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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214. 묵상글 들 ( 성 치릴로 수도자와 성 메토디오 주교 기념일. - 시련의 의미를 아는 인내.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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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214. 성 치릴로 수도자와 성 메토디오 주교 기념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시련의 의미를 아는 인내
"갖가지 시련에 빠지게 되면 그것을 다시없는 기쁨으로 여기십시오.
여러분도 알고 있듯이, 여러분의 믿음이 시험을 받으면 인내가 생겨납니다.
그 인내가 완전한 효력을 내도록 하십시오.
그리하면 모든 면에서 모자람 없이 완전하고 온전한 사람이 될 것입니다."
오늘부터 야고보서가 봉독되는데 시작부터 믿음의 시련에 대해 얘기합니다.
당시 믿는 이들이 믿음 때문에 시련 중에 있거나
하느님을 믿는데도 시련이 있었기 때문일 텐데
이 시련에 의미가 있으니 기쁘게 받아들이라고 합니다.
박해 시대처럼 믿는 것 때문에 박해를 받거나
하느님을 믿는데도 다른 사람에게처럼 고통이 닥치거나 하면
우리는 왜 하느님을 믿어야 하나, 굳이 하느님을 믿을 필요가 뭐 있나?
이런 식으로 믿음에 대한 의구심이 들며 믿음이 시련을 당하게 되지요.
그런데 고통이나 시련은 이렇게 의구심이 들게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이 고통과 시련의 의미를 생각게도 합니다.
다시 말해서 왜 내게 이런 시련이 닥쳤는지 묻게도 하는 거지요.
의미없는 고통이나 덧없는 시련은 정말 견딜 수 없기 때문입니다.
바꿔 말하면 고통뿐인 덧없는 인생은 살 이유가 없고
살아낼 힘도 없기 때문에 반드시 의미가 있어야 하듯
고통이나 시련도 의미가 있어야 견딜 수 있습니다.
이에 대해 오늘 야고보서는 시련의 의미가
우리에게 인내가 생겨나게 하고,
이 인내가 온전한 효력을 발휘하게 되면 완전한 사람이 되게 한다고 얘기합니다.
이것을 시련이 인내를 낳고, 인내가 완전한 사람을 낳는 것이라고
그 의미를 얘기해도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렇습니다.
분명한 것은 시련없이 인내나 인내력이 생기지 않습니다.
좋아하는 것이나 즐거움을 인내한다고 하지 않고,
인내라는 것이 본래 고통이나 시련을 견디는 것을 말함이니
고통과 시련없이는 인내나 인내력이 생길 수는 없는 거지요.
이것은 이렇게 이해할 수 있지만 그러나 인내가 모든 면에서 모자람없이 완전하고
온전한 사람이 되게 한다는 것은 선뜻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미련곰탱이처럼 무조건 인내하면 정말 모자람없이 완전하고 온전한 사람이 될까요?
그렇지 않고 야고보서도 그런 뜻에서 말한 것이 아니라
인내가 완전한 효력을 낼 경우 그렇게 된다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이 말은 완전한 인내가 완전한 인간이 되게 한다는 뜻일 겁니다.
그렇다면 다시 완전한 인내가 무엇인지가 문제가 되겠는데
완전한 인내란 인내의 의미를 완전히 알고 하는 인내이고,
하느님 사랑으로부터 그 의미를 찾은 인내를 말함일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고통이나 시련이 하느님 사랑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그럴 때 우리는 겸손하게 인내하고,
하느님께 대한 사랑으로 인내하고,
하느님 사랑의 힘으로 인내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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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214. 성 치릴로 수도자와 성 메토디오 주교 기념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요나의 표징밖에는 아무런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마태 16,4)
오늘 <복음>은 ‘4천명을 먹이신 기적 이야기’에 이어, 예수님께 대한 바리사이들의 시험을 전해줍니다. 복음사가는 이렇게 전해줍니다.
“그분을 시험하려고 하늘에서 오는 표징을 요구하였던 것이다.”(마르 8,11)
그들은 “하늘에서 오는 표징”을 요구했습니다. 마치 모세 때에 광야에서 내린 ‘만나’(탈출 16장)나, 여호수아의 간구로 해와 달이 멈춰졌던 일(여호 1,12-14)과 같은 하늘에서 오는 초자연적인 표징을 요구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저의는 이러한 표징과는 상관없이 예수님을 넘어뜨리는 데 그 초점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기 위해서가 아니라, 무너뜨리기 위해서 시험합니다. 마치 광야에서 예수님을 시험하여 넘어뜨리기 위해, “유혹자가 그분께 다가와,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이 돌에게 빵이 되라 해보시오.”(마태 4,3)라고 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그것은 당신이 메시아인지를 스스로 증명해보이라는 지극히 도전적인 행동이었습니다. 그래서 마치 심문하듯이 예수님을 다그쳤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탄식하시며 말씀하십니다.
“어찌하여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는가?
~이 세대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마르 8,12)
이에 대해서, <마태오복음>의 병행구절에서는 표징을 분별하지 못하는 이유와 표징을 요구하는 이유도 밝혀줍니다.
“너희는 하늘의 징조는 분별할 줄 알면서 시대의 표징은 분별하지 못한다.
악하고 절개 없는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지만, 요나의 표징밖에는 아무런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마태 16,3-4)
그렇습니다. 사실, 예수님께서 메시아의 시대의 표징을 드러내셨지만, 바로 앞 장면의 ‘4천명을 먹이신 기적이야기’를 통해서도 드러내셨지만, 표징을 받아들이지 않음은 ‘악하고 절개 없는 세대’임을 말해줍니다.
어저면, 도처에서 드러내시는 당신의 신성을 보고 또 보고 보면서도, 여전히 무시하고 거부하고 있는 우리의 마음이 바로 그럴 것입니다.
과학자 아인쉬타인은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이 세상에는 두 부류의 사람들이 있는데, 한 부류는 세상에는 기적이 없다는 사람들이요,
또 한 부류는 세상의 모든 것이 기적이라고 여기는 사람들이다. 나는 후자에 속하는 사람이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어찌하여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는가?”(마르 8,12)
주님!
당신의 진실은 오늘도 저의 믿음을 다그칩니다.
오늘 저희에게 불신으로 왜곡된 마음을 밝혀주소서.
가리고 눈 감은 마음을 뜨게 하소서.
도처에서 드러내시는 당신을 보게 하소서.
당신의 신성을 보고 또 보고 보면서도 무시하고 거부하는 일이 없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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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214. 성 치릴로 수도자와 성 메토디오 주교 기념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표징을 요구하지 마라
교포사목을 할 때입니다. 성당 앞뜰에 성모님상을 모시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제 마음을 안 어떤 분이 “한국 어느 성당에 모셔진 성모님은 성모상에 머리를 갖다 대면 꼭 안수하는 모습인데 기적도 많이 일어난답니다. 그 성모님상을 모신 곳이 어딘지 알아보고 그런 성모님을 모셨으면 좋겠습니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쁜 성모님을 모시면 더 많은 관심을 갖게 되고 은총도 그 만큼 더 크게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일반 판매용 성모상도 눈을 쌍꺼풀 해야 한답니다.
저도 그렇습니다만 사람들은 신비한 현상에 민감합니다. 어디에 어떤 기적이 있다고 하면 그곳에 쫓아가고 그 혜택을 입고자 애를 씁니다. 예나 지금이나 달라진 것이 없습니다. 그 신비한 현상이나 기적을 통하여 드러내 주시고자 하는 하느님의 뜻을 찾기보다 눈에 보이는 현상에 더 많은 마음을 빼앗기는 것이 현실입니다. 물론 믿음이 약한 사람은 보고라도 믿어야죠. 그렇지만 자주 접하게 되면 둔감해지기 마련입니다. 은총을 주시는 하느님을 보지 못하고 주어진 은총의 열매에만 매달리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빵 일곱 개와 물고기 몇 마리로 사람들을 배불리 먹이신 기적을 베풀어 주셨음에도 종교지도자들의 불신은 계속되고 결국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하늘의 표징을 요구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믿음이 없는 완고한 이들의 요구를 거절하셨습니다. 자기들의 욕구에 걸맞은 것만 요구하고 이미 보여 준 표징을 올바르게 보려 하지 않고 또다시 표징만을 바랐기 때문입니다. 사실 하느님 나라는 누구에게 보여주기 위해 있는 나라가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하느님의 일도 누구에게 보여주기 위해서 하는 일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행하신 기적은 당신의 권능을 통해 아버지 하느님께로 인도하기 위한 방법일 뿐입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 사람들에게 무엇인가 보여주기 위해서 오신 쇼맨이 아니십니다. 예수님은 결코 보여주기 위한 기적, 기적을 위한 기적을 행하진 않으셨습니다. 따라서 기적을 많이 보고 체험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그 기적의 삶을 사는 것이 소중합니다. 기적이 믿음을 가져오기보다 믿음이 기적을 낳습니다. 어떤 성모님 상을 모시든 그 앞에서 그분의 마음으로, 그분이 지니셨던 믿음으로 기도할 수 있다면 기적은 언제든지 일어날 수 있습니다. 내가 지금 살아있음이 기적입니다.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사랑을 베풀고 가난한 이들을 보살피며 소외된 사람들의 상황을 바꾸어 주시고 영원한 삶을 살게 해 주어도 그것은 기적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사실은 그것이 살아있는 기적입니다. 그리고 어떤 특별한 기적을 베풀어 준 것은 그 기적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기적 사건 안에 담긴 의미가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여전히 현상을 쫓아다녔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마음속으로 깊이 탄식하시며 말씀하셨습니다. “어찌하여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는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이 세대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
지금 나의 삶의 자리에서 기적의 삶을 살지 못한다면 하늘의 기적이 아무리 많이 일어난다 해도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무엇을 보여 달라고 조르지 말고 여러분이 기적을 만드시길 바랍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를 믿는 사람은 내가 하는 일을 할 뿐만 아니라, 그보다 더 큰 일도 하게 될 것이다.” 주님, 표징을 올바르게 볼 수 있는 눈과 깨닫는 마음을 주십시오. '마음을 다하여'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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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214. 성 치릴로 수도자와 성 메토디오 주교 기념일. 이기우 사도요한 신부님.
하늘의 표징, 시대의 표징
오늘 복음에서는 바리사이들이 와서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하늘에서 오는 표징을 요구하는 바람에 논쟁이 벌어지게 된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마음속으로 깊이 탄식하셔야 했습니다: “어찌하여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는가?”(마르 8,12). 논쟁을 걸어온 바리사이들은 이번만이 아니라 평소에도 줄곧 적대적 태도를 보여준 바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왜 이런 탄식을 하시게 되었느냐 하면, 그분은 당신 자신이 하늘에서 오는 표징이심을 누차 가르침이나 기적으로 보여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바리사이들은 고약하게도, 이미 보여준 표징들은 무시하고 자신들이 인정할 만한 표징을 보여달라고 떼를 쓰고 있었던 것입니다.
