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 환난이란 무엇을 가리키는가? 워치타워의 성서해석방법 중 하나는 성서에 언급되는 용어를 특정된 사건으로 취급하여 워치타워 교단에 예언적으로 적용한다는 점이다. 그러한 용어들 중에는 '적은 무리', '큰 무리', '충실하고 슬기로운 종' 그리고 오늘 파수대에서 다루는 '큰 환난' 등이 있다. 1 적은 무리 '적은 무리'라는 용어는 물론 수적으로도 적다는 것을 의미할 수 있지만, 보잘 것 없는 비천한, 어린, 미성숙한의 뜻으로 사용될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단순한 의미를 특별한 의미로 추측 해석하였는데, 이 용어가 나오는 곳은 유일하게 누가 복음 12:32 이다. 이 기록은 누가의 기록이다. 그런데 예수께서 이 말씀을, 요한이 훨씬 뒤에 기록한 요한 계시록 7: 9에 언급되는 '큰 무리'를 예측하고서 이 용어를 대조되게 사용했다는 뜻이 된다. 이것은 예수께서 미래의 모든 일을 손바닥 들여보듯이 알고 있었고, 심지어 자기가 죽고 나서 2천년이 지나면 비로소 큰 무리가 나올 것이라는 예상을 하였다는 뜻이 된다. 그리고 2천년이라는 공백 기간이 존재하지만 그것은 내가 알바가 아니다라는 무관심한 태도를 의미한다. 그러나 우리는 이 적은 무리라는 용어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문맥의 의미대로 읽을 수 있다. 적은 무리여 무서워 말라 너희 아버지께서 그 나라를 너희에게 주시기를 기뻐하시느니라 비록 세상에서 비천하지만 진실을 추구하는 그들에게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이 될 희망의 위로를 하신 말씀이시다. 이 용어가 수적으로 특정될 아무런 이유가 없다. 2 큰 무리 '큰 무리' 역시 마찬가지이다. 앞서 144,000 이라는 유대인이 택함을 받는 장면을 묘사했기 때문에 이에 상대적으로 많은 수의 큰 무리를 언급한 것이다. 누가 복음의 적은 무리와 아무 상관도 없으며 구태여 연관을 지우려면 유대인 144,000과 관련을 지울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워치타워 리더들은 임의로 추측하여 계시록의 144,000명을 누가 복음의 적은 무리로 단정한 것이다. 나아가 그 추측한 것을 새로운 진리라는 용어 안에 포함시켰다. 진리는 그들의 편의에 따라 언제든지 바뀔 수 있다는 것을 스스로 드러내었다. 또한 그렇게 함으로써 144,000을 문자적인 수자로 단정하였다. 이 부분에만 해도 몇 가지나 되는 추측이 적용되었는가? 1 누가복음의 적은 무리는 계시록의 144,000명을 의미한다. 2 144,000명은 문자 그대로의 수치이다. 3 또 그들은 영적 이스라엘이다. 4 큰 무리는 누가 복음의 적은 무리에 대조되는 용어이다. 이러한 모든 것들을 단정적으로 추측하여 행동을 촉구하면서 그 결과에 대해서는 결코 책임지려 하지 않는다. 3 충실하고 슬기로운 종 '충실하고 슬기로운 종'에 대해서는 어떠한가? 우선 관련된 성구를 살펴보자: 주인이 자기 집안 일꾼들을 돌보도록 임명하여 그들에게 제때에 양식을 나누어 주게 한 충실하고 슬기로운 종은 과연 누구입니까? 주인이 와서 그 종이 그렇게 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되면, 그 종은 행복합니다! ㅡ마태24:45-47, 신세계역 위에 인용된 구절에서 알 수 있듯이 여호와의 증인 통치체는 그들에 대한 충성과 순종을 요구함에 있어서, 성경의 다른 어떤 부분도 이 부분만큼 자주 인용하여 강조하지 않는다. 그들의 조직 권위에 대한 주장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 포물선적인 진술에 대한 해석에서 비롯되며, 특히 그들이 이 해석을 이용하는 방식과 관련이 있다. 주로 중앙집권적 행정권한의 개념을 지지하기 위해 사용되며, 이 성구에 근거하여 모든 그리스도인 회중 성원들(증인들은 자신들에게만 적용하는 것으로 이해)에 대한 통제를 행사한다. 러셀의 협회장 재임 중, 누군가 "충실하고 지혜로운 종"이라는 인물을 럿셀에게 개인적으로 적용했다. 그의 진술에서 알 수 있듯이 럿셀은 그 적용을 받아들였음에 분명하다. 그는 그것이 그리스도인 모임 전체로서의 반열에 적용되는 것이 아님을 주장하고, '하나님이 정한 시간'에 특별한 종인, 개인의 출현을 예언한 것이라는데에 찬성의 뜻을 나타내었다. 러더포드는 협회장이 되어 임기 첫 10년 동안 전임자가 지녔던 것과 같은 큰 영향력을 발휘하는 것이 어렵다는 것을 알았다. 러셀과 달리 러더포드는 워치타워 성원들의 목회자로 선정되지 않았다. 그는 파수대에서 예측한 때의 실패로 야기된 의심의 여파를 대처하고, 지지와 통제력을 주로 얻기 위해 첫 10년의 기간을 소모하였다. 