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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이면적 유대인이냐, 표면적 유대인이냐?
(로마서 2:28-29)
대저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표면적 육신의 할례가 할례가 아니라. 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지니 신령에 있고 의문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 그 칭찬이 사람으로부터가 아니요 다만 하나님으로부터니라.
유대인이란 하나님의 선민을 말한다. 그러므로 유대인이란 말은 이방인이란 말과 대조되는 말이다. 그런데 유대인 중에도 두 종류가 있다. 곧 표면적 유대인과 이면적 유대인이다. 무엇이 다를까? 누가 진짜일까? 하나님은 어떤 유대인을 원하실까?
1. 표면적(表面的) 유대인의 특징은 무엇인가?
1) 첫째 특징은 할례에 있다.
① 이 할례의 법은 모세가 태어나기도 훨씬 전인 아브라함 때에 하나님이 그에게 주신 것이다. 아브람이 99세 때에 여호와께서 그에게 나타나셔서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 사이에 세워 너로 심히 번성케 하리라.”(창 17:1-5)라고 하셨다. 또한 “내가 너와 내 언약을 세우니 너는 열국의 아비가 될지라.”라고 하시고는 이름을 아브라함으로 고쳐주시며 “내가 너로 열국의 아비가 되게 하리라”고 약속하시고, 이어서 “너희 중 남자는 다 할례를 받아라. 이것이 나와 너희와 너희 후손 사이에 지킬 내 언약이니라.”라고 하셨다.
② 골리앗이 이끄는 불레셋 군대가 이스라엘 나라에 쳐들어왔을 때에, 왕과 모든 장수들도 골리앗이 무서워서 벌벌 떨고 있었는데, 마침 전쟁터에 형들을 만나러 왔던 다윗이 골리앗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는 의분이 일어나서 말하기를 “이 할례 없는 불레셋 사람이 누구관대 사시는 하나님의 군대를 모욕하겠느냐?”(삼상 17:26)라고 하였다. 할례는 이방인에게는 없는 선민의 표였다.
③ 역사적으로 볼 때에도 할례는 매우 중요하다.
첫째는 모세에게 나타난다. 모세가 미디안 땅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애급에 있는 자기 동족들을 구원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받게 되어 애급을 향해 떠났다. 그런데 숙소에서 하나님이 모세를 죽이려고 하셨다(출 4:24). 아니, 가라고 하실 때는 언제고, 죽이시려고 하시는 것은 무엇인가? 그 연유를 가장 빨리 깨달은 사람은 모세의 아내 십보라였다. 그가 곧 차돌을 취하여 자기 아들의 포피를 베어 모세의 발 앞에 던지며 “당신은 참으로 내게 피 남편이로다.”라고 하니, 하나님께서 모세를 놓으셨다. 아마 모세가 떠나기 전에 하나님이 그의 아들에게 할례를 행하라고 명하셨던 것 같다. 그러나 십보라의 반대로 할례를 행하지 않으니까, 하나님이 모세를 죽이시려고 하셨을 것이다. 민족 구원의 거룩한 사역을 시작하기 전에 먼저 모세의 가족들이 할례를 받아야만 했다.
또한 여호수아에게도 나타난다. 광야 40년의 생활을 마치고, 요단강을 건너 드디어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되었다. 그러나 여리고성을 함락시키기 전에 하나님은 여호수아에게 명령하시기를 “너는 부싯돌로 칼을 만들어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다시 할례를 행하라.”하시매, 여호수아가 부싯돌로 칼을 만들어 할례산에서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할례를 행하였다(수 5:2-3). 약속의 땅에 들어가게 되는 이 큰 일을 시작하기 전에 하나님은 다시 한 번 할례의 중요성을 일깨워주시고, 선민이 된 표를 가지고 약속하신 땅에 들어가게 하셨다.
