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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2월 16일 온고을교회주일예배 설교 – 황의찬 목사
《 하나님의 메타포 》
시 18:1~2
〈 잔인한 도시 〉
소설가 이청준이 1977년에 발표한 ‘잔인한 도시’라는 단편소설이 있습니다.
소설 속 주인공은 범죄를 되풀이하며 평생 교도소를 들락거리면서 사는 노인입니다.
형기를 마치고 나와봤자 마땅히 갈 곳이 없습니다.
교도소 앞 공원 벤치에서 잠을 잡니다.
그러던 어느 날 밤 소란스러운 소리에 잠을 깹니다.
어떤 사람이 나무에 서치라이트를 비추면서 새를 잡고 있습니다.
실눈을 뜨고 바라보니, 새들이 멀리 도망치지 못하고 쉽게 잡힙니다.
더 놀라운 것은 새를 잡는 그 사람의 정체였습니다.
그 사람은 형기를 마치고 출소하는 이들에게 새를 파는 장사꾼입니다.
노인도 출소하고 나서 그 사람에게 새를 몇 마리 사서, 방생 했습니다.
교도소를 들락거리지 않고, 새처럼 훨훨 자유롭게 날고 싶은 간절한 마음에서였습니다.
알고 보니, 장사꾼은 새의 날개 속 깃털을 짤라 내고, 다시 잡아 되팔았습니다.
새가 눈앞에서는 공중으로 날아올랐으나, 겨우 근처 공원의 나뭇가지에 앉아야 합니다.
노인은 교도소를 맴돌고, 새는 교도소 인근 공원을 맴돕니다.
노인은 사회에서 지지기반을 잃어버렸습니다. 새는 날개 속 깃털을 잃어버렸습니다.
노인이나 날개 잘린 새나, 다를 게 없습니다. 둘 다, 똑같은 처지입니다.
참 잔인합니다. 그래서 소설 제목이 ‘잔인한 도시’입니다.
소설 속 새 장수는 ‘잔인한 도시’를 연출하는 보이진 않는 손을 상징합니다.
작가 이청준은 ‘잔인한 도시’라는 작품에서 이렇게 비유로써 드러냅니다.
“인간은 날개 꺾인 새다!” ~ 인간은 어차피 날개 꺾인 새와 다를 바 없다!
“새 장수는 잔인한 도시의 연출자이다!” ~ 인간을 비참하게 만드는 구조적 모순이 있다!
이청준의 ‘잔인한 도시’가 걸출한 문학의 반열에 오를 수 있는 비결이 무엇입니까?
대단히 빼어난 비유법을 구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비유법 중에 은유법이 있고 직유법이 있습니다.
‘A는 B와 같다’ 이렇게 하면 직유입니다! ‘A는 B다!’ 이것이 은유입니다.
‘은유법’ 영어로 메타포입니다! 직유법은 ‘시멀리 메소드 simile method’입니다.
직유법에 비해 은유법이 훨씬 강력한 효과를 가져옵니다. 국어시간에 배웠지요?
☞ 오늘 설교 제목이 “하나님의 메타포”입니다. 구미가 당기지 않습니까?
〈 메타포라 〉
오늘의 주제는 은유입니다. ‘메타포’인데요, 메타포, 영어입니다.
영어 메타포(metaphor)는 ‘r’자로 끝납니다. ‘r’ 자가 붙은 이유가 있습니다.
영어 단어는 헬라어가 어원인 경우가 매우 많습니다. 메타포도 그 어원이 헬라어입니다.
헬라어 ‘메타포라’가 어원인데, 영어에서 ‘라’자를 슬며시 잘라먹고 ‘r’자만 남겼습니다.
헬라어 ‘메타포라’는 ‘나르다’ ‘전달하다’는 뜻의 단어입니다.
사람은 평생 무언가를 남에게 전달해야 하는 숙명을 타고 납니다.
♬ ‘겉이 타야 님이 알제, 속만 타면 누가 아나?’