실제로 예수님께서 이런 바리사이들의 사악함 때문에, 당신이 하느님 아버지께 순명하며 보여주신 가장 큰 하늘의 표징이 십자가 죽음 사건이었는데, 그네들은 이 사건에서 배우거나 깨닫는 바가 없었습니다. 도리어 그분의 죽음을 사두가이들의 뒤에서 교사하고 선동했었지요(마태 22,15). 선교사가 된 바오로가 사울로 불리었던 시절에 열성적인 바리사이로서 예수님을 거짓 예언자로 간주했던 것처럼, 다른 바리사이들도 마찬가지로 예수님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지닌 율법 지식으로 얻은 사회적 명성을 기반으로 경제적 기득권을 누리고 있었습니다. 과부들의 가산을 등쳐 빼앗기도 하고(마태 23,14), 빌려준 돈을 갚지 못하는 농부들의 토지를 불법적으로 가로채서 부재지주 노릇도 하는 등(마태 23,28), 의로움 대신 불의를 저지르며 자비 대신 착취를 일삼고 신의 대신 배신을 밥 먹듯이 저지르고 있었습니다(마태 23,23). 이런 바리사이들과 그들의 율법 학자들의 비행과 위선을 예수님께서 고발하시니까, 예수님의 모든 가르침을 무시하고 모든 선행도 외면하면서 오로지 증오에 가득차서 적대적인 태도를 버리지 않았을 뿐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의 진실을 보지 못하던 그네들의 눈은 멀어 있었습니다. 그야말로 이들에게는 이런 그분의 말씀이 제격입니다: “네 오른 눈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빼어 던져 버려라. 온몸이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지체 하나를 잃는 것이 낫다”(마태 5,29). 이들은 예수님의 눈 속에 있는 티를 찾아내려고 애쓰면서, 자신들의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던(마태 7,3) 자들로서, 마음의 눈이 멀어버린 자들이었습니다(요한 9,39-41).
이에 대해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는 이렇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모든 시대에 걸쳐 교회는 시대의 징표를 탐구하고 이를 복음의 빛으로 해석하여야 할 임무를 지니고 있다. 그렇게 함으로써 각 세대에 알맞은 방법으로 교회는 현세와 내세의 삶의 의미 그리고 그 상호 관계에 대한 인간의 끝없는 물음에 대답해 줄 수 있을 것이다”(사목헌장 4항). 이에 따라서 프란치스코 현 교황도 교황직에 오른 직후 2013년 신앙의 해를 폐막하고 나서 전 세계 가톨릭 신자들에게 반포한 권고 「복음의 기쁨」에서 시대의 표징을 식별하는 일에 관해서, 백성의 말에 귀기울여 강론을 준비하는 일이라고 풀이한 바 있습니다.
“강론자는 백성의 말에 귀기울여야 합니다. 그리하여 신자들이 들어야 할 것을 찾아야 합니다. 강론자는 말씀의 관상자이고 또한 그의 백성의 관상자입니다. 이렇게 하여 그는 ‘이런저런 인간 집단을 특징짓는 갈망, 풍요와 한계, 기도하고 사랑하며 삶과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을 배웁니다. 그러면서 ‘복음의 실질적 대상자들’에게 주의를 기울이고 ‘그들의 언어, 그들의 표징과 상징들을 고려하고 그들의 질문에 대답’하는 것입니다. 강론자는 성경 본문의 메시지를 인간 상황에, 하느님 말씀의 빛을 갈구하는 경험에 연결시킬 줄을 알아야 합니다. 이러한 관심은 매우 종교적이고 사목적인 관심입니다. 근본적으로 이는 ‘그러한 사건들 안에서 하느님 메시지를 읽는 참된 영적 감수성입니다. 이를 통하여 우리는 성령의 빛으로 ’하느님께서 역사적인 상황 바로 그곳에 울려 퍼지게 하고 계신 어떤 부르심‘을 인식하고자 노력하게 됩니다. ’하느님께서는 이러한 역사적 상황 속에서, 또한 이러한 역사적 상황을 통하여, 신자들을 부르고 계신 것입니다.”
이미 그분이 하늘의 표징이시므로 더 이상 하늘의 표징을 보려고 할 것이 아니라 시대의 표징을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리하여 교회가 신자들과 함께 식별해 낸 시대의 표징들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요한 14,6)를 따라서 하느님께 나아가기 위한 징검다리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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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214. 성 치릴로 수도자와 성 메토디오 주교 기념일. 조명언 마태오 신부님.
죽음에 자유롭지 못한 우리입니다. 사실 역사를 보면 죽음을 이겨내기 위한 노력을 사람들이 얼마나 기울였는지를 쉽게 볼 수 있습니다. 진시황제의 불로초만이 아닙니다. 많은 사람이 오만가지 방법을 사용해서 죽음에서 벗어나려고 했습니다.
젊은 피의 수혈, 영약, 칼로리 섭취 제한, 채식, 마법의 혈청, 불가리아 요구르트, DHA 등등…. 이런 노력이 실제로 평균 수명을 높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모든 이의 수명이 늘어난 것은 아닙니다. 뜻밖의 이른 죽음을 맞이하는 사람도 정말 많습니다.
19세기 실증주의 철학자 오귀스트 콩트는 오래 살기 위해 엄격한 생활 수칙을 정하고 이를 철저하게 따랐습니다. 담배, 커피, 술 등을 포함해서 자극적인 음식을 삼갔고 식사량을 제한했습니다. 조금이라도 건강에 지장을 주는 것이라면 절대로 하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콩트는 몇 세까지 살았을까요? 이토록 애를 쓰고서도 59세에 세상을 떠났다고 합니다.
우리 모두는 죽음 안에서 절대로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죽음을 지배하고 계신 주님께 대한 믿음을 가져야 하는 이유입니다. 자신의 부족함과 나약함을 인정하며, 주님의 뜻을 따르는 삶이 필요합니다.
바리사이들이 예수님을 찾아와 하늘에서 오는 표징을 요구합니다. 이 표징의 요구 전에 예수님께서는 놀라운 기적을 행하셨습니다. 사천 명을 배불리 먹이신 빵의 기적이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이 또 다른 표징을 요구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들은 예수님의 모든 기적을 단순히 사기꾼이 보여주는 요술로 생각했던 것입니다. 보고서도 믿지 못하는 이유는 예수님에 대해 믿기 싫어하는 불신과 악의를 품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만약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 있었다면 예수님의 말씀만으로도 하늘에서 오는 표징을 볼 수 있었을 것입니다. 사람을 구원하는 표징을 외면하는 이 세대에 하늘에서 오는 표징을 보여봤자 그들의 악한 마음만 더 커질 뿐 이로운 것이 없었겠지요. 그래서 그 자리를 떠나셨던 것입니다.
죽음을 지배하는 전지전능하신 주님께 대한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 믿음이 주님의 말씀 안에서 놀라운 표징을 발견하게 할 것입니다. 오늘 독서의 야고보 사도의 말씀을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여러분의 믿음이 시험을 받으면 인내가 생겨납니다. 그리하여 모든 면에서 모자람 없이 완전하고 온전한 사람이 될 것입니다.”(야고 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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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고난으로 가득하지만, 고난의 극복으로도 가득하다(헬렌켈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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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214. 성 치릴로 수도자와 성 메토디오 주교 기념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병원에 계신 형제님을 위해서 병자성사를 다녀왔습니다. 형제님을 만나기 위해서 3번의 문을 통과해야 했습니다. 병원입구에서 백신카드를 보여주고, 열을 측정했습니다. 병원에 들어가서는 신분증을 보여주고, 방문카드를 받았습니다. 병실에 들어가서는 장갑을 끼고, 마스크를 2장 쓰고, 보안경까지 썼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병실에 누워있는 형제님을 만났습니다. 형제님을 만나기 위해서 3번의 문을 통과하는 것은, 장갑과 마스크 그리고 보안경까지 쓰는 것은 저를 위해서가 아니었습니다. 면역력이 약한 형제님을 위한 보호조치였습니다. 형제님이 건강을 회복해서 밝은 모습으로 만날 수 있기를 기도했습니다. 하느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신 것도 죄와 악에 물들어서 하느님과 멀어지는 우리를 구원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병원에 누워있던 형제님이 저의 기도를 받았던 것처럼 우리도 온전한 마음과 정성으로 주님의 자비와 사랑을 청해야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예수님께 ‘표징’을 요구하였습니다. 표징을 요구하는 것은 신앙인의 태도가 아닙니다. 표징을 요구하는 것은 사탄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40일간 단식하셨을 때입니다. 사탄은 예수님께 표징을 요구하였습니다.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돌을 빵으로 만들어 보십시오.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높은데서 뛰어내려 보십시오.’ 예수님께서는 표징을 바라는 사탄의 요구를 거절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은 빵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으로 살아야 한다. 하느님을 시험해서는 안 된다.’ 백인대장은 예수님께 아무런 표징을 요구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한 말씀만 청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백인대장의 믿음을 보시고 백인대장의 종을 고쳐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시로페니키아 여인의 믿음을 보시고 딸을 고쳐 주셨습니다. 하혈하던 여인의 믿음을 칭찬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신앙은 표징이라는 조건을 요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은 온전한 믿음에서 시작하는 것입니다.
오늘 독서에서 야고보 사도는 신앙인이 가야 할 길을 이야기합니다. “나의 형제 여러분, 갖가지 시련에 빠지게 되면 그것을 다시없는 기쁨으로 여기십시오. 여러분도 알고 있듯이, 여러분의 믿음이 시험을 받으면 인내가 생겨납니다. 그 인내가 완전한 효력을 내도록 하십시오. 그리하면 모든 면에서 모자람 없이 완전하고 온전한 사람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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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214. 성 치릴로 수도자와 성 메토디오 주교 기념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주님의 자녀다운 품위있는 삶
- 인내, 겸손, 지혜 -
-제주도 성지 순례 여정 1일차-
오늘은 제주도 성지 순례 여정의 첫날입니다, 이렇게 수도형제와 함께 여행길에 오르기는 수도원 입회후 40년만에 처음입니다. 감개무량합니다. 흡사 산티아고 순례 여정의 연장처럼 느껴집니다. 미사준비등 만반의 준비에 수도형제와 함께 하니 미니 이동 수도원이 된 듯합니다. 원래는 휴가중 여행이지만 여행의 성격을 격상시켜 “제주도 성지 순례 여정”이라 명명했습니다. 잘 들여다 보면 전국 곳곳에 순교 성지들이 산재해 있어 전국토가 성지처럼 생각되었고 제주도 역시 예외가 아닙니다.
제주도 순례 여정중 방문할 곳을 일별하던중 저절로 나온 찬탄을 잊지 못합니다. “아, 제주도는 보물섬이구나!” 정말 없는 것이 없다할 정도로 골고루 갖춘 아름다운 섬임을 직감할 수 있었습니다. 두 차례의 피정지도에 이어 제 생애 세 번째 방문이지만 늘 새로운 느낌이 드는 보물섬, 제주도입니다.
바로 제주도 보물섬처럼 가톨릭 교회의 참 자랑스런 보물이 성인들입니다. 참 다양한 아름다운 품위의 보물같은 성인들이요 끊임없이 우리 삶의 좌표가, 희망의 표징, 회개의 표징, 구원의 표징이 되는 참 좋은 보물같은 성인들입니다.
오늘은 9세기 그리스의 테살로니카 출신의 성 치릴로 수도자와 성 메테디오 주교 두 형제 기념일입니다. 성 메테디오는 성 치릴로보다 12세 위의 형이며, 동생 성 치릴로 가 42세까지 사신 반면, 형 성 메테디오는 70세까지 사셨습니다. 두 형제 성인들 모두 간단히 요약할 수 없는 주님 사랑에 참으로 복잡 다단한, 치열하고 가열찬 백절불굴의 삶에 빛나는 업적은 그대로 살아 있는 순교적 삶이라 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입니다.
‘슬라브의 사도들’로 불리는 두 형제 성인들은 모라비아, 보헤미아, 불가리아를 복음화했고,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슬라브의 사도들’이라는 회칙을 통해 성 베네딕도와 함께 두 형제 성인을 유럽의 수호성인으로 선포했습니다. 이어 교황은 이분들이 이룬 복음의 성공적 토착화와 더불어 동서방 간의 교회일치를 위한 노력의 중요성을 강조했습니다.
두 형제 성인들의 한결같은 파란만장한 시련과 인내의 삶의 역사를 대하면서 오늘 제1독서 야고보서 다음 말씀이 연상되었습니다.
“형제 여러분, 갖가지 시련에 빠지게 되면 그것을 다시없는 기쁨으로 여기십시오. 여러분의 믿음이 시험을 받으면 인내가 생겨납니다. 그 인내가 완전한 효력을 내도록 하십시오. 그리하면 모든 면에서 모자람 없이 완전하고 온전한 사람이 될 것입니다.”
