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주일 설교 내용 요약
제 목 : 성경적 실천의 현장과 클레로스(294) – 사도들의 실천과 클레로스(273) – 고린도전서 강론(17)
고린도전서 강론(17) – 11장
11장은 누가 머리에 무엇을 써야 하는지 아니면 쓰지 말아야 하는지의 문제와 성만찬의 의미에 대한 사도 바울의 권면의 내용이다.
남자는 머리에 무엇을 쓰면 안 되고 여자는 머리에 무엇을 써야 한다고 권면하는 사도 바울
사도 바울은 내가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것처럼 그대들은 나를 닮아가는 자들이 되라고 권면하고 있다. 그리스도의 모습으로 점점 달라져 가는 것을 의미한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형제들이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자기 자신이 있는 위치까지 오기를 간절히 바라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형제들에게 그대들이 모든 일에서 나를 기억하고 또 내가 그대들에게 전해준 교훈들을 잘 간직하고 있으므로 내가 그들을 칭찬하지만, 그러나 나는 그대들이 각 남자의 머리는 그리스도요, 여자의 머리는 남편이요, 그리스도의 머리는 하나님이신 것을 깨닫기를 원한다고 설명하고 있다.
그러면서 머리에 무엇을 쓰고 기도하거나 예언하는 남자는 모두 자기 머리인 그리스도를 욕되게 하는 것이지만, 그러나 머리에 무엇을 쓰지 않고 기도하거나 예언하는 여자는 자기 머리인 남편을 욕되게 하는 것이며, 이는 머리를 깎아버린 것과 마찬가지라고 또한 설명하고 있다. 만약 여자가 머리에 아무것도 쓰지 않으려면 그 사람은 머리를 깎으라는 것이며, 만약 머리를 깎거나 삭발하는 것이 부끄러운 일이면 머리를 가리라는 것이다. 남자는 하나님의 형상이요 하나님의 영광이니 머리를 무엇으로 덮지 않는 것이 마땅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여자는 남자의 영광이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남자가 여자로부터 비롯되지 않고 여자가 남자로부터 비롯되기 때문이며, 남자가 여자로 말미암아 창조되지 않고 여자가 남자로 말미암아 창조되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에 따라 여자는 천사들로 말미암아 그 머리 위에 권세를 지는 것이 마땅하다는 것이다. 당시에는 에클레시아에 모일 때 천사들도 함께 있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는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고린도의 아프로디테 신전에서는 제사 과정에 여제사들과 성관계를 하는 풍습이 있었는데 여사제는 머리를 짧게 깎았다고 한다. 따라서 여자가 머리를 짧게 자르면 안된다는 것은 고린도의 이런 독특한 문화적 배경 때문에 하는 권면으로 추측할 수 있다. 고린도 자매들 중에도 그런 자매들이 있어서 그것을 막기 위해서 사도 바울이 고린도 전서에서만 이 말을 하는 것이 아닌가 추론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 안에서는 여자와 분리되어 남자만 있을 수 없고 남자와 분리되어 여자만 있을 수 없다고 사도 바울은 설명하고 있다. 왜냐하면 여자가 남자로부터 비롯된 것과 똑같이 남자도 여자로 말미암기 때문이고 모두는 하나님으로부터 비롯되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걸라디아서에서도 남자와 여자는 하나라고 선언하고 있는데 이것은 남자와 여자가 동등하다는 것으로 당시의 문화적인 배경에서 보면 폭탄 선언인 것이다.
그러면서 사도 바울은 그대들 안에서 스스로 판단하라고 하면서 여자가 머리에 아무것도 쓰지 않고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 적절하느냐고 반문하고 있고, 남자가 머리를 길게 기르면 수치가 된다는 것을 본성이 그대들을 가르치고 있지 않느냐고 반문하고 있다. 그러나 만약 여자가 머리를 길게 기르면 자신에게 영광이 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길게 기른 머리는 머리에 쓰는 것을 대신하여 그 여자에게 주신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당시 고린도의 특수한 상황으로 이해하는 것이 옳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이와 관련해서 누가 논쟁하려는 모습을 보일지라도 에클레시아 안에서 이런 문제로 논쟁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주장하고 있다.