내 속을 꼭 알아줘야 하는 이에게 속내를 정확하고 신속하게 전달해야 합니다.
가장 잘 전달하는 방법으로서 ‘비유법’이 있습니다.
비유법 중에서 가장 강렬한 방법이 바로 ‘메타포’입니다.
“너는 바보 같아, 내 마음을 몰라주니 너는 바보 같아!” 이러면 효과가 뚝 떨어집니다.
“너는 바보야!” “내 마음 몰라주니 너는 바보야” 이래야 직성이 풀립니다. 그렇지요?
이것이 메타포입니다. 은유입니다.
이 메타포는 문학작품은 물론이고 영화에서도 강력한 무기로 등장합니다.
영화뿐 아니라 연극을 비롯한 문학과 예술에서 메타포를 빼면 성립이 안 됩니다.
아까 말씀드린 소설가 이청준의 ‘잔인한 도시’에서도 강력한 메타포가 동원되었습니다.
교도소를 들락거리는 가엾은 노인과 날개 꺾인 새를 메타포 했습니다.
날개를 꺾어 멀리 못 날아가게 하여 되팔아먹는 장사꾼을 ‘잔인한 도시’로 메타포 했습니다.
☞ 오늘 설교에서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메타포의 원조가 누구냐는 것입니다.
누가 가장 먼저 메타포를 써먹었습니까? ~ 설교 제목에서 이미 선포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메타포!’
성경에서 하나님의 메타포를 찾아봅시다.
제 설교를 이만큼 들으셨으면, 금방 떠올라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에덴동산에 있는 두 그루의 나무입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선악과, 따 먹으면 영생하게 되는 생명 나무 생명과(창 3:22)
하나님은 ‘생명과는 영생의 열매와 같고, 선악과는 죽음의 열매와 같다’ 이렇게 안 하십니다.
“생명과는 영생의 열매다! 선악과는 죽음의 열매다!”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창 2:17)
☞ 하나님은요, 강력하게! ‘은유’하셨습니다! ‘메타포’하셨습니다!
〈 열 번이나 되는 메타포 향연 〉
메타포, 원조가 누구시라고요? ~ 하나님!
메타포, 하나님의 피조물입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시고, 하나님이 가장 먼저 사용하셨어요!
하나님은 사람을 창조하시고, 사람에게 메타포로 선포하십니다.
생명과는 영생의 열매다! 선악과는 죽음의 열매다!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시고, 세우신 최초 언약이 ‘선악과 언약’입니다.
하나님이 맺으신 최초 언약을 메타포로, 강력하게 딱, 못 박았습니다.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창 2:17)
이렇게 강력하게 각인시켜야 할 때 쓰는 방식이 메타포입니다.
최초 언약은 직유법(시멀리 메소드 simile method)이 아닙니다.
아주 강력한 메타포입니다. 그래서 오늘 설교 제목이 “하나님의 메타포”입니다.
하나님은 말씀으로만 하지 않으시고, 에덴동산에 생명과 선악과를 두시고 선포하십니다.
예수 믿고 구원 받은 사람들!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를 표현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나에게 어떤 분이시다”를 밝힐 때, “하나님은 나에게 아버지와 같습니다!”
이렇게 직유법으로 합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은 나의 아버지이십니다!” 메타포로 합니다.
그래서 기도할 때, “하나님 아버지!” “아버지 하나님!” 이렇게 메타포로 합니다.
시편 23편에서 “하나님은 나의 목자와 같은 분이다” 이렇게 합니까?
“하나님은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은유, 메타포입니다.
하나님이 메타포로 하셨으니, 우리도 하나님께 예배할 때 메타포로 함이 옳습니다!
오늘 본문 시편 18편은 다윗이 하나님을 향해서 ‘메타포’로 선포한 빼어난 시입니다.
(1~2절) “나의 힘이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2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시요 나를 건지시는 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내가 그 안에 피할 나의 바위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요 나의 산성이시로다”
“와~~~!” 시 18:1~2절은 ‘메타포’의 대 잔치, 메타포의 대향연입니다.