④ 그러므로 이 할례 문제가 신약에 와서도 가장 심각한 문제가 되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믿거나 안 믿거나 당연히 할례를 받았으니까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지만, 본래 할례를 받지 않았던 이방인들이 예수님을 믿게 될 때에는 할례를 받게 해야 할 것이냐 아니냐 하는 것이 큰 문제가 된 것이다. 보수적인 유대인들은 강경하여 이방인들도 할례는 반드시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⑤ 그러나 그들이 깨닫지 못하고 있었던 중요한 사실이 있었다. 곧 육신의 양식보다는 영의 양식이 더 중요하고, 육신의 할례보다는 마음의 할례가 더 중요하다는 사실이다. 하나님이 참으로 원하시는 일은 육신의 할례가 아니라 마음의 할례였다. 이런 사실은 구약에도 여러 번 나온다(신 10:16; 30:6; 렘 4:4; 9:26 등). 우리가 성경을 바르게 이해하기 원한다면 육신보다 영혼, 보이는 것보다 보이지 않는 것, 땅에 있는 것보다 하늘에 있는 것을 항상 더 중요하게 생각해야 한다.
2) 둘째 특징은 율법에 있다.
① 바울은 이를 가리켜 “그런즉 유대인의 나음이 무엇이며 할례의 유익이 무엇이뇨? 범사에 많으니 첫째는 저희가 하나님의 말씀을 맡았음이라.”(롬 3:1-2)라고 말한다.
② 유대인들은 율법을 자랑하였다. 그러므로 율법을 지키기 위해 그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아 있을 때에든지 길에 행할 때에든지 누워 있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 또 그것을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으며 미간에 붙여 표를 삼고, 또 집 문설주와 바깥문에 기록하였다(신 6:6-9). 그들은 이 율법을 지키기 위해 목숨도 바쳤다. 특히 안식일을 지키는 것과 음식에서 부정한 것을 먹지 않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였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은 예수님이 그런 것을 잘 지키지 않는다고 시비를 하기도 했다.
③ 율법은 물론 반드시 지켜야 한다. 부자 청년이 예수님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겠습니까?”라고 물었을 때에 예수님은 “네가 생명에 들어가려면 계명들을 지켜라”(마 19:16-17)라고 하셨다. 또한 예수님은 산상수훈에서 십계명을 재해석해 주심으로 율법의 중요성을 강조하셨다.
④ 그런데 무엇이 문제였는가? 그들은 율법을 지키기는 했지만, 마음으로부터 지키지를 않았다. 형식적으로 지킬 뿐이었다. 율법을 지키는 일은 행위로 지키기 전에 먼저 마음에서부터 지켜져야 한다. 사람을 죽여야만 살인이 아니다. 그보다 먼저 “형제에게 노하는 것도, 형제에게 라카라고 욕을 하는 것도, 또한 미련한 놈이라고 멸시하는 것도 모두가 살인”이라고 가르치셨다(마 5:21). 팔복의 말씀도 마찬가지다. 주님은 우리의 행위보다도 먼저 마음의 성결을 이루라고 하셨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그런 뜻을 알지 못했다. 그들은 형식적으로만 지키기에 바빴을 뿐이다. 그러다보니 하나님의 계명이 사람의 계명에 가려서 빛을 잃고 말았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마 15:8-9)라고 책망하셨다.
3) 셋째 특징은 그들의 종교인 유대교에 있다.
① 유대교의 가장 큰 특징은 희생제사다. 유대인들은 열심히 짐승을 잡아서 하나님께 드렸다. 이 제도는 나의 죄로 인해 내가 죽어야 할 것을 짐승을 대신 죽여 바침으로 내 죄를 용서받는 의식이었다. 그러므로 제사에는 진심으로 회개하는 마음이 있어야 했다. 다시는 죄를 짓지 않겠다는 굳은 결심과 함께 하나님께 자기를 제물로 드리는 다짐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유대인들에게는 그런 마음이 없었다. 단지 습관적이고 형식적으로만 할 뿐이었다. 이런 태도는 모세 때에 광야생활을 하면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스테반이 순교하기 직전에 유대인들에게 이를 책망하였다. “이스라엘의 집이여! 사십 년을 광야에서 너희가 희생과 제물을 내게 드린 일이 있었느냐”(행 7:42)?