그 세월 동안 그는 러셀이 정말로 '그 종'이며, 그가 정한 연대를 포함해 그가 가르쳐 준 모든 것들이 의심의 여지없이 정확하다고 열정적으로 주장했다. 그러나 그가 완전한 통제권을 일단 얻게 되자, 이런 상황이 중단되면서, 러셀의 견해들이 신임을 잃으면서 점점 더 많이 자신의 견해로 대체되고 심지어, 역방향으로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충실하고 슬기로운 종"의 비유는 거의 언급하지 않았다. 그것은 필요하지 않았다. 러더포드는 거의 마법에 가까운 용어인 '조직' 개념을 들여왔고, '하나님(神)의 통치'인 신권통치를 강조하기도 했다. 그가 하나님의 통치기구를 아래로부터 위로가 아니라" "위로부터 아래로의 조직이라는 주장이 그의 협회장직의 성격을 잘 나타내고 있다. 그것이 주는 효과는 지상에서 자신이 조직의 최고 머리가 되었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1 "충실하고 지혜로운 종"은 이제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의 반열'로 바뀌었다. 러더포드 이후로, 그 종은 오순절로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수세기 동안 지상에 살고 있는 모든 "기름부음 받은" 그리스도인들의 반열이라고 여러 해 동안 알려 왔다. 1981년 3월 1일자 파수대 24쪽은 이렇게 말한다: 여호와의 증인들은 이 '종'이 오순절 이후 19세기 동안 어떤 특정한 때에 관계없이 땅 위의 어느 한 집단으로서 모두 기름부음 받은 그리스도인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으로 이해한다. 따라서, "집안 일꾼"은 개인으로서의 그들의 추종자들이다. 그 자체가 이 해석에 이의가 제기될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사실상, 성경에서 모든 진정한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기름부음을 받은 것으로 보여지기 때문에 종에 관한 비유적 표현은 어느 시대에 살고 있던지 모든 참된 그리스도인들에게 적용됨을 전적으로 의미한다.2 물론 워치타워 협회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을 기름부음 받은자로 보지 않고 오늘날 살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을 두 부류로 나누며, 지상의 희망을 가진 기름부음 받지 않은 부류와 하늘의 희망을 가진 기름부음 받은 부류로 나눈다. 개인으로서 '기름부음' 받은 자들은 '종'에 의해 양식을 먹는 '집안 일꾼'으로 불리워지며, '종'은 양식을 나눠주는 자들의 집합체로서 나타낸다고 한다. 다시 말하지만, 흔히 인용되는 이사야 43:10-12의 말씀에서처럼,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민족을 "나의 종"(단수)으로, 그리고 나라를 구성하는 개인들을 모두 "나의 증인"(복수)으로 말하는 것과 같이 이것은 어느 정도 성경적 병행점이 자체적으로 없는 것은 아니다. 그것이 문제가 될 수 있는 점은 워치타워의 원칙 적용에 있다. 오늘날, 이 "종 반열"은 아직 지상에 살아 있는 14만 4천 명의 기름부음 받은 한 반열 중 "남은 자"로 구성되어 있다고 한다. 2005년에 그들의 숫자는 대략 8,600명으로 집계된다. 워치타워의 출판물이 이러한 해석적 토대를 기반으로 어떻게 구축되는지, 그리고 그러한 해석으로 인해 어떻게 사람들을 극단으로 인도하게 되는지 생각해 보라. 하나님과 그리스도께서 조직을 통해서만 사람들을 대한다는 인식으로 세뇌시키고ㅡ 강요ㅡ하는 것이 최우선 관심사임이 명백해지고 있으며, 오늘날 그 조직이 워치타워 협회라는 법인체를 움직이는 조직이라는 것이다. 먼저 우리는, 워치타워 협회의 가르침에서, "종 반열"은 서기 33년에 시작해서부터 현재까지 지속적이고 중단없이 존재해왔다는 주장에 주목한다. 1975년 1월 15일자 파수대 46면과 47면은 다음과 같이 말하면서 이를 강조했다: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 나는 세상 제도의 종결까지 모든 날 동안 여러분과 함께 있습니다(마태28:20). 예수 그리스도 께서는 그의 종인, 회중의 머리이시며, 그분의 말씀은 역사가 흐르는 동안 줄곧 "집안 사람들"을 먹이도록 힘을 주실 것이라는 것을 알려준다. 종 반열의 세대는 자신들은 물론이고 그 다음 세대에게도 양식을 먹였다. 예수께서는 친히 그의 사람들에게 양식을 먹이는 이 방법에 주의를 환기시키셨다.ㅡ개인을 따로 독립적으로가 아니라, 서로 사랑하고 돌보는 친밀하게 연합된 그리스도인 집합체로서 그렇게 하셨다. 충.