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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수필사랑 원문보기 글쓴이: 홍억선
* 주의 : 이 원고는 수필창작대학 8기 및 수필사랑 특강 원고입니다. 또한 본 원고의 저작권은 '계간 수필세계'에 있으며, 수필세계 2007년 여름호에 수록할 원고이므로 임의로 무단 전제하면 출판법에 저촉되니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수필문학의 성(城) 쌓기, 그 구체화를 위한 제언
한상렬 / 문학평론가 hsy943@hanmail.net
수필가. 문학평론가. 『수필시대』주간. 한국문인협회 이사, 국제펜클럽한국본부 인천회장, 현대수필창작아카데미 대표. 한굳문학비평가협회, 한국수필가협회 이사, 제물포수필문학회 회장.
저서에 수필집 《미로찾기》, 문학평론집 《절망 속에 꿈꾸기》, 창작이론서 《수필문학 바로보기》 등 50여 권
인천문학상, 신곡문학상. 한국문학비평가협회 문학상 등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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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문학의 위기’ 그 담론 읽기
문학은 과연 죽었는가? 일본의 저명한 문학평론가 가라타니 고진은 ‘그렇다’라고 말했다. 2000년 9월 대산문화재단이 주최한 국제 문학포럼에서 그는 “내 생각에 문학은 이미 죽었다. 그런데도 마치 그렇지 않은 것처럼 문학에 대해 글을 쓰는 것은 양심에 어긋나는 것이다” 라고 했다. 이런 견해에 대하여 수긍할 사람도 있겠지만, 상당수의 작가들은 “문학은 죽기는커녕 오히려 번성하고 있다”는 말로 문학의 지고(至高)하고도 영원함을 강조하는 사람도 있을 줄 안다. 비근한 예로 총 판매 부수 1,000만 부를 넘어선 이문열의 소설을 예로 들 수 있다.
이같이 서로 다른 견해에도 불구하고 왜 독자들은 최근에 발표되는 문학지들을 읽으면서 혹시 ‘문학은 죽은 것이 아닌가’ 라는 의구심을 떨치지 못하는 것일까? 그것은 무엇보다도 문학이 다른 장르에 비해 재미가 없다는 점에서 일 것이다. 감동도 없으며, 유익함도 없고, 무엇을 썼는지 알 수 없는 자기도취에 빠져 자기현시나 자랑거리를 늘어놓기 일쑤라는 것이다. 게다가 주제 의식이 빈약하여 알쏭달쏭한 작가 홀로의 담론에 함몰하여 삶의 의미를 독자에게 전혀 주지 못한다는 것이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이런 글을 썼는지 알 길이 없는 글. 간혹 재미있기는 하지만 그런 경우에는 작품의 질이 떨어지는 글. 그래서 불멸의 예술과 상상력의 근원으로서의 문학은 죽은 것이 아닌가라는 의문― 아마도 이런 자기비하의 근원에는 문학이 급변하는 사회 변화와 독자들의 요구에 적응하지 못하고 변화를 거부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2. 문학적 성(城) 쌓기
문학은 어쩌면 환상(幻像)의 성(城)을 짓는 일이다. 성(城)은 한때 음악이 연주되던 곳이었다. 이렇게 음악이 연주되던 성으로 프랑스의 오뜨 리브(Haute-rive)에는 환상의 성인 ‘빨레 이데알(Palais Ideal)’이라는 성이 있다. 이 성을 축조한 사람은 그 마을의 집배원이었던 페르디낭 ․ 슈발이라는 사람이었다. 그는 이 성을 짓고 성주가 되었다. 1879년이라 전해진다.
프랑스 시골 마을의 집배원이었던 페르디낭 ․ 슈발은 어느 날 우편물을 배달하기 위해 길을 걷다가 그만 돌에 부딪혀 넘어진 일이 있었다. 한참만에야 아픔을 참고 일어난 그의 시선을 잡는 것이 있었다. 매일같이 개울가의 돌밭을 밟고 지나가던 그가 단 한 번도 관심을 갖지 않았던 돌더미였다. 이제껏 그가 눈 여겨 보아오지 않은 기이한 형체의 돌이 그의 시선을 끌었다. 그와 돌과의 첫 만남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돌에 대한 최초의 눈뜸이었다. 그는 그 돌을 주워 집으로 가지고 돌아왔다. 다음날부터 귀가하는 길에는 언제나 그의 배낭에 돌을 채워 날랐다. 돌이 많아지자 그 돌에 조각을 새기기도 하고, 기둥을 쌓기도 했다. 그때부터 그 돌은 쪼아지고 쌓여 그의 꿈속에 깊이 잠들고 있었던 성곽이 구축되기 시작하였다. 작은 조각에서 큰 조각으로, 조각이 기둥으로, 벽으로, 층계로 그리고 지붕으로, 마침내 기적의 성으로 솟아올랐다. 그 성의 이름은 다름 아닌 ‘이상의 성(Palais Ideal)’이었다. 차라리 ‘환상의 성’이 적절했다.
이렇게 한 사람의 집념과 꿈으로 태어난 환상의 성이 ‘빨레 이데알’이다. 그러나 이 성은 그렇게 쉽게 축조된 것이 아니었다. 가정을 돌보지 않고 성의 축조에 전념했던 그는 사랑하는 외아들과 아내를 잃게 된다. 그제야 그는 충격과 슬픔으로 아들과 아내를 위한 묘각(墓閣)을 짓기 시작했다. 돌로만 지어진 사랑과 슬픔의 유택(幽宅)은 이 지상에 존재하는 가장 아름다운 묘각이었다. 이를 완성하고서야 그는 다시금 성을 짓기 시작하였고, 이 외로운 작업은 그의 나이 일흔이 넘어서야 끝을 맺었다. 이렇게 슈발의 성은 한 사람의 꿈이 얼마나 황홀한 열매를 맺을 수 있는가를 우리에게 보여준다.
