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담 조수현의 삶과 예술
현담선생과 한 직장에서 일을 한지도 벌써 20년이 되었다. 선생께서는 다정다감한 성품의 소유자로서 주변 사람들을 잘 보살펴주셨다. 그래서 그런지 그의 곁에는 언제나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이 모였다.
선생하면 훈훈한 情이 떠오른다. 언제 어디서든 먼저 손을 내밀면서 악수로 반갑게 맞아주는 모습은 예나 지금이나 다름이 없다. 그는 베푸는 삶을 살았다. 새해 명절 때마다 학교에서 가장 어렵게 사는 사람을 선정하여 선물을 주었고, 장학회를 만들어 생활이 어려운 학생을 선발하여 장학금을 주기도 했다. 서예과에서는 어머니와 같은 자애로운 존재였다. 그의 따뜻한 마음은 각박한 세상에 피가 돌게 하고 사람과 사람사이를 이어주는 난로 역할을 했다. 그런 분이 정년퇴임을 한다고 하니 생각만해도 마음 한구석이 허전해진다.
오랫동안 선생과 함께 생활하다보니 기억할만한 일도 많다. 원광대에 부임했을 때 미술대학 교수들을 소개시켜주기 위해 연구실 한 방 한 방을 분주하게 노크하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지리산, 선운사, 속리산 등에 MT를 가서 학생들과 흥겹게 놀던 지난날의 모습이 엊그제 같다. 선생은 블루스의 고수로서 학생들의 인기를 독차지했으며, 노래방에 가면 하숙생이라는 노래를 구성지게 불러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浩然한 성대를 타고 났기에 그의 음성은 어디를 가든 울려 퍼졌다. 밤새도록 놀았는데도, 다음날이 되면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맑게 깨여 있었다. 이른 아침 잠에서 깨어나면 허리를 곧게 펴고 參禪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30년 이상을 지속한 참선이라고 한다.
그동안 선생에게 진 빚이 많다. 학교에 처음 부임했을 때 처음으로 연구비 제도가 생겼다. 입사한지가 얼마되지 않아서 연구비 수혜를 받을 수 없었는데, 어느 날 선생께서 나를 불러 연구비 절반을 떼어주면서 내년에 타면 갚으라고 했다. 또 한 가지 잊지 못할 고마운 일이 있다. 선생께서는 나에게 박사학위과정을 밟을 것을 독려했다. 당시의 생각으로는 교수가 열심히 공부해서 학생들 잘 가르치면 됐지 무슨 학위가 필요하냐는 생각을 했었다. 그러나 지금의 상황으로 보건데, 그때 선생께서 당부를 안했다면 아마 지금쯤 상당히 어려운 처지에 놓였을 확률이 크다.
세속의 삶이 그렇듯이, 함께 생활하면서 늘 웃을 일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어느 해인가 학위 심사를 하다가 견해 차이가 생겨서 서로 언성을 높인 적도 있었다. 한동안의 찬 공기가 예상되는 아주 큰 다툼이었다. 심사를 마치고 식당에 갔다. 어색함이 감도는 분위기속에서 긴 침묵이 흘렀다. 그때 현담선생께서는 말문을 열면서 오히려 나를 위해 박수를 치자고 했다. 그 순간 햇볕에 눈 녹듯이 금방 방안의 공기가 따뜻해졌다. 현담선생만이 할 수 있는 일이었다.
IMF이후 서예과를 지망하는 학생들이 줄어들고 구조조정이라는 어려운 상황에 처하면서 우리 학과도 어쩔 수 없이 영향을 받았다. 그러한 어려운 상황을 겼으면서 교수들의 견해가 엇갈리고 사태가 심각했지만, 그래도 서예과가 화목한 기운을 잃지 않고 잘 유지될 수 있었던 것은 따뜻한 인간미를 지닌 현담선생의 역할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선생의 성품은 서예술의 형성과도 연결된다. 선생의 글씨를 처음 본 것은 93년 白岳美術館 전시장에서였다. 선생의 글씨는 일반 한국서예에서 볼 수 없는 특이한 기운이 느껴졌다. 발굴된지 얼마 안 된 신라 古碑를 소재로한 작품도 있었고, 중국의 글씨를 임서한 작품도 있었다. 그중에서도 장천비에 대한 해석이 무척 독특하게 느껴졌다.
장천비는 법첩과는 달리 크고 작은 대비가 현저하고 기우뚱하고 바르고 한 것이 마치 분청사기와 석장승, 목장승, 남산돌부처를 보는 듯했다. 그러면서도 선생이 쓴 장천비는 법첩보다도 더 닮아있었다. 그것은 역대 서화가가 추구했던 “不似之似(닮지않은 닮음)”에 이르고 있음을 말해준다. 정신의 간취에 성공한 창조적 재구성이었다. 그때 선생의 나이가 40대 임을 감안한다면, 선생은 이미 젊은 시절부터 서예에 대한 확고한 자기철학이 자리하고 있었나보다.
