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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24일 루카 1,67-79
‘즈카르야의 노래’ 부를 자격; 내 자녀가 세례자 요한이 된다면 하느님을 찬미할 수 있는가?
오늘 복음은 즈카르야가 요한을 낳고 입이 풀려 하느님을 찬미하는 내용입니다.
즈카르야의 찬미는 이렇게 시작합니다.
“주 이스라엘의 하느님께서는 찬미 받으소서. 그분께서는 당신 백성을 찾아와 속량하시고 당신 종 다윗 집안에서 우리를 위하여 힘센 구원자를 일으키셨습니다.”(루카 1,68)
그리고 자기 아들이 메시아의 예언자가 될 것을 기뻐합니다.
메시아의 예언자가 되는 운명은 실로 세상에서 가난하고 박해받고 고통과 십자가의 삶인데 아버지가 이런 삶을 살게 될 아들을 두고 기뻐하는 마음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요?
어쩌면 우리도 자녀가 세례자 요한의 삶을 살겠다고 할 때 기뻐 주님을 찬미할 수 없다면 아직은 즈카르야처럼 혀가 묶인 사람일 수도 있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메시아의 예언자입니다. 메시아의 예언자가 되는 기쁨을 이해하기 위해 먼저 우리는 예언한다는 말이 무엇인지 알아야 합니다.
예언자는 누군가의 말을 전해서 그 사람을 알게 하고 사랑하게 하는 역할을 합니다.
예언자는 사람들의 마음을 돌려놓아 예언하는 대상을 위해 살도록 가르치는 사람인 것입니다.
엘리야는 구약의 대표적인 예언자입니다. 엘리야는 사람들의 마음을 주님께 돌렸습니다.
바알이 아닌 하느님을 위해 살도록 했습니다.
사람은 누군가를 위해 살아야만 하도록 창조되었습니다.
자크 라캉은 “인간은 타자의 욕망을 욕망한다”라는 말을 했습니다.
그리고 “욕망을 손에 쥐는 순간 욕망의 대상은 저만큼 물러난다.
대상은 허상이 되고 다시 욕망만 남는다.
그리고 욕망이 남아있기에 한 인간은 또 살아간다.”라고도 했습니다.
인간은 어떤 대상에게서 나오는 욕망을 충족시켜주며 사는 존재란 뜻입니다.
우리는 ‘타자(他者: 나 외의 다른 이)의 욕망을 충족시켜 타자의 영광’을 위해 산다는 것을 이해 해야합니다.
모든 피조물은 자신 안에서 생존 욕구 외에 어떤 다른 욕구도 만들어내지 못합니다.
물론 생존 욕구도 창조자에게서 주어진 것입니다.
늑대에게 자란 아이는 절대 두 발로 서서 걷고 싶다는 욕구를 가질 수 없습니다.
우리가 두 발로 걷게 된 것은 두 발로 걷고 싶은 마음을 타자, 곧 부모에게서 그 욕구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부모의 ‘뜻’을 따라주면서 우리는 두 발로 걸을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누군가의 뜻을 따라주는 것은 누군가에게 ‘영광’을 올리는 것과 같습니다.
부모님의 뜻을 따라주는 자녀는 부모에게 영광을 올리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물론 모기나 기생충과 같은 것들은 ‘자기 자신의 영광’을 위해 삽니다. 그러니 타자의 영광을 위해 산다고 할 수 없습니다.
맞습니다. 그런 동물은 인간으로 말하면 자아와 자기 자신이 곧 하나입니다.
하지만 인간은 다릅니다.
인간은 자아와 자기 자신이 다릅니다.
자기 자신으로서는 자아가 타자입니다.
그것도 모른 채 타자인 자아의 뜻을 따라 자아에게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산다면 절대 모기나 기생충과 같은 존재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벗어났었더라도 다시 그 모습으로 돌아갑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누구나 자기가 영광을 돌리려는 대상과 한 몸이 되어가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누군가의 뜻을 따라 그 영광을 위해 살아 그 사람과 한 몸이 되고 그 사람의 세상에 속하도록
인도하는 사람이 예언자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어떤 예언자에 의해 어떤 세상에 속하게 되어있는데, 빛과 어둠 두 세상밖에 없습니다.
영화 ‘저스티스리그: 스나이더컷’(2021)은 슈퍼맨, 배트맨, 원더우먼, 아쿠아맨 등의 히어로들이 우주의 악당 다크사이드와의 싸움에 관한 내용입니다.
허황한 내용 같지만 사실 이런 영웅 장르들 안에도
우리 삶이 반영이 안 된다면 아무도 그런 영화를 보지 않을 것입니다.
다크사이드가 지구를 침공하자 영웅들이 뭉칩니다. 여기에서 대장은 배트맨입니다.
하지만 그들의 힘을 감당하기에 지구의 영웅들은 턱없이 힘이 부족함을 깨닫습니다.
