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2891
9월22일 [연중 제25주간 수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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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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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m.youtube.com/watch?v=tgPI0HeqE3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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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기도의 모델, 에즈라!>
멸망을 향해 가는 이스라엘 민족을 안타깝게 바라보며,하느님의 자비를 청하는 한 의인(義人), 사제요 율법학자 에즈라가 바친 기도는, 우리가 바쳐야 할 참된 기도가 어떤 것인지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에즈라는 기도하는 사람의 자세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잘 가르치고 있습니다. “의복과 겉옷은 찢어진 채 무릎을 꿇고 두 손을 펼쳐...”(에즈라 9장 5절)
여기서 ‘찢어진 의복과 겉옷은’ 자신이 하느님 앞에 큰 죄인임을 공개적으로 드러내는 표시입니다. 무릎을 꿇는 행위는 죄인으로서 겸손하고 솔직한 마음 상태를 표현하고 있습니다. 두 손을 펼치는 것은 하느님 앞에 자신의 무능함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면서, 하느님의 도움을 간절히 바라는 표시입니다.
에즈라가 보여준 태도는 참으로 모범적인 기도 자세입니다. 우리의 모든 죄와 잘못을 잘 알고 계시는 전지전능하신 아버지 앞에, 죄인인 아들이 취해야 할 가장 기본적인 태도입니다. 진실성과 겸손한 마음을 잘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에즈라의 기도는 기승전결이 있습니다.
① “저의 하느님, 너무나 부끄럽고 수치스러워서, 저의 하느님 당신께 제 얼굴을 들 수 없습니다. 저희 죄악은 머리 위로 불어났고, 저희 잘못은 하늘까지 커졌습니다.”(에즈라 9장 6절)
에즈라는 기도의 출발점이 어떠해야 하는지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는 자신과 민족이 처해있는 부끄러운 현실을 정확히 직시하고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자신을 포함한 공동체 전체가 하느님 앞에 나아가 공동체적으로 죄를 고백합니다. 이는 공동체의 죄가 곧 내 죄이며, 공동체의 일이 곧 내 일임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② “그러나 이제 잠깐이나마 주 하느님께서 은혜를 내리시어, 저희에게 생존자를 남겨주시고, 당신의 거룩한 곳에 저희를 위하여 터전을 마련해 주셨습니다.”(에즈라 9장 7절)
우리의 죄가 하늘까지 닿음에도 불구하고 하느님께서 우리를 저버리지 않으셨음을 기억합니다. 완전히 멸망시키지 않으시고 생존자를 남겨주시어 이스라엘 역사를 잇게 하셨음에 감사드립니다.
③ 이어서 민족의 멸망과 유배라는 참담한 현실을 불러온 구체적인 죄의 고백이 이어집니다. 가장 중요한 죄목은 우상숭배, 그리고 하느님께 대한 불충실이었습니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하느님의 자비와 용서를 불러오는 가장 중요한 요소는, 솔직하고도 진정성있는 참회와 죄의 고백임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④ 에즈라 기도의 마지막 부분은 ‘그럼에도 불구하고’입니다. 너무나도 송구스럽고 부끄러움에도 불구하고 다시 한번 하느님의 자비와 용서를 구하고 있습니다.
그 큰 하느님 사랑과 은총에 보답하기는 커녕 끝도 없는 배신과 타락의 길을 걸어왔음에 가슴을 칩니다. 고개조차 들수 없고, 그 어떤 처벌 앞에서도 할 말이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한번 하느님으로부터의 용서와 자비를 희망하고 있습니다.
무죄한 의인이면서도 하느님 앞에 겸손되이 무릎을 꿇고, 백성들의 죄에 대한 용서를 청하는 에즈라의 기도가 참으로 감동적입니다. 에즈라의 기도는 백성들의 지도자가 어떤 삶을 살아내야 하는지 명확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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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복음묵상 동영상)
https://youtu.be/7dHJjKo9a7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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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를 이긴 사람은 사람들에게 호감을 산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열두 제자에게 병을 고치는 권한과 함께 복음을 전하는 소명을 주십니다. 그리고 재물에도 집착하지 말고 애정에도 집착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우리는 그런 집착이 영적 능력을 감소시킨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결국, 제자들은 주님의 말씀을 따라 어디에서나 복음을 전하고 병을 고쳐줍니다.