새삼 오늘 기념하는 두 형제 성인뿐 아니라 모든 성인들이 이런 시련과 인내의 대가들임을 깨닫습니다. 참으로 이런 시련과 믿음의 인내를 통해 완전하고 온전한 성인의 삶이요, 주님의 자녀다운 품위의 삶임을 깨닫게 됩니다. 그대로 우리의 정주 영성이 목표하는 바, ‘시련-기쁨-믿음-인내’ 입니다. 사실 정주 영성에 항구한 베네딕도회 수도승들은 이런 면에서 모두 성인들입니다. 인내와 더불어 겸손과 지혜를 겸비한 성인들입니다. 인간 무지에 대한 답도 겸손과 지혜뿐임을 깨닫습니다.
오늘 복음의 무지에 눈먼 바리사이들과 겸손과 지혜를 겸비한 예수님이 극명한 대조를 이룹니다. 정말 주님을 닮은 성인들은 한결같이 인내의 사람이자 참으로 자기를 알았던 겸손하고 지혜로운 분들이었습니다. 하늘의 표징을 요구하는 바리사이들의 무지에 주님은 깊이 탄식하시며 말씀하십니다. 새삼 시공을 초월한 무지한 이 세대를 향한 말씀처럼 들립니다.
“어찌하여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는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이 세대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
눈만 열리면 하늘의 표징들로 가득한 세상인데, 예수님 자신이 빛나는 하늘의 표징인데, 또 이 거룩한 미사보다 더 좋은 하늘의 표징도 없는데 새삼 무슨 표징이 필요하겠는지요! 무지에 눈먼 바리사이들과 같은 이들의 회개가 절실한 오늘의 현실입니다. 참으로 ‘마음의 병’중 하나가 하느님을 모르는 무지에 기인한 완고한 마음임을 깨닫습니다. 복음의 마지막 대목에서 예수님의 지혜로운 분별력과 단호한 처신이 인상적입니다.
‘그러고 나서 그들을 버려두신 채 다시 배를 타고 건너편으로 가셨다.’
아니다 싶으면 집착하지 않고 시간과 정력을 낭비함이 없이 지체없이 결단하여 홀연히, 홀가분하게 떠나는 예수님의 모습이 참 지혜롭고 멋집니다. 참으로 주님은 빛나는 분별력의 모범입니다. 참으로 우리가 청할 바 이런 분별력의 지혜라는 선물이요, 야고보 사도는 항구히 지혜의 은총을 청하라 하십니다. 무지에 대한 궁극의 답도 하느님께서 주시는 지혜뿐임을 깨닫습니다.
“누구든지 지혜가 모자라면 하느님께 청하십시오. 그러면 받을 것입니다. 하느님은 모든 사람에게 너그럽게 베푸시고 나무라지 않는 분이십니다. 그러나 결코 의심하는 일 없이 믿음을 가지고 청해야 합니다. 의심하는 사람은 바람에 밀려 출렁이는 바다 물결과 같습니다. 그러한 사람은 주님에게서 아무것도 받을 생각을 말아야 합니다.”
야고보 사도의 참 적절한 유익한 조언입니다. 한결같은 인내의 믿음으로 지혜를 청하라는 사도의 말씀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인내의 믿음과 겸손과 분별력의 지혜를 선사하시어 우리 모두 주님의 자녀다운 품위있는 삶을 살게 하십니다.
“주님, 당신의 자비가 저에게 이르게 하소서.
그러면 제가 살리이다.
당신의 가르침이 저의 즐거움이기 때문입니다.”(시편119,77).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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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214. 성 치릴로 수도자와 성 메토디오 주교 기념일. 정천 사도 요한 신부님.
오늘의 묵상
시련은 누구에게나 어떠한 형태로든 찾아오기 마련입니다.
누군가에게는 예상하지 못한 질병의 고통으로, 누군가에게는
불의의 사고로 자녀를 잃은 비통함으로 다가옵니다.
어떤 이에게는 오랜 기간 공들인 수고와 노력이 한순간에
무너져 내린 허탈함으로, 어떤 이에게는 헌신적으로 일하던
직장에서 갑자기 쫓겨나게 된 상실감으로 다가오기도 합니다.
이런 시련이 왜 하필 나에게 다가온 것인지, 내가 무엇을
그렇게 잘못한 것인지 하느님께 따져 보기도 하지만,
그분께서는 침묵 속에서 우리를 방관하고 계시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마치 십자가 위에서 절규하시던
예수님에게 아무런 응답이 없으셨던 하느님처럼 말입니다.
“저의 하느님, 저의 하느님, 어찌하여 저를 버리셨습니까?”(마르 15,34)
그런데 오늘 제1독서는 이러한 시련을 두고 우리의 믿음이
‘시험’에 놓이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하느님께서 당신 자녀들을
단련시키시는 과정이라는 것이지요. 사실 그 자녀들 가운데 으뜸이신
예수님께서도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모진 시련을 겪으셨습니다.
승리자의 위풍당당함이 아닌 패배자의 무력한 모습을 선택하신
메시아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참으로 끝까지 인내하셨습니다.
그 거룩한 인내는 마침내 부활이라는 완전한 결실로 이어지고,
온 인류는 구원을 선물로 받게 되었습니다.
혹독한 수난에도 끝까지 인내하신 예수님의 모습을 기억하는
우리 신앙인들은 각자에게 다가온 시련에 좌절하기보다
오히려 그에 맞서 강한 믿음으로 인내하는 사람들입니다.
당신 제자들이 얼마나 힘겨운 사투를 벌이고 있는지 잘 아시는
주님께서는 다음과 같은 위로의 말씀으로 우리에게 힘과 용기를 주십니다.
“너희는 세상에서 고난을 겪을 것이다.
그러나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요한 16,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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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214. 성 치릴로 수도자와 성 메토디오 주교 기념일.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기적을 요구하는 바리사이파 사람들
빵의 기적이 있은 뒤에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예수님의 속을 떠보려고 한다. 즉 예수님 자신이 하느님께로부터 보냄을 받은 참된 메시아로서 그것을 말씀과 행적으로 드러내셨다. 바리사이들은 그것의 사실 여부를 시험하려는 것이다. 그들의 마음을 아시는 예수께서는 “어찌하여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는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이 세대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12절)고 거절하셨다.
예수님의 이 거절은 다른 것이 아니라, 예수님은 마음의 회개와 더불어 사람들이 하느님께로 이르는 영적이고 내적인 변화의 기적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현세적인 물리적인 변화를 요구하는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이 요구한 메시아적 징표란, 참으로 깜짝 놀랄만한 일로서, 요르단 강물을 갈라놓고 그곳을 지나다니는 길을 낸다든지, 말 한마디로 견고한 성벽을 무너뜨린다든지 하는 무력적이고 파괴적인 것이었다. 그러한 행위로 이스라엘을 억압하고 있는 로마를 정복하여 자신들이 타민족을 지배할 수 있는 현세적인 지상왕국을 만들어내는 징표를 보이라는 것이다.
파라오 시대에는 원수에게서 해방되어야 했기에 그런 표징들이 일어나야 했지만(탈출 3-15장 참조), 하느님이신 그분께 다른 표징을 요구할 수 없다는 것이다. 예수님의 뜻은 그것과는 다른 것으로 인간으로는 이해하기 힘든 방법으로 세상의 구원을 향하여 가시고 계시는 것임을 우리는 알고 있다. 그것은 어리석음의 상징으로 보이는 십자가를 통해서였다.
오늘 복음을 묵상하면서 우리는 과연 어떠한 기적을 하느님께 청하며 오늘을 살아가고 있는지 생각해 보아야 한다. 바리사이파 사람들처럼 현세적인 부귀영화를 위하여 기도하면서 사는가? 아니면 나 자신의 내적인 회개와 쇄신을 통해 하느님께서 부르시고 열어놓으신 구원의 길을 찾고자 하는지? 즉 나 자신의 변화를 위해서 기도하고 살아가고 있는지 반성해 보자. 가장 큰 기적이란 바로 나 자신의 변화라는 것이다. 내가 변할 때에 세상도 바뀔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느님을 발견하기 위해서 어떤 곳을 꼭 찾아가야 하는 것도 아니며, 어떤 사람에게 꼭 배워야만 하는 것도 아니다. 어디서나 모든 것 안에서 하느님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고 느낄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분에게 항상 감사와 찬미를 드릴 수 있는 삶을 살 수 있는 것이다. 사람에게서 배운다면, 아마 좋은 이야기를 많이 들었기 때문에 귀의 수준은 높아질 수 있을지 몰라도 삶이 없으면, 실천이 따르지 않는다면 아무런 의미가 없다.
모든 것 안에서 그분을 발견할 수 있는 나 자신으로 변화되는 기적을 항상 청하고 열심히 노력하자. 주님께 이러한 은혜를 청하며 나 자신과 다른 사람들의 성화를 위해 기도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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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214. 성 치릴로 수도자와 성 메토디오 주교 기념일.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어찌하여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는가?"(마르 8, 12)
표징을
속이는 것은
표징을
요구하는
우리자신이었다.
언제나
사람의 표징은
사람이다.
끊임없이
표징을
요구하는
변덕스러운
우리들 삶이다.
자기 입맛에
맞지않으면
표징을
너무 쉽게
갈아타는
우리들이다.
가장 큰 표징인
예수님을
앞에 두고도
우리들은
표징을 요구한다.
표징을
먹고 사는
우리들이
표징을 죽인다.
예수님께서는
살리는
삶으로 우리를
초대하신다.
욕심 많은
자아가
무너져야
표징은 다시
살아날 수 있다.
표징은
십자가의
죽음으로
우리 앞에
서 있다.
표징의
현주소는
우리의 회개로
다시 분명해진다.
표징의 요구가
아닌 표징과의
합일이 중요하다.
표징의 십자가로
정신을 다시
차리게 된다.
표징이 가짜가
아니라
거짓으로
살아가는
우리자신이
가짜이다.
가짜가
진짜가
되게하시는
참된 표징의
이름으로
기도드린다.
봄, 여름, 가을, 겨울
표징이신
예수님과 함께하는
우리들 삶이다.
우리의 표징은
진정 무엇인가를
다시 묻고
따르는 오늘의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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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214. 성 치릴로 수도자와 성 메토디오 주교 기념일. 송영진 모세 신부님.
『표징』
“바리사이들이 와서 예수님과 논쟁하기 시작하였다. 그분을 시험하려고
하늘에서 오는 표징을 요구하였던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마음속으로 깊이
탄식하며 말씀하셨다. ‘어찌하여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는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이 세대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 그러고 나서
그들을 버려두신 채 다시 배를 타고 건너편으로 가셨다(마르 8,11-13).”
여기서 “예수님과 논쟁하기 시작하였다.” 라는 말과
“그분을 시험하려고” 라는 말은
“예수님에게 시비를 걸었다.” 라는 뜻입니다.
‘하늘에서 오는 표징’을 요구했다는 말은, 메시아라는 것을 증명할 수 있는,
어떤 특별한 기적을 보이라고 요구했다는 뜻입니다.
이 이야기에서 ‘모세’의 경우가 연상됩니다.
하느님께서 백성을 구하는 임무를 모세에게 주셨을 때,
모세는 자신 없는 모습으로 이렇게 말합니다.
“그들이 저를 믿지 않고 제 말을 듣지도 않으면서,
‘주님께서 당신에게 나타나셨을 리가 없소.’ 하면 어찌합니까?(탈출 4,1)”
그러자 하느님께서는 그에게 특별한 능력을 주시면서(탈출 4,2-7),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들이 너를 믿지 않고 첫 번째 표징이 말하는 것을 듣지 않는다 하더라도,
두 번째 표징이 말하는 것은 믿을 것이다. 그들이 이 두 표징도 믿지 않고
너의 말을 듣지 않거든, 나일강에서 물을 퍼다가 마른 땅에 부어라.
