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 1-7 레아가 야곱에게 낳은 딸
본문은 야곱의 딸 디나가 세겜에게 유인을 당한 일과 세겜의 청혼에 대하여 야곱의 아들들이 거짓으로 응답한 일에 대한 모세의 기록입니다.
1. 본문 1-2절은
“① 레아가 야곱에게 낳은 딸 디나가 그 땅 여자를 보러 나갔더니
② 히위 족속 중 하몰의 아들 그 땅 추장 세겜이 그를 보고 끌어들여 강간하여 욕되게 하고” 입니다.
본 장은 가혹한 투쟁 기록입니다. 하나님은 이 투쟁으로 자기 종을 다시 훈련시킵니다. 야곱의 청렴 결백한 생애로부터 그가 딸의 정결을 얼마나 소중히 여겼으리라는 것을 쉽사리 추측할 수 있습니다. 그는 자기 딸이 능욕 당한 사실에 대한 소식을 듣자 마음에 아주 깊은 상처를 입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기 아들들이 복수심에 불탄 나머지 극히 두려운 죄를 범했다는 소식에 접하자 그의 슬픔은 몇 곱절로 늘어납니다.
그러나 우리는 모든 것을 순서대로 검토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디나는 아버지 집을 떠나서 정도 이상으로 자유롭게 배회했기 때문에 겁탈을 당했습니다. 사도가 가르치고 도리가 명하는 대로 그녀는 조용히 집안에 있어야 옳았습니다. 소녀들에게는 미덕이 어울리기 때문입니다. 잠언은 여인들이 οἰκουροί(오이쿠로이) 라고 해서 집을 지키는 이가 되어야 한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가정에서 아버지들은 만약 딸들을 모든 불명예로부터 보호하기를 바란다면 그들은 엄격한 규율아래 두라는 가르침을 받습니다.
거룩한 야곱의 딸이 헛된 호기심으로 인하여 그토록 심한 벌을 받았다면 겁 없이 공공 모임으로 열심히 쫓아 다니며 청춘의 정열을 불태우는 요즘 연약한 처녀들에게는 어떤 위험이 도사리고 있겠습니까? 모세는 ‘디나가 그 땅 여자를 보러 나갔다’ 고 말합니다.
이때에 모세께서는 책임의 일부를 디나 자신에게 돌리는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녀는 장막 속에서 어머니의 감시하에 머물러 있어야 했던 것입니다.
2. 본문 3절은
“그 마음이 깊이 야곱의 딸 디나에게 연련하며 그 소녀를 사랑하여 그의 마음을 말로 위로하고” 입니다.
모세는 세겜이 창녀에게 행하듯 한번 디나를 욕보이고 나서는 멸시하여 천대할 정도로 행동하지 않았다는 것을 시사해 줍니다. 그는 디나를 아내로서 사랑했습니다. 심지어 그는 디나를 소유하기 위해 할례조차 반대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육욕의 정열이 너무도 기세를 부려서 그는 우선 디나에게 욕을 보였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실제로 진지한 애정으로 디나를 포응하였습니다. 그러나 거기에는 자제심이 결여되어 있었습니다. 이로써 그는 중한 죄를 지은 것입니다.
세겜은 그 소녀의 ‘마음에다’ 말하였습니다. 그는 부드러운 말로 마음을 끌기 위해 그녀에게 정중하게 말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녀가 응하려 하지 않고 반항하자 결과적으로 그는 폭력을 사용하게 된 것입니다.
3. 본문 4절은
“그 아비 하몰에게 청하여 가로되 이 소녀를 내 아내로 얻게 하여 주소서 하였더라” 입니다.
세겜이 디나를 자기 아내로 원했다는 것은 여기서 더욱 명백히 표현되고 있습니다. 그의 욕정은 디나를 욕보이고 나서 그녀를 멸시할 정도로 방종하지는 않았습니다. 더욱이 그는 자기 아버지 의사를 존중하고 있기 때문에 그의 품행은 칭찬할 만합니다. 그는 제 마음대로 혼약을 맺으려 하지 않고 자기 아버지 권세에 위임시키고 있습니다.
그는 느닷없이 욕정에 열기에 휘말려 비열한 타락을 했었습니다. 그렇지만 이제는 본 정신으로 돌아와 자연의 섭리를 따르고 있습니다. 청년들은 실수하기 쉬운 시기에 육체의 정욕을 이기지 못하여 많은 죄를 짓는 일이 없도록 스스로 조심해야 합니다. 오늘날에는 어디를 가나 더 큰 방종이 수치스런 행위를 삼가지 않고 있습니다.
세겜은 본성의 지배와 지시 아래서 자기 아버지에게 결혼 주선자로 나서 주기를 바랬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자녀들에 대한 부모의 권리가 불가침의 것이라고 유추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 권리를 뒤집으려고 시도하는 자는 하늘과 땅을 혼동하는 자입니다. 그런데 교황은 혼인을 축하한다 하여 신성한 자연의 계약을 깨뜨렸습니다. 그러므로 간음자 세겜 혼자서도 그 야만적 행위를 정죄 하기에 충분한 심판관으로 나타날 것입니다.
4. 본문 5-6절은
“⑤ 야곱이 그 딸 디나를 그가 더럽혔다 함을 들었으나 자기 아들들이 들에서 목축하므로 그들의 돌아오기까지 잠잠하였고
⑥ 세겜의 아비 하몰은 야곱에게 말하러 왔으며”입니다.