성은 돌로만 쌓는 것은 아니다. 위대한 벽화와 시, 소설과 음악 작품도 드높은 성이며, 보들레르의 <풍경>이나 렘브란트의 <나무 세 그루>, 미켈란젤로의 <천지창조>, 바하의 <마태 수난곡>도 모두 하나의 성이었다. 위대한 성에는 긴 회랑의 무서운 정적과 이끼 낀 돌담이며 수많은 사연들이 풀포기 속에 잠겨 있는 후미진 정원에 삶의 비애와 열락(悅樂)이 숨어 숨쉬고 있다. 어찌 이런 작가의 성을 두고 문학의 위기를 말하겠는가?
한 편의 수필은 작가의 마음을 진정으로 대변한다. 이는 수필이 진솔한 인간 체험에의 언어적 형상화로 그 자신을 진심으로 드러내 주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수필은 작가의 마음이라 해도 좋으며, 이런 작가의 마음을 진솔하게 표현하는 수필은 좋은 수필이라 할 수 있다.
지금 우리는 21세기라는 이름으로 우리에게 다가온 새 시대에 살고 있다. 오늘이 어제와 다르고 내일 또 어떤 변화를 몰고 올지 가늠키 어려운 시대에 살고 있다. 우리는 그런 시대에 몸을 내던진 사람들이다.
21세기는 단순히 과학 기술에 의해 이어져 나가는 사회가 아니다. 시적 상상력과 문학적 창조력에 의해 생명력을 갖게 될 그런 사회로 예측된다. 그러므로 생명력을 갖지 못한 것들은 외부적 충격과 환경 변화에 의해 부서지고 파괴될 것이다. 따라서 21세기의 한국문학은 이런 생명력을 갖기 위해 스스로 변화해야 할 운명 속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수필문학의 경우에도 역시 그러하다.
문학의 위기를 말하는 비장감은 문학이야말로 모든 문화의 중심에 있어야 한다는 고정관념과 경직성에서 출발한다. 지금 지구촌은 탈 중심 ․ 다원적인 평등의 세계로 가고 있다. 더구나 멀티미디어가 의사소통의 핵심적 도구로, 디지털 방식에 의해 세계는 혁신적인 변화를 가속화해 간다. 그러므로 새 시대에는 새로운 문학적 환경에 대처할 수 있는, 감정적인 호소나 선험적인 이론을 통해서가 아닌 실제 작품들을 통해서 그 구체적인 모습을 드러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이런 변화에 문학은 민감하지 못한 듯 하다.
수필문학은 말할 것도 없이 정서적 이미지와 지적 이미지의 결합으로 되어 있다. 그 중에서도 유독 지금까지의 수필은 정서 쪽에 상당한 무게를 실어왔다. 여기에 ‘신변’이라는 취약성이 수필문학을 주변문학으로 폄하(貶下) 하게 하는 빌미를 제공해 왔다고 할 수 있다. 이런 경향성은 우리의 수필이 이젠 정서에 바탕을 두기보다는 지성을 강조한 수필의 창작을 요구하고 있다. 이는 새 시대에 걸 맞는 내용과 기법의 변화 이른바 패러다임의 변화를 요구하게 한다. 한 마디로 탈을 벗어야 할 때라는 말이다.
3.워홀의 마법―캠프(camp)와 키치(kitsch)
문학은 무의미한 것들의 유의미화 과정이 필수적이다. 스위스의 소설가 알랭 드 보통의 연애소설 《우리는 사랑인가》에는 주인공 엘리스가 등장한다. 그는 남녀가 사랑에 빠지고 헤어지는 과정을 수술을 집도하는 내과의사처럼 섬세하게 묘사하고 있다. 여주인공의 입을 통해 전달하는 메시지는 다름 아닌 현대미술의 정수다. 한 마디로, 그것은 ‘무의미한 것들의 유의미화’이다. 이는 고정관념의 탈피일 것이다. 작가만의 독창적인 상상력을 발휘하여 대중문화의 다양한 이미지들을 예술로 만들어 지금까지 예술이란 교양 있고 품위 있는 계층만이 향유하는 것이라는 고정관념을 과감히 깨뜨리는 변화가 아닐 수 없다.
두물머리. 경기도 남양주 양수리에 가면 북한강을 끼고 양 쪽으로 러브호텔들이 즐비하다. 유럽의 고풍스러운 성채의 모습을 한 모텔들이 마치 외국에 와 있는 듯한 착각을 일으키게 한다. 일본의 큐슈의 하우스덴보스에서 본 건물들의 모습과 흡사하다. 덴마크의 어느 도시를 떠나놓은 듯 그렇게 외국풍의 건물들이 들어선 가운데 서면, 잠시 공간적 거리와 시간의 경계를 뛰어넘은 듯한 착각을 하게 한다. “너희들만 즐기냐? 너희들만 잘났냐? 어디 나도 좀 맛보자!” 라고 말하는 듯하다. 그래서 장 보드리야르는 “키치가 존재하기 위해서는 그것에 대한 수요가 있어야 되는데, 이 수요은 사회적 지위 이동에 따라 결정된다. 사회적 이동이 없는 사회에는 키치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했다. 1910년대에 이르러 국제적인 용어가 된 이 ‘키치’라는 독일어가 지금과 같은 의미를 갖게 된 어원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키치(Kitsch)는 1872년경부터 유행하기 시작한 용어로 ‘속된 것', ‘가짜’ 또는 ‘본래의 목적에서 벗어난 것’ 등의 의미로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즉 고상하고 품위 있는 패션과 반대의 개념으로 세련된 맛을 외면하고 지나치게 산만한 장식을 통해 일부러 저속함을 보이고자 하는 패션을 의미한다. 이런 감각은 주로 경제의 고도 성장기를 맞은 나라에서 갑자기 물질적 풍요로움에 권태를 느껴 일어나게 되는 경우다. 마치 물질문명을 조롱하기라도 하듯 천박한 복장과 액세서리로 장식하게 된다. 그러므로 키치는 싸 보일수록 그에 가까우며, 싫증을 내기 쉽고 싫증나면 언제든 마음의 부담이 없이 버리겠다는 생각을 하게 한다. 이는 물리적인 해석일 뿐, 그 이전에 ‘싸다’라는 언어의 뉘앙스에는 ‘무거워 보이지 않고 가벼워 보이는 패션’이라는 의미가 포함된다.