‘나의 힘이신 여호와’ 메타포입니다. 이를 필두로, ‘여호와는 나의 반석’ ‘나의 요새’
‘나를 건지시는 이’ ‘나의 하나님’ ‘나의 바위’ ‘나의 방패’ ‘나의 구원의 뿔’ ‘나의 산성’
☞ 무려 열 번에 걸쳐서 하나님을 메타포로 노래합니다. 다윗 신앙의 진수입니다!
〈 나의 힘이 되신 여호와? 나의 힘이신 여호와! 〉
다윗의 메타포를 보십시오!
‘나의 힘과 같다’라고 하지 않고, ‘나의 힘이신 여호와’
‘여호와는 나의 반석과 같다’ 하지 않고,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여호와는 나의 요새와 같다’ 하지 않고, ‘여호와는 나의 요새시요’
‘나를 건지시는 이와 같다’ 하지 않고, ‘나를 건지시는 이시요’
‘나의 하나님과 같다’ 하지 않고, ‘나의 하나님이시요’ 이렇게 시를 지어 노래했습니다.
‘나의 바위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요 나의 산성이시로다’
☞ 금년에 초등학교 입학하는 손자에게 식사 기도를 해 보라했습니다.
녀석이 주저하지 않고 합니다. 이렇게 기도를 했습니다.
“나의 힘이 되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시편 18편 1절 말씀 아멘!”
온 가족이 웃음이 빵 터졌습니다.
저희 집 거실에는 시편 18편 1절 말씀을 새긴 액자가 걸려있습니다.
손자녀석이 그것을 외워서 그대로, 곁눈질로 흘끔흘끔 보면서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그 액자에 새겨진 말씀은 한글 개역성경 버전입니다.
한글 개역성경에는 ‘나의 힘이 되신 여호와여’입니다.
한글 개역성경은 1938년에 처음 발행되었습니다. 꽤 되었지요?
현대어로 개정할 필요가 생겨서 60년이 지난, 1998년에 ‘개역개정판’이 나왔습니다.
개역성경이 개역개정판으로 버전업되면서, 시편 18편 1절도 약간 수정이 되었습니다.
‘나의 힘이 되신 여호와여~’ 사실은 그대로 두어도 무방합니다. 그러나 수정했습니다.
‘나의 힘이신 여호와여~’ 은유법, 메타포를 더욱 분명하게 한 것입니다.
“나의 힘이신 여호와여~”
☞ 여러분은 어디서 힘을 얻습니까?
한국인은 전통적으로 ‘밥심’이 최고라 했습니다.
밥을 굶고는 힘을 쓰지 못합니다. 그래서 ‘밥심’입니다.
그러나 밥심만으로는 세상을 살아내지 못합니다.
배부르고 등 따습더라도, 사람 구실을 위해서는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예수 믿고 구원받아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감당하려면, 하나님이 주시는 힘이 필요합니다.
우리의 에너지원이 하나님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주신 힘으로,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감당할 수 있습니다.
☞ 다윗이 정확하게 고백합니다. ‘나의 힘이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 하나님의 메타포와 예술 속의 메타포 〉
오늘 설교 제목이 “하나님의 메타포”입니다.
하나님은 어떻게 메타포하십니까, 단순히 말씀으로만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천지를 창조하시는 과정에서부터 ‘메타포’하십니다.
에덴동산에 생명과와 선악과를 두셨습니다.
실제로 생명과 선악과를 창조하시고, “생명과는 영생, 선악과는 죽음”으로 메타포하십니다.
하나님은 “사랑”에 대하여 어떻게 메타포하십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못박힘으로써 메타포하셨습니다.
조건 없는 사랑, 죄인 구원을 위하여 몸소 십자가에 못 박히는 사랑으로 메타포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너를 사랑한다. 너도 나를 사랑하겠느냐?”
‘잔인한 도시’를 쓴 소설가 이청준도 메타포합니다.