그러면 나일강에서 퍼 온 물이 마른땅에서 피가 될 것이다(탈출 4,8-9).”
(첫 번째 표징은 지팡이를 뱀으로 바꾸는 일이고,
두 번째 표징은 손에 나병이 걸리게 했다가 다시 낫게 하는 일입니다.)
예수님에게 와서 시비를 건 바리사이들은 아마도 모세가 백성들 앞에서
표징을 일으킨 것과 같은 일을 해 보라고 요구한 것 같습니다.
그런데 표징을 본다고 해서 항상 모든 사람이 믿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가 일으킨 표징들을 보고 그의 말을
믿었지만(탈출 4,30-31), 이집트인들과 파라오는 안 믿었습니다(탈출 7장-8장).
이집트 요술사들은 모세가 일으킨 표징들과 이집트에 내린 둘째 재앙까지는
요술로 흉내 냈는데, 셋째 재앙인 ‘모기 소동’ 때에는 흉내 내지 못하고
“이것은 하느님의 손가락이 하신 일입니다.” 라고 증언했습니다(탈출 8,15).
그래도 파라오는 그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믿으려고 노력하는 사람은 표징을 통해서 더 깊은 믿음을(확신을) 갖게 되는데,
안 믿으려고 작정한 사람은 표징 자체를 부정합니다.
(모세 자신은 믿고 있었고, 백성들을 믿게 만들기 위한 표징을 원했습니다.
그러나 바리사이들은 안 믿으려고 작정한 상태에서
자신들이 안 믿는 것이 옳다는 것을 확인하려고 표징을 요구했습니다.
그래서 만일에 예수님께서 어떤 표징을 보여주신다고 해도 그것을 표징으로
인정하지 않았을 것이고, 더 놀라운 다른 표징을 보이라고 요구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깊이 탄식하신 것은, 안 믿으려고 작정한 그들의 악한 마음을
꿰뚫어보셨기 때문이고, 표징을 보여주기를 거절하신 것은
보여주어도 소용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바리사이들이 예수님에게 와서 시비를 건 이야기 바로 앞에는
예수님께서 빵 일곱 개로 사천 명을 먹이신 이야기가 있습니다.
바리사이들은 “그런 정도의 기적은 표징이라고 말할 수 없다.” 라고
주장했던 것 같습니다.
요한복음 6장을 보면, ‘기적의 빵’을 먹은 사람들이 예수님께 “무슨 표징을
일으키시어 저희가 보고 선생님을 믿게 하시겠습니까? 무슨 일을 하시렵니까?”
라고 말합니다(요한 6,30).
‘빵의 기적’은 표징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들은 탈출기에 나오는 ‘만나가 내리는 기적’(탈출 16장)과 같은
기적을 요구합니다(요한 6,31).
오늘날의 우리 입장에서는 그런 유대인들을 이해하기가 어려운데,
사실 냉정하게 반성해 보면, 우리 안에도 그런 모습이 있습니다.
물론 이미 신앙인이 된 사람들은 “표징을 보여주면 믿겠다.” 같은 말을
하지는 않겠지만, 뭔가 간절하게 원하는 것을 청하는 기도를 할 때
조건을 붙이는 경우가 있습니다.
“저의 기도를 들어주시면, 제가 ......을 하겠습니다.” 같은 식으로......
신앙인이라도 그렇게 기도하는 것은,
믿으려고 하지는 않고 표징만 요구하는 바리사이들의 태도와 다르지 않습니다.
창세기 28장에 나오는 야곱의 서원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저와 함께 계시면서 제가 가는 이 길에서 저를 지켜 주시고, 저에게
먹을 양식과 입을 옷을 마련해 주시며, 제가 무사히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게
해 주신다면, 주님께서는 저의 하느님이 되시고, 제가 기념 기둥으로 세운
이 돌은 하느님의 집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저는 당신께서 주시는 모든 것에서
십분의 일을 당신께 바치겠습니다(창세 28,20-22).”
그런데 야곱이 그런 서원을 하기 전에 이미
하느님께서 먼저 이렇게 약속하셨습니다.
“나는 너의 아버지 아브라함의 하느님이며 이사악의 하느님인 주님이다. 나는
네가 누워 있는 이 땅을 너와 네 후손에게 주겠다. 네 후손은 땅의 먼지처럼
많아지고, 너는 서쪽과 동쪽 또 북쪽과 남쪽으로 퍼져 나갈 것이다. 땅의 모든
종족들이 너와 네 후손을 통하여 복을 받을 것이다. 보라, 내가 너와 함께
있으면서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켜 주고, 너를 다시 이 땅으로 데려오겠다.
내가 너에게 약속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않겠다(창세 28,13-15).”
따라서 야곱은 거창하게 서원을 할 필요가 없었고,
그냥 “감사합니다.” 라고 한 마디만 해도 되는 상황이었습니다.
(야곱의 서원은 아직 믿음이 초보 단계에 있었던 구약시대의 모습인데,
오늘날의 우리도 그런 식으로 기도할 때가 많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런데 하느님의 말씀을 보면,
하느님께서는 야곱에게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으셨습니다.
그처럼 하느님(예수님)의 사랑과 자비는
어떤 대가도 요구하지 않는 무조건적인 사랑과 자비입니다.
주님이신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이렇게 호소하십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다.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요한 15,9).”
주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것은
우리가 당신의 사랑 안에서 사는 것, 그것뿐입니다.
그러니 하느님(예수님)께 무엇인가를 청하려면
조건 같은 것은 붙이지 말고 그냥 단순하게 청하는 것이 옳은 일입니다.
우리가 청하는 그것이 당신 뜻에 합당한 것이면,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그것을 틀림없이 주시고,
당신 뜻에 합당하지 않으면, 대단한 조건을 붙인다고 해도 주시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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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214. 성 치릴로 수도자와 성 메토디오 주교 기념일.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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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214. 성 치릴로 수도자와 성 메토디오 주교 기념일.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영적인 눈을 뜨면 모든 것이 다 경이로움의 대상이요, 매 순간이 기적의 연속입니다!
옆에서 지켜보기에 너무나 안쓰러웠던 투병 생활을 마무리하고, 하느님 품으로 돌아간 한 형제의 간절한 바람이 아직도 제 귓가에 남아있습니다. 그 간절한 바람이란 것이 제게는 정말이지 아무것도 아니었지만, 그분에게는 그렇게 간절했나 봅니다.
“칼칼한 육개장 한 사발에 공깃밥을 말아 훌훌 먹어 봤으면...시원한 물 한 컵 벌컥벌컥 들이 마셔 봤으면...평소 그리 좋아했던 옥수수 한 자루 파도소리 철렁이는 바닷가에서 낚싯대 한번 드리워 봤으면...”
따지고 보니 지금 우리가 누리고 있는 지극히 작고 평범한 일상의 일들이 어떤 분들에게는 엄청난 기적이요 표징입니다. 사실 따지고 보면 하루하루가 기적입니다. 주변을 곰곰이 살펴보면 일상의 모든 흐름들이 표징입니다.
하늘을 뚫어지게 바라볼 필요도 없습니다. 기를 쓰고 눈을 부릅뜨고 기적을 찾아 나설 필요도 없습니다. 우리가 제대로 회심하면, 우리가 제대로 영적인 눈을 뜨게 되면 주변의 모든 것이 다 경이로움의 대상이요, 매 순간이 기적의 연속입니다.
죽었다 깨어나도 변화되지 않고 회심하지 않는 바리사이들 앞에 예수님께서 깊이 탄식하십니다. 탄식은 어떤 때 나오는 것입니까? 정말 해도 해도 너무한 때, 정말 이건 아닌데, 하는 생각이 들 때, 어떻게 이럴 수가 있을까, 하는 느낌이 들 때 자기도 모르게 깊은 한숨과 함께 탄식이 터져 나옵니다.
예수님께서 탄식하신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종착지가 바로 코앞인데, 구원이 바로 눈앞인데, 영원한 생명이 이렇게 자기들 가까이 있고, 금방 손에 넣을 수 있는데, 그것을 외면하고, 거부하고, 발로 차버리는 바리사이들 앞에 너무나 안타까운 나머지 터져 나온 탄식이었습니다.
그간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보여준 기적이 얼마나 많았는데, 그간 예수님의 손으로 치유의 은총을 입은 사람들이 얼마나 많았는데, 빠져나간 악령들, 죽음에서 되살아난 사람들...그 모든 하늘의 표징들을 자신들의 두 눈으로 확인했던 바리사이들이었건만, 또 다른 표징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이는 메시아의 능력을 자신들의 눈으로 다시 한번 확인해보고, 승복하여 예수님께 돌아서기 위해서가 절대로 아니었습니다. 그저 호기심에, 그저 장난삼아, 애초부터 신앙의 눈이 아니라 적개심과 불신으로 가득 찬 눈으로 예수님에게 또 다른 표징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이런 바리사이들의 모습 앞에 예수님께서 느끼셨던 비애감과 실망감을 하늘을 찔렀을 것입니다. 극에 달한 바리사이들의 불신과 적대감, 꽉 막힘 앞에서 너무나 안타까웠던 예수님께서는 가슴 아프셨겠지만 그들에게서 기대와 희망을 접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남겨두고 떠나십니다. 영혼의 눈이 먼 그들이었기에, 바로 자기들 눈앞에 다가온 구원을 놓치는 일생일대의 과오를 저지르고 만 것입니다.
혹시라도 오늘 우리 내면에 그 옛날 바리사이들의 그 완고함과 옹졸함, 적대감과 불신으로 가득 차 있는 것은 아닌지? 그래서 실망하신 주님께서 우리를 떠나가고 계시는 것은 아닌지? 진지하게 돌아볼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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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214. 성 치릴로 수도자와 성 메토디오 주교 기념일. 전삼용 요셉 신부님.
선거로 드러나는 나의 모습: 바리사이의 선택, 신앙인의 선택!
저도 모르게 또 월요일 묵상을 했네요.
월요일 묵상은 다음 주부턴 꼭 쉴게요 ^^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바리사이들과 ‘하늘에서 오는 표징을 요구하는’ 그 세대를 두고 탄식하십니다.
왜 하느님을 믿기 위해 표징을 요구하는 것이 잘못일까요? 그 이유는 이미 표징을 보여주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앞에서 4천 명을 먹이시는 기적을 행하셨습니다.
당신이 아버지이시고 창조자이심을 보여주는데 이것만큼 큰 표징은 없습니다.
만약 아이가 “아빠, 우리 아빠 맞아? 맞으면 한 번 날아봐!”라고 한다면 황당할 것입니다.
이 말은 아빠가 아빠이기를 믿기 원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자신에게 어떤 이익이 되는가를 시험하는 말입니다.
다시 말해 아빠는 필요없고 슈퍼맨이 필요하다고 말하며, 자신 안에 이 세상에서 아빠의 덕을 보며
능력자가 되고 싶다는 욕망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로보트 기요사키’는 전 세계 베스트셀러가 된 『부자 아빠, 가난한 아빠』로 유명한 사업가입니다.
그는 물론 가난한 아빠도 사랑하겠지만 그보다는 부자 친구의 아빠가 더 좋았습니다.
그래서 그에게 가서 어렸을 때부터 돈 버는 법을 배웠습니다.
그리고는 자신을 키워준 아빠보다 부자 아빠를 따른 것을 더 잘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를 통해 그의 마음 안에는 아빠의 따듯한 애정도 좋지만, 이 세상에서는 돈을 많이 버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마음이 드러났습니다.
물론 자신을 키워준 아빠도 사랑하겠지만, 책 내용만 보면 그는 아빠를 ‘능력’으로 평가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럴 때 그를 키워준 가난한 공무원이었던 아빠의 마음은 어떨까요?