따라서 루카 복음의 이 말대로 하면 병을 고치는 능력과 복음을 전하는 능력은 같은 것입니다. 영적인 능력이 부족한 상태로 말로만 복음을 전해봐야 소용이 없다는 뜻으로도 해석될 수 있습니다. 사람은 말보다 사람의 존재를 먼저 믿으려 합니다. 진실한 사람에게서 진실한 말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중국 역사에서 여자 임금이 딱 한 사람 있었습니다. 바로 당나라의 측천무후입니다. 측천무후는 훌륭한 남자를 늘 곁에 두고 국정에 관한 의견을 듣고 싶었지만 아무래도 주위의 눈총이 두려웠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좋은 꾀를 생각해 냈습니다. 당대에 덕망 높기로 유명한 두 스님을 궁궐로 초대한 것이었습니다.
한 스님은 당시 국사(國師)로 있던 ‘충국사’였고 또 한 스님은 ‘신수’(神秀) 대사였습니다. 여왕과 함께 있으려면 조금이라도 여색을 탐해서는 아니 되었기에 측천무후는 두 스님 중 여색에 초연한 스님을 고르려는 것이었습니다. “스님들도 때로는 여자 생각이 나십니까?” 측천무후가 두 스님을 떠보았습니다. 이에 대해 충국사는 “우리는 절대로 그런 일이 없습니다.”라고 단호해 대답했습니다. 그러나 신수 대사는 “몸뚱이가 있는 한 그런 생각이 없을 수 없겠지만 다만 방심치 않을 뿐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측천무후는 두 번째 테스트에 들어갔습니다. 두 스님을 큰 목욕탕으로 안내하여 목욕을 시킨 다음 아름다운 궁녀를 시켜 두 스님의 때를 닦아 드리게 하였습니다. 그래놓고 자신은 목욕탕 꼭대기에 앉아 두 스님을 몰래 관찰했습니다. 그런데 이게 어찌 된 일일까요? 절대로 여색에 동하지 않는다던 충국사는 몹시 흥분해 어쩔 줄 몰라 했고 신수 대사는 여여(如如)하여 조금도 달라짐이 없었습니다. 측천무후는 “물에 들어가니 길고 짧음을 알겠더라."(入水見長)라는 시를 짓고 이후 신수 대사를 곁에 두고 늘 국정을 논하였습니다. [출처: ‘이 책을 읽으면 유능해지고 부자가 됩니다’, 유튜브 채널, ‘북올림’]
사람이 믿을 수 없다면 말은 아무 소용 없습니다. 그리고 성덕의 길고 짧음은 실제 그런 상황에 다다르지 않으면 알 수 없습니다. 대부분 자신의 능력을 과신하는 사람은 자신과 싸워본 적이 없는 사람입니다. 자신과 싸워본 적이 있다면 자신의 힘으로 자신을 이길 수 없음을 잘 알 것입니다. 그래서 그러한 상황이 오지 않도록 조심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재물을 아예 가지고 다니지 말라고 하시는 이유는 재물이 있으면 그것에 신경이 쓰이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며, 이집 저집으로 거처를 옮기지 말라는 말도 역시 더 좋은 거처나 사람을 찾기 위해 신경을 분산시키지 말라는 뜻입니다. 소위 우리가 말하는 ‘세속-육신-마귀’에 사로잡힌 사람은 그 사람 자체가 믿지 못할 사람이 되기 때문에 누구도 그런 사람들이 전하는 복음은 믿지 않을 것입니다. 먼저 자신을 이긴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사람들이 나의 말도 믿게 됩니다.
영국이 역사상 가장 부강했던 때는 엘리자베스 1세 시기라고 합니다. 이리 치이고 저리 치여서 눈치 보며 살아야 했던 영국을 무려 40년 동안 세계 최강국으로 만든 여군주가 엘리자베스입니다. 그녀는 특히 스페인의 무적함대를 격파함으로써 앞으로 수백 년 동안 전 세계인이 영어를 배워야 하게 만들었습니다.
군주는 백성의 신임을 얻어야 하거나, 정략결혼 등을 통해 적을 만들지 말아야 했습니다. 엘리자베스 1세 여왕 이전의 대부분의 왕은 정략결혼을 통해 세상과의 타협을 추구하였습니다. 특히 엘리자베스 여왕의 아버지 헨리 8세도 재혼을 하기 위해 로마 가톨릭을 등졌습니다. 심지어 재혼을 위해 엘리자베스 여왕의 어머니인 앤 볼린을 참수하였고, 6번의 결혼을 하는 동안 또 다른 아내도 참수했습니다. 아들을 낳지 못한다는 이유였지만 실제로 세 번째 아내에게 아들을 얻었기에 이것도 핑계로만 보일 뿐이었습니다.
