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이선희
보도블록의 붉은 색깔이 사선으로 읽힌다
촘촘하게 박힌 사각의 보도블록 위 고개를 숙이고 걷는다
듬성듬성 사탄과 마구니가 섞여 있는 경전같다
세로로 가로로 한 칸 건너 흰색, 검은색 글자들로 적힌
보도블록 사이에 사람과 사람이 아닌
이들이 있다 나무 보살, 풀 보살, 돌 보살
보도블록 틈새를 비집고 나온
풀 보살들은 경구에 물결로 친 밑줄이다
돌은 동그라미로 그려진 말씀이다
돌의 말씀을 던지는 저 어지신 분이라니
법당에는 잉잉 날아다니는 말들도 더불어 산다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말들을 캑캑 끄집어 낸다
도대체 삼켜지지 않으므로
눈으로, 코로, 입으로 들어간 말들을 퉤퉤 뱉어낸다
벚나무의 빛살과 개나리의 종소리는
너무도 뻔한 후렴구처럼 같다
강아지풀, 개망초는 자주 쓰는 기호 같고
이 길을 따른다는 건 성전의 일이므로
믿을수록 얼마나 쉽고 아름다운가
겨울에는 얼음판이고, 여름에는 홍수에 잠기는
너덜너덜 금이 간 시멘트 길은 찢어진 책의 페이지다
얼마만큼의 위력이 가해져야 책이 찢어지는가
불립의 문자에게 무슨 허물이 있는지도 모른다
이제는 고개를 숙이지 않고 걷는다
풀들의 자라나는 속도나
벤치의 칠이 벗겨지는 경로나
그네 벤치의 삐걱대는 강도를 알 것 같다
웬만한 것은 다 들어 있는 책이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