어쩌면 우리도 하느님에게 능력을 보여주면 믿겠다고 청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남편의 승진을 위해, 아이의 성공을 위해, 집값의 상승을 위해 기도하고 그 기도가 성취되면 하느님을 믿겠다고 한다면 하느님은 마음이 아프실 것입니다.
왜냐하면, 당신은 ‘아버지’가 되시기를 원하는데, 우리는 이 세상 살아가는데 필요한 것들을 챙겨줄 ‘슈퍼맨’을 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아버지가 자신들이 원하는 것을 들어줄 능력이 없는 것을 볼 때는 가차 없이 버립니다.
그러니 바리사이들은 예수님께 능력 있는 표징을 보여달라고 하며 자신들이 부려먹을 힘 있는 황소와 같은 하느님을 바라고 있었음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살과 피가 섞인 ‘양식’만큼 하느님을 아버지로 믿을 표징은 없는데도 말입니다.
우리가 타락한 세대인지 아닌지는 ‘선거’ 때 명확하게 드러납니다.
선거 때가 되면 후보자들은 각자 자신에게 어떠한 능력이 있는지 어필합니다.
이는 벌써 아버지와 같은 후보가 아닌 슈퍼맨과 같은 능력자를 원하고 있기에 우리 자체가 바리사이처럼 돈을 좋아하는 나라가 되었음을 드러나게 합니다.
지도자의 자질은 크게 세 가지로 나눕니다. 바로 ‘비전 – 통솔력 – 청렴함’입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비전입니다.
지도자는 마치 배의 선장과 같은데 길을 볼 줄 모르면 큰 사고가 나게 할 수도 있습니다.
결단력 없는 선장 때문에 얼마나 많은 희생자가 나올 수 있는지 우리는 세월호 사고 때 깊이 체험했습니다.
비전 없는 지도자를 따라가는 것은 지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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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214. 성 치릴로 수도자와 성 메토디오 주교 기념일. 이재을 사도요한 신부님.
성 치릴로 수도자와 성 메토디오 주교 기념-묵상과 기도
성 치릴로와과 메토디오는 형제로, 그리스의 테살로니카에서 태어나 터키의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교육을 받았습니다. 두 형제는 슬라브인들을 위한 알파벳을 만들고 전례서들을 자신들이 창안한 슬라브 알파벳으로 번역하였습니다. 그들은 체코 모라비아의 슬라브족에게 파견되어 복음을 전하며 헌신적으로 일하였습니다. 로마로 돌아가서 치릴로는 수도 서원을 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869년 무렵에 선종하였고, 메토디오는 교황 특사로 모라비아에서 활동하다가 885년 무렵 선종하였습니다.
야고보서에서 야고보는 시련이 닥치면 그것을 기쁨으로 여겨라. 믿음이 시험을 받으면 인내가 생기는데, 그 인내로 효력을 내라. 그러면 모자람 없는 온전한 사람이 된다. 고 하였습니다.
마르코 복음에서 바리사이들이 예수님께 하늘에서 오는 표징을 요구하였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믿음이 없는 것을 보시고, 어찌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는가! 하였습니다. 주님의 말씀에 의심하지 않고 "예"하고 응답하는 제자가 됩니다.
회상과 성찰
지난 시간을 되돌아봅니다. 지난 시간 동안 걸어온 길. 자리, 만남을 회상합니다. 나의 모습을 깊이 바라봅니다.
-. 3분 동안. 지난 현장을 더 깊이 바라봅니다. 나와 이웃과의 만남, 대화, 일, 사건 등 그 경과와 결과를 구체적으로 바라봅니다.
-. 내 안에 살아계신 주님, 자비하신 그분의 현존을 바라봅니다. 그리고 그분의 말씀을 듣습니다.
-. 선과 진리, 사랑과 자비 기준으로 나의 허약함과 허물, 그릇됨과 악습 등을 바라 봅니다. 회개와 개선, 결심 등 복음적 실행을 묵상합니다.
-. 감사의 마음으로 다짐과 실천을 기도로 바칩니다.
말씀 묵상
하느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종 야고보가 세상에 흩어져 사는 열두 지파에게 인사합니다.
나의 형제 여러분, 갖가지 시련에 빠지게 되면 그것을 다시없는 기쁨으로 여기십시오. 여러분도 알고 있듯이, 여러분의 믿음이 시험을 받으면 인내가 생겨납니다. 그 인내가 완전한 효력을 내도록 하십시오. 그리하면 모든 면에서 모자람 없이 완전하고 온전한 사람이 될 것입니다.
여러분 가운데에 누구든지 지혜가 모자라면 하느님께 청하십시오. 하느님은 모든 사람에게 너그럽게 베푸시고 나무라지 않으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면 받을 것입니다. 그러나 결코 의심하는 일 없이 믿음을 가지고 청해야 합니다. 의심하는 사람은 바람에 밀려 출렁이는 바다 물결과 같습니다.
그러한 사람은 주님에게서 아무것도 받을 생각을 말아야 합니다. 그는 두 마음을 품은 사람으로 어떠한 길을 걷든 안정을 찾지 못합니다.
비천한 형제는 자기가 고귀해졌음을 자랑하고, 부자는 자기가 비천해졌음을 자랑하십시오. 부자는 풀꽃처럼 스러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해가 떠서 뜨겁게 내리쬐면, 풀은 마르고 꽃은 져서 그 아름다운 모습이 없어져 버립니다. 이와 같이 부자도 자기 일에만 골몰하다가 시들어 버릴 것입니다. 야고 1,1-11
그때에 바리사이들이 와서 예수님과 논쟁하기 시작하였다. 그분을 시험하려고 하늘에서 오는 표징을 요구하였던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마음속으로 깊이 탄식하며 말씀하셨다. “어찌하여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는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이 세대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 그러고 나서 그들을 버려두신 채 다시 배를 타고 건너편으로 가셨다. 마르 8,11-13
실천
우리는 일상에서 지혜가 모자람을 볼 수 있습니다. 나의 허물과 부족함, 무지와 몰이애, 믿음과 용기 등 지혜가 없음을 알게 됩니다. 그때 지체없이 주님께 청해야 합니다. "주님, 믿음을 주소서." 지혜는 주님께 간청할 때 그분께서 주십니다. 지금 나의 허물과 부족함을 알때, 나의 무지와 몰이해를 알 때, 그분께 대한 믿음이 약하고 용기가 없을 때, 그때 바로 주님께 간구할 때입니다. "주님, 저는 허물이 많습니다. 부끄러움도 있습니다. 당신을 잘 알지 못합니다. 당신을 이해하는 것도 미숙합니다. 이로써 믿음으로 용기도 부족합니다. 제게 믿음을 더해 주소서. 당신의 지혜를 깨닫게 하소서. 오직 이 길만을 청합니다. 그 은총을 주소서. 하고 기도합니다.
야고보 사도는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다고 여길 때 하느님께 청하라. 의심없이 믿음을 가지고 청하라. 고 하였습니다. 믿음없이 사는 자 되지 말고 믿음을 갖고 사는 자 되라. 고 하였습니다.
마침 기도
주님의 기도, 성모송, 영광송을 바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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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214. 성 치릴로 수도자와 성 메토디오 주교 기념일. 강만연 베드로 형제님.
눈에 보이지 않는 표징을 읽을 수 있는 믿음을 키워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살면서 뭔가 확인을 해야 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가령 관공서를 가더라도 어떤 공문서 발급을 할 때 그 사람의 신원을 확인하는 이유는 개인적인 정보가 잘못 유출될 수도 있기 때문에 하는 것입니다. 자기 스스로 아무리 본인이라고 주장을 해도 신분증으로 확인이 되지 않으면 그다음 절차가 진행되지 않습니다. 세상을 살면서 우리는 확인을 해야만 안심을 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사실 확인도 의심적어서 요구하는 경우도 있지만 오히려 알면서도 확인을 빌미로 해 상대방을 난처한 상황에 놓이게 하려고 요구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우리나라 속담에 아니 땐 굴뚝에 연기날까 하는 속담이 있습니다. 연기가 굴뚝에서 나오면 반드시 아궁이에 불을 놓았다는 것은 굳이 확인을 하지 않아도 알 수 있습니다. 만약 이런 상황에서 아궁이에 불을 놓았는지 확인을 요청한다면 이때 확인은 불필요한 행동입니다. 이건 억지 확인이 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바리사이들은 예수님께 표징을 요구하십니다. 그 표징은 하늘에서 내려오는 표징을 말합니다. 하늘이니 어떤 자연계에서 일어나는 표징을 말하는 게 아니고 예수님께서 평소 하늘나라에 대해 말씀을 하시기도 하기 때문에 그렇다면 당신이 정말 그 세상에서 왔다는 어떤 징표가 있을 텐데 그걸 우리에게 보여달라고 하는 것입니다. 어쩌면 그들은 그렇게 했을 때 당신의 말을 믿을 수 있겠다는 묵시적인 의미를 드러낸 것과도 같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사실 표징이라는 것은 말 그대로 겉으로 드러나는 것을 상징합니다. 이걸 요구하는 그들의 마음을 보시고 탄식을 하십니다.
좁은 인간의 생각으로 판단해보면 그냥 어떤 표징을 바로 보여주시면 그들의 마음에 확신을 주실 수 있는 상황인데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 회피하신 것은 어떤 이유에서 그렇게 하셨을까를 묵상해봅니다. 그들은 눈에 보이는 표징만 표징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마태오 복음에 나오는 병행구절에서는 자연계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보고는 어떤 일이 일어났다는 것을 알면서도 시대의 표징을 읽지 못하는 경우가 일어난 것을 복음을 복음을 통해 보면 왜 예수님께서는 이런 예시를 들어서 말씀을 하셨는지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습니다.
아마도 그들은 드러나지 않아 표징을 볼 수 없어서 표징을 요구하는 게 아니라 충분히 그들이 원하는 답을 찾으려고만 한다면 얼마든지 알 수도 있었을 텐데 단순히 표징 그 자체를 확인하려고 하는 수단이 아니라 단순히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하는 그들의 불순한 의도를 이미 예수님께서 간파하셨기 때문에 그들의 그런 완악한 마음 그자체를 아쉬워하셨던 것 같습니다. 이런 태도는 좋은 모습이 아닙니다.
굴뚝에 연기가 나면 당연히 아궁이에 불을 놓았다는 것을 정황상 알 수 있는데 마치 아궁이에 불을 놓았는지 확인을 요청하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만약 그들의 속마음이 진실되고 순수한 마음이었다면 굳이 눈에 보이는 현상으로 표징을 보여주시지 않으셨어도 충분히 말씀으로 설명해 주셨을 것 같습니다. 실제는 그렇게 하지 않으시고도 얼마든지 하늘에서 내려오는 표징을 보여주실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계셨는데도 불구하고 그렇게 하신 연유는 무엇일까요? 예수님께서는 눈에 보이는 현상을 보고 예수님을 따르려고 하는 마음보다는 눈으로 보지 않아도 예수님의 말씀을 신뢰할 수 있는 그런 믿음을 원하셨던 것은 아닐까요?
어떤 현상을 보고서 믿는 믿음은 하수의 믿음이 될 것입니다. 인간은 망각의 동물이기 때문에 그런 현상은 시간이 지나게 되면 확신의 정도가 다소 약해질 수가 있습니다. 하지만 표징 같은 것이 없어도 우리가 글에서도 그렇습니다만 글쓴이가 어떤 의미를 드러내지 않아도 글의 행간을 통해서 그 속에 숨은 의미를 읽어낼 수 있는 것처럼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으로도 그분이 하늘에서 오신 분이라는 것을 알 수 있어야 하는데 그들의 수준이 그 수준까지는 미치지 못했던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과 신앙도 마찬가지이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사실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아무리 믿음 생활을 열심히 한다고는 하지만 때로 과연 하늘나라가 존재할까 하는 의구심이 드는 경우도 인간인지라 얼마든지 있을 수 있습니다. 실제 우리는 바리사이와 같은 그런 것은 요구하지 않아도 나약한 인간이라 내심 말로는 표현을 하지 않아서 그렇지 우리의 마음속에도 어쩌면 오늘 복음에 나오는 바리사이들의 마음이 전혀 없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극히 드물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바리사이들의 모습을 보면서 우리의 마음도 이와 같지는 않은지 한번 되돌아보는 것도 좋을 듯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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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의 성장과 지혜는 어떤 관계가 있는가?
