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문학(시)
안산행 열차를 기다린다
박봉규 지음|푸른사상 시선 182|128×205×9mm|144쪽|12,000원
ISBN 979-11-308-2106-1 03810 | 2023.10.28
■ 시집 소개
소용돌이치는 세상살이에 철근 같은 희망을 노래한 시편
박봉규 시인의 첫 번째 시집 『안산행 열차를 기다린다』가 <푸른사상 시선 182>로 출간되었다. 시인은 삶의 무게를 기꺼이 감내하며 치열하게 살아가는 자들을 향한 연민과 세상살이의 다채로운 풍경을 곡진하게 노래한다. 쓸쓸한 풍경 너머 철근 같은 희망을 붙드는 시인의 목소리는 따스하기만 하다.
■ 시인 소개
박봉규(박상규)
전남 보성 출생. 오월문학상과 『영남일보』 신춘문예를 통해 작품 활동을 시작하였으며, 목수와 기자 생활을 거쳐 현재 광동제약(주) 영업부에 재직하고 있다. 세상살이에 대한 연민이 결국 사람을 향한 애틋한 마음이라 여기고 있다.
■ 목차
제1부 길을 묻는다
말하고 싶은 비밀 / 꿈에 / 옛사랑 / 길을 잃다 / 철쭉에게 묻다 / 기다리는 날 / 걷다 보면 / 나의 외로움이 너에게 / 목련꽃 그늘 아래서 / 까치산역 / 첫 시집이 출간되고 / 유정이의 그림 여행 / 안산행 열차를 기다린다 / 혼잣말
제2부 나의 청춘은 가난하였으나
망명의 시절 / 감각, 혹은 슬픔 / 비상을 꿈꾸며 / 기다리는 날 / 파행 시편 1 / 파행 시편 2 / 파행 시편 3 / 간다 / 시의 문신을 새긴 적이 있다 / 가리봉동을 걷다 / 모기 생각 / 갑오 잡다 / 풍경 / 병원을 마주 대하는 생각
제3부 높고 낮은 곳을 떠돌다
희망 / 일꾼 1 / 일꾼 2 / 일꾼 3 / 일꾼 4 / 일꾼 6 / 일꾼 7 / 일꾼 9 / 일꾼 10 / 근로자 대기소 / 영광 원전, 그리고 달맞이꽃에 대한 기억 / 감자탕을 먹는다 / 겨울 삽화 / 당선 소감 / 화성법
제4부 다시 봄
봄비 / 산이 눕는다 / 당신은 누구십니까 / 보성군 문덕면 봉갑리 백사마을 / 반딧불이를 추억하며 / 뒤통수를 치다 / 푸르른 욕망 / 너의 결혼식 / 어디선가 그도 나처럼 늙어갈 것이다 / 이층집 작은 방 / 그런 게 사랑 아닌가 뭐 / 그리움은 강물처럼 / 그의 삶을 믿네 / 맹서 / 안녕히 계세요
작품 해설 : ‘말하고 싶은 비밀’이 결삭은 시의 귀환 보고서 - 조성국ㅠ
■ '시인의 말' 중에서
재치 있는 언어는
사람의 기분을 유쾌하게 만든다.
그런 사람 만나면 즐겁다. 그런 삶이 되고자 한다.
사람들 곁에 있을 때
노래는 흥에 겨웠고 나의 시는 생명을 얻는다.
작가의 길에서 한참을 벗어나
주변인의 삶을 살고 있던 전 시인에게
따뜻한 애정으로 시집을 출간케 한 조성국, 고재종 시인님, 시의 세상으로 떠나신 고(故) 이형기 선생님께 감사 드린다.
살다 보면
어찌할 수 없이
만나야만 하는 순간들이 분명히 찾아온다.
그러한 순간이 나에게 왔을 때
나는 어떤 모습으로 그 시간들을 마주할 것인가.
