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향신문]1월29일
팬데믹 이후 달라진 여행 패턴을 분석한 에어비앤비 자료에 따르면, ‘탈도시’ ‘사적인 공간’ ‘특별한 경험’ 등이 핵심 키워드로 집계됐다. 오랜 ‘집콕’으로 인한 답답함을 해소하고자 확 트인 자연을 목적지로 설정하고, 유명 관광지가 아닌 나만의 공간을 찾아 떠난다는 것이다. 긴 연휴로 이어지는 이번 설 명절은 코로나19로 시끌벅적한 이동을 자제하는 분위기다. 각 지역에서 “여행 좀 한다”고 인정받은 현지인들로부터 조용히 바람 쐬고 오기 좋은 동네 나들이 코스를 추천받았다.
■남원 행정마을 _ “비바람을 견뎌낸 강인함을 느껴봐”
반기룡 시인은 “숲속에 들어가 본 사람은 안다. 강풍이 몰아치면 원가지, 곁가지, 잔가지, 마른 가지 할 것 없이 포옹하며 모진 비바람 견디어 내는 것을”이라고 노래했다. 아마도 이 시에 등장하는 숲을 현실에 옮긴다면 이곳과 흡사할 것이다.
남원 행정마을 서어나무 숲
서어나무숲. 윤정준 제공
남원에서 여원재를 넘어 60번 국도를 따라가다 보면 운봉의 너른 평야에 가만히 내려앉은 듯한 마을이 있다. 행정구역상 명칭은 남원시 운봉읍 행정마을이다. 나들이 코스로 이곳을 추천한 윤정준 (주)한국의길과문화 이사는 “100여그루의 서어나무가 30~40m 높이로 뻗어 있는데 그 모습이 소담하고 다정하다”며 “숲이 뿜어내는 찬란한 생명력과 무한한 상승의 의지를 느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서어나무숲에 얽힌 전설 또한 흥미롭다. 마을의 터로는 적당치 않은 들판 한복판에 마을이 들어서자 전염병 등 우환이 끊이질 않았다고 한다. 어느 날 지나가던 도사가 마을 북쪽에 나무를 심어 액운을 막길 권하자 마을 사람들이 나무를 심기 시작했고, 그 나무들이 지금의 서어나무숲을 이루었다는 것이다. 모진 비바람을 견뎌낸 숲처럼 삶의 굴곡들을 지나온 내적 강인함이 느껴지는 동네다.
왈길마을숲. 윤정준 제공
왈길마을숲. 윤정준 제공
여유가 있다면 왈길마을 숲도 추천한다. 윤 이사는 “마을 숲이라고 얕잡아 봤다간 큰코다친다. 도심의 공원과 견주어도 뒤처지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왈길마을 숲에는 1.5㏊의 너른 들에 300년 넘은 느티나무와 소나무, 팽나무 등이 빼곡하게 자리하고 있다. 여기서 끝이 아니다. 숲 사이로 난 길을 따라 마을로 들어서면 양쪽 언덕으로 줄지어 선 소나무들이 시선을 사로잡는다. 마을의 안전을 지키기 위해 좌우에 서 있는 호위무사처럼 당당한 자태가 한 폭의 동양화처럼 아름답다.
■강진 백운동 원림 _ “인적 드문 비밀의 정원”
전고필 여행 전문 PD는 “유홍준 교수가 <나의 문화 유산 답사기>에서 강진을 ‘남도 답사 1번지’라 했지만, 정작 이곳을 담아내지 않아 아쉬움이 남는다”고 말했다. 그가 언급한 ‘이곳’은 강진의 백운동 원림이다. 담양의 소쇄원, 보길도의 부용동 정원과 더불어 호남의 3대 정원으로 불리지만 두 정원에 비해 잘 알려지지 않아 아직은 인적이 드문 편이다. 원림이란 집터에 딸린 숲을 의미한다.
백운동 원림. 강진군문화관광재단 제공.
백운동원림. 강진군문화관광재단 제공
월출산 다원. 전고필 제공
1812년 백운동 원림에서 하루를 보낸 다산 정약용은 이곳의 경치를 잊을 수 없어 제자 초의에게 ‘백운동도’를 그리게 했다. 그리고 13수의 시를 지어 붙였는데, 이것이 바로 <백운첩>이다. 당시 다산은 옥판봉, 동백나무 오솔길, 100그루의 홍매, 취미선방, 모란 화단, 집 앞의 푸른 절벽, 소나무를 심은 묏등, 정선대, 시냇가의 단풍나무, 흐르는 물에 술잔을 띄워 보낼 수 있다는 유상곡수, 폭포, 대나무밭을 ‘12가지 뛰어난 경관’으로 꼽았다.