엘리자베스는 아버지로부터 딸로도 인정받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사랑한 사람으로부터 배신당하기도 합니다. 그녀는 마지막까지 그 사람과 나누었던 편지가 있었고 마지막 때 그 사람의 이름을 불렀다고도 합니다. 그녀는 결혼하는 대신 독신을 선택합니다. 그리고 “짐은 국가와 결혼했노라!”라는 유명한 말을 남깁니다.
당시 무적함대를 무찌를 수 있었던 원동력은 백성을 하나로 집결할 힘이었습니다. 수적 우세에도 제대로 싸움 한 번 해보지 못한 아프가니스탄 군인들을 보며 현실적으로는 불가능해 보이는 싸움을 승리로 이끈 엘리자베스 여왕의 힘이 얼마나 컸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영국은 그녀를 중심으로 똘똘 뭉칠 수 있었는데 그 이유는 그녀가 세상과 타협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꼭 종교 안에서만 자신을 절제하는 이가 성령의 힘을 발휘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는 어디에나 해당하는 예외가 없는 규칙입니다. 육을 살리려면 영은 죽고 영이 살면 육이 죽습니다. 이것을 아는 사람이라면 진정 자신이 사랑하는 것을 지키기 위해 끊어야 하는 것을 끊습니다.
영과 육은 반대입니다. 그러니 육을 끊는 작업을 죽을 때까지 게을리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면 사람들이 나를 믿게 될 것이고 나를 믿게 되면 내가 전하는 복음도 믿게 됩니다. 하지만 세상과 타협하는 모습을 보이면 그다음 하는 말들은 허공의 메아리가 될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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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루가 9,1-6 : 복음을 전하는 제자들의 자세
예수님께서는 열두 제자를 파견하시면서 그들에게 당신의 예언적 가르침과 치유기적의 능력을 주신다. 즉 악한 영들과 질병들을 제압하는 권한을 주셔서 영광스럽게 하셨다. 이러한 권한은 그들에게 필요했다. 이러한 권능으로 사도들은 사람들을 신앙과 의화에로 초대하여 구원과 생명으로 가는 길을 일러줄 수 있었던 것이다. 또한 그 능력을 보고 사람들은 그들의 말씀을 믿을 수 있었던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아무것도 지니고 가지 말라고 하신다. 이것은 제자들이 자기들이 먹을 양식마저도 걱정하지 않고 세상의 온갖 염려와 세상일에 대한 걱정으로부터 자유롭기를 바라신 것이다. 복음을 전하는 일 외에 다른 것에 대한 집착을 버리라고 하시는 것이다. 그들의 영광은 아무것도 지니지 않는데 있다고 그분은 말씀하셨다. 복음을 전하는데 방해되는 것에 마음을 빼앗기지 말라는 말씀이다.
지팡이도, 여행 보따리도, 양식도, 돈도, 여벌 옷도 지니지 말라고 하심으로써, 제자들이 쓸데없는 염려로 마음이 산만해지는 일이 없도록 하신다. “네 근심을 주님께 맡겨라. 그분께서 너를 붙들어 주시리라.”(시편 55,23)는 말씀대로 먹을 것 걱정을 하지 말라고 하신다. “너희는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는 없다.”(마태 6,24) “너의 보물이 있는 곳에 너의 마음도 있다.”(마태 6,21)고 하셨다.
주님께서는 사도들을 돈도, 금이나 은도, 신발도 없이 보내신다. 선을 행하는 사람들이 칭송을 듣는 것은 그들이 가지고 있는 물건들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뛰어다니며 가져다주는 은총 때문이다. 성경에서는 “얼마나 아름다운가, 산 위에 서서 기쁜 소식을 전하는 이의 저 발! 평화를 선포하고 기쁜 소식을 전하며 구원을 선포하는구나.”(이사 52,7) 우리의 발은 복음을 전하는 아름다운 발이 되어야 한다.