움베르토 에코 역시 “키치는 오히려 미학적 체험이라는 외투를 걸친 채 예술이라도 되는 양 야바위 치면서 전혀 이질적인 체험을 슬쩍 끼워 놓음으로써 감각을 자극하려는 목표를 정당화하려고 하는 작품”이라는 정의를 내리고 있다. 여기서 에코는 한 발 더 나아가 “감동의 사전 조작과 주입”에 주목하면서 “쉽게 소화할 수 있는 예술의 대용품인 키치는 어렵게 이해하려고 애쓰기보다는 별로 힘들이지 않고 미의 가치 체계를 즐길 수 있기를 바라는 게으른 청중에게는 이상적인 음식이다.”라고 보고 있다.
어떻든 현대인은 집중적인 예술 경험보다는 일종의 이완작용으로써 쉽게 소비할 수 있는 쾌락의 경험을 요구하는 측면이 비교적 강하다. 그래 새로운 것, 예쁘장한 것, 신기한 것, 감각적인 것 등 원칙적으로 개방적인 쾌락의 경험을 추구하는 중산층의 특수한 쾌락주의에 가치를 둔다. 여기에 이발소 그림의 진실이 담겨 있다고 하겠다.
키치를 떠올리면 함께 상정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캠프(camp)이다. 미국의 저명한 철학자이자 문화비평가인 손택이 『파티잰 리뷰』 1964년 가을호에 발표한 <캠프에 관한 노트>는 그해 12월 11일자 『타임』지에 소개될 정도였다. 그녀를 일약 유명한 인물로 만든 에세이였다. 도대체 캠프란 무엇인가?
영어사전에는 캠프란 “케케묵거나 속된 것이 오히려 멋있다고 보기”, “기상천외한 것이나 케케묵은 것 또는 속된 것의 좋은 점을 인정하기, 그러한 태도, 행동, 예술 표현”이라 하고 있다.
58개의 짧은 글로 구성된 <캠프에 관한 노트>는 앤디 워홀의 팝 아트작품이 나오면서 이를 묘사할 캐치프레이즈로 사용되기 시작하였다. 워홀은 “나는 소비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라는 명제를 예술의 차원으로까지 끌어올리려고 했던 인물이었다. 즉 마릴린 먼로의 얼굴이나 광고를 예술화하려는 워홀의 장난을 손택은 ‘캠프’라는 용어로 사용했던 것이다.
강준만은 “캠프의 세계에서 사용되는 슬랭(속어)을 일반화시키고자 시도한 것으로 이의 본질은 비자연적인 것, 인조적인 것, 그리고 과장에 대한 애정에 있으며, 그것은 양성(兩性) 스타일의 승리를 의미한다.”고 보고 있다. 즉 캠프는 경박한 것에 대해 진지하고 진지한 것에 대해 경박하며, 나쁜 취향의 좋은 취향이 존재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따라서 캠프의 궁극적인 명제는 “그것이 끔찍하기 때문에 그것은 좋다.”는 것이다.
키치가 수많은 팝 아트 작품이 제작되는 기폭제가 되었지만, 팝 아트는 캠프에 더 가깝다고 하겠다. 오창섭은 팝 아트는 키치적 소재를 차용한 예술이지만 그 이면에 존재하는 심리는 키치와 반대로 흐르고 있다고 하여, 키치가 고급예술의 효과를 모방하는 위에서 아래로의 흐름이라면, 팝 아트는 통속적인 대중문화를 소재로 추상표현주의를 비평하는 아래에서 위로의 흐름이라는 것이다.
어찌되었든, 현대문화는 키치와 캠프라는 대중미학의 선 위에 있음은 명확하다. 이러한 사실은 예술 전반에 걸친 고정관념의 일탈을 보여준다고 하겠다. 문학의 측면에서도 이런 경향성은 오늘의 문화를 지배하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따라서 미래의 수필문학의 창작은 이런 문화적 양태를 염두에 두고 생산되어야 할 것이다. 무의미한 것에 대한 유의미화. 이는 말할 것도 없이 수필문학이 지향해야 할 바일 것이다. 수필문학의 의미화 과정은 이런 문화 현상을 짚어내면서 경계를 풀어나가는 과정이 되어야 할 것이다. 마땅히 오늘의 수필작가는 이런 문화 읽기에서부터 출발해야 할 일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독창적인 상상력을 발휘하여 대중문화의 다양한 이미지들을 예술로 만드는 고정관념을 깨뜨리는 변화가 필요할 것이다. 바로 워홀의 마법일 것이다.
4. 장벽 깨기- 문학에서의 이종결합
대중문화의 저속함과 함께 또 하나 21세기의 문학은 스스로의 아집과 패각(貝殼)을 깨고, 타학문이나 장르와 교류를 활발히 진행하는 복합예술이 될 것으로 보인다. 이른바 퓨전이 그것이다. 문학과 영상, 문학과 음악, 나아가 문학과 미술이 혼합될 뿐만 아니라, 예술과 테크놀로지, 그리고 인간과 기계의 합일 가능성도 문학의 새로운 영역으로 부상하게 될 것으로 보고 있다. 이런 퓨전화는 이른바 이종결합(異種結合)으로 혼용, 혼합을 의미한다. 《장미의 이름》의 작가 움베르토 ․ 에코도 21세기에는 갖가지 문화가 뒤섞인 잡종적 혼합이 될 것이라고 예언하고 있다.
이런 경향에 대하여 이어령은 2000년 벽두「동아일보」에 기고한 글을 통해 “한 마디로 좋은 의미든 나쁜 의미든 21세기는 통제 불능의 시대라고 할 수 있다. 국경 안이라고 해도 전통적인 제품의 개념까지도 그 경계가 무너져 전화기에 라디오가 달리고 냉장고에 인터넷이 결합되는 하이브릿드 상품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젓가락이 아니라 포크로 스파게티를 먹는 아이들을 관찰해 보면 미래가 어떤 모습으로 찾아오고 있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라고 말하면서 이미 우리 앞에 퓨전 시대가 도래 해 있다고 말한 바 있다.