오늘 독서를 묵상하면서 드는 생각입니다. 믿음의 성장과 지혜의 상관관계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치고 누구나 믿음이 깊기를 원합니다. 때로 나의 믿음은 이것밖에 되지 않는가 하고 한탄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믿음은 그냥 단순히 믿으려는 마음을 억지로 가진다고 해서 생기는 것은 아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물론 노력은 필요할 것입니다. 그런 노력이 무엇일까가 오늘 독서를 묵상하면 어느 정도는 답이 나오는 것 같습니다. 우리는 때로 맹신을 좋은 믿음이라고 착각할 소지도 있습니다. 무조건 덮어놓고 믿는 것은 좋은 믿음이 아니라 자칫 잘못하면 우상숭배가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표면적으로는 좋은 모습 같지만 왜 그게 우상숭배로 될 수 있을까요? 실상을 보면서 허상을 보기 때문입니다. 이런 우를 범하지 않기 위해서는 자신의 믿음이 그냥 단순히 아무 생각없이 순수하게 받아들인 양 마치 순수한 신앙이라고 치부를 하게 될 때 일어날 수가 있을 겁니다. 사실 함정은 여기에 있다고 봅니다.
맹신도 맹신을 해서 맹신을 하는 경우도 있지만 사실 잘 모르고 있기 때문에 맹신을 하는 경우가 훨씬 많을 것입니다. 그렇게 됐을 때 착각하는 게 본인의 믿음이 아주 신실하다는 사실입니다. 누구나 이런 함정에 빠지기 쉽습니다. 그렇다면 이런 오류를 어떻게 알아내야 할 것이며 그런 수단으로 무엇이 있을지가 핵심입니다. 믿음에서는 의심은 좋지 않은 것임에는 틀림없는 사실이지만 의구심은 필요할 수도 있습니다. 의구심이라는 것은 뭔가 완전하고 싶은데 자기의 생각에 조금 석연찮은 구석이 있게 되면 그게 왜 그럴까 하고 의문을 가지는 것입니다. 이건 의심과는 약간 본질을 달리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의구심은 어찌보면 역으로 자신의 믿음에 흠결이 있다면 그 흠결을 보완할 수 있는 수단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게 해결되지 않으면 그 의구심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또 그게 확장이 되면 의심으로 전락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걸 해결하는 하나의 방편이 될 수 있는 게 신앙에도 지혜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지혜는 때로 지식을 통해서 얻어지는 경우도 있습니다. 지식이 없어도 지혜를 얻을 수 있다면 그야 참으로 좋은 현상이지만 그렇지 못할 경우는 지식을 쌓아야 할 것입니다. 믿음이 성장하려고 하는 요소 가운데 하나가 시험일 것입니다. 오늘 독서는 믿음이 시험을 받으면 인내가 생긴다고는 하지만 이 의미는 사실 숨은 의미가 있지 않겠습니까? 시험을 이겼을 때라는 전제가 있을 때만 이 말씀이 설득력이 있는 것입니다. 무조건 시험만 있다고 해서 인내가 형성되는 것은 당연히 아니지 않겠습니까? 그 시험을 이길 수 있는 힘이 있기 위해서 지혜가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지식과 지혜가 자신의 믿음의 흠결을 보충해서 완전한 믿음으로 갈 수 있는 발판을 제공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의심은 바람에 밀려 출렁이는 바다 물결과 같다고 오늘 독서는 말합니다. 그래서 의심하는 사람은 주님에게서 아무것도 받을 생각을 하지 말아야 한다고 하십니다. 왜냐하면 두 마음을 품기 때문입니다. 이런 마음으로는 어떤 길을 걸어도 안정을 찾지 못한다고 하셨습니다. 이 길에는 신앙의 길도 포함할 것입니다. 이런 일련의 말씀을 논리적으로 정리를 해보면 믿음의 길과 신앙의 길을 가는 데 있어서 의심을 가지고 간다면 그와 같은 길은 불완전한 길을 걷는 것이고 그렇게 되면 그 속에서는 안정과 평화를 찾을 수 없다는 말씀과 같은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천국을 가는 여정 속에서 신앙의 배가 망망대해에 좌초되고 마는 형국과 같을 것입니다.
결국 믿음에 시험을 받아도 그걸 지혜롭게 잘 대처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신앙에도 신앙지식이 선행돼야 한다는 것을 오늘 독서를 묵상하면서 드는 생각입니다. 때로 지식이라는 게 믿음의 길에 장애가 될 경우도 있을 수 있지만 사실 성장의 발판이 되는 경우가 훨씬 더 많을 것입니다. 그것도 어떻게 지혜롭게 잘 대처를 하는가에 달려 있을 겁니다. 외부의 바람에도 출렁이는 바다의 물결이 되지 않는 신앙과 믿음의 밑바탕이 되려면 반드시 지혜를 필요할 것이며 그런 지혜를 우리는 기도로 청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게 됐을 때 신앙의 배는 천국을 향해 순항을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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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214. 성 치릴로 수도자와 성 메토디오 주교 기념일. 김 로마노 형제님.
연중 제6주간 월요일 제1독서(야고1,1~11)
4세기초 에우세비우스는 바오로 서간에 이어지는 서간 일곱개, 곧 야고보서, 베드로 1,2서, 요한1,2,3서, 그리고 유다서를 가톨릭 서간이라 불렀다.
여기서 가톨릭이란 말은 '보편적'이라는 뜻이다. 이 서간들이 어느 특정한 교회가 아니라 보편 교회에 보내졌다하여 그런 이름을 붙인 것이다. 야고보서는 전형적인 권고서한에 속한다. 명령형 동사가 자주 쓰인다는 단순한 사실이 이를 입증한다.
이 서간은 믿음을 통해서만 구원받는다고 주장하는 개신교의 교리(이신득의 ; 以信得義)와 달리 행동(실천)으로 의롭게 되고 구원받는다는 사실을 강조하기 때문에 M. Luther는 이 서간을 다른 신약성경 책들과 비교하면서 "복음적 특성을 전혀 간직하지 못한 지푸라기 같은 서간" 이라고 깎아 내렸고, 이런 견해를 받아들인 개신교 전통에서는 그리스도론과 구원론도 제대로 갖추지 못한 질이 낮은 경전으로 평가하였다.
19세기의 역사 비평가들은 이 서간을 초대 교회 안에서 서로 대립하던 두 경향, 곧 바오로적인 경향과 유다교적인 경향 사이의 절충을 시도한 문헌으로 보았다.
가톨릭에서는 주로 병자성사의 근거를 제시하고(5,14-15), 믿음을 통해서 구원받는다고 주장하는 개신교의 교리를 반박하기 위해서(2,14-26) 이 서간을 이용하였다.
한편, 개신교에서는 야고보서의 집필 목적을 연구하면서부터 신약성경의 다른 책들과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고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야고보서가 집필되던 당시 교회 상황이 사도 바오로가 믿음을 통해 의로움(구원)에 이른다는 복음이 교회내에 편만한 상태였다고 보았다.
그리고 적지 않은 개신교 성도들이 그 '믿음으로서 의로움(구원)에 이른다'는 이신득의(以信得義) 복음을 관념론으로 변질시켜 믿음은 삶에서 구체적으로 드러나야 하는 신앙 행위와 분리시켜 버렸다고 본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야고보서의 행위라고 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의 자연스런 표출이다.
사람이 운동을 많이 하면 땀을 흘리듯이,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이 있는 자는 그 믿음으로 말미암은 신앙 행위가 자연스럽게 따라 온다고 본다.
특히 야고보서에 나오는 '행동'(행함, 실천)으로 번역되고 있는 단어 '에르곤'(ergon)이 바오로 서간 중 테살로니카 전서 1장 3절에서 '믿음의 행위'를 표현할 때도 쓰였다는 사실은 주목할 만하다고 본다.
거기에서 바오로는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가지고 있는 자는 당연히 그 믿음으로부터 '에르곤'을 행사한다는 사실을 말했다.
따라서 '이신득의'를 말하는 바오로의 사상과 행위로 말미암은 구원(의로움; 개신교에서는 '칭의' ; 야고 2,24)을 말하는 야고보의 사상이 상충되는 것이 아니라고 본다. 현대 개신교에서는 사도 바오로와 야고보의 사상이 그 뿌리에서 서로 조화를 이루고 있다고 보고 있다.
어쨌든 야고보서는 그 자체의 고유한 특성과 내용을 지닌 만큼 독립적으로 다루는게 바람직하다고 본다.
야고보서의 내용은 결코 가볍거나 진부하지 않다. 신약성경에서 야고보서만큼 사회의식이 뚜렷한 경전도 없을 것이다. 이 서간이 초대교회에서 정경으로 뒤늦게 인정을 받은 것도 사도적 기원의 취약성 때문이지 결코 그 내용 때문이 아니었다.
"하느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종 야고보가 세상에 흩어져 사는 열두 지파에게 인사합니다." (1,1)
여기서 야고보가 누구인가? 예수님의 제자인 제배대오의 아들이자 요한의 형인 야고보 <장(長)야고보 ; 마르1,19>인가? 아니면 예수님의 다른 제자,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차(次)야고보 ; 마르3,13>인가? 그도 아니면 나중에 교회 전승에서 밝힌 주님의 형제로서 예루살렘 원로단의 대표가 된 야고보(사도12,17 ; 15,13 ; 1코린15,7 ; 갈라1,19 ; 2,9.12)인가?
야고보서가 저자로 내세운 이 이물은 마지막 야고보일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우선 요한의 형 야고보는 A.D.44년에 순교하였고(사도12,1-2),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 없기 때문이다.
전통적으로 세번째로 거론하는 야고보는 공관복음에서 예수님의 형제들 가운데 가장 먼저 나온다(마르6,3 ; 마태13,55).
고대의 테르풀리아누스는 신약 성경의 기록만 가지고 예수님의 형제들을 마리아와 요셉이 첫 아들 예수님 다음에 낳은 아들들, 곧 예수님의 동생들이라고 주장하였다. 오늘날 개신교 신자들이 이를 받아들인다. 이들은 성모님과 성요셉의 (평생)동정을 부정한다.
서방교회에서는 야고보를 주님의 사촌으로 여겼던 4세기 히에로니무스의 견해에 따라 그들을 예수님의 사촌 육촌 팔촌등 가까운 친척으로 본다.
초대 교회에서 주님의 형제들은 열두 사도단과 구별되었다(사도1,13-14 ; 1코린15,5.7). 주님의 형제 야고보는 열두 사도단에 속하지는 않았지만 넓은 의미에서 사도로 통한다(1코린15,7 ; 갈라1,19). 그는 예수님의 공생활에 동반하지 않고 다른 친척들과 함께 나자렛에서 머물러 있었다(마르3,21.31-32 ; 6,1-4).
그러나 야고보는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그에게 나타나실 만큼 그분과 특별히 가까운 사이였고(1코린15,7), 그 뒤 예루살렘 모교회가 창립될 때 원로단의 대표가 되었다(갈라2,9 ; 사도12,17 ; 15,13-22 ; 21,18).
야고보는 A.D. 60년대 초에 순교하였다. 요세푸스의 증언에 따르면, 로마 총독이 없는 틈을 타 대사제 아나누스 2세가 산헤드린을 소집하고, "메시아라고 불린 예수의 형제" 야고보를 율법 위반자로 몰아붙여 돌로 쳐 죽였다(유다 고대사 20,9.1).