또 그렇게 돌아다닐 때 그들은 손님 대접을 받을 수 있었다. 유대인들은 그들의 풍습에서 나그네를 마치 ‘하느님의 천사’처럼 대했다. 즉 필요한 것, ‘먹고 자는 것’을 무료로 제공할 줄 알았으며, 그렇게 하는 것이 바로 하느님을 섬기는 행위로 알았고 또한 이를 통해 축복을 받았던 것이다. 이집 저집 옮겨 다니지 말라고 하시는 것은 음식 때문에 복음을 전하는 것이 방해를 받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사람들이 너희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그 고을을 떠날 때에 그들에게 보이는 증거로 너희 발에서 먼지를 털어 버려라.”(5절) 그들의 가르침을 받아들이지 않는 곳에서 묻은 먼지는 하느님의 백성을 더럽히지 않고 하느님의 집에 더러운 것이 묻어 들어가지 않도록, ‘새 성전’으로 들어갈 때 그 먼지를 털어 버려야 한다.
뛰어나지도 않고 갖춘 것도 별로 없는 이 제자들을 통해 이제 예수님께서는 세상을 정복하실 수 있다. 나 자신도 아무것도 아닌 존재이지만, 주님의 제자로서 복음을 전할 수 있는 사람인 것을 감사하며 앞으로 나아가도록 도우심을 구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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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원주교구 신우식 토마스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모든 마귀를 쫓아내고 질병을 고치는 힘과 권한을 열두 제자에게 주시며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고 병자들을 고쳐 주라고 파견하십니다. 그리고 “길을 떠날 때에 아무것도 가져가지 마라. 지팡이도 여행 보따리도 빵도 돈도 여벌 옷도 지니지 마라.” 하고 당부하십니다.
가까운 곳으로 잠깐 여행을 갈 때도 짐이 많습니다. 먹을 것, 입을 것은 물론이고 휴대폰 충전기, 화장품 등등 …….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가져갔다가 꺼내지도 않고 도로 가져오기도 합니다. 우리는 준비성이 투철한 사람들입니다. 미래를 철저하게 대비하는 유비무환의 정신이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우리와 생각이 다르신 것 같습니다. 제자들에게 아무것도 가져가지 말라고 하십니다. 복음을 전하는 여정은 우리의 여행과는 분명히 다르고, 세상 것에 애착을 보이면 이룰 수 없는 사명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철저하게 하느님의 은총만을 의지하라고, 아무것도 가지고 가지 말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가진 것 가운데 자신을 온전히 주님께 의탁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필요 없는 짐일 뿐입니다. 결코 제자들이 잘나서 예수님께 뽑혔고, 마귀를 쫓아내고 병자를 고쳐 주는 능력을 지니게 된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제자들의 사명은 오로지 다른 이들에게 구원의 기쁜 소식을 전하는 것이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능력과 힘은 주님을 따라 살아가기 위한 도구입니다. 이웃과 나눔으로써 우리는 하느님께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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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아무것도 가져가지 마라.>
“예수님께서는 열두 제자를 불러 모으시어, 모든 마귀를 쫓아내고 질병을 고치는 힘과 권한을 주셨다. 그리고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고 병자들을 고쳐 주라고 보내시며, 그들에게 이르셨다. ‘길을 떠날 때에 아무것도 가져가지 마라. 지팡이도 여행 보따리도 빵도 돈도 여벌 옷도 지니지 마라. 어떤 집에 들어가거든 그곳을 떠날 때까지 거기에 머물러라. 사람들이 너희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그 고을을 떠날 때에 그들에게 보이는 증거로 너희 발에서 먼지를 털어 버려라.’ 제자들은 떠나가서 이 마을 저 마을 돌아다니며, 어디에서나 복음을 전하고 병을 고쳐 주었다."(루카 9,1-6)
“아무것도 가져가지 마라.”라는 말씀은, 글자 그대로 아무것도 가져가지 말라는 명령입니다. 필요하지 않은 것과 필요한 것을 구분하지 말고, 자신을 온전히 주님께 의탁하는 일을 방해하는 것인지 아닌지를 따지지 말고, ‘빈 마음’과 ‘빈 손’으로 떠나라는 명령입니다. <여기서 ‘빈 마음’이라는 말은, 세속적이고 물질적인 것들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욕심내지 않는 마음인데, 그냥 비어 있기만 한, 공허한 마음이 아니라 “영적인 에너지로 가득 차 있는 마음”입니다.> 이 말씀을 ‘무소유’를 강조하신 말씀으로 생각하기가 쉬운데, 예수님께서 강조하시는 것은 ‘무소유’가 아니라 ‘올바른 소유’입니다. ‘무소유’는 ‘아무것도 없는 텅 빈 상태’이고, ‘올바른 소유’는 “신앙인으로서 가지고 있어야 하는 것은 가지고 있는 상태”입니다. 신앙인으로서 가지고 있어야 하는 것은 믿음, 사랑, 희망, 열정 등입니다. 버려야 하는 것은 의심, 걱정, 탐욕 등입니다.