그렇다. 요즘 아이들은 국수와 냉면까지도 포크로 먹는가하면, 콜라에 밥을 말아먹기도 한다. 여기서 스파게티문화를 극대화하고 현대화하면 요즘 유행하는 퓨전 메뉴가 될 것이다. 한식과 양식의 이질적인 요리 시스템을 한데 섞어서 새로운 맛을 창출하는, 그래서 심지어 퓨전(Fusion)을 미래의 비전(Future Vision)이라고 풀이하기도 한다. 집이 양옥으로 변하고 옷이 양복으로 바뀌는 시대에도 음식만은 밥과 김치로 문화의 전통성을 이어왔지만, 이제는 그 의식주 문화 가운데 가장 보수적인 식문화마저 퓨전화 되고 있다.
이런 이종배합(異種配合)의 현상은 음식문화만이 아니라 21세기를 움직이는 키 워드로 작용한다. 그렇다면 문학의 미래를 두고 볼 때 과연 문학은 어떤 길을 밟을 것인가? 하는 의문에 접하게 된다.
2000년 1월11일 MBC 텔레비전은 뉴스를 통해 음악과 미술이 컴퓨터에 의해 이종(異種)의 요소를 하나의 목적으로 합치함으로써 새로운 예술세계를 보여주는 변화의 모습을 방영한 일이 있었다. 대중음악에서의 퓨전은 이미 퓨전 재즈니 음악이라는 용어로 사용되어 왔다. 그럼에도 문학이라는 영역에서는 보수적인 성격에서 문을 열지 않았던 것이 사실이다. 변화를 수용하기에 시간을 필요로 하는 문학적 특수성 때문이다. 시대는 분명 이종(異種) 배합을 통해 개성을 찾아가는 시대로 변모하고 있지만, 그런 변화에 둔감한 문학은 아리스토텔레스의 “문학은 현실을 반영한다”는 말만을 금과옥조로 하여 왔는지도 모른다. 여기서 문학의 퓨전화를 미래의 방향으로 받아들일 수 있겠다. 결국 문학의 퓨전화는 이종 배합(異種配合)으로 혼용, 혼합을 의미한다.
이런 이종결합 퓨전이야말로 종래와 같은 독자성에서 장벽을 깨는 일이 아닐 수 없다. 모든 문화 현상에서 장벽 깨기. 크로스 오버가 진행되듯, 수필문학도 이제 고정관념에서 벗어나 장벽을 깨야할 때이다. 곧 문학적 낯설게 하기를 통해 새로운 수필쓰기를 모색해야 할 때이다.
5. 새로운 수필쓰기의 방향-문학적 낯설게 하기
자, 그렇다면 수필문학에서의 위대한 성(城) 쌓기는 어떻게 이루어질까? 한 마디로 말해 수필작가는 새로운 변화에 민감해야 할 것이다. 지금까지의 고정관념에서 과감히 탈피해야 한다. 창조는 정체에서가 아니라, 변화에서 이루어진다. 그 변화의 한 축을 형성하는 것이 다름 아닌 ‘낯설게 하기’ 혹은 ‘생소화’ 일 것이다.
5-1. 전제-‘다르게 생각하기’의 문학적 상상력
문학적 상상력은 일종의 감수성이다. 여기 감수성이란 미적 대상에 대한 인식을 위한 기본 능력, 외계의 자극을 직관적으로 받아들이는 능력을 말한다. 작가는 이런 감수성을 통해 발견한 소재의 이미지를 통해 문학적 상상력을 깨우치게 되는 동기와 계기를 갖게 된다. 즉 자신의 체험과 이상을 작품 속에 구체화하기 위해 상상력의 기능에 의존한다.
이런 상상력의 기능은 일반적으로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현실에서 만날 수 없는 세계 즉 지각에도 없고 기억에도 없는 새로운 세계를 구체적으로 표현하는 기능이다. 예술이 현실의 단순한 모방보다는 새로운 표상을 제시하는 영혼의 감성을 중요시한다는 점에서 영감(靈感)이나 직관과 비슷하다. 둘째로, 체험을 표현하는 의식의 한 양식으로서의 기능으로, 칸트는 감각적 지각의 자료들을 사유 속에서 능동적으로 종합하는 능력이 상상력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어떻든 상상력이란 작품을 이루게 하는 정신적 능력을 말한다. 시에서의 이런 창조적 상상력은 새로운 지각과 낡은 체험을 결합하여 직관처럼 순식간에 새로운 체험을 얻고, 다시 반복되는 상상작용을 통하여 이를 결합하고 종합하여 한 편의 통일체로 작품을 완성시키게 된다. 특히 소설에서의 상상력은 무한히 펼쳐지며, 체험 중심의 수필에서도 이런 상상력은 수필의 일상성을 벗어나는 길이 될 것으로 보아 상상력의 발현을 작품을 통해 살펴보는 일은 의미 있는 일이 될 것이다.
최근의 광고 속에는 다분히 에로티시즘적인 이미지가 사용된다. 이탈리아 밀라노의 광고제작사인 BBDO가 만든 ‘르판체스코 비아시아’란 핸드백 광고를 보면 이를 알 수 있다. 이 광고는 핸드백의 지퍼가 열리는 아이디어를 생각해 냈음직하다. 그런데 그 모습이 여성의 성기와 결부시켜 상상력이 엉뚱하면서도 탁월하게 나타나고 있다. 깊은 동굴의 문이 열리듯 핸드백의 지퍼가 열린다. 그런가하면, 영국 런던의 사치&사치에서 시작한 에로틱숍 ‘코코드메르(co co de Mer)’ 광고는 양배추를 통해 여성의 성기를 형상화하고 있다. 부엌에서의 판타지란 카피가 첨부된 이 광고는 양배추의 잘린 단면에서 여성의 성기 형상을 추출해 내는 에로틱한 상상력을 발휘한다. 일종의 합법적인 포르노라고나 할까. 실체를 보여줄 수 없는 메타포를 빌려온 듯 은밀하고 내면적일수록 까발리고 싶은 욕망을 드러내고 있다고나 할까. 아무튼 그 상상력의 탁월함에 놀라게 한다. 이런 경향은 전통적인 고전주의에서 새로움을 추구하고자 하는 인간의 본성이 발휘되고 있다 하겠다. ‘다르게 생각하기’의 좋은 예일 것이다.
