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평화촌(平化村)의 선조(先祖) 유적(遺跡)
우리 위씨와 평화촌 간의 인연은 역사를 한참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15세 통선랑 휘 덕룡(悳龍) 할아버지께서 장원봉 밑 동동리에서 1414년에 이곳으로 이사하셨을 것으로 보면 2006년을 기준으로 꼭 592년이 된 셈이다. 실로 장구한 세월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습독공 형제의 유적만 남아 있을 정도에 그치고 있다.
오늘 우리 후손들이 이용하고 있는 백산재(栢山齋) 강당과 외평화(外平化)에 있는 추원당(追遠堂)이라는 정각이 그것이다. 습독공이 사셨던 15세기와 16세기에는 산정재가 공의 묘소자리에 있었다. 다만 그 정자 또는 재각이 언제 어떤 연유로 없어진지는 알 수 가 없다. 그 후 현재 백산재 자리에 초가지붕의 재각인 다산재(茶山齋)가 있었다.
초가인 다산재는 너무 낡아 쓰러질 지경에 이르렀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회은공(悔隱公) 이 1936년 자기 집 사랑채를 사비를 들여 뜯어나 재조립해 문중의 재각으로 헌납한 것이다. 문제의 사랑채는 1895년에 지은 장흥부의 동헌(東軒)건물이었다. 이 건물을 1934년 일제가 경찰서를 신축하려고 철거한 것을 공(公)이 구입, 사랑채로 이건한 것이다.
한편 오현조 신실인 하산사(霞山祠)는 1975년에 신축한 건물이다. 우리는 시조공 등 상계(上系)조상의 위패를 모신 신실이 없었다. 그러다 5세조인 충렬공 묘소 인근에 재각인 하산재를 1910년대쯤 마련했다. 그 후 1925년부터 재각 동편에 설단, 시조공과 14세 판사공의 제향을 올렸다. 그리니까 시조공이 동래한 후 1287년 만에 제사를 드린 것이다.
그러나 후손들은 하산재에서 드린 설단제사가 미흡하고 불편하게 느껴졌다. 그 이유는 선조들의 위패를 모실 신실이 가장 아쉬웠다. 다음으로는 재각이 외진 곳에 있어 후손들이 제향에 참여하기가 불편했다. 그래서 여러 해 숙의를 거듭한 끝에 우리의 성지인 백산재에 신실을 짓거나 그 것이 어려우면 제단을 만들어 제사를 드리기로 확정했다.
처음에는 자금이 없어 제단을 만드는 것으로 결정했다. 그 후 전체 후손을 대상으로 모금을 해서 신실을 짓기로 했다. 그런데 덕운(德雲) 황량(滉良) 종원이 딸의 혼수비용 240여만원을 희사, 오늘의 하산사라는 신실을 마련하게 된 것이다. 신실이 마련된 후 당초 시조공, 판사공에서 중시고공, 충렬공, 통덕랑공 등 5위의 선조에게 제향을 드린 것이다.
한편 외평화(外平化)에도 선조들의 유적이 있다. 그곳에는 습독공의 동생이자 행원파(杏園派)의 파조이신 휘 유정(由貞)의 정각인 추원당(追遠堂)이 남아 있다. 지금은 관리가 소홀해서 외롭게 서 있지만 이곳 평화가 우리 장흥 위씨의 성지임을 입증하는 또 하나의 유적이 아닐 수 없다.
2) 성역화(聖域化) 사업(事業)의 시급성(時急性)
위씨의 성지 평화는 옛 모습을 잃어가고 있다. 백산재 입구에는 2층 벽돌양옥이 들어서 찻집으로 성업 중에 있다. 그 뒤쪽으로 기와집 두 채가 있는데 한 곳은 어린이 집으로 이용되면서 여러 놀이기구가 설치돼 유원지로 변해가고 있다. 자칫하면 성지 앞뜰이 유흥음식점과 유원지로 둔갑, 난장판지대로 변할지 모르는 상황에 놓여 있다.
우리가 성지의 품격을 지키기 위해서는 지금 대책을 세워야한다. 자고로 신실과 재각의 주변은 고요하고 경건한 분위기를 갖추고 있다. 그런 분위기를 조성하기 위해서는 앞뜰에 음식점과 유원지가 들어서게 해서는 안 된다. 그럼으로 우리는 문중차원에서 대책을 마련하는 게 시급하다. 우선 두 채의 집만이라도 구입, 유원지화를 막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 도문중이 나설 것을 제의 한다. 시급한 것은 대밭 밑에 있는 두 채의 가옥을 매입하는 것이다. 소요자금은 모금을 하거나 아니면 CD사업을 해서 수익금으로 하든지 그것도 아니면 기묘대동보 잉여금을 투입해서라도 성역화의 저해요소를 없애야 한다.
물론 이 제안에 반대할 종원도 많을 것이다. 사람의 의견은 모두 같을 수 없다. 전적으로 동의할 사람도 있고, 반대할 사람도 있게 마련이다. 그러나 우리가 우려하는 것은 회주사 주변이 술집과 놀이터로 둔갑해서 장터처럽 되지 않을까 하는 노파심에서 그런 것이다.
만일 유흥음식점이 난립했을 때를 가정해 보자. 그 때는 아무리 큰돈을 투입해도 그런 업소를 매입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렇다면 비록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나서자는 것이다. 어찌 보면 현명할지 모른다. 매사는 타이밍을 맞혀야 한다. 한 타이밍을 놓쳤기 때문에 오늘 이런 결과가 나온 것이다.
그런데 또 이때를 놓치면 성역화는 영영 불가능해 질 수 있다. 그래서 늦었을 때가 빠르다고 한 것이다. 우리 모든 종인들은 회주사 성역화만은 남의 일이 아니고 곧 자신의 일이라고 여기고 관심을 가져줘야 한다. 우리의 성지를 남이 만들어 주지는 않을 것이다.
회주사를 비롯 평화리에는 많은 유적이 있군요. 앞으로 체계적이며 합리적인 관리가 필요하리라 봅니다.
정정 하산사--> 회주사
회주사 성역화는 남의 일이 아니란 말에 동감합니다.
종친분들의 많은 관심이 기대가 되고 성역화가 되도록 빨리될수 있길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