② 나아가 그들은 성전을 성전답게 하지 못하고 장사치들의 집(요 2:16)으로 만들었고, 나아가 “강도의 소굴”(마 21:13)로 만들었다. 성전은 기도하는 집이요, 예배하는 집이요, 하나님을 만나는 곳이어야 한다. 그런데 하나님은 안 계시고 장사치들과 강도들이 설치는 곳이 되어 있었다. 혹시 오늘의 우리 교회들도 그렇게 되지나 않았는지 두려울 뿐이다. 그들의 종교는 분명 타락하였다.
③ 왜 그렇게 타락하였을까? 세 가지 이유다. 첫째는 편의주의(便宜主義)라는 것이고, 둘째는 형식주의(形式主義)이고, 셋째는 배금주의(拜金主義)다. 이런 불순한 것들이 제사장들의 마음에 파고 들어오니까, 성전은 강도의 소굴이 되고, 제사는 하나님께 열납되지 못하는 더러운 제사, 가증한 제물들이 되고 말았다.
2. 이면적(裏面的) 유대인이란 어떤 사람들일까?
1) 그 첫째 의미는 나다나엘의 경우에서 발견된다. 예수님이 그를 가리켜 “보라! 이는 참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요 1:47)라고 하셨다.
① 간사한 것이 없어야 한다. 이 세상에 거짓되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대통령도 거짓말을 얼마나 많이 하는가? 많이 배우고, 많은 것을 가졌다고 자랑하는 사람들일수록 더욱 거짓되다. 그래서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오?”(렘 17:9)라고 하였고, “네가 지켜야 할 모든 것 중에서 더욱 네 마음을 지켜라.”(잠 4:23)라고 하였다.
② 그러면 이 간사하고 거짓된 것이 어디에서 온 것일까? 창세기 3:1에 “하나님께서 지으신 들짐승 중에 뱀이 가장 간교하더라.”라고 하였다. 또한 예수님은 마귀에 대해 설명하시면서 “마귀는 욕심쟁이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또한 거짓말쟁이로서 거짓의 아비가 되었다.”(요 8:44)라고 하셨다. 간사하고 거짓됨은 우리의 죄로부터 온 것이고, 그 결과 뱀처럼 마귀에게 쓰임 받는다. 따라서 하나님과는 원수가 될 수밖에 없다. 우리는 먼저 우리 마음에서 간사한 것을 뽑아내고 마음을 순수하고 정직하게 만들어야 한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너희가 돌이켜 어린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마 18:3)라고 하신 것이다.
③ 우리가 어떻게 해야 간사한 것을 뽑아버리고 순수하고 정직한 사람이 될 수 있을까? 무엇보다도 먼저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하나님을 경외하면 죄를 깨달아 회개하게 되고, 죄악의 길을 끊고 주님을 더욱 가까이하게 된다. 주님의 십자가를 늘 바라보면서 자신을 살펴 회개하는 생활을 계속하게 되어 마음이 정결하고 정직하게 되고, 또한 그것들을 사랑하게 된다.
2) 둘째 의미는 야곱이 이스라엘로 바뀌게 된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야곱은 아직 참 유대인이 아니었다. 그가 하나님의 사자를 만나 밤새워 씨름한 후에 비로소 ‘이스라엘’이라는 새 이름을 받게 되었다. 마치 아브람이 아브라함이 되고 할례의 언약을 받은 것과 같은 이치다.
① 이스라엘이라는 말은 “하나님과 겨루어서 이겼고, 또한 사람과 겨루어서도 이겼다.”는 뜻이다. 우리의 씨름 상대가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먼저 기억해야 한다. 그리고 하나님에게 이겨야 사람에게도 이길 수 있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하나님과 씨름을 할 생각은 하지도 않고 사람하고만 씨름을 하려고 하니까 실패하는 것이다. 아무런 보장이 없는 어리석은 싸움을 하지 말고, 지혜를 받아 먼저 하나님이 우리의 씨름 상대임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을 이기면 사람에게는 저절로 이긴다.
② 무엇으로 이겼는가? 야곱은 밤새워 기도를 함으로 이길 수 있었다. 육신적으로는 에서가 야곱보다 훨씬 더 강하다. 야곱은 육신의 힘으로는 에서를 이길 수 없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께 기도함으로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으로 에서를 이겼다.
