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V 인기가 식을 줄 모른다. 이제 SUV 시장 확대는 받아들여야 하는 현실이다. 부작용 없는 조화로운 확대가 필요한 때다.
[임유신의 업 앤 다운] 외래종이 국내에 들어와 급증해 생태계를 파괴하는 경우가 종종 생긴다. 황소개구리, 뉴트리아, 큰입배스, 붉은귀거북 등 동물뿐만 아니라 돼지풀, 서양금혼초 등 식물도 해당한다. 들어와서 조화를 이루면 문제가 아니지만 토종 생물의 씨를 말리니 문제다. 요즘 SUV 열풍을 보면서 외래종에 의한 생태계 파괴 현상이 문득 떠올랐다. SUV는 외래종은 아니다. 생긴 지도 오래됐고 자동차 생태계를 이루는 한 종류로 조화를 이뤄왔다. 다만 요즘 들어 이상 폭증으로 세를 불리는 모양새가 마치 외래종 같다. SUV 열풍은 국내에만 국한된 현상도 아니다. 전 세계에 열풍이 뜨겁고 모든 브랜드가 SUV 만들기에 동참한다. 열풍이 한창 진행 중인 만큼 이제는 계속해서 이어질지 따져봐야 할 때다.
먼저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는 SUV가 자동차 생태계에 위협을 가하는 ‘생태계 교란종’인지 여부다. SUV의 증가로 인해 다른 차종이 생산 중단된다면 SUV의 증가가 꼭 반가운 일만은 아니다. 아직은 그런 현상이 두드러지지는 않지만 조짐이 보이기는 한다. 현대자동차 엑센트와 기아자동차 프라이드는 국내 단종설이 나돈다. 해외에는 이미 신모델을 투입한 상태다. 국내 시장에 소형 SUV 코나와 스토닉을 내놓았기 때문에 판매 간섭을 우려해 없앤다고 분석한다. 단종은 아니고 판매 시기 보류라는 이야기도 나온다. 단종이든 판매 보류든 SUV가 비슷한 급 시장에 영향을 미치는 사실은 분명하다.
FCA크라이슬러코리아는 최근 지프만 남기겠다는 견해를 밝혔다. 지난해 피아트는 980대, 크라이슬러는 272대를 판매했지만 지프는 7,012대를 팔았다. SUV 열풍을 바로 보여준다. 크라이슬러는 낡은 300C로 버텨왔고, 피아트도 이렇다 할 성적을 내지 못하고 국내 시장 적응에 어려움을 겪어왔다. 피아트는 판매 대수가 1000여 대 가까이 되지만, 재고 소진을 위한 프로모션 영향이 컸다. 크라이슬러 국내에서도 활발하게 많은 차종을 팔지 않아서 판매를 중단해도 크게 영향을 미치지는 않는다. 본사에서도 정리를 계획 중이라는 소문이 돌 정도이고 신차도 없어서 국내에서 활동을 펼치기도 쉽지 않다. 피아트는 피다 만 것 같아서 아쉬움이 남는다. 두 브랜드를 포기하고 지프만으로도 국내에서 장사가 되니 내린 결정이다. SUV 열풍으로 인한 생태계 교란의 시작을 보는 듯하다.
포드는 지난해 SUV와 크로스오버 확대 정책을 발표했다. 2020년까지 SUV와 크로스오버 13종을 선보이겠다는 계획이다. 올해에도 이와 비슷한 내용을 발표했다. 신차 개발비 상당 부분을 SUV에 배정하겠다는 내용이다. 포드는 2020년까지 미국 자동차시장에서 SUV가 차지하는 비중을 50%로 예상한다. 미국 시장 SUV 비중은 2014년 30%대 초반에서 2016년 40%까지 오른 상태다. 당장 SUV가 아닌 모델이 확 줄지는 않겠지만, 주력 모델의 중심이 SUV로 흐른다는 사실을 예상할 수 있다.
SUV 열풍이 한때 인기에 그쳐서 언젠가는 수그러들까? 시장 상황이 바뀌면 흥하던 차종이 몰락해 버리는 경우를 자동차 역사에서 종종 봐왔다. 유럽에서는 왜건이 여전히 인기지만 미국에서는 미니밴의 등장으로 왜건 시장이 줄어들었다. 미니밴은 7인승 SUV의 영향으로 인기가 예전만 못하다. 그리고 지금은 SUV가 각 차종 시장을 갉아 먹는다.
이미 기본적인 차종 형태는 대부분 나온 터라, SUV에 대적할 만한 완전히 새로운 형태 차종은 나오기 힘들다. 이미 있는 차종 중에 혁신적인 변화를 거쳐 SUV의 인기를 뛰어넘을 만한 것이 무엇일까? 세단, 해치백, 왜건∙∙∙. 딱히 잠재적 가능성을 지닌 차종이 없다.
SUV 열풍은 한동안 계속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자동차업체는 철저하게 수익 위주다. 정통성이나 자존심 등을 우선시하기도 했지만, 어디까지나 과거 얘기다. 요즘처럼 철저하게 수익 위주로 굴러가는 때도 없다. 잘 팔리는 차로 몰리는 현상은 당연하다. 자동차는 하루 이틀 만에 만들어지지는 않는다. 이미 대부분 브랜드가 SUV에 집중하고 있는 이상, 개발 중인 차들이 시장에 풀리고 모델 주기를 채우는 시간까지 고려하면 최소한 수년 동안은 SUV 천국이 이어질 수밖에 없다.
SUV의 종합성도 무시할 수 없다. 예전에는 세단과 SUV는 용도와 성능, 승차감, 안정성, 효율성 등에서 구분이 명확했다. 이제는 기술 발달로 이런 격차가 줄어들었다. 아웃도어에 특화된 차종이라는 이미지도 사라진 지 오래다. 게다가 SUV는 세단과 해치백, 미니밴 등 대부분 차종의 장점을 한데 지녔다. SUV 한 대면 다 된다.
SUV는 미개척 분야가 많고 크기 제한이 없다. 소형부터 대형까지 다 소화해낸다. 해치백은 준중형급 이상 크기는 만들지 않고, 왜건도 아주 작거나 큰 급은 잘 없다. SUV 전문 브랜드가 아닌 이상 라인업에 SUV가 비어 있는 브랜드가 대부분이다. SUV로 채울 여지가 크니 계속해서 새로운 SUV가 쏟아질 가능성 역시 크다.
지금 추세와 전망을 따지면 SUV의 인기가 한 방에 훅 떨어지지는 않으리라고 본다. 오히려 세단이 누리던 일반적인 범용 모델 지위를 갖게 될 가능성이 크다. SUV의 확대는 곧 선택권 확대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SUV 열풍은 환영할 일이다. 단, 조화로운 확대가 전제돼야 한다. SUV가 자동차 생태계에 교란을 일으켜 다른 차종이 사라지는 일은 없어야 한다.
자동차 칼럼니스트 임유신(<evo> 한국판 편집장)
임유신 칼럼니스트 : 자동차 전문지 <카비전>, <모터 트렌드>, <탑기어> 등을 거쳤다. 현재 영국 슈퍼카 전문지 <evo>의 한국판 편집장으로 일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