■ 추천의 글
박봉규는 90년대 중반에 오월문학상과 『영남일보』 신춘문예에 연거푸 당선되며 촉망을 받던 청년 시인이었으나 생활 개척에 뜻하는 바가 있어 잠시 시를 밀쳐두고 목수, 기자, 제약사 영업사원 등의 직업을 이어가며 나름 그 전선에서 고지(高地)에 오른 아주 성실한 사람이다. 그럼에도 “무엇이/사람의 시간을 가난하게 하는 걸까”(「길을 잃다」)라는 어느 한 날의 통렬한 물음이 있어, 젊어 “시 한 편 써놓고 행복해서 밤새껏”(「옛사랑」) 기뻐하던 옛사랑의 꿈을 오늘 다시 들고나온다. 정녕 아름답고 미쁘다. 그래서 「파행 시편」에 보듯 “우리들의 거친 열망 지속적인 파행의 밤”을 가로지르던 젊은 날의 꿈과 방황의 이야기를 뜨겁게 뿜어내고, 「일꾼」 연작에서 보듯 소외와 고통의 최전선에서 “하루 벌어 살아도 가슴 저미는 설렘/철근 같은 희망은 부러지지 않더라”며 노동에 대한 긍정의 파토스를 마음껏 쏟아내니 또한 미쁘고 당당하다. 아직도 청년투의 발화나 호기를 씻어내진 못하였지만 그 호기가 오히려 삶에서나 시에서나 무한 긍정의 에너지로 작용할 수 있으니, 부디 이 시집이 그간 밀쳐두었던 시작(詩作)의 새로운 출발점이 되어서 제2의 인생 고지에 치열하게 도전해보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 고재종(시인)
■ 작품 세계
그가 “지향하는 곳” “어디인가 흩날리는 바람 그 세월 속에 겁 없는 사계가 훌쩍 지나갔고 시침이 멈춘 자명종 난장에 버려진 부속품처럼 밤마다 설움에 떨”기도 하지만 그 설움에 “꺼이꺼이 울다 눈물 훔치면 어느새 고요해지는” “명경지수.” “환영” 같은 “그 속에 하늘이 있고 바람이 있고 네가 있고 내가 있”고 그가 있었다. 막연하게 안개처럼 피어오르는, 잘 다루어진 시적 어휘의 감정이지만 기다란 서사의 “파행”을 겪으며 많은 공정과 업무를 배우며 현장 사람들과 익숙해진다.
“곱게 늙어가는 사람들을 만”나고 “말을 하지 않아도/억지로 티를 내지 않아도/묵묵히 망치질하는 그 모습에서/일꾼의 참모습을 발견할 수가 있”는 그런 “참 일꾼을 만나면/그 사람이 집처럼 편안”(「일꾼 3」)해지는 참일꾼이 되어간다. 일테면 삶의 구체적인 지형도 속에서, 그러한 단면의 각본과 연결되어서 이쪽저쪽으로 뻗어 나가는 긴 이야기들이 시(詩) 속에 자리를 잡아간다. 차츰차츰 “일꾼”이 되어가는 그의 심상과 구체적인 삶의 결합이 잘 어우러지기 시작한다. 대개의 생생한 삶은 낮고 느리고, 어둡고 쓸쓸한 곳에 있듯이 그의 시가 그곳을 통과 중이었다. (중략)
그가 자신의 삶을 흐트러뜨리지 않으면서도 타인의 삶을, 우리 사는 세상의 공동체 구성원인 사람의 선(善)함을 추구하며 살아온 것이라서 그렇다. 이상과 현실의 험난한 줄타기를 하면서도 내내 그렇게 살아온 삶이어서 더욱 그랬다. 그동안 봐왔던 사람들과는 다른 유형의 인간이다. 하여 “높고 낮은 곳을 떠돌다” 오래 묵어 결삭은, ‘말하고 싶은 비밀’과 같은 시의 귀환에다 군말을 더 붙일 여력이 내겐 없다. 이제서야 “삶의 모든 순간들이/빛날 수는 없겠지만 사는 동안 한순간의/빛도 허용 받지 못한 수많은 인생들의/고단하고 외롭고 쓸쓸했던 뒷모습에 따뜻한 눈빛이라도 보내고 싶”은 그가, 또한 그렇게 살아갈 것이어서 그렇다. 무릇 시인이란 제 자신의 말길을 열어, 세상의 물길과 숨길과 은밀히 통하는 자이므로 나는 그의 “희망”에 가만 귀 기울여 들을 수밖에 없다.