③ 우리들도 마찬가지다. 이 세상이 얼마나 악한가? 또 얼마나 더 강한가? 우리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다. 그러면 어떻게 이길까? 기도밖에 없다. 기도로 하나님을 움직이면, 그 하나님이 우리에게 세상을 이길 능력을 주심으로, 또는 하나님이 친히 싸워주심으로 이기게 하신다.
3) 셋째 의미는 육신적인 유대인이 아니라, 영적인 유대인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① 로마서 8:5-13에 잘 설명되어 있다. “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따르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라.”
② 갈라디아서 5:16-18이다.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르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가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너희가 만일 성령의 인도하시는 바가 되면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리라.”
갈라디아서 5:24-26을 보자.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의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박았느니라. 만일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또한 성령으로 행할지니, 헛된 영광을 구하여 서로 격동하고 서로 투기하지 말지니라.”
③ 본문에서는 이면적 유대인이냐, 표면적 유대인이냐의 문제는 “의문에 있지 않고, 영에 있다”고 하였다. 여기의 의문(儀文)이라는 말은 율법의 조문이라든가, 형식문, 예식문 등의 의미다. 영어로는 레터(letter), 곧 ‘글자’라고 번역하였다. 문자에 얽매이는 자가 되지 말고 영에 속한 사람들이 되어야 하겠다.
4) 이면적 유대인이란 말의 넷째 의미는 이사야 41:14-15에 나타난다.
① “지렁이 같은 너 야곱아, … 보라! 내가 너로 이가 날카로운 새 타작 기계를 삼으리니 네가 산들을 쳐서 부스러기를 만들 것이며 작은 산들로 겨 같게 할 것이라.”
② 육신적으로는 지렁이에 불과하다. 그러나 성령의 능력을 받은 사람이 이면적 유대인이다. 하나님은 그를 이가 날카로운 새 타작기계로 만드신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약속하시기를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라고 하셨다.
③ 성령의 능력을 받아야 한다. 하나님의 능력으로 사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 능력은 우리가 상상도 할 수 없는 엄청난 능력이다.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신으로 되느니라”(슥 4:6). 그렇다. 육신의 힘, 인간의 힘으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오직 하나님의 신으로만 한다. 이것이 바른 신앙이다.
3. 우리가 어떻게 해야 이면적 유대인이 될 수 있을까?
1) 우리는 표면적 유대인도 아닌 이방인이라는 사실을 먼저 깨달아야 한다. 이를 에베소서 2장에서는 다음의 세 가지로 설명한다.
① 1-2절,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그 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② 11절 “그러므로 생각하라. 너희는 그 때에 육체로 이방인이요 손으로 육체에 행한 할례당이라 칭하는 자들에게 무할례당이라 칭함을 받는 자들이라.”
③ 12절, “그 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
2)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에 영접하여 성령의 충만을 받아야 한다.
① 회개해야 한다. 형식적 신앙생활을 회개해야 한다. 마음에 숨긴 죄를 회개해야 한다. 마음이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떠나 있는 것을 깨달아 회개해야 한다. 하나님보다도 세상을 더 사랑한 죄를 깨달아 회개해야 한다.
②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한다. 그가 우리의 구주이심을 믿어야 하고, 그가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심으로 우리에게 사죄의 은총을 주시고, 우리에게 구원의 길을 열어주신 것을 믿고, 감사해야 한다.
③ 성령의 충만을 받아야 한다. 성령으로 살기를 소원하면서 늘 기도에 힘써서 더욱 충만한 은혜를 받아야 한다. 성령이 임하시면 권능을 받는다. 소극적으로는 죄를 이기고, 유혹을 이기며, 적극적으로는 주님의 말씀을 따라서 살 수 있고, 주님의 뜻을 깨달아 그 뜻을 행하는 사람이 된다.
3) 진리의 말씀으로 무장해야 한다.
① 복 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주야로 묵상하는 사람이다(시 1:2). 주님의 진리의 말씀이 항상 우리를 지켜 의의 길로 가게 하신다. 또한 우리가 주님 안에 있고, 주님의 말씀이 우리 안에 있으면 우리가 무엇을 구하든지 다 이루어주신다(요 15:7).