슬.종과 밝아지는 빛에 대한 두 가지 모순점 1 충슬종은 역사적으로 계속되어 왔고 계속 빛이 밝아 졌다면 럿셀의 때에 그는 무지 밝은 빛을 받아야 했는데, 그의 말에 따르면 배도한 진리를 회복시켰다고 한다. 2 영적 양식의 서빙의 시간과 음식의 질에서 합격했다면 그 조사기간은 1914년 가을부터 1919년 봄 합격할 때까지 4년 6개월 동안 검사한 셈이다. 그렇다면 그 기간 중 그렇게 질 좋던 음식(교리나 가르침)이 왜 다 사라지고 지금은 전혀 다른 음식을 공급하는가? (럿셀이 가르친 서적들은 단 한권도 워치타워 도서실에 존재하지 않는다.) 충.슬.종 반열에 대한 워치타워의 해석이 틀렸다는 것은 누가 12:47, 48에 등장한 비슷한 비유에서 알 수 있다: 그때에 주인의 뜻을 이해하고도 준비하지 않았거나 주인이 시킨 대로 하지 않은 그 종은 매를 많이 맞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해하지 못하고 매 맞을 일을 한 사람은 적게 맞을 것입니다. 참으로, 누구든지 많이 받은 사람에게는 많이 요구될 것이며 많이 맡은 사람에게는 그만큼 더 요구될 것입니다. 여기에 따르면 "여러 대의 매를 맞는 반열"과 "조금 맞는 반열"이 존재해야 한다. 이들은 누구인가? 여기에는 묵묵부답이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은 "종"이 개개인에게 적용되는 충실성을 의미하기 때문이지 어떤 반열에 적용시키는 것은 비유의 원래 의미를 넘어서는 것이기 때문이다. 성경의 전체 초점은 "반열"이 무엇을 하는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주로 개인 남녀가 무엇을 어떻게 하는지에 강하게 집중되어 있음은 부인할 수 없다. 성서의 가르침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 각자가 주인의 충실한 관리인이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는 ´충실하고 슬기로운 종´ 그 자체로 매우 명백하다. 충.슬.종이란, 충실한 관리인을 의미한다. 그래서 사도는 그레데 섬에 있는 디도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누구보다도 장로들에 관한 조언을 하였는데, 이러하다: 하느님의 관리인으로서 감독자는 비난받을 일이 없고, 자기 고집대로 하지 않고, 쉽게 화를 내지 않고,술 취하는 자가 아니고, 폭력적이지않고, 부정한 이득을 탐내지 않고(디도 :1:7, 신세계역) 우리는 스스로에게 물어봐야 한다: 비유에 묘사된 두 종 중에서, 어느 종이 주인이 도착해야 할 특정 시간에 대한 선입견을 가졌다는 것을 의미하는가? 충실한 종이 아니라 악한 종이었다. 이 후자의 종은 주인이 일정 기간 내에 그가 온다고 기대하지 않았다면 ´지체하고 있다´고 느낄 수 없었을 것이다. 충실한 노예는 주인이 얼마나 오랫동안 떨어져 있을지에 대한 특별한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표현되지 않는다. 그는 주인이 없는 기간을 추정하거나 한정하려고 하지 않고 단순히 충실하게 봉사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특정 시기를 기준으로 그 때 혹은 이전에 태어난 사람의 생애 기간 내에 도착이 올 것이며, 또 와야 한다고 수십년 동안 주장했던 워치타워 조직과는 상당히 다르다. 4 큰 환난 이제 마지막으로 오늘의 파수대 연구기사의 주제격인 큰 환난에 대해서 살펴보자. 우선 큰 환난 이라는 용어가 나오는 성서 구절은 아래와 같다. (개역 개정 인용) 1. [사무엘상 5:9] 그것을 옮겨 간 후에 여호와의 손이 심히 큰 환난을 그 성읍에 더하사 성읍 사람들의 작은 자와 큰 자를 다 쳐서 독한 종기가 나게 하신지라 2. [느헤미야 1:3] 그들이 내게 이르되 사로잡힘을 면하고 남아 있는 자들이 그 지방 거기에서 큰 환난을 당하고 능욕을 받으며 예루살렘 성은 허물어지고 성문들은 불탔다 하는지라 3. [마태복음 24:21] 이는 그 때에 큰 환난이 있겠음이라 창세로부터 지금까지 이런 환난이 없었고 후에도 없으리라 4. [누가복음 21:23] 그 날에는 아이 밴 자들과 젖먹이는 자들에게 화가 있으리니 이는 땅에 큰 환난과 이 백성에게 진노가 있겠음이로다 5. [사도행전 7:11] 그 때에 애굽과 가나안 온 땅에 흉년이 들어 큰 환난이 있을새 우리 조상들이 양식이 없는지라 6. [요한계시록 2:22] 볼지어다 내가 그를 침상에 던질 터이요 또 그와 더불어 간음하는 자들도 만일 그의 행위를 회개하지 아니하면 큰 환난 가운데에 던지고 7. [요한계시록 7:14] 내가 말하기를 내 주여 당신이 아시나이다 하니 그가 나에게 이르되 이는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인데 어린 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 살펴 본 구절들에서 큰 환난이란, 특정 사건을 예언하였다기 보다는 글 자 그대로의 뜻인 매우 크게 백성들이 고통 받는 기간으로 묘사된다. 