1) 마르코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열두 제자를 파견하실 때 ‘둘씩 짝지어’ 파견하셨습니다.(마르 6,7) (바오로 사도도 항상 다른 사람과 함께 다녔습니다.) ‘복음 선포’는 곧 ‘신앙을 증언하는 일’이고, 증언은 두 명 이상의 증인이 필요한 일입니다.(신명 19,15) 그래서 둘씩 짝지어 파견하신 것으로 해석하는데, ‘두 명 이상의 증인’이 필요하다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서로 돕고 서로 의지하는 ‘형제애’입니다. ‘사랑’으로 복음을 선포하라는 뜻이 들어 있다는 것입니다.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모든 사람이 그것을 보고 너희가 내 제자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요한 13,35) 사랑 자체가 곧 증언입니다. (만일에 사도들이 혼자서 가야 했다면,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는 상태에서, 혼자라는 점 때문에 더욱 힘들었을 것이고, 금방 지쳤을 것입니다. 선교활동만 그런 것이 아니라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공동체와 떨어져서 혼자 신앙생활을 한다면, 그것은 힘든 일이기도 하고 위험한 일이기도 합니다. 믿음을 잃거나 흔들릴 위험이 크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혼자서는 사랑 실천을 할 수가 없고, 사랑 실천 없이 신앙생활을 하면 금방 힘을 잃어버립니다.)
2) 사도들의 ‘빈 마음’과 ‘빈 손’은, 그들의 ‘믿음’을 증명하는 강력한 증거가 됩니다. 그래서 “길을 떠날 때에 아무것도 가져가지 마라.”라는 말씀은, “아무것도 가져가지 않음으로써 너희의 믿음을 증명하여라.”라는 명령이 됩니다. 반대로, 가지고 있는 것이 많다면, 그것은 믿음이 부족하거나 없다는 것을 드러내는 일이 될 뿐입니다. (이것은 누구든지 경험을 통해서 얻게 되는 교훈입니다. 그동안 우리 교회의 역사를 보면, 가진 것이 많았을 때에는, 즉 부유했을 때에는 하느님에게서 멀어졌고, 부패했고, 타락했습니다. 그러나 박해를 받을 때나 가난했을 때에는 신앙의 순수성을 지켰습니다.) ‘믿음’은 곧 ‘걱정하지 않음’입니다.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차려입을까?’ 하며 걱정하지 마라. 이런 것들은 모두 다른 민족들이 애써 찾는 것이다.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는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필요함을 아신다.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아라. 그러면 이 모든 것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마태 6,31-33) <믿음 없는 사람들은 많이 가지고 있어야 걱정을 안 하게 된다고 생각하지만, 실제 현실에서는 가지고 있는 것이 많으면 많을수록 걱정도 늘어납니다. 신앙인은 믿음을 통해서 걱정에서 해방되는 사람입니다.>
3)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해 주는 일은, 희망을 전해 주는 일이기도 합니다. 이 희망은 하느님 나라에서 얻게 될 것들, 즉 구원과 영원한 생명에 대한 희망입니다. 사도들의 ‘빈 마음’과 ‘빈 손’은 그 희망이 막연한 기대감이 아니라 틀림없이 이루어질 확실한 희망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증거가 됩니다. 영원한 것에 대한 희망으로 허무한 것들에 대한 애착심을 버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만일에 ‘빈 마음’과 ‘빈 손’이 아니라면, 그러면서 “이것들은 꼭 필요한 것들이다. 어쩔 수 없이 가지고 있어야 한다.”고 변명한다면, 사람들에게 세속과 물질에 대한 애착심을 버리고 하느님 나라만 추구해야 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런 말을 하려면 자기 자신부터 애착심을 버리는 모습을 보여 주어야 합니다. <신앙생활을 할 때, 모든 신앙인이 수도자가 될 수는 없고, 그래서 완벽하게 ‘빈 마음’과 ‘빈 손’으로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러나 언제든지 모든 것으로부터 떠날 준비는 하고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아무것도 가지고 오지 않았으며 이 세상에서 아무것도 가지고 갈 수 없습니다."