② 진리가 없으면 어떻게 될까?
a) 진리가 있는 곳에 자유가 있다고 하셨으니, 반대로 진리가 없으면 자유가 없다(요 8:32). 어떤 자유인가? 가장 중요한 자유는 양심의 자유다. 너무도 많은 사람들이 자기의 양심을 속이고 거역하면서 산다. 양심의 자유를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그래서 가끔 ‘양심선언’을 한다는 사람들이 나오지만, 대다수의 사람들은 그렇게 할 만한 용기도 없다. 돈과 권세와 무력 앞에 무릎을 꿇고 마음에도 없는 일을 하면서 살고 있다. 그러나 진리를 알게 되면 그 진리가 우리의 양심을 강하게 만들고 용기 있게 만들어 주어서 불의에 대항하게 한다. 양심으로 인해 비록 감옥에 갇히게 되는 일도 있고, 모진 박해를 받게도 되지만, 진리의 사람들은 결코 굴하지 않는다. 양심을 속이고, 또는 양심을 거역하고 육신의 안락을 누리느니 차라리 고난을 받겠다고 하면서 그 길을 간다.
b) 또한 진리를 알지 못하면 우리는 거짓에 속아 넘어가게 된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8:44에서 마귀에 대하여 설명하시면서 “저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저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니라.”라고 하셨다. 또한 예수님은 세상 끝 날에 임할 일을 설명하시기 전에 먼저 경고하시기를 “너희가 사람의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마 24:4)라고 하셨다. 말세에는 미혹하는 자가 가득해진다. 대관절 누가 미혹하는 자일까? 구약성경에서나 예수님이 당하셨던 일들을 보면 미혹자는 보수요 정통이라고 자랑하는 자들이었다. 많은 사람들에게 인기를 끌고 환영받는 사람들이었다. 참 선지자와 사도들은 외롭게 살았고, 이단으로 취급되었고, 멸시와 천대와 박해를 받았다. 그러기에 우리가 진리를 알아야 한다. 그 진리가 바로 이 성경 안에 있지 않는가! 성경을 사랑하자. 성경 속에 들어가야 한다. 성경을 주야로 읽고 묵상하고 이 말씀을 붙잡고 기도하면서 깨닫기에 힘써야 한다. 꿈을 잘 해석했던 요셉과 다니엘은 큰 나라의 총리대신이 되었다. 하물며 성경을 바로 해석하는 사람이 되면 얼마나 더 존귀해지겠는가!
c) 진리의 말씀이 없으면 입술로는 주님을 사랑한다고 말하지만, 실은 예수님을 죽이는 자가 된다. 예수님이 친히 증언하셨다. “나도 너희가 아브라함의 자손인 줄 아노라. 그러나 내 말이 너희 속에 있을 곳이 없으므로 나를 죽이려 하는도다.”(요 8:37)라고 하셨고, 이어서 “너희가 지금 하나님께 들은 진리를 너희에게 말한 사람인 나를 죽이려 하는도다. 아브라함은 이렇게 하지 아니하였느니라.”(40절)라고 하셨다.
④ 진리의 말씀은 우리의 참된 양식이다. 이 말씀이 가득한 사람이 영적으로 배부르고 강건한 사람이 된다. 예수님이 마귀의 시험을 물리치실 때에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마 4:4)라고 하셨고, 오병이어의 이적을 행하신 후에는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요 6:55)라고 선언하신 후에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요 6:63)라고 깨우쳐주셨다.
⑤ 또한 진리의 말씀은 우리가 주님을 따르는 참된 표적이다. 예수님은 무리들을 보시면서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요 6:26) 라고 말씀하심으로 그들의 자세가 잘못되었음을 책망하셨는데, 베드로는 “주여! 영생의 말씀이 계시매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이까? 우리가 주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신 줄 믿고 알았삽나이다.”(요 6:68-69)라고 말함으로 그가 주님을 따르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었음을 밝히 보여주었다. 우리도 그런 신앙과 깨우침을 가져야 하겠다. 주 안에서 진리의 사람들이 되시기를 축원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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