그러한 사건들은 역사 이래로 항상 존재하여 왔다. 그런데 워치타워(또는 일부 개신교파)에서 큰 환난을 특정화 하여 예언적 사건으로 취급하는 이유는 이 사건이 담긴 시기를 미래로에 성취될 예언으로 보기 때문이다. 성서 역사학자들은 처음에 복음서의 기록 순서가 마태복음이 가장 먼저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마가복음은 마태복음을 압축한 것이라 보았다. 그러나 면밀한 연구 끝에 Q복음서가 가장 먼저 기록되었고, 마가복음이 기록되었으며,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은 마가 복음을 거의 대다수(90%) 그대로이며 나머지 10% 중에서도 5% 정도는 Q복음의 어록에서 발췌한 것을 알게 되었다 따라서 마태와 누가의 순수한 자기 자료는 각 5% 밖에 안 된다는 사실이다. 그러면 복음서의 기록 연대는 어떻게 될까? 역사학자들에 따르면 마가복음이 기원 70년이나 그 직후에 기록되었으며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은 그보다 15년 정도 후에 기록되었다는 것이 현재의 중론이다. 이에 요한복음은 다시 이로부터 15년 정도 후에 기록되었다고 한다. 이 순서를 제대로 이해하는 것은 복음서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 굉장히 중요한 역할을 한다. 예를 들어 마가 13:30에서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 이 일이 다 일어나리라" 라는 예언처럼 보이는 말씀이 있다. 만일 마가복음이 기원 70년 이전에, 즉 예루살렘 성이 무너지기 전에 이 말씀이 기록된 것과 그 후에 기록된 것의 예언적 효과는 천양지차이다. 만일 예루살렘 멸망 전에 이 말씀이 기록되었다면, 예언은 분명히 성취되었고 나아가 오늘날 워치타워의 중요 교리인 '한 세대 교리'가 탄력을 받는데 보조적인 역할을 할 수도 있다. 그러나 마가복음이 70년이나 직후에 기록되었다면 이 예언은 예언의 효과를 대부분 잃는다. 기껏해야 사후 예언(ex-eventus)인 것이다. 이 사후 예언이 설령 진실되게 사전에 예수의 말씀이라 하더라도, 2천년 후에 다가올 모형적 예언으로 보기에는 턱없이 무리가 되는 것이다. 따라서 이 말씀의 의도는 예수의 말씀이 분명하게 성취되었다고 주장하는 것에 지나지 않으며 그리하여 예수가 진정한 하나님의 예언자라는 사실을 입증하려는 의도밖에는 효과가 없는 것이다. 복음서의 기록 연대가 미리 오래 전에 밝혀 졌다면, 이 말씀을 무슨 천지개벽을 일으키는 절대절명의 예언으로 보는 해석은 결코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불트만의 종말론적 해석에 의하면 그는 역사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의 차원에서 종말론을 다루지는 않고 오직 개인의 실존적 차원에서 종말론을 다루었다. 따라서 큰 환난에 대한 그의 해석도 여전히 개인적인 것이다. 만일 큰 환난이 어떤 특정한 사건이어서 그리스도인 공동체에게 그 환난이 공통적으로 적용된다면 그것을 쉽게 견딜 수 있는 사람은 부유하고 세상에서 지위를 갖고 있는 사람일 것이며, 반대로 가난하고 지위가 없는 사람은 동일한 어려움에 견디기가 더 어려울 것이라는 것은 쉽게 추리된다. 이것은 구원 받을 사람이 결국 매우 세속적으로 유리한 입장인 사람이라는 결론에 도달되므로 매우 비성서적이다. 따라서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불트만이 큰 환난을 개인이 겪는 견지에서 보는 시련과 고난이 될 것이라는 점이 충분히 납득될 수 있다. 우리 모두는 작든 크든 우리의 인생살이에서 시련과 고난을 당한다. 그러한 고난 없이는 결코 인내가 무엇인지 알지 못할 것이며 오직 인내를 통해서만 구원에 이르는 인격을 함양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러한 인격이 곧 생명의 면류관이라 야고보는 말하고 있다(약 1:12). 그러므로 모든 그리스도인은 큰 환난을 문자적인 의미 그대로 통과해야만 새로운 제도에 합당한 사람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은 특정한 때에 일어나는 특별한 예언적 사건이 아니라 나에게 언제 어디서나 일어날 수 있는 시련인 것이다. 