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은 17일 미국의 임시 예산안 확정 뒤 서방 언론과 만나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에서 '제 3의 마이단'(대규모 민중 시위)을 일으켜 자신을 축출하려는 계획을 갖고 있다"고 주장했다. 지난 2013년 말~2014년 초 친러시아 성향의 야누코비치 대통령을 축출한 대규모 시위(유로마이단)에 직접 참여한 일부 유력 인사들은 "러시아가 '마이단' 시위와 무슨 상관? 그들은 축출 대상이었는데"라고 의구심을 표명했다.
우크라이나인들은 지난 2004년(오렌지 혁명)과 2014년 '마이단'(광장)에서 대규모 시위를 벌여 친러 정부를 무너뜨리고 탈(脫)러시아-친(親)서방 정권을 세웠다. 젤렌스키 대통령은 2004년 시위를 '1차 마이단', 2014년 유로마이단을 '2차 마이단', 앞으로 러시아가 자신을 축출하기 위해 조직한 대규모 시위를 '3차 마이단'으로 규정한 것이다. 제 3자의 눈에도 '마이단 시위'와 러시아 배후'는 연결이 잘 되지 않는다.
젤렌스키 대통령/사진출처:우크라 대통령실
우크라이나 매체 스트라나.ua도 18일 젤렌스키 대통령의 '제 3의 마이단' 주장이 우크라이나 정계에서 논란을 불러일으켰다며 그의 발언에 대한 일부 인사들의 반응과 파장, 실현 가능성 등을 심층적으로 분석했다. 젤렌스키 대통령이 그 근거로 든 우크라이나 군정보국의 정보에 대해서는 안드레이 유소프 군정보국 대변인이 나서 추가 설명을 이어갔다.
유소프 대변인은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내부의 정치·사회적 갈등을 조장하려는 시도를 강화했다"고 설명했다. "단지 하나의 주제가 아니라, 우크라이나 국내의 여러 갈등을 조장하고 심화하는 작업은 우크라이나의 정치적 갈등에 편승한 공격”이라는 게 그의 주장이다. 전시에 상대국에 대한 '프로파간다'(선전, 선동)전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럼에도 젤렌스키 대통령의 발언이 주목을 끄는 것은 여러가지 이유에서다. 먼저 2013년 말부터 시작된 '유로마이단' 10주년이 다가오고 있다. 우크라이나에서는 통상 11월 21일을 '유로마이단'의 시작으로 본다고 한다.
우크라이나 '유로마이단' 사진 모음/사진출처:위키피디아
또 여름철 반격이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한 채 교착상태로 빠져들고 있고, 미국 등 서방의 대(對) 우크라 추가 지원 전망도 점차 어두워지고 있다. 젤렌스키 정권의 무능에 대한 야권의 공세가 오랜 전쟁에 따른 국민의 피로감과 미래 불안감에 불을 지필 경우. 반(反) 젤렌스키 정서가 개규모 시위로 나타날 수도 있다. 젤렌스키 대통령은 이를 러시아의 주도면밀한 계획에 의해 이뤄지는 '제 3의 마이단', 즉 '쿠데타'로 보고 있다는 해석이 나온다.
스트라나.ua는 유로마이단에 참여한 인사들이 대통령의 '마이단 재발' 발언에 '다소 뜬금없다'는 반응을 전하면서, 실제로 일어날 수 있는지 여부를 따졌다.
이 매체에 따르면 '유로마이단'에 직접 참여한 일부 시위자들은 "러시아와 마이단은 아무리 연관관계가 없다"며 "대통령의 발언은 '진정한 마이단 지지자들"에게는 모욕적"이라는 주장을 폈다. 또다른 인사는 유로마이단 3주년을 앞둔 2016년 11월 대규모 민생 시위가 발발할 조짐을 보이자, 비슷한 논리(제 3의 마이단, 러시아의 '사툰' 계획 план Шатун)를 폈던 전임 페트로 포로센코 대통령을 떠올리기도 했다.
포로셴코 전대통령이나 젤렌스키 대통령이 주장하는 '제 3의 마이단'은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사회를 갈등과 분열로 몰아 궁극적으로 정권 전복을 노린다는 것이다. 차이가 있다면, 2016년 포로셴코 대통령 집권 당시에는 참았던 국민들의 민생 불안이 공공요금 인상을 계기로 터져나왔고, 이번에는 반격의 성과을 실망하고 미래 불안을 느끼는 민심이 어떤 계기로 폭발할 수 있다는 우려라고 할 수 있다.
당혹스러운 것은, 맨 먼저 '제 3의 마이단'을 주창했던 포로셴코 전 대통령 세력이 젤렌스키 대통령의 마이단 발언을 이끌어낼 만큼 사회적 갈등 메시지 확산에 앞장선다는 사실이다. 역사의 아이러니이지만, 젤렌스키 대통령 측은 야당인 포로셴코 전 대통령 세력을 "러시아를 위해 일한다"고 몰아세우고 있다.