그리스도교 전통에서 야고보서의 저자를 예수님의 형제 야고보로 내세운다 할지라도 야고보서는 저자가 역사적인 위대한 인물의 이름을 빌려 쓴 차명 서간이다.
그리고 이 서간에 인용된 구약 성경은 히브리어 성경이 아니라 칠십인역 그리스어 성경이다. 아마도 저자는 야고보의 제자이거나 추종자로서 그의 가르침을 후대에 알리고자 했던 인물일 것이다.
그 다음 이 서간의 인사말에서 "세상에 흩어져 사는 열두 지파"는 누구를 말하는가?
본문에서 '흩어져'에 해당하는 '디아스포라'(diaspora)는 '~을 통해 널리', '쪼개고 들어가는', '관통하는' 이라는 의미의 전치사 '디아'(dia)와 '흩뿌리다'라는 의미의 동사 '스페리오'(sperio)의 합성어에서 유래한 단어로서 '분산', '흩어진 자'라는 문자적 의미를 지니며, 신약성경에서는 세번 밖에 사용되지 않았다(요한7,35 ; 1베드1,1).
이 용어는 이스라엘이 아시리아와 바빌로니아에 의해 멸망한 뒤에 팔레스티나 지역 밖에서 신앙을 지키며 흩어져 살아왔던 유다인들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그러나 야고보는 이 용어를 본문에서 팔레스티나 밖에 사방으로 흩어져 있는 유다인들이라는 의미보다는 초대 교회 당시에 신앙의 박해로 인해 흩어져 있는 그리스도교인들을 가리키는 의미로 사용한 것 같다.
사실 스테파노가 순교한 후 예루살렘에 큰 박해가 일어나면서 그리스도인들이 예루살렘과 유다 지역 밖으로 흩어졌으며(사도8,1), 이것은 오히려 그리스도교의 급속한 확산이 이루어지는 계기가 되었다.
야고보는 유다인이든, 이방인이든, 로마제국 곳곳에 흩어져 있는 모든 그리스도인들 (온 세상에 흩어져 사는 디아스포라 유다계 그리스도인들)을 대상으로 해서 본 서신의 메시지를 보내고 있는 것이다.
"갖가지 시련에 빠지게 되면 그것을 다시없는 기쁨으로 여기십시오. 여러분도 알고 있듯이, 여러분의 믿음이 시험을 받으면 인내가 생겨납니다. 그 인내가 완전한 효력을 내도록 하십시오. 그리하면 모든 면에서 모자람없이 완전하고 온전한 사람이 될 것입니다." (2-4)
'시련'이라고 번역된 '페이라스모이스'의 원형 '페이라스모스'(pheirasmos)는 '시험'(test), '시련'(trial), '유혹'(temptation)이란 다양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중에서 '시험'이란 표현은 '시련'과 '유혹' 모두를 포괄하는 표현이다.
본문에서는 유혹이라는 의미보다는 그리스도인으로서 믿음을 지켜야만 하기에 거기에 따르는 시련이라는 의미로 이 단어가 사용되었다.
즉 내적인 욕심으로 인한 시험이라기 보다는 외적인 고난으로서의 시험이란 의미가 더 강한 것이다.
여기서 '갖가지 시련'에서 '갖가지'라는 표현은 종류가 다양하다의 의미의 '여러가지'를 말하는데, 삶의 모든 영역 어디에서건 뜻하지 않은 갖가지 종류의 위협적인 시험에 직면하였기 때문일 것이다(사도20,19 ; 2코린11,23-28).
"갖가지 시련에 빠지게 되면" (2)
'빠지게 되면'으로 번역된 '페리페세테'(pheripesete)는 '~주위에'란 뜻의 전치사 '페리'(pheri)와 '빠지다'(마태15,14), '넘어지다'(마태17,15)란 의미의 동사 '핍토'(phipto)의 합성어로서 '~에 에워 싸이도록 빠지다', '~에 빠져 에워 싸이다' 란 뜻을 가진 '페리핍토'(pheripipto)의 가정법 동사이다.
이 동사는 성도들이 시련들을 일부러 만난 것이 아니라 여러가지 시련들이 느닷없이 예기치 않게 닥쳐왔다는 사실을 짐작하게 해준다. 특히 가정법 동사 '페리페세테'는 여기서 시간을 나타내는 불변사 '호탄'(hotan; '~할 그때에는')과 함께 쓰였다.
여기서 '호탄'은 여러 번의 반복적 동작이 일어나는 때를 묘사하므로 시련의 닥침이 일회성으로 끝나는게 아니라 자꾸 반복적으로 닥쳐왔음을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이제 야고보서 1장 3절에서 그리스도인들이 시험을 당할 때 왜 그것을 전적으로 기쁘게 생각해아 하는지 그 이유를 설명하고 있다.
"여러분도 알고 있듯이, 여러분의 믿음이 시험을 받으면 인내가 생겨납니다" (3)
먼저 여기서 '시험'으로 번역된 '도키미온'(dokimion)은 마치 금, 은을 뜨거운 불 속에 넣고 녹여 그 진위를 시험하듯이 믿음의 진위를 입증하거나 시험하는 단련(연단)을 의미하는 단어로서 본문과 베드로 전서 1장 7절에만 나타난다. 즉 본문에서 이 단어는 시험 곧 단련이 그리스도인들의 믿음의 진위를 테스트하는 과정임을 보여준다.
그런데 성도의 삶에 있어서 이것은 한 번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여러번 되풀이 된다. 이처럼 그리스도인들에게 반복적으로 닥치는 믿음에서의 시련은 그것을 겪는 그리스도인에게 '인내'라는 아름다운 열매를 맺게 한다.
여기서 '인내'로 번역된 '휘포모넨'(hypomonen)의 원형 '휘포모네' (hypomone)는 '~아래에' 란 뜻의 전치사 '휘포'(hypo)와 '머물다'(마태10,11)란 뜻의 동사 '메노'(meno)의 합성어에서 유래하며 문자적으로는 어떤 상황아래 흔들림없이 머물러 있는 것을 뜻하고 나아가서 '확고부동', '복면', '항구성'이란 의미를 내포한다.
큰 시련과 고난 속에서도 '휘포모네'의 자세를 취하는 사람은 자신의 믿음과 경건을 충실하게 지켜나간다. 이러한 고난 가운데 확고부동함은 단번에 생기는 것이 아니라 서서히 성취되는 것이다.
'생겨난다', '만들어 낸다'는 뜻의 '카테르가제타이'(katergazetai)가 '카테르가조마이'(katergazomai)동사의 현재형이란 사실을 통해서도 확인된다.
일반적으로 희랍어 동사의 현재형은 계속적인 의미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여러가지 시련을 기쁨으로 승화시켜야 하는 이유는 시험이 인내를 만들어내며, 그리스도인으로서 갖추어야 할 모든 자세를 온전히 구비하게 하기 때문이다.
고난의 시험을 당하는 그 당시는 비록 그것이 힘겨울지라도 결국 믿음으로 잘 인내할 그리스도인들에게,그것은 큰 유익을 가져다주는 것이다. 그러기에 고난의 시험 없이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참된 영적 기쁨이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
"그는 두 마음을 품은 사람으로 어떠한 길을 걷든 안정을 찾지 못합니다" (8)
간구하는 자의 마음 상태가 간구의 내용과 모순되지 않는 것이 바로 '의심하지 않는 것'(6)이다. 의심없는 태도만이 하느님께 간구하는 바를 응답받을 수 있는 유일한 통로이며 이것이 야고보가 본문에서 거듭 강조하고 있는 믿음일 것이다.
'의심하다'라는 '디아크리노'(diakrino)동사는 '자기 자신과 모순되다', '주저하다', '망설이다'라는 뜻이 있는데, 야고보서 1장 6절에서 두번씩이나 연속 사용함으로써 의심이란 주제를 강조했다.
특히 '의심하는 자'의 모습을 '바람에 밀려 출렁이는 바다 물결과 같다'고 비유를 통해 시각화시켰으며, 그 위험성에 대한 경각심을 고조시키고 있다.
의심의 위험성과 더불어 의심의 성격이 액체와 같이 불안정한 성격을 지니고 있음을 보여준다.
어느 때는 마치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잔잔하다가도 이내 요동치며 험상궂게 변모해 버리는 바다의 물결은 참으로 그 잔잔함을 믿을 수 없는 불안정한 것이다. 뿐만 아니라 바다 물결의 비유는 의심의 규모가 바다처럼 끝이 없고, 한이 없다는 것을 드러내준다.
이처럼 야고보는 단 하나의 적절한 비유를 사용함으로써 의심이 지니는 여러가지 부정적 면모를 생생하게 전달하는 것이다.
야고보서 1장 6절의 이러한 '의심하는 자'가 바로 야고보서 1장 8절의 '두 마음을 품은 사람으로~안정을 찾지 못한 자'를 가리킨다.
여기서 '두 마음을 품은'으로 번역된 '딥쉬코스'(dipsichos)는 '두 번'이란 뜻의 '디스'(dis)와 '마음', '영혼'이란 뜻의 '프쉬케'(psche)로 이루어진 합성어로서 문자적으로는 '두번의 마음' 이나 '망설이는', '동요하는', '의심하는' 또는 '시련의 때에 특히 더 필요한 믿음의 일관성과 결의가 부족한' 이란 뜻을 포함하고 있다.
이러한 마음은 언제든지 상황에 따라 변할 수 있는 마음으로서 일관성있는 태도를 기대하기 힘들다. 신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단 두 번 밖에 등장하지 않는데, 그 두번 다 야고보서에서만 나타나고 있다(야고4,8).
'비천한 형제는 자기가 고귀해졌음을 자랑하고, 부자는 자기가 비천해졌음을 자랑하십시오.' (9-10)
시련의 때에 가난한 자는 당당하고, 부한 자는 겸손해야 한다는 권면의 내용이다.
야고보서 1장 9-11절은 앞의 단락과 내용상 연결되는 것으로서 시련의 때에 가난한 자는 하느님께서 언젠가는 높여 주신다는 믿음으로 의연한 자세를 견지하는 한편, 부자는 그의 부요함이 영원 무궁하지 않다는 것을 알고, 겸손한 자세를 가져야 함을 말한다.
믿음의 시련 아래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은 아무리 자신이 가난하고 상황이 부정적이라 하더라도 결코 기가 꺾이거나 주눅이 들어서는 안된다.
현실의 환경과 세상적 평가에 의하면 이들은 한없이 불쌍한 사람일 수밖에 없지만, 하느님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이미 영광스럽고 존귀한 새로운 지위를 부여받은 자이기 때문이다.
2월 14일 [연중 제6주간 월요일]
인간의 생각, 뜻으로 가는 것, 신앙 아닙니다.
(마르8,11-13)
11 바리사이들이 와서 예수님과 논쟁하기 시작하였다. 그분을 시험하려고 하늘에서 오는 표징을 요구하였던 것이다.
= 앞10절 ‘곧바로 제자들과 함께 배에 올라 달마누타 지방으로 가셨다.’에서 이어지는 오늘 말씀입니다.
= 달마누타- 과부라는 뜻입니다. 십자가의 그 대속을 믿지 못해 용서, 그 쉼(안식)을 누리지 못하는, 그 안식이신 예수님(신랑)과 짝하지 못하는 과부, 그 과부 홀로 인간의 법, 지혜로 신앙을 하려는 쉼이 없는 그곳에 안식(쉼)의 말씀을 주시려 가셨습니다.
그런데 그 구원(십자가)의 말씀을 진리로 받으려하지 않고 논쟁을 벌입니다. 자신들의 말, 곧 도덕과 윤리-율법이 더 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시험하려 표징까지 요구합니다.
(요한1,4-5.9.11) 4 그분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었다. 5 그 빛이 어둠 속에서 비치고 있지만 어둠은 그를 깨닫지 못하였다. 9 모든 사람을 비추는 참 빛이 세상에 왔다. 11 그분께서 당신 땅에 오셨지만 그분의 백성은 그분을 맞아들이지 않았다.