물론 역사적 차원에서 모든 참 그리스도인 공동체에게 공통적으로 일어날 수도 있지만 그러한 상황이 되는 것은 당연한 흐름으로 이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종교적 박해에 의해서 다가오는 것이 결코 아니다. 그것은 공동체에 일어나는 것이기 때문에 현재의 여호와의 증인과 같은 집단에 일어나는 종류가 될 수 없다. 왜냐하면 그들이 명분은 그리스도인이지만 결코 함께 모여 사는 경제적 공동 운명체가 아니기 때문이다. 복음서나 요한 계시록에 언급된 큰 환난이 미래의 역사적인 사건에 적용되려면 역사의 흐름에서 적 그리스도인과 대립구도를 이루게 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큰 환난을 강조하는 이유는 그것을 대비하는 과정에서 워치타워 법인 중심의 결속을 다지려는 속셈이 깔려 있는 것이다. 5 큰 환난에 대한 주석 마가가 기록한 환난이 예루살렘 함락에 적용된다면 그것이 전무후무한 큰 환난이라는 데 의문을 가질 수 있기 때문에 여기에 그 구절에 대한 주석을 소개한다. Pulpit Commentary Verse 19. - For those days shall be tribulation, such as there hath not been the like from the beginning of the creation. These expressions are very remarkable. To begin with, the tribulation would be so unexampled and so severe that the days themselves would be called "tribulation." They would be known ever after as "the tribulation.'" There never had been anything like them, and there never would be again. Neither the Deluge, nor the destruction of the cities of the plain, nor the drowning of Pharaoh and his host in the Red Sea, nor the slaughter of the Canaanites, nor the destruction of Nineveh, or of Babylon, or of other great cities and nations, would be so violent and dreadful as the overthrow of Jerusalem by Titus. All this is confirmed by Josephus, who says, speaking of this overthrow, "I do not think that any state ever suffered such things, or any nation within the memory of man." St. Chrysostom assigns the cause of all this to the base and cruel treatment of the Son of God by the Jews. The destruction of their city and their temple, and their continued desolation afterwards, were the lessons by which the Jews were to be taught that the Christ had indeed come, and that this was the Christ whom they had crucified and slain. Mark 13:19 이 표현들은 매우 주목할 만하다. 우선, 그 환난은 전혀 전례가 없고 크게 심각해서 그 날들 자체가 "환난"이라고 불릴 것이다 그것들은 나중에 "큰 환난"으로 알려지게 될 것이다. 그들과 같은 것은 결코 없었고, 다시는 없을 것이다. 대홍수도, 평원의 도시들을 파괴하는 것도, 바로와 그의 군대가 홍해에서 익사하는 것도, 가나안 사람들을 죽이는 것도, 니네베나 바빌론이나 다른 위대한 도시들과 국가들을 파괴하는 것도, 티투스가 예루살렘을 무너뜨리는 것만큼 폭력적이고 끔찍하지는 않을 것이다. 이 모든 것은 요셉푸스에 의해 확인된다. 요셉푸스는 이 타도에 대해, "나는 어떤 국가나 인간의 기억 속에 있는 어떤 국가도 그런 일들을 겪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성 크리소스톰은 이 모든 것의 원인을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아들을 학대하는 근거와 잔인한 처사에 있다고 생각한다. 