선생은 중국의 법첩을 많이 섭렵했지만, 글씨의 기저에는 한국의 토속적인 체취가 너무나도 깊이 베어 있다. 선생은 일찍부터 한국서예사 연구에 관심을 가졌다. 개인전 도록 후면에 실린 창암 이삼만에 대한 연구는 그것을 증명한다. 창암 이삼만은 그 어느 서예가보다도 한국적인 정서를 글씨에 담아낸 서예가로 이름이 높다.
현담선생의 작품에 내재된 정신적 뿌리는 원불교와도 관계가 깊다. 원불교는 한민족의 정서에 근간을 둔 민족종교로 불리어지고 있다. 그의 가계는 원불교가 탄생한 영광으로부터 출발되어지고 있으며, 친가와 외가는 모두 독실한 원불교 신자이다. 외조부는 원불교의 창시자인 소태산 대종사의 큰 은혜를 입은 큰 도인이었다. 이러한 환경속에서 자라났기에 필획속으로 원불교의 정신이 스며든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었다.
원불교에는 글씨를 잘 쓰는 도인들이 많다. 소태산 대종사는 원불교의 교주답게 필획에 자신감과 탈속한 도인의 기상이 서려있으며, 정산종사의 글씨는 잔잔한 선비풍의 글씨이고, 그의 아우 주산종사의 서풍은 전문서도인의 기상이 서려있다. 그의 도맥을 이어받은 대산종사의 글씨는 통나무를 연상케하는 忠直한 기운이 있어 사람의 마음을 흠뻑 빠져들게 한다. 어느날 원불교 총부에 소장된 도인들의 글씨를 유심히 보면서 현담선생 글씨의 DNA를 발견할 수 있었다. 글씨의 외양은 다를지라도 필획에 내재된 骨氣는 분명 원불교의 정신으로 이어지는 同根生임을 느끼기에 충분했다.
선생은 글씨에만 전념한 것이 아니라, 서예사 연구에 대한 열정도 대단했다. 학과가 창립되자마자 서예과 학생들과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자주 탁본여행을 했으며, 그 자료를 바탕으로 금석문전집을 제작하여 열악한 한국서예사 발전에 큰 자취를 남겼다. 선생은 정년퇴임을 앞두고 구조조정이라는 문제를 놓고 마음이 편치 못했다. 앞으로 편안한 시간을 가지고 더 큰 학문과 더 큰 예술의 열매를 맺을 수 있기를 기원한다.
현담 조수현 교수 정년기념 소품초대전
2012. 12. 6(목) ~ 12.12(수)
초대일시 2012. 12. 8(토)오후4시
익산 W 갤러리
첫댓글 감사히 읽고 갑니다. 이런 분이 벌써 정년이시라니 믿기지 않습니다. 재학생으로써 다시한번 마음을 다잡고 희망을 가지고 열심히 생활해야겠습니다.
존경하는 현담선생님의 세세한 성품과 작품세계를 이해하는 좋은글입니다.
잘 읽었습니다. 벌써 정년을 앞두고 계시다니 늘 건안하시길 기원드립니다^^
귀한 글과 맑은 정신을 만나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유리알처럼 투명하고 고고한 학鶴처럼 기품이 묻어나 보이네요. 일면식도 없지만 존경할 만한 분이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퇴임 이후의 삶에서 振於無竟이 되시길...,
전시를 진심으로 축하합니다...참선으로 다져진 아름다운세계의 귀한작품으로 가득할 전시장이 성황이루시길 기원드리며...귀한글 감사합니다 교수님...()
不似之似(닮지않은 닮음)이라..너무 멋있는 말이네요 ㅠㅠ
불사지사는 임서(意臨)의 핵심입니다. 의임은 그 사람의 사고력과 창의력에 따라 다르게 표현됩니다. 중국의 역대 임서를 보면 임서가 단순한 모방이 아니라 불사지사였다는 것을 여실하게 느낄 수 있습니다.
좋은 글 잘 보고 갑니다! 두 분 모두 앞으로도 계속 행복하시길 기원합니다. 고맙습니다.
안녕하세요 경영학부 20120860 조은별 입니다.
현담 조수현 선생님의 서체는 뒤죽 박죽 정리가 되어 있지 않아 보이고 크기도 모양도 마음대로 적은 것처럼 보이지만 멀리서 전체를 보니 글자 하나하나가 조화를 이루면서 종이를 채우는 것이 그림같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조금 거칠게 느껴지면서도 무언인가 스며드는 듯한 느낌도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