이 경관은 2022년에도 여전히 볼 수 있다. 전 PD는 “‘비밀의 정원’이라는 표현이 딱 들어맞을 만큼 도로와 마을, 일대의 차밭에서는 보이지 않는다. 동백나무가 울창한 진입로를 지나면 비로소 작은 시내와 계곡의 물소리, 새소리가 들린다. 바위 위에 앉아 선비들이 이 자연을 얼마나 조화롭게 활용했는가 돌아보기를 바란다”고 전했다. 계곡을 가로지르는 나무다리를 건너면 대문과 담장이 모습을 드러낸다. 6채밖에 되지 않는 건물이지만 절묘한 입지에 깜짝 놀랄 것이다. 짜임새 있는 공간들은 단출하지만, 전통의 의미를 돌아보게 한다.
그 옆으로는 월출산 다원이 이어진다. 월출산 자락에 담긴 이국적인 풍경은 보성 녹차밭 못지않은 장관이다. 편하게 산책하기에 좋다.
■원주 울렁다리 _ “아슬아슬하지만 시원하게”
울렁다리. 다리를 건널 때 느껴지는 아찔함과 울렁거리는 마음을 표현한 이름이다. 길이 404m, 폭 2m로 국내 최장 현수교로 제작된 이 다리는 유리로 만들어진 바닥 아래로 까마득한 계곡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것이 특징이다. 70㎏ 기준 성인 1600명이 한 번에 설 수 있을 만큼 튼튼하게 설계됐지만, 자신도 모르게 등골이 오싹해지는 느낌이 들 것이다. 두려움도 잠시, 눈앞에 펼쳐진 빼어난 풍광이 그 공포를 녹인다.
원주 울렁다리. 강원도 관광재단 제공
원주 울렁다리. 강원도 관광재단 제공
울렁다리는 지난 1월21일 문을 연 원주시 간현관광지의 소금산 그랜드밸리에 자리하고 있다. 원문규 강원도관광재단 관광마케팅실장이 이곳을 추천한 이유는 “머지않아 유명해질 신생 관광지인 만큼 서둘러 가야 인파를 피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절벽을 따라 350m를 아슬아슬 걸을 수 있는 소금 잔도는 울렁다리로 채워지지 않는 강심장들에게 추천하는 상급 레벨이다. 하늘 위 우뚝 서 있는 전망대 스카이타워에서는 간현관광지 전체를 조망할 수 있다.
모험을 좋아하지 않는 이들에게는 700m 길이의 덱 산책로가 제격이다. 자연 암벽에 빔 프로젝터를 활용하여 투사하는 방식으로 선보이는 미디어파사드 ‘은혜 갚은 꿩’은 원주의 대표적 설화를 바탕으로 해 가족 단위 관광객들에게 추천한다.
■부산 중앙동 거리 _ “원도심으로 떠나는 아날로그 감성 산책”
부산 최대 상권 중 하나인 남포동은 부산국제영화제로도 잘 알려진 명소다. 이에 비해 바로 옆에 자리하고 있는 중앙동의 매력을 아는 이는 그리 많지 않다. 이곳을 추천한 노시현 부산 로컬 사진작가는 “1998년 시청과 관공서들이 연산동으로 이전하면서 예전과 같은 화려함은 사라졌지만, 부산의 찬란했던 시간을 머금고 있는 동네인 만큼 아날로그 시간여행을 즐기기에는 안성맞춤”이라고 설명했다.
부산 중앙동 풍경. 노시현 제공
부산 중앙동 풍경. 노시현 제공
중앙동을 대표하는 명소는 중구 국민은행 중앙동지점부터 ‘40계단’까지 이어지는 테마거리다. 지금은 오래된 가게들과 새로 터를 잡은 상점들이 뒤섞여 있지만 1950~1960년대만 해도 이곳은 한국전쟁 때 피란민들의 판자촌이 자리하고 부두에서 들어오는 구호물자를 파는 장이 서던 곳이자 헤어진 가족들을 이어주는 만남의 장소였다. 영화 <인정사정 볼 것 없다>의 오프닝 신에 등장하며 강렬한 인상을 남기기도 했다.
이 길을 바라보고 있으면 ‘고즈넉하다’라는 말이 자연스럽게 떠오른다. 노 작가는 “오래된 옛 건물들과 현대가 조화를 이룬 곳으로 최소 30~40년의 세월이 검증하는 노포들이 골목골목 숨어 있으니 이를 찾아보는 것 또한 묘미”라고 귀띔했다.