성만찬의 의미
11절부터 사도 바울은 성만찬의 문제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다. 이제 내가 제시하는 일에 있어서는 내가 그들을 칭찬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대들의 모임이 더 좋은 쪽으로 가지 않고 더 나쁜 쪽으로 가고 있다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우선하여 성회에 모일 때에 그대들 가운데 분쟁이 있음을 듣고 나는 어떤 부분은 사실이라고 믿고 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대들 가운데 검증을 통과한 사람들이 드러나기 위해서는 그대들 안에 파당들이 있는 것이 필요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처럼 고린도 형제들은 어린 형제들이며 아직 검증을 통과한 사람들이 없는 것이다. 누가 검증을 통과했는지를 알기 위해서는 파당이 있는 과정이 있을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런 과정을 거치면서 누가 검증을 통과했는지 알 수 있다는 것이다. 혼란의 과정을 필연적으로 겪을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그대들이 같은 자리에 있어도 주의 만찬을 먹는 일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한 자리에 모여서 먹어도 그것은 주님의 만찬을 먹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것은 어쩔 수 없이 거칠 수밖에 없는 과도기적인 모습이라고 볼 수 있다. 각자 음식을 준비해 와서 먹는데 각자 자기 것을 먹으니 준비하지 못한 자는 못 먹는 사람도 있고 어떤 자는 술에 취해 있으니 이것이 어떻게 주의 만찬이라고 할 수 있겠느냐고 지적하는 것이다.
그러면서 사도 바울은 그들의 잘못된 모습을 지적하고 있다. 그대들이 각자 먹고 마실 수 있는 집이 없느냐는 것이다. 또는 하나님의 성회를 멸시하고 가진 것이 없는 자들을 수치스럽게 만들려는 것이냐고 지적하는 것이다. 내가 그대들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하겠느냐고 하면서 내가 그대들을 칭찬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사도 바울은 주께서 잡히시던 그 밤에 하신 일을 내가 직접 주님으로부터 받아서 그대들에게 전에 주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하면서 성만찬의 진정한 의미가 무엇인지를 알려주고 있다.
주님께서는 떡을 취하시고 감사드리신 후 떡을 떼고 말씀하셨다는 것이다. "받아서 먹으라.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떼어진 내 몸이다.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억하라."
그리고 식사 후에는 잔도 이와 같이 하시고 말씀하셨다는 것이다. "이 잔은 내 피에 의한 새 언약이다. 이것을 행하여 너희가 마실 때마다 나를 기억하라." 라고 하셨다는 것이다. .(요6:53-58)
사도 바울은 그대들이 이 떡을 먹고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그가 오실 때까지 선언하는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그 빵을 먹거나 주의 잔을 마시는 사람은 주의 몸과 피에 죄를 범하는 것이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은 먼저 자기 자신을 검증하고 그 떡을 먹고 그 잔을 마셔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먹고 마시는 사람은 자기에게 내릴 형벌을 먹고 마시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로 말미암아 그대들 가운데 유약한 자들과 병든 자들이 많고, 잠이 든 자들도 상당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만약 우리 스스로를 철저히 판단하면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판단을 받지 않을 것이라고 사도 바울은 설명하고 있다.
지금 우리가 주님으로부터 판단을 받는 것은 훈육을 받는 것으로서 우리가 세상과 함께 단절되지 않게 하시기 위함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훈육은 온전한 자들로 성장하게 만들기 위해서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대들이 먹기 위하여 모일 때에는 서로를 기다리라고 권면하고 있다. 즉 각자 쌓아온 음식을 먹어버리는 지금의 모습은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성만찬은 하나가 되는 과정이다. 한 떡을 갈라서 먹고 한 잔의 포도주를 나눠 마시는 것은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함께 먹음으로 하나가 되는 것을 의미한다. 주님께서 당신의 살과 피를 택하신 자들에게 나누어 주시는 이유이다. 이러한 성만찬의 의미를 정확히 알고 하나가 되기를 소망하는 사람들만 성찬에 참여하라고 사도 바울은 권면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누구든지 만약 배가 고프면 집에서 먹으라고 권면하고 있다. 그대들의 모임이 단죄되는 일이 없게 하기 위해서라는 것이다. 나머지들은 언제든 내가 가게 되면 정해줄 것이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성회에 모여 성만찬을 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따르는 것인데 그대들의 모습은 성만찬일 수 없다는 것이다. 그것은 단죄의 대상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모이면서 자기 배만 소중히 여기는 것이다. 이것은 종교 의식이 아니라 관계에 대한 이야기이다. 즉 예배라는 종교 의식에 빠지면 안 된다는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되는 관계가 중요하다는 것을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2.공지사항
다음 주 기도는 연동흠 형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