5-2. 문학적 ‘낯설게 하기’의 실제
수필문학에서의 위대한 성(城) 쌓기는 어떻게 이루어질까? 한 마디로 말해 수필작가는 새로운 변화에 민감해야 할 것이다. 지금까지의 고정관념에서 과감히 탈피해야 한다.
문학에서의 형식주의를 표방한 쉬클로프스키는 ‘낯설게 하기’를 문학성의 요체로 보고 있다. 언어를 특별한 방식으로 사용하는 데서 그 특징을 찾을 수 있다고 보고 문학의 형식적 요소인 소리, 이미지, 리듬, 구문, 음보, 운, 서술기법과 같은 장치들이 모두 ‘낯설게 하기’의 효과를 갖고 있다고 보고 있다. 즉 “문학 언어는 ‘일상 언어에 가해진 조직적인 폭력’이며 문학 언어를 다른 담론(談論) 형식들과 구별해주는 것은 그것이 일상 언어를 다양한 방식으로 변형시키고 뒤틀어 놓는다는 것이다. 문학 장치들의 압력을 받고 변형된 일상 언어는 낯설게 되고 생소화 된 언어이다.” 라고 하였다.
이제 이런 문학적 낯설게 하기의 구체적 예를 들어보기로 하겠다.
제게는 어린 시절 이런 경험이 아직도 남아 있습니다. 학교 운동장에서 저는 이따금 허리를 굽혀 가랑이 사이로 세상을 바라보곤 했습니다. 그러다가 그만 지치면 철봉대 위에 박쥐처럼 거꾸로 매달려 푸른 하늘을 올려다보곤 했습니다. 그때 제가 거꾸로 바라본 세상은 전혀 다른 감각이었습니다. 참을 수 없이 답답하고 짓눌렸던 세상이 아득하게만 보였고 사물들의 윤곽 자체마저 지금껏 보아오던 것보다 더 이름답고 신선하며 뚜렷해 보였습니다. 그것은 변함없이 반복되던 생활에 경이로움을 주는 것이었습니다. 조금만 자세를 달리하여도 전혀 엉뚱한 모습으로 다가오는 요지경 속과도 같았습니다. “자세가 달라지면 지금껏 길들여졌던 감각기능이 달라진다고 「카․실러」도 말하지 않았던가? 습관화된 감각. 조금만 위치를 바꾸어도 그 대상은 같은 시각 느끼는 반응에 차이를 보인다는 이야기다.
필자의 수필집에 수필 한 대목이다. 허리를 굽혀 역도(逆倒)된 세상을 바라보아야 한다. 낯선 세상 바라보기다.
여기 문학적 ‘낯설게 하기’는 45도의 각도로 걸려있는 그림을 통하여 설명된다. 관찰자는 비스듬히 걸려있는 실제의 그림만 인지하는 것이 아니고, 정상적으로 걸려있는 모습도 상상 속에서 동시에 떠올리게 된다. 이 두 가지의 근본 요소를 자동적 영상(These)과 새로운 상(Antithese)라고 한다. 관찰자는 이 두 가지 요소를 비교하면서 그 차이점을 확인하며 전체적으로 하나의 새롭고 복합적인 기호를 탄생시키게 된다. 이를 문학적 ‘낯설게 하기’라 하겠다. 이런 기호학의 원리는 오늘의 수필문학에서도 적용되어야 할 것이다. 이는 수필문학의 변화의 바람이기도 하다. 하나의 틀에 안주하려는 나태를 부정하고 새로운 변화를 시도하자는 움직임이 지금 우리 수필문단에서도 불어야 한다. 윤재천이 “수필가는 변화의 주모자”가 되어야 한다고 역설한 바와 맥을 같이 한다.
수필의 자조적, 신변적인 특성은 생래적인 것이다. 문제는 이를 어떻게 미적 형상화의 과정을 거쳐 의미화해 내느냐에 달려 있다. 보통의 신변적 화소일망정 소재를 보는 특별한 ‘눈’, 이를 윤오영은 “피사체를 보는 눈”이라고 하였다. 통상의 고정관념에서 일탈하여 독자로 하여금 ‘생소하게’ 느껴지도록 하는 변화가 필요하다. 여기에 지금까지 우리가 보아오던 시선과 전혀 다른 ‘낯섬’의 풍경은 독자로 하여금 신선한 충격에 빠지게 할 것이다. 45도의 각도로 걸려있는 그림을 보는 시선이 그렇고, 허리를 굽혀 역도(逆倒)된 세상을 바라보는 작가의 눈이다.
비자반 일등품 위에 또 한층 뛰어 특급품이란 것이 있다. 반재며, 치수며 연륜이며 어느 점이 일급과 다르다는 것은 아니나, 반면에 머리카락 같은 가느다란 흉터가 보이면 이게 특급품이다. 알기 쉽게 값으로 따지자면, 전전(戰前) 시세로 일급이 2천 원 전후인데, 특급은 2천 4, 5백원, 상처가 있어서 값이 내리기는커녕 오히려 비싸진다는 데 진진(津津)한 묘미가 있다.