모세는 야곱의 말없는 슬픔에 대해 단 한 구절을 삽입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수치스러운 일에 익숙치 않은 자들이 불명예스러운 일을 당하면 더 심한 충격을 받는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사려깊은 자가 자기 가족을 때묻지 않고 정숙하고 방정하게 보호하려고 많이 노력했었으면 했을수록 그의 상처는 더욱 더 깊었습니다. 그러나 집에는 그 혼자 뿐이었으므로 그는 시치미를 떼고 자기 아이들이 밭에서 돌아오기까지 혼자서 슬픔을 되씹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이 말로써 야곱이 자기 아들들의 귀가시까지 복수를 보류했다는 것을 뜻하지 않습니다. 그는 혼자 있었고 권고해 줄 이도 위로해 줄 이도 없었기 때문에 넋을 잃은 자처럼 늘어져 있었다는 말입니다. 그렇다고 할 때 본문의 의미는 야곱이 견딜 수 없는 비애에 사로잡혀 침묵했다는 뜻입니다.
야곱은 소문이 날까 하여 자기 감정을 남에게 엿보이지 않는 슬기를 발휘했을 것입니다. 남에게 알려지고 나면 사태를 수습할 준비를 하기도 전에 그 자신이 위험에 빠지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일을 만나든지 야곱은 주변에 좋은 충고를 해 줄 사람들, 또는 그 강탈자들의 손에서 딸을 구출해 줄 자들을 만나기까지는 분을 참는 것이 지혜로웠습니다.
모세는 ‘더럽혔다’는 말을 사용함으로써 우리에게 인간의 진정한 순결이 무엇인지를 가르쳐 줍니다. 즉 경건하게 정결을 도야하고 각자가 자기 그릇을 명예롭게 소유할 때라야 순결하다고 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누구든지 자기 몸을 음란한데 팔면 자신을 더럽히는 것입니다. 세겜은 디나를 강제로 범했는데도 디나는 더럽힘을 받았다고 일컽어진다면 자발적인 간음자와 행음자는 어떻게 말해야 하겠습니까?
5. 본문 7절은
“야곱의 아들들은 들에서 이를 듣고 돌아와서 사람 사람이 근심하고 심히 노하였으니 이는 세겜이 야곱의 딸을 강간하여 이스라엘에게 부끄러운 일 곧 행치 못할 일을 행하였음이더라” 입니다.
모세는 이 기사의 비극적인 전말을 기술하기 시작합니다. 세겜은 참으로 악하고 불경스럽게 행동하였습니다. 그러나 야곱의 아들들이 저지른 행위는 몇 곱절 더 악독하였습니다. 그들은 단 한 사람의 개인적 과오를 복수하기 위해 한 민족 전체를 몰살시켰습니다.
한 젊은이의 경박한 행위에 대해 고토록 많은 사람을 살육함으로써 잔인하게 보상받으려고 시도한다는 것은 결코 합당치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자기들이 입은 피해에 대해 손수 복수를 감행하려고 했습니다. 누가 그들을 재판관으로 세웠단 말입니까? 더욱이 그들은 기만적 불성실의 죄까지 추가시킵니다. 그들은 언약을 구실로 이 크나 큰 죄를 범했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우리는 야곱에게서 끈질긴 인내의 사례를 발견하고 감탄을 금하지 못합니다. 그는 그토록 많은 재앙을 당했지만 약해지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무엇보다 하나님의 자비를 깊이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 자비로 말미암아 은혜의 언약은 야곱의 후손에게 남아있게 되었습니다. 그런 맹렬한 분노와 원한에 사로잡힌 소수의 사람들이 세상은 다 제외하고 백성들 속에 그리고 하나님의 자녀로 인정받아야 한다는 것은 그 얼마나 불합리한 일입니까?
그들이 하나님의 나라에서 탈락되지 않는 것은 분명히 그들 자신의 힘으로 된 일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내리신 은총은 그들의 공로에 기초한 것이 아니라 순전히 하나님의 자비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우리들 역시 만약 하나님께서 우리 죄를 용서해 주시지 않는다면 완전히 파멸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분께 동일한 관용으로써 대우받기를 요구합니다.
야곱의 아들들은 참으로 성낼만한 정당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개인적으로 수치를 입었고 그 범죄의 무례 때문에 고통을 당했습니다. 그들의 누이가 마치 성소와 같은 야곱의 집에서 끌려나가 욕을 당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주로 내세우는 것은 택함 받은 거룩한 백성에게 당한 그런 수치를 그대로 용인한다면 그것은 악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 자신은 한가지 죄에 대한 증오로 말미암아 보다 크고 보다 용납할 수 없는 범죄를 향해 맹렬히 돌진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타인의 과오를 정죄함에 있어 엄한 재판관이 되어서 무분별하게 악으로 달려 가는 일이 없도록 주의해야 됩니다. 우리는 악의 교정을 원하는 경우 훨씬 악한 교정책을 사용하는 일이 없도록 삼가야 됩니다. ‘행치 못한 일들을 행하였음이니라’ 는 말씀에서 해석자들은 흔히 이 구절의 의미를 ‘그런 일을 행하는 것은 온당치 못하다’ 고 설명합니다. 그러나 이런 피해를 당하고 참을 수 없다고 결정한 야곱의 아들들에게 이 말을 적용하는 것이 더 적절할 것 같습니다.
그들은 복수의 권리가 자기들에게 전속된 양 나서는 잘못을 범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어째서 오히려 그런 생각을 하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자기 돌보심과 보호 아래로 맞아들이셨다. 그러므로 잠잠하여 우리 손에 있지 않는 징벌 행위를 완전히 주권자의 의지에 맡기는 것이 우리의 본분이다’ 라고 했어야 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타인의 범죄를 노여워 할 때, 우리 본분을 넘어서 일을 시도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배울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