포로셴코 전 우크라 대통령이 지난해 해외로 출국하려다 국경검문소에서 제지당하자 항의하는 모습/사진출처:텔레그램 '바자'
전쟁 중에 '제 3의 마이단'이 가능할까? 가능하다면 그 목적은 무엇이며 그 뒤에는 진짜 러시아가 있을까? 결론부터 이야기하면 이론적으로 '제 3의 마이단'은 불가능하다.
우크라이나 정치학자인 루슬란 보르트니크는 "시위가 금지된 계엄령 하에서 사람들이 당국에 위험한 플래카드를 들고 거리로 나올 것으로 생각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또 모든 시위가 성공하려면 상당한 대중적 지지가 모아져야 하는데, 아직 그런 조짐은 없다. 예컨대, 미하일 사카슈빌리 전 그루지야 대통령이 지난 2017년 11월 키예프(키이우)에서 포로셴코 당시 대통령을 겨냥해 조직한 '미호마이단'은 참가 규모가 적어 정권을 뒤집지 못했고, 끝내 그는 우크라이나 땅에서 추방됐다.(현재는 모국인 그루지야에서 수감중이다/편집자) 물론, 그 흐름은 포로셴코 대통령이 2019년 대선에서 연임에 실패한 국정 운영 실패로 이어졌다는 분석도 있다.
무엇보다도 2년 가까운 전쟁으로 젤렌스키 대통령의 권력이 그 어느 때보다도 공고해졌다. 그는 의회와 정부, 그리고 지역 행정부까지 모두 통제하고 있다. 우크라이나군의 군사 반란 가능성도 제기되나, 실제로는 군을 통제하는 '단일 군맥'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게 일반적인 시각이다. 잘루즈니 군총참모장이 우크라이나군을 통괄하지만, 젤렌스키 대통령도 시르스키 지상군 사령관 등 개별 부대 사령관과 직접 소통하고 있다.
러시아군의 공습을 피해 지하철역으로 몰려든 키예프(키이우) 시민들
하지만, 불만은 사회 곳곳에 잠복해 있고 불씨는 어디든 있다. 전선에서 들려오는 심각한 패배나 경제적 파탄은 언제든 반정부 시위의 불씨가 될 수 있다. 스트라나.ua는 "대통령이 서방의 재정 지원이 어려움에 봉착했을 때, 제 3의 마이단 음모론을 주장했다"며 "서방의 지원이 줄어들고, 화폐(흐리브냐화) 가치가 폭락했을 때를 미리 대비한 것"이라고 해석했다. 그러면서 "역사적으로 빵(식료품 부족/편집자)은 법이나 전쟁을 넘어 언제든지 민생 폭동의 불씨가 될 수 있다"고 했다.
민생 불안 조짐은 우크라이나 여러 곳에서 찾을 수있다. 바이든 미 대통령의 우크라이나 특사인 페니 프리츠커는 최근 젤렌스키 대통령을 만나 "미국의 도움 없이 어떻게 살 수 있을지 생각해 볼 것을 제안한 것"으로 보도됐다. 불길한 조짐이다. 전비 지출이 급증하고, 경제 지표가 개선될 전망이 보이지 않는 상태에서 대규모 재정적자에 의해 흐리브냐화가 폭락할 경우, 삶의 질은 떨어진다. 특히 부정부패가 심각한 우크라이나에서 '양극화 현상'은 더욱 두드러질 것이다.
우크라이나 재정 지원의 키를 쥐고 있는 존슨 미 하원의장/사진출처:엑스(X, 전 트위트) @RepMikeJohnson
이럴 때일수록 '서방의 지원 중단은 젤렌스키 대통령에게 떠나라는 뜻'이라는 야권의 선전선동이 우크라이나인들에게 먹혀든다. 그같은 음모는 벌써부터 나오고 있다는 게 스트라나.ua의 지적이다.
서방의 지원 감소로 따른 경제적 문제는 우크라이나에 심각한 내부 분열을 초래할 수 있고, 최소한 '전쟁을 끝내라'는 요구가 솟구칠 수도 있다. 전쟁이 계속되는 한, 경제적 해결책을 찾기가 힘들기 때문이다. 젤렌스키 대통령이 전쟁 중단 여론에 밀려 러시아 측과 합의에 이른다면. 대통령 자신과 우크라이나 모두에게 심각한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고 스트라나.ua는 짚었다.
관건은 우크라이나 사회의 '안전 장치'가 어느 정도까지 작동하느냐에 달렸다. 전쟁 중 대규모 시위는 그 자체로 패전과 국가 붕괴를 뜻한다. 야권의 대정부 공세와 집권세력의 '마이단 음모' 주장 사이에서 우크라이나인들이 어떤 선택을 할 지에 달렸다. 역사를 바꾼 '유로마이단'이 10주년을 앞두고 또 한번 시험대에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