도 정확히 5년 후인 1993년 거짓말같이 세상을 떠났다. 천상병 시인이 세상을 떠났을 당시 목순옥 여사는 이렇게 생각했다고 한다. "5년이 아니라 10년만 더 살게 해달라고 빌었을 것을..."
평생을 가난하게 살다보니 전화기 한 대 못 가지다가 80년대 후반에 전화기를 한 대를 가지게 됐는데 가지고 나서 전화기 곁에 계속 붙어 있었다고 한다. 그러다보니 친구들은 그가 또 잡혀가거나 그런거 아니냐고 찾으러 다녔다고 한다.
천상병 시인이 세상을 떠난 이후 8백만 원에 달하는 조의금이 들어왔다고 한다. 당시 생전 처음 만져보는 돈을 그의 장모가 잘 숨겨둔다는 것을 하필 아궁이에 숨겨놓았다.(...) 그런데 목순옥 여사가 이것을 모르고...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그나마 형태가 남은 것을 은행에 가져가서 그나마 절반은 건졌다고 한다.[15] 장모인 조성대 여사는 딸인 목순옥 여사가 세상을 뜨던 2010년까지도 살아있었고, 그리고 2011년 4월 12일 사위와 딸을 다 앞세우고 무려 103세의 나이로 귀천하였다. 아이러니하게 천상병 시인은 평소 장모의 장례비 걱정을 많이 했다는데 그래놓고 장모보다 먼저 세상을 떠났으며 남은 돈이 장모의 장례비 만큼의 돈이었다고 한다.
천상병 시인은 인사동에서 찻집 '귀천'을 운영하고 있었는데[16], 천상병 시인이 죽은 뒤에는 아내 목순옥 여사가 계속해서 운영하고 있었다. 하지만 목순옥 여사마저 2010년 세상을 떠나자 '귀천'은 문을 닫고 말았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목순옥 여사의 조카가 하고 있는 귀천 2호점은 계속 운영되고 있다는 점이다.
경기도 파주 헤이리마을에 귀천 3호점인 카페귀천이 있다. 천상병시인을 기리는 복합문화공간으로 시인의 서재에 꽂혀있던 실제 서적들과 천상병 시인의 육필원고 등 유품들을 카페귀천 내 천상병문학관에서 볼 수 있다.
당시 '귀천'에 자주 다니던 사람이 천상병 시인에게 빌린 돈을 언제 갚을 거냐고 묻자 천상병 시인이 이렇게 답했다고 한다. "허허, 내가 죽으면 천국과 지옥의 갈림길에서 포장마차를 하고 있을 테니 오거든 갚을 만큼의 공짜술을 주겠네." 이 이야기는 일본인이 쓴 세계 유명인의 명대사란 책자에 나온 적도 있다.
개를 무척 좋아하여 개와 함께한 유명인이라는 책자에 나오기도 했다. 천상병 시인이 세상을 떠날 때 기르던 개는 슬퍼하며 천상병이 자주 앉던 서재에 항상 누워있다가 3년 뒤에 주인을 따라갔다고 한다.
노원구 수락산 등산로에는 천상병 공원이 있다. 여기에는 천상병 시인의 유품 203점을 묻어놓은 타임캡슐이 있는데 천상병 시인의 탄생 200주년이 되는 2130년 공개한다고 한다.그러니까 도굴할거 아니면 살아서 볼 생각은 포기하는게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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