= 예수님의 사람들의 생명, 빛이 표징입니다. 성경은 ‘바리사이의 모습이 우리의 모습임을 알아들으라.’고 오늘 말씀하시는 겁니다.
12 예수님께서는 마음속으로 깊이 탄식하며 말씀하셨다. “어찌하여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는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이 세대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
표징~
(루가2,12) 12 너희는 포대기에 싸여 구유에 누워 있는 아기를 보게 될 터인데, 그것이 너희를 위한 표징이다.
= 구유- 짐승의 먹이통입니다. 짐승, 죄인들의 생명(구원)의 양식, 그 표징으로 오신 예수님입니다. 그 구원의 표징인 예수님 앞에서 다른 표징을 찾으면~ 당연히 그들은 영원히 표징을 깨닫지 못할 것입니다.
사람들에게는 씨를, 짐승들에게는 풀을 양식으로 주셨습니다.(창세1,28~참조) 씨(제라)-아들, 후손이라는 뜻입니다. 후손은 그리스도를 뜻합니다.(갈라3,16)
예수님은 당신을 ‘사람의 아들’이라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말씀을 깨닫는 것(먹는 것) 사람입니다. 깨달음이 아닌 자신의 義, 명예를 위한- 홀로 열심 한 그 과부의 행위-풀을 먹는 짐승입니다.
13 그러고 나서 그들을 버려두신 채 다시 배를 타고 건너편으로 가셨다.
= 예수님은 또 다른 고장으로 건너가십니다. 자기 말을 고집하는 사람 안에는 에수님의 말씀이 머무르실 수가 없습니다.
(집회15,14-20)
집회15, 14 한 처음에 인간을 만드신 분은 그분이시다. 그분께서는 인간을 제 의지의 손에 내맡기셨다. 15 네가 원하기만 하면 계명을 지킬 수 있으니 충실하게 사는 것은 네 뜻에 달려 있다.
= 인간의 의지는 하느님의 의지와 다름을 먼저 알아야 합니다.
(이사55,8) 8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같지 않고 너희 길은 내 길과 같지 않다. 주님의 말씀이다. 9 하늘이 땅 위에 드높이 있듯이 내 길은 너희 길 위에, 내 생각은 너희 생각 위에 드높이 있다.
=그래야 인간의 길 그 계명(말)을 버리고 하느님의 길 그분의 계명(말씀)이 나의 원함이 될 수 있습니다.
16 그분께서 네 앞에 물과 불을 놓으셨으니 손을 뻗어 원하는 대로 선택하여라. 17 사람 앞에는 생명과 죽음이 있으니 어느 것이나 바라는 대로 받으리라.
= 물, 불- 우리의 생명에 꼭 필요한 물과 빛입니다. 하늘의 물, 불(말씀)로 받으면 생명입니다. 땅의 물, 불(말)로 받으면 죽음입니다.
다시~ 십자나무- ‘모세가 주님께 부르짖으니, 주님께서 나무 하나를 보여 주셨다. 모세가 그것을 물에 던지자 그 물이 단 물이 되었다. 그곳에서 주님께서는 백성을 위한 규정과 법규를 세우시고 그곳에서 주님께서는 백성을 시험하셨다.’(탈출15,25) 그 구원의 계명 그 하느님의 계명을 진리로 받으면 그 십자가의 대속으로 하늘의 새 생명을 얻지만~ 사람의 계명 도덕과 윤리로 받으면 선악의 법이 되어 심판입니다.
우리는 하늘에 들어갈 수 있는 흠도 티도 없는 그 완전한 善을 이룰 수 없는 존재라는 것(야고2,10참조) 그래서 하늘의 흠도 티도 없는 사람의 아들(씨)이신 예수님의 십자가의 대속, 그 의로움이 꼭 필요하다는 것을 잊으면 안 됩니다.
생명과 죽음은 내가 선택하는 것입니다. 천국과 지옥, 내가 선택하는 겁니다. 오늘~~~
18 참으로 주님의 지혜는 위대하니 그분께서는 능력이 넘치시고 모든 것을 보신다.
= 세상(인간)은 깨닫지 못하는 지혜라 하셨습니다.(1코린2,8)
19 그분께서는 당신을 경외하는 이들을 굽어보시고 사람의 행위를 낱낱이 아신다. 20 그분께서는 아무에게도 불경하게 되라고 명령하신 적이 없고 어느 누구에게도 죄를 지으라고 허락하신 적이 없다.
= 죄를 허락하시는 것이 아니라, 불경(不敬) 그 죄가 드러나도록 허락하심 입니다. 왜?
(로마3,25-26) 25 하느님께서는 예수님을 속죄의 제물로 내세우셨습니다. 예수님의 피로 이루어진 속죄는 믿음으로 얻어집니다. 사람들이 이전에 지은 죄들을 용서하시어 당신의 의로움을 보여 주시려고 그리하신 것입니다. 26 이 죄들은 하느님께서 관용을 베푸실 때에 저질러졌습니다. 지금 이 시대에는 하느님께서 당신의 의로움을 보여 주시어, 당신께서 의로우신 분이며 또 예수님을 믿는 이를 의롭게 하시는 분임을 드러내십니다.
우리의 창조 목적이~
(이사43,7) 7 나의 영광을 위하여 내가 창조한 이들, 내가 빚어 만든 이들을 모두 데려오너라.’
= 우리 창조의 목적인 하느님께 영광을 드림을, 십자가의 의로움이신 예수 그리스도로 드리게 된 것입니다.(에페1,5-6참조) 하느님은 인간의 善, 義 - 그 영광을 받지 않으십니다. 십자가의 대속, 그 선, 의- 주님의 영광만 받으십니다.
우리는 주님의 그 영광으로 그분의 지체로 한 몸이 되어 달려 올라지는 것입니다.
(골로3,15-16) 15 그리스도의 평화가 여러분의 마음을 다스리게 하십시오. 여러분은 또한 한 몸 안에서 이 평화를 누리도록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감사하는 사람이 되십시오. 16 그리스도의 말씀이 여러분 가운데에 풍성히 머무르게 하십시오. 지혜를 다하여 서로 가르치고 타이르십시오.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느님께 시편과 찬미가와 영가를 불러 드리십시오.
= 십자가 위에서 주님과 한 몸이 되는 것, 하느님의 지혜(말씀)로만 깨달을 수 있습니다.
♡ 아멘 -*^ㅇ^*-
2022년 02월 14일 월요일
연중 제6주간 월요일 [오늘의 묵상] (정천 사도요한 신부)
시련은 누구에게나 어떠한 형태로든 찾아오기 마련입니다.
누군가에게는 예상하지 못한 질병의 고통으로,
누군가에게는 불의의 사고로 자녀를 잃은 비통함으로 다가옵니다.
어떤 이에게는 오랜 기간 공들인 수고와 노력이 한순간에 무너져 내린 허탈함으로,
어떤 이에게는 헌신적으로 일하던 직장에서 갑자기 쫓겨나게 된 상실감으로 다가오기도 합니다.
이런 시련이 왜 하필 나에게 다가온 것인지,
내가 무엇을 그렇게 잘못한 것인지 하느님께 따져 보기도 하지만,
그분께서는 침묵 속에서 우리를 방관하고 계시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마치 십자가 위에서 절규하시던 예수님에게 아무런 응답이 없으셨던 하느님처럼 말입니다.
“저의 하느님, 저의 하느님, 어찌하여 저를 버리셨습니까?”(마르 15,34)
그런데 오늘 제1독서는 이러한 시련을 두고
우리의 믿음이 ‘시험’에 놓이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하느님께서 당신 자녀들을 단련시키시는 과정이라는 것이지요.
사실 그 자녀들 가운데 으뜸이신 예수님께서도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모진 시련을 겪으셨습니다.
승리자의 위풍당당함이 아닌 패배자의 무력한 모습을 선택하신 메시아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참으로 끝까지 인내하셨습니다.
그 거룩한 인내는 마침내 부활이라는 완전한 결실로 이어지고,
온 인류는 구원을 선물로 받게 되었습니다.
혹독한 수난에도 끝까지 인내하신 예수님의 모습을 기억하는
우리 신앙인들은 각자에게 다가온 시련에 좌절하기보다
오히려 그에 맞서 강한 믿음으로 인내하는 사람들입니다.
당신 제자들이 얼마나 힘겨운 사투를 벌이고 있는지 잘 아시는 주님께서는
다음과 같은 위로의 말씀으로 우리에게 힘과 용기를 주십니다.
“너희는 세상에서 고난을 겪을 것이다. 그러나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요한 16,33).
(정천 사도 요한 신부)
연중 제6주간 월요일 복음(마르8,11~13)
예수님께서는 마음속으로 깊이 탄식하며 말씀하셨다. "어찌하여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는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이 세대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 (12)
바리사이들이 예수님께 구한 '표징'에 해당하는 '세메이온'(semeion; a sign)은 어떠한 것을 다른 것들로부터 구별해 주고 두드러지게 나타나게 함을 뜻하는 단어이다.
'세메이온'(semeion)이 '표'나 '신호'(마태26,48)라는 뜻 외에 '표징', '표적', '기적', '징조' 등의 의미로 사용될 때는 '능력'을 뜻하는 단어인 '뒤나미스'(dynamis; act of power)와 비교된다.
'뒤나미스'(dynamis)는 다분히 초자연적인 능력이라는 뜻이 있는 데 비해서, '세메에온'(semeion)은 그것을 행하는 자가 모든 사람들이 부정할 수 없는 신적(神的) 권위를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증명해 주는 뜻이 있다.
따라서 바리사이들이 예수님께 '표징'을 보여 달라고 한 것은 과연 신적(神的) 권위를 지니고 있는지에 대해 증명해 달라는 뜻이고, 그러한 호기심은 순수하게 예수님을 인정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시험하여 고소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마음 속으로 깊이 탄식하며' 말씀하신다.
'깊이 탄식하며'에 해당하는 '아나스테낙사스'(anastenaksas; he sighed deeply)의 원형 '아나스테나조'(anastenazo)는 '위쪽으로'라는 뜻의 전치사 '아나'(ana)와 '탄식하며 신음하다'는 뜻의 동사 '스테나조'(stenazo)가 결합된 단어인데, 가슴 밑바닥 깊은 곳으로부터 숨을 끌어 올리는 것을 말한다.
이것은 어떻게 해서라도 예수님을 곤경에 빠지게 하여 고소하려는 비열한 인간에 대한 하느님의 아들의 깊은 실망과 비애 및 탄식의 마음을 대변하는 단어이다.
마르코 복음 8장 12절의 후반절인 '이 세대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는 말은 '하느님께서 이 세대에 표징을 주시는 일만큼은 결코 하지 않으실 것이다'는 부정적인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병행 구절인 마태오 복음 16장 4절에는 '이 세대'가 '악하고 절개없는 세대', 즉 '악하고 음란한 세대'로 표현되고 있으며, '요나의 표징밖에는 아무런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는 예수님의 구체적인 답변이 나온다.
'요나의 표징'이란 바리사이들이 구하는 표징과는 전혀 다른 것으로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신 후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실 것이라는 사실을 말한다.
즉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수난과 부활이라는 영광의 표징만이 이 시대에 주어질 것이라는 사실을 말한다.
고집이 세고 이기적이며 어두움에 속한 이들은 눈에 보이는 신비한 표징만을 구하며, 그것들이 눈에 보이지 않을 때에는 결코 하느님을 믿지 않으려고 한다.
하지만 진실한 믿음은 보이지 않는 것을 믿으며, 자연인의 지혜와 이성으로 온전히 깨달을 수 없는 십자가의 신비(1코린1,18.21)를 믿고, 그것을 하느님께서 믿는 이들에게 주신 진정한 표징으로 바라보며 받아들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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