■청송 얼음골·청량대운도 전시관 _ “자연과 인간이 완성한 웅장함”
청송의 매력은 겨울에 빛을 발한다. 주왕산의 거대하고 기묘한 바위는 매서운 바람 속에서 더욱 선명해지고 얼음 밑에서 솟아오른 듯한 주산지의 왕버들은 이 계절이 아니고서는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청송 얼음골. 청송군청 제공
청송 주암산. 청송군청 제공
가족여행이 취미인 최주석 청년농부 대표가 추천한 첫 번째 나들이 코스는 주왕산 얼음골이다. 최근 청송의 랜드마크로 떠오른 이곳을 두고 최 대표는 “현실판 <겨울왕국>을 경험하게 될 것”이라고 표현했다. 암벽 꼭대기에서 폭포수처럼 흘러내린 물이 그대로 얼어붙은 빙벽은 각기 다른 형태의 결을 뽐내며 멋스러움을 더한다. 감탄을 마무리하기엔 아직 이르다. 사실 이 빙벽은 인위적으로 물을 뿌려 만든 것이다. 빛이 잘 들지 않는 지형이라 오래도록 녹지 않고 유지된다고 한다. 발 빠른 MZ세대들 사이에서는 이미 ‘사진 맛집’으로 소문이 나 있다. 인파를 피하고 싶다면 부지런해야 한다. 이른 아침 시간대가 비교적 한산하다.
청송 청량대운도 전시관. 청송군청 제공
또 다른 추천 코스는 ‘청량대운도’ 전시관이다. 폐교된 초등학교를 리모델링한 이곳에 세계에서 가장 큰 수묵화가 있다. 서울천도 600주년을 기념해 제작된 ‘청량대운도’다. 평생 우리나라의 아름다운 강산을 수묵화로 남기는 데 매진한 이원좌 화백이 1992년 4월부터 10월까지 약 180일에 걸쳐 이 그림을 그렸다. 높이 6.3m, 길이 45.6m. 숫자만으로는 그 크기가 잘 와닿지 않을 수도 있다. 최 대표는 “대작임을 알고 와도 끝없는 길이와 거대한 크기에 압도당할 것이다. 사진에는 담기지 않는 웅장함이 있다”고 말했다.
하얀 구름에 잠긴 산의 자태부터 생생하게 담아낸 계곡의 시원함까지 수없이 산을 오르며 그림을 구상했다는 화백의 발걸음을 좇아 그림을 감상해보는 것도 방법이다.
■대전 대청호 _ “걷다가 힘들 땐 카메라를 켜”
대청호 오백리길은 대청호를 둘러싸고 있는 약 200㎞의 둘레길이다. 이상은 사진작가·산악 전문가는 “조용히 원 없이 걷고 싶을 땐 대청호 오백리길을 가라”고 말했다. 지역 주민이라면 누구나 알 법한 이 ‘흔한’ 곳을 언급하는 이유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 그 진가를 발견하지 못한 이들을 위해서다. 또한 볼 때마다 달라지는 명불허전의 풍경을 다시금 강조하고 싶어서다.
대청호 오백리길 풍경. 이상은 제공
대청호 오백리길 풍경. 이상은 제공
총 21개의 테마로 이뤄진 길은 등산로, 산성길, 임도, 옛길 등을 포함하고 있다. 유명한 곳이지만 끝도 없이 이어지는 길이라 마주치는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다. 특히 이 작가가 추천하는 1구간(두메마을길)은 대전 대덕구 대청호 물 문화관 뒤편에서 시작해 이현동 갈대밭이 있는 두메마을에서 끝나는 코스다. 11.5㎞에 이르는 1구간은 걷는 내내 대청호의 아름다운 모습을 바라보고 즐길 수 있어 사색 코스로 제격이다. ‘그림 같은 풍경’이라는 여섯 글자가 머릿속을 떠나지 않을 것이다.
완주가 부담스럽다면 대청 로하스 캠핑장을 중심으로 한 짧은 코스를 추천한다. 캠핑장 전망대, 숫고개 벤치, 비상여수로 전망대, 지명산 둘레길, 대청정 등을 둘러보는 코스다. 언급한 곳들은 ‘인생샷’을 위해 카메라를 들어야 할 시간임을 알려주는 알람 같은 지점이기도 하다. 평지 위주라 어린아이들과 함께하기에도 수월하다.
김지윤 기자 june@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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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대청호 오백리길 풍경은
그림 같은 풍경
참말로 여섯글자가 머릿속을 떠나지 안네요
좋은 정보 감사합니다
평안한 저녁시간 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