반면이 갈라진다는 것은 기약치 않은 불측(不測)의 사고이다. 사고란 어느 때 어는 경우에도 별로 환영할 것이 못된다. 그 균열(龜裂)의 성질 여하에 따라서는 일급품 바둑판이 목침(木枕)감으로 전락해 버릴 수도 있다. 그러나 그렇게 큰 균열이 아니고 회생할 여지가 있을 정도라면 헝겊으로 싸고 뚜껑을 덮어서 조심스럽게 간수해 둔다. 1년, 이태, 때로는 3년까지 그냥 내버려 둔다. 계절이 바뀌고 추위, 더위가 여러 차례 순환한다. 그 동안에 상처 났던 바둑판은 제 힘으로 제 상처를 고쳐서 본디대로 유착(癒着)해 버리고, 균열진 자리에 머리카락 같은 흔적만이 남는다.
―김소운, <특급품(特級品)>에서
이 수필은 화소인 ‘비자반’이라는 대상을 보는 시선의 생소함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누구나 흔히 쓸 수 있는 소재에 대한 고정관념에서 벗어나 그만의 독특한 시선이 나타나 있다. 더구나 소재의 특성을 인간으로 대우하면서 소재를 의미화 내고 있다. 신변적 소재가 분명하지만, 이를 자기화해 내고 의미를 부여함으로써 소재가 생생하게 생명성을 갖게 한다.
‘낯설게 하기’는 상식적이고 규격화된 상념을 거부한다. 그리하여 기계적인 행동관습을 극복하여 의식적 경험을 회복시켜 나갈 때에 독자는 이런 세계를 새롭게 발견하고 그 현상학에 신선하게 반응할 수 있다. 엄현옥의 수필 <놀이터>에서는 좋은 예다.
긴 직사각형의 나무 의자에 앉아 본다. 등받이도 없다. 평평한 의자는 길이가 내 키와 비슷할 듯 싶다. 한 번 재보고 싶어 슬며시 누워 본다. 두 팔을 붙이니 전신을 눕힐 만 하다. 한 몸 뉘기에 부족함이 없다.
가까스로 모을 누워본다. 옆으로 20층 건물이 비스듬히 보이고 밤하늘도 좁아 보인다. 평소에는 오려다보면 머리가 아찔할 정도로 거대해 보이던 아파트였다. 계속 올려다보기가 버거울 정도로…. 그러나 아니었다. 누워서 바라본 건물은 높지도 거대하지도 않았다. 그곳에서 토닥거리며 사는 수많은 사람들, 몇 년을 아니 수십 년에 걸쳐 마련했을 소시민의 안식처는 그저 아담한 시멘트 건물이었던 것이다.
어둠은 점점 시야를 좁혀온다. 내가 누운 나무의자는 어느새 편한 요람이 된다. 마지막 내 몸을 뉠 칠성판(七星板)이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든다. 북두칠성을 본떠 일곱 개의 구멍을 뚫는다던가.
―엄현옥의 수필 <놀이터>에서
아파트 놀이터의 등받이 없는 나무의자. 그 의자에 앉아 화자는 여러 가지 상념에 젖어 있다. 의자에 누워 화자는 칠성판을 떠올린다. 정형화된 상념에서의 일탈이 독자를 사뭇 낯설게 한다. 일상적 현대인으로는 천착할 수 없는 삶의 무게요, 의미의 반추다. 일상인의 기계적인 행동반경에서 벗어난 새로운 세계의 발견이다. 이런 고정 관념으로부터의 벗어남이 독자를 보다 깊은 삶의 체험적 현장으로 이끌게 한다. 좋은 수필은 이렇게 신변의 일에서 출발하지만 작품이 주는 의미는 깊고 넓다. 자잘한 일상사가 철학이라는 옷을 입고 새롭게 태어난다. 때문에 이런 수필이 주는 감동은 그만큼 크게 마련이다.
수필문학의 소재가 일상을 벗어나지 못한다면 변화는 찾기 어렵다. 남홍숙의 <한문장 +한문장 = 더 아름답다>는 소재가 사뭇 낯선, 어원을 근간으로 하여 전개되고 있다.
아이들에게 “아름답다는 게 어떤 걸까‘하고 물었다.
A : 노는 것
B : 돈 많은 것
C : 자연 그대로인 것이라고 대답했다.
거기서 한 문장씩 더해보라고 했더니
A : 노는 것 +사이좋게
B : 돈 많은 것 +혼자만 쓰지 않고 봉사활동도 하는 것
C : 자연 그대로 +자연과 사람이 하나로 어울ㄹ려 지내는 것이라 했다.
아름답다의 어원은 세 갈래다.
• 아름 = 알음 = 앎 = “지식인답다.”
• 고어에서 아름은 나를 가리키는 말로. “나답다.”
• 팔을 한 아름 벌려 누군가를 안아준다는 데서 파생한 말로 “안아준다는 것은 사랑”이고 그 사랑이 아름다움이라는 것이다.
아이들이 말한, 하나의 문장만으로 아름다움을 아우를 수 없는 것처럼, 아름다움을 설명하기에는 한 가지만의 어원으로는 부족하다. 지식인답기만 하면 현학적이기 쉽고, 나답기만 하면 편파적일 것 같고, 사랑만 있으면 이성이 배제되고 감성만 자랄까 염려된다.
하나는 부족하다. 세 갈래가 하나로 어우러질 때 더 아름답다.
―남홍숙의 <한문장 +한문장 =더 아름답다>에서
사회가 변하면 언어도 변하게 마련이다. 작가는 어원에 근간하여 의미를 조합하고 있다. 산문 문장인 수필의 원형으로 본다면 다소 생경하다. 하지만 이 수필은 한 가지 어원으로는 부족하여 파생어를 만듦으로써 애초의 의미가 갖는 자신의 견고한 성(城)에 더 깊은 의미를 부여하려는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독자적 개체로서의 아름다움보다도 그 근간에 하나를 보탬으로써 더 아름다울 수 있음을 그는 어원을 통해 보여주고 있다.
언어기호는 기표와 기의로 이루어져 있다. 그러므로 낯설게 하기는 이들 기표와 기의 어느 하나나 모두에서 일어날 수 있는, 여기서는 음운론적 구조로 보아 주로 기표상에서 낯설게 하기가 나타나고 있다. 또한 번다한 수식을 피하고 간결, 압축, 요약을 통해 언어가 지닌 비유와 상징을 바탕에 깔아 언어가 지닌 표피적 의미보다는 내재된 본질을 통찰하려는 작가의 창작태도이다.