그들의 도시와 성전이 파괴되고, 그 후에도 계속 황폐해진 것은 유대인들에게 그리스도가 정말로 오셨으며, 그들이 십자가에 못박혀 죽인 그리스도가 바로 이 그리스도라는 것을 가르쳐야 할 교훈이었다. Verse 20. - And except the Lord had shortened the days, no flesh would have been saved: but for the elect's sake, whom he chose, he shortened the days. St. Matthew's record (Matthew 24:22) differs from that of St. Mark in the omission of the words "the Lord," and the clause "whom he chose." If the time of the siege of Jerusalem had lasted much longer, not one of the nation could have survived; all would have perished by war, or famine, or pestilence. The Romans raged against the Jews as an obstinate and rebellious nation, and would have exterminated them. But "the Lord" shortened the time of this frightful catastrophe, for the elect's sake, that is, partly for the sake of the Christians who could not escape from Jerusalem, and partly for that of the Jews, who, subdued by this awful visitation, were converted to Christ or would hereafter be converted to him We learn from hence how great is the love of God towards his elect, and his care for them. For their sakes he spared many Jews. For their sakes he created and preserves the whole world. Yea, for their sakes, Christ the eternal Son was made man, and became obedient unto death. "All things are yours, and ye are Christ's, and Christ is God's." It may be added that a number of providential circumstances combined to shorten these days of terror. Titus was himself disposed to clemency, and friendly towards Josephus. Moreover, he was attached to Bernice, a Jewess, the sister of Agrippa. All these and other circumstances conspired in the providence of God to "shorten the days." Mark 13:20 마태의 기록(마태복음 24장 22절)은 마가의 기록과 다르다. 마가는 "주님"이라는 단어와 "그가 선택한"이라는 단어를 생략하였다. 예루살렘 공방전이 훨씬 더 오래 지속되었더라면, 민족들 중 어느 누구도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다. 전쟁이나 기근, 역병으로 모두 죽었을 것이다. 로마인들은 유대인들을 완고하고 반항적인 국가로 맹렬히 비난했고, 유대인들을 말살했을 것이다. 그러나 "주님"은 이 끔찍한 재앙의 시간을 단축시켰습니다. 택하신 자를 위해서. 부분적으로는 예루살렘에서 도망치지 못한 그리스도인들을 위해서, 그리고 부분적으로는 이 끔찍한 방문에 굴복한 유대인들을 위해서, 우리는 그리스도로 개종하였거나, 그 후에 그리스도로 개종하였는가 ? 우리는 이로부터 하나님의 선지자에 대한 사랑과 그들을 돌보는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큰 것인가를 알게 됩니다. 그들을 위해 그는 많은 유대인들을 구했다. 그들을 위하여 그는 온 세상을 창조하고 보존하였다. 그래요, 그들을 위해 영원한 아들 그리스도가 사람이 되어 순종하여 죽게 되었다. "모든 것은 너의 것이고, 너는 그리스도의 것이고,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것이다." 오늘날 테러의 단축을 위해 여러 가지 신의 섭리가 결합된 것이 추가될 수도 있다. 티투스 자신은 자비를 베풀고 요셉푸스에게 우호적이었다. 게다가 그는 아그리파의 누이인 유대인 베르니케와 정이 들었다. 이 모든 상황들이 하나님의 섭리 속에서 '날을 단축'하기 위한 요인으로 함께 작용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