인간은 나약하다. 인간은 날개속 깃털을 잃어 날아오르지 못하는 새다.
세상은 악하다. 사람을 죄악의 사슬에 묶어놓는다.
흥부 놀부, 흥부는 선이고, 놀부는 악이다!
콩쥐 팥쥐, 콩쥐는 선이고, 팥쥐는 악이다!
춘향전, 춘향이는 절개이고, 변학도는 탐관오리다!
한국의 고전도 이렇게 ‘메타포’합니다.
☆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메타포의 원조는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받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메타포를 따라합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따라쟁이들입니다.
저도 제가 쓴 책에서 하나님의 메타포를 따라했습니다.
[아담은 빅뱅을 알고 있었다] 제목에서 아담과 빅뱅을 동일시했습니다.
아담 하와에게는 생략된 과거가 있습니다.
아담 하와의 서른살 이전은 하나님이 생략하시고 창조하셨습니다.
빅뱅이론, 138억년 전 대폭발을 일으킨 싱귤레리티에도 생략된 과거가 있습니다.
폭발을 일으킨 싱귤레리티는 누가 만들었는지, 그게 왜 폭발했는지 누구도 알지 못합니다.
아담과 빅뱅의 싱귤레리티는 닮았습니다. 통하는 면이 있습니다.
‘아담은 빅뱅을 알고 있었다!’ 이 제목도 메타포입니다.
☞ 하나님의 메타포, 예술 속의 메타포, 하나님이 시작하셨고 사람들은 따라합니다!
〈 직유법 신앙에서 메타포 신앙으로~ 〉
예수님을 나의 주인으로 영접하면서 시작되는 우리 신앙, 거기에는 발달단계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천지창조와 예수님의 십자가, 부활을 처음에는 전혀 안 믿었습니다.
불신자 단계입니다. 여기서 복음을 접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는데 그것이 진리일까?
예수님이 내 죄를 대신하여 죽으셨다는데 그것이 진리일까?
구도자 단계입니다. 진리를 탐구하다가 믿기로 결단합니다.
믿기로 결단하였으나, 아직은 직유법 수준입니다.
하나님이 창조주이실지 모르겠다. 긴가민가하다!
예수님의 십자가 부활이 역사적 사실일 수도 있지 않을까? 그럴지도 몰라!
직유법 단계입니다. 직유법 단계에서는 이렇게 합니다.
‘하나님은 아버지와 같은 분이야!’ ‘예수님은 구세주와 같은 분이야!’
‘하나님 아버지’를 부르고 시작하는 기도에 미숙한 단계입니다.
① 불신자 단계 ② 구도자 단계 ③ 직유법 단계를 거쳐왔습니다. 어디로 가야 합니까?
종착지는 은유법 단계 곧, ④ 메타포 단계입니다.
‘하나님은 아버지 같은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빼박 아버지입니다!
‘예수님은 구세주와 같아’가 아닙니다. 예수님은 결코 변개할 수 없는 구세주입니다!
메타포 단계에는 우리가 언어의 구사에서 메타포할 뿐 아니라, 삶에서도 메타포해야 합니다.
삶에서도 메타포는 행동으로 하는 메타포입니다. 자신을 메타포로 연출해야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신 것처럼, 우리도 메타포해야 합니다.
시편 18편을 쓴 다윗 왕, 그의 신앙을 우리가 논해 무엇하겠습니까마는,
시편 18편에서 다윗왕의 신앙은 그야말로 물이 오를대로 올랐습니다.
다윗 신앙의 최고봉이 어디냐 한다면 응당 시편 18편입니다.
(시 18:1~2) “나의 힘이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2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시요 나를 건지시는 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내가 그 안에 피할 나의 바위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요 나의 산성이시로다”
메타포 단계의 신앙으로 하나님을 기쁘게 합시다!
언어 뿐 아니라, 삶에서의 메타포를 이룹시다!
“하나님의 메타포”는 하나님의 형상을 닮았으니, 우리의 메타포가 되어야 할 줄 믿습니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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