이는 변화를 읽어내려는 작가 정신일 것이다. “하나는 부족하다. 세 갈래가 하나로 어우러질 때 진짜 아름답다.”는 의미화는 통찰과 해석, 의미화의 단계를 거치는 문학적 형상화라고 보아도 좋겠다. 그 형식은 비록 독자를 낯설게 하지만, 담고 있는 의미는 분명 새로움을 추구하고 있다.
이옥자는 《요지경 열두 마당》이라는 풍자에세이를 통해 세태를 통렬히 비판한 바 있었다. 그는 고전문학의 4.4조의 율조를 차용하여 패러디함으로써 수필문학의 새로운 영역을 개척하였다. 김희수의 <호호(好好) 랩송> 역시 같은 맥락에서 창작된 작품으로 볼 수 있다.
영어도 좋지만 한자도 공부해둬라. 엄마가 말씀하셨지 뭐부터 해야할지 모르겠어 천자문은 따분해 천팔백자 지루해 엄마, 관심있는 걸 하면 머리에 잘 들어온다고 했지 내게 관심있는 건 그녀뿐이야 그럼 계집녀(女) 들어가는 글자부터 해봐라 좋아좋아 왜 여자가 좋은 지 알겠어 좋을 호(好)에 여자가 들어있잖아 어떻게 안 좋을 수가 있어
그녀가 호호(好好) 배꼽으로 웃어주었지 초승달 같은 하연 미(媚)소도 벅찬데 보름달 같은 배꼽 미소에 내 모든 느낌이 충돌했어 이름은 또 어떻고 아름다울 연(娟)에 예쁠 아(娥) 연아처럼 예쁜 아인 없어 그녀를 처음 본 순간 내 운명은 비로소 시(始)작된 거야 여자는 묘(妙)한 동그라미야 과녁처럼 동그라미를 많이 쳐놓고 나를 어지럽게 해 갈 지(之)자로 비틀거리게 해 그리곤 “내게로 올래(來)?” 손짓하잖아
―김희수의 <호호(好好) 랩송>에서
이 수필 역시 율조를 근간으로 하여 세태를 패러디하고 있다. 문학의 형식적 요소를 낯설게 하는 기법으로 이 수필은 [好, 媚, 娟, 娥, 始, 妙]와 같이 ‘계집녀’가 들어가는 동음의 한자어를 패러디하면서 의미를 확대해가는 묘미를 보여준다. 언어가 지닌 속성을 통해 의미를 확대해가는 언어 유희적 기교로, 수필창작의 변화를 추구하고자 하는 작가의 의도를 읽게 한다. 이는 기호와 문학의 퓨전이라고 보아도 좋겠다.
이 같은 수필 창작의 경향은 정여송이 한자어의 2, 3, 4, 5자 성어의 묶음을 통해 의미의 통합을 추구한 것과 같은 맥락으로 볼 수 있다.
천지일월天地日月, 동서남북東西南北, 춘하추동春夏秋冬, 건곤이감乾坤離坎,
회삭현망晦朔弦望, 단주모야旦晝暮夜, 남녀노소男女老少, 수화토석水火土石,
효제충신孝悌忠信, 도천지왕道天地王, 경사자집經史子集, 지수화풍地水火風,
갑을병정甲乙丙丁, 흥망성쇠興亡盛衰, 생로병사生老炳死, 동서고금東西古今,
신언서판身言書判, 건곤간손乾坤艮巽, 기승전결起承轉結, 가감승제加減乘除,
(이하 생략)
힘도 힘이려니와 꿍짝꿍짝 율동이 있으니 흥이 돋는다. 네 박자는 안정감마저 불러와 버팀목으로 선다. 나 홀로의 목소리가 아닌 여러 목소리인 4중창이다. 사방 풍광이 한꺼번에 펼쳐진다. 넓은 파문은 여운을 크게 그린다. 가늠하기 어려운 통찰력과 포용력을 싸안고 있다. 장성한 4형제가 나란히 선 듯 든든해지기도 한다. 호연한 기운이 솟는다. 내친김에 다시 한번 더 내리쳐 다섯으로 깨트린다. 생각을 굴리고 펴고 다듬는다. 내내 보물찾기만 한다.
―정여송의 <세상 나누기>에서
정여송은 이런 언어가 지닌 미적 감수성 외에도 <석목(石木)>과 같은 작품을 통해 낯설게 하기를 시도하고 있다.
몇 천만 년이 아롱져 있다. 침묵이 두텁게 흐를 뿐 어느 한 곳에서도 느슨함이나 빈틈이 보이지 않는다. 장구한 세월이 농축된 만큼 단단함의 서슬이 빛을 낸다.
멀리서 볼 때 영락없는 나무였다. 가까이 다가가니 돌덩이다. 손을 만져본다. 차다. 생각에 잠겨 응시하면 어떤 덩어리의 형체가 다가오고 또 생각을 내려놓고 바라보면 텅 빈 공간으로 펼쳐진다. 경북 영덕을 지나 강구라는 곳. 경치 좋은 해변도로의 휴게소 같은, 동해가 내려다보이는 언덕에 그것들이 모여 있었다.
규화목이다. 광물화된 나무의 유체(遺體). 미라. 제2전시실에는 그것들의 속내를 발가벗기기라도 할 듯이 단면을 매끄럽게 가공하여 전시해 놓았다. 표면에 싸인 시간이 눌려져 있고 발자취가 그려져 있으며 기쁨인가 고통인가 싶은 무늬가 새겨져 있다. 알지 못할 어떤 뜻을 한입 크게 물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새 역사 하나가 ‘우르르 꽝’하고 이루어진 것 같은 착각도 일어난다. 다가가 가만히 안아 본다. 그것에 녹아 있는 삶을 마음으로부터 읽는다. 희미한 여백만 보인다. 조그마한 손전등이라도 들어야 할까 보다. 다시 닭이 모이를 쪼듯 낱낱으로 쪼갠다. 그러나 내 힘으로는 도저히 해독할 수 없는 난수표가 되고 만다.