나//죽는 날//애 썼 다, 하시며//개근상 하나 주신다면 좋겠다
―「희망」 전문
― 조성국(시인) 해설 중에서
■ 시집 속으로
꿈에
사람이 꿈에 보인 날이면
하루 종일 마음이 어수선하다
일도 손 잡히지 않고
괜히
창밖이나 먼 하늘을 바라본다
사랑하는 사람이거나
또한 그렇지 않거나 살아가면서
잊고 지낸 얼굴이 꿈속을 드나든다는 것은
그만큼
외롭다는 뜻일 게다
어디에 있든지 잊히고 싶지 않다는 바람일 게다
사랑이었을까
곰곰이 생각해보다가
그리움일까 목젖에 걸린 가시 같은 것
사람은 많아도
내 사랑 하나 없어서
잊혀진 옛 사람이 마음을 두드린다
사람이
꿈에 보인 그다음 날이면
읽을 수 없는 암호들이 공중을 떠다닌다
안산행 열차를 기다린다
그가 있으면, 안산행이다 눈이 그치고 낮은 처마 물방울이 떨어진다 나는 커피를 마시며 그의 동정을 곁눈질한다 털실로 짠 스웨터와 잘 닦인 구두코 햇살이 미끄러지고 미끄러진 햇살이 내 발밑의 눈을 녹인다 나는 가볍게 목례를 보낸다 역사(驛舍) 뒤편의 나무들 일제히 몸을 드러내고, 눈송이가 떨어진다 가슴 엔 듯 층층이 눈이 쌓이고 파리해진 잎 하나가 선로에 떨어진다 늘 그만큼의 거리로 우리는, 말이 없었다 같은 눈높이로 세상을 보았지만 그림자 사이에도 벽은 있고 튕겨지는 저 햇살 고운 햇살에도 벽이 있다 불현듯 호흡이 가빠져 서둘러 그를 쫓아가지만 희망은 저만치 앞서가는 안산행 열차인 것이다 그가 오면 안산행이다 햇살에 눈부시고 눈부신 설움 햇살에 튕겨나간다 눈 쌓인 가리봉역 그의 언 발을 녹일 때 그는 가볍게 목례를 보낸다
파행 시편 2
1
전투적이지 않는 생은 도태되고 말 겁니다 동사무소 계단을 쓸며 말했다 그는 신병훈련소에서 소품으로 지급된 행정요원이었다 향방 훈련이 한참이었고 예비군들은 총구에 머리를 꽂으며 심심해했다 시간은 모든 것을 앗아가죠 우리 세월도 언젠가는 권태로 얼룩지고 말 것입니다 습관에 익숙한 동물이니까 누군가의 목숨이 총성으로 사라졌다 그는 묵묵히 쓸어냈다 늙어 보이는 얼굴은 나이보다 초췌했고 지척의 죽음을 남의 일인 양 중얼거렸다 태양이 너무 따가웠다 달력의 날짜를 갉아먹으며 나는 정든 시절로부터 해제당했다 낡은 사진첩 몇 잎의 추억이 윤색되었고 전투적이었고 낯익은 노래 해적처럼 습격했지만 두터운 전공서적 찢긴 사랑만이 내 목숨을 지켜냈다 대학의 남은 일 학기 그의 답장은 한 번도 오지 않았고 그의 부재를 나는, 인정해야만 했다 (후략)
일꾼 1
하루 벌어 살아도 희망은 있더라
제 가슴에 꽝꽝 망치질하면 칠현의 가야금 하늘을 깨우고
각목을 관통하는 대못
가뭄에 탄 껍질 뚫고 연한 속살 덧니처럼 삐져나와
숨 가쁜 몸짓으로 발목을 붙든다
햇살은 기다린 자의 몫으로 청아하고
한 장 한 장 벽돌을 쌓다 보면 그 위에 앉는 사랑
아무리 모진 사람이라도 벽돌 위에 얹히면 애련하게 떠올라
흙손으로 꾹꾹 눌러 그 사람 생각하며 집을 짓는다
고운 모래 더미 고인 눈물 버무려 미장질하면
튀어나온 생채기 흐르는 강의 표면처럼 흐르고 흘러서
우리 저마다 아름다운 석양빛으로 물들어가면
편안한 저녁 일꾼들 모두 돌아간 현장에
그네들의 애틋한 사랑이 고여 천천히 몸을 말리는 생채기
아무리 모진 세상일지라도 따뜻한 집 한 칸 남기며
갈 곳 없는 멧새들과 별빛의 안식처가 되어도 좋으리니
하루 벌어 살아도 가슴 저미는 설렘
철근 같은 희망은 부러지지 않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