그래서 유일한 희망인 죽은 배트맨을 살려내려고 합니다.
지구를 지키려는 목적에서 허락되지 않은 일을 벌이게 된 것입니다.
다행히 슈퍼맨은 살아나고 싸움에서 이겨 일단은 다크사이드의 공격을 막아내기는 하였습니다.
하지만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우리를 혼란에 빠뜨립니다.
미래의 일을 보여주는데 지구는 다크사이드에 의해 황폐해졌고 슈퍼맨이 배트맨과 자신의 옛 동료들을 죽이려고 찾아다니는 것입니다.
왜 슈퍼맨은 다크사이드편에 서게 되었을까요?
그 이유는 슈퍼맨의 아기를 가진 아내 루이스 레인이 배트맨의 방치로 고통스럽게 죽었기 때문입니다.
슈퍼맨에게 지구를 지켜야 하는 어쩌면 가장 큰 원인은 루이스 레인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구인들은 자신의 아내와 아기가 죽는 것을 내버려 둔 것입니다.
이때 그를 위로해 준 것이 다크사이드였습니다.
슈퍼맨은 다크사이드가 좋아서라기보다는 더는 ‘누군가를 위해’, 곧 누군가에게 영광을 주려는 대상이 사라졌고 다만 원한만 쌓이게 되었기 때문에 그 복수심이 다크사이드편에 서게 만든 것입니다.
이때 또 하나의 반전은 배트맨의 부모를 죽인 영원한 원수, 곧 조커가 배트맨 편에 선다는 것입니다.
배트맨은 슈퍼맨도 적이 되어버린 상황에서 지금까지 자신의 적이었던 조커와 친구가 되어야 합니다.
사사로운 감정이 아니라 지구를 지켜내야만 한다는 ‘뜻’ 때문에 원수가 친구가 되는 것입니다.
배트맨과 슈퍼맨이 갈라지게 되는 이유는 슈퍼맨이 더는 지구를 지켜야 하는 이유가 사라진 데 있고,
배트맨과 조커가 친구가 되는 데는 지구를 지켜야 하는 이유가 남아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모든 인간은 ‘누군가를 위해’ 살아갑니다. 그 누군가가 없을 때는 ‘자기 자신을 위해’ 살아갑니다.
복수심을 위해 살아갈 수도 있는데, 이는 자기 자신에게 영광을 주는 행위입니다.
그러나 결국 어떻게 됩니까?
어둠의 세력이 됩니다.
하지만 조커도 지구를 지켜야 한다는 뜻에 합류한다면 빛으로 나오게 됩니다.
조커에게 배트맨은 빛으로 나아오는 예언자였고, 슈퍼맨에게 다크사이드는 어둠으로 가는 예언자입니다.
예언자는 곧 그 세계의 문입니다.
빛이건, 어둠이건 우리를 그 빛과 어둠의 세상에 머물게 만드는 것은 바로 빛과 어둠에서 오는 ‘뜻’에 의해서입니다.
어둠은 피조물로서 피조물은 피조물을 희생시키며 살아갑니다. 그것이 자아건, 부모건, 선생이건, 다크사이드건 상관없습니다.
피조물에서 오는 모든 뜻은 피조물을 파괴합니다. 세상을 보존하려는 뜻은 세상을 만든 창조자에게서만 옵니다.
이것이 빛의 세상입니다. 하느님 나라입니다.
그리스도께서 태어나시기 전까지는 누구도 하느님의 뜻을 따를 수 없었습니다.
하느님의 계명이 있지 않으냐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유다인들이 율법을 지킬 수 있었을까요?
어차피 그 율법을 가지고 내려온 모세도 인간입니다. 모세가 가지고 온 율법을 지킴은 곧 모세에게 영광을 돌리는 것이고, 결국엔 피조물에 영광을 돌리고 피조물을 위해 사는 것과 같습니다.
어둠에서 빛의 세상으로 나아갈 수 없습니다.
그래서 빛 자체이신 분이 당신을 위하고 당신께 영광을 드리며 살라고 사람이 되신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뜻을 따르고 그리스도의 명령을 따름은 모세의 십계명을 따름과 다릅니다.
조커가 빛으로 나아오게 되는 이유는 배트맨의 뜻을 위해서가 아닙니다.
알지 못하는 지구를 지켜내야 한다는
창조자의 뜻입니다.
인간의 뜻이 아무리 사랑하라는 것이라고 해도 그 인간을 위해서 살면 그 사랑은 이기적인 것에 머뭅니다.
오직 빛의 예언자, 곧 그리스도를 사랑하게 하는 일을 하는 사람만이 구원에 다다릅니다.
이것을 이해해야만 우리도 혀가 풀려 즈카르야의 노래를 함께 할 수 있습니다.
참된 즈카르야의 노래를 부르려면 주님의 예언자가 되는 기쁨을 충분히 묵상해야 합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