(『수필과비평』,2004.11-12월호, 349-351쪽)
화자가 감상한 ‘규화목(硅化木)’은 퇴적물 속에 묻혀있던 나무줄기 세포 속에 광물질이 녹아 있는 물에 의해 침투를 받아 유기물질이 광물질로 치환되어 화석화된 것이다. 이런 치환에 의해 미세한 나무의 외형과 내부 구조가 잘 보존되어 있는 것으로 규산과 함께 수산화철 등이 얼룩 모양으로 주입되어 있어 여러 가지 방향으로 절단하고 표면을 연마해서 장식으로 이용하기도 한다. 여기서 경화된 나무의 화석 즉 “광물화된 나무의 유체(遺體)”를 감상하면서 과연 화자는 어떤 상상력을 일으켰을까 하는 데 있다. 만일 이 경우 작가의 내적감각이 상상력을 동원할 수 없다면 이런 창작이 이루어질 수 있을지 의문스럽다.
6. 나가는 말
현대사회는 과거와 같은 발상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비상을 요구한다. 이는 전통에만 매달려 폐쇄적이던 우리들의 사고에 일대 변혁과 혁신을 필요로 한다. 그래서 현대인은 충격이 강하면 강할수록 시선을 집중하게 된다. 포스트모더니즘의 메타픽션의 경우가 그러하다.
김성곤은 이런 경향에 대하여 러시아 형식주의자들의 ‘낯설게 하기’의 기법의 문제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포스트모더니즘은 소설의 형식 자체를 전복시킨 반소설의 혁명이었다. 모더니즘에서는 외부사건보다 인물의 내면의식을 형상화함으로써 행동적 플롯이 형성되지 않는다. 그러나 대신 내면의식의 은밀한 통로를 통해 현실세계와 만나게 된다. 반면에 급진적인 포스트모더니즘에서는 소설의 형식 자체가 해체된다. 이는 작가의 세계관의 해체를 의미하는 바, 소설의 문맥들이 상호 중첩되거나, 현실과 소설이 몸을 뒤섞는 실험소설을 메타픽션이라 한다.
―김성곤 <문화연구와 인문학의 미래>, 서울대학교출판부, 2003. 20-21쪽
모더니즘을 포함한 전통적 소설과 비교하여 두 가지의 차이점을 지닌다. 첫째로 전통소설이 현실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작가의 세계관적 답변이었다면, 메타픽션은 어떤 답변도 또 다른 질문에 불과하며 끝없는 질문들만이 계속된다. 둘째로 전통소설이 소설과 경계를 분명히 하면서 소설을 통해 현실을 보게 하는 반면, 메타픽션은 소설과 현실 사이를 넘나듦으로써 양자의 관계 자체에 초점을 맞춘다. 이를 어찌 소설에서만 가능하다고 하랴. 소설에서 메타픽션이 필요하다면 마땅히 수필문학에서도 이런 경향은 필요충분한 일이겠다.
한 마디로 문학의 본질은 사물의 낯익은 것들을 낯설게 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되는지도 모른다. 조나단 킬러(Jonathan Culler)의 말과 같이 신문기사도 마치 시처럼 배열해 놓으면 문학적 책읽기를 유발할 수 있고, 거기에서 새로운 의미를 도출해 낼 수 있다고 했듯, 전통적인 것만이 만능일 수는 없다. 따라서 문학과 비문학의 차이는 작품을 창작하는 작가의 시선이 어디에 있는가가 중요한 문제일 것이다.
문제는 ‘낯설게 하기’가 필연적으로 고도의 상징을 요구하며, 그 고도의 상징은 해석을 필요로 하고, 일반 대중들에게는 그와 같은 과정이나 요소가 난해하게 느껴질 수가 있다는 점을 간과해야 할 것이다. 여기서 해석의 목적은 원래 ‘낯설은 것들’을 ‘낯익은 것들’로 바꾸어 놓는 것이다. 그렇다면 애초에 왜 ‘낯익은 것들’을 굳이 ‘낯설게’ 만들어야만 하는가 하는 의문이 생길 수도 있다. 애초 모더니즘과 신비평, 구조주의와의 상관관계를 위한 텍스트로서의 ‘낯설게 하기’는 자체 충족성을 부여하기 위한 목적이었을 것이다.
수필문학의 질적 저하를 우려하는 목소리가 어느 때보다 크다. 수필문학에 대한 질시와 매도 역시 어제나 오늘이나 매양 그 타령이다. 심지어 “수필 그까짓 것 아무나 쓸 수 있는 글” 쯤으로 생각하기도 한다. 수필이 이런 폄훼(貶毁)와 매도에서 벗어나는 길은 무엇일까? 문제는 외적 요인보다는 수필을 창작하는 작가 자신 즉 내적 요인이 더 크다는 사실이다. 창작의 문제, 수필가 스스로의 자기비하, 이런 것들이 문제를 더욱 문제시하게 한다.
이제, 오늘의 수필작가들이 가야 할 길은 어디일까? 분명한 것은 시대 변화에 민감하게 대처하는 길이요, 작법 자체의 대 변신이 있어야 함은 말할 나위 없다.
지금은 대량 생산의 시대이다. 속중화(俗衆化) 현상이 세계를 지배하면서 악화가 양화를 몰아내듯 예술성보다는 대중적인 키치(kitch)가 더 관심을 끌고 있다. 하지만, 아무리 시대가 이를 요구한다 해도 분명한 것은 예술 그 자체의 순수성이다. 문학에서의 낯설게 하기는 바로 그 순수를 지키는 길이 되리라 여겨진다. 이런 길이야말로 수필문학이 미래문학으로 발돋움하게 하는 길이요, 문학의 위기를 염려하는 시대에 수필문학의 성(城)을 쌓는 일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