(1티모 6,7) 사실 하느님께서 부르시면 모든 것을 놓아두고 떠나야 한다는 것을, 즉 인생이란 ‘공수래공수거’ 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데 알면서도 실제 삶으로 실천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4) 선교활동도 그렇고, 신앙생활도 그렇고, 꼭 필요한 것은 ‘열정’입니다. ‘열정’은 한 가지만 생각하는 것이고, 그 한 가지를 위해서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바치는 것입니다. 바로 그 ‘열정’에 초점을 맞춰서, “아무것도 가져가지 마라.”라는 말씀을 “너 자신을 위해서는 아무것도 가져가지 마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생각해도 본래의 뜻과 다르지 않은데, 그래도 “복음 선포에 필요한 것은 모두 챙겨 가라.”라는 뜻이 들어 있게 됩니다. 자기 자신을 위해서는 ‘빈 마음’과 ‘빈 손’으로 가지만, 그러나 복음 선포와 신앙을 증언하기 위해서는 열정적으로 모든 것을 가져가서 다 쏟아 부으라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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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산보 길에 길 잃은 어린 참새를 보았습니다. 가까이 가니 아직 잘 날지 못합니다. 날개 짓을 하지만 1미터를 넘지 못합니다. 가녀린 날개, 걷기에도 힘이 부치는 작은 발, 갈 곳을 몰라 하는 눈망울을 보았습니다. 어린 참새가 엄마를 찾고, 친구를 만나서 재잘거리면 좋겠습니다. 알을 깨고 이 세상으로 나왔으니, 참새로서 기쁘고 즐거운 시간을 보냈으면 좋겠습니다. 2005년 캐나다 연수를 시작할 때입니다. 추운 겨울 온타리오 호수 주변의 가로등에 외로이 앉아 있던 갈매기를 보았습니다. 당시에는 외로운 갈매기처럼 저도 외롭고 쓸쓸했습니다. 겨울이 지나니 봄이 찾아왔고, 한인성당의 미사를 도와주면서 교우들을 만날 수 있었고, 여름에 활짝 꽃이 피듯이 즐거운 시간을 보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아련한 추억입니다.
지난 8월 23일에는 서품 30주년을 맞이해서 감사한 시간을 가졌습니다. 1년 동안 미사를 도와드리고 있는 부르클린 한인 성당에서 축하해 주었습니다. 퀸즈 한인 성당에서 동료신부님들과 감사미사를 봉헌하였습니다. 가톨릭평화신문의 필진, 엠이 봉사자들, 부르클린 교우들, 퀸즈의 교우들이 함께 하셨습니다. 필라델피아 한인성당에서 서울교구 사제들이 함께 감사미사를 봉헌하였습니다. 태풍의 영향으로 하루 종일 비가 내렸지만 저를 기억해주고, 함께 해주신 분들이 있어서 행복한 하루였습니다. 80이 넘으신 신부님께서 덕담을 들려주셨습니다. 지나온 30년을 감사드리고, 앞으로 남은 시간도 감사드리면서 지내라고 하셨습니다. 바오로 사도의 말씀을 들려주셨습니다. “우리는 낙심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외적 인간은 쇠퇴해 가더라도 우리의 내적 인간은 나날이 새로워집니다."(2코린도 4,16) 그렇습니다. 나이를 숫자로 생각하면 주름이 늘고, 경험으로 생각하면 연륜이 쌓이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파견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파견하시면서 많은 걱정을 하셨습니다. ‘마치 내가 너희를 이리 때 속으로 보내는 것 같구나!’ 제자들이 가는 길이 결코 쉬운 곳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러면서도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길을 떠날 때에 아무것도 가져가지 마라. 여행 보따리도 빵도 돈도 여벌옷도 지니지 마라.” 현실의 삶에서 꼭 필요한 것들도 가지고 다니지 말라고 하십니다. 복음을 전하는 것은 사업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것은 소유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은 떠나가서 이 마을 저 마을 돌아다니며, 어디에서나 복음을 전하고 병을 고쳐 주었습니다. 정말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주님과 함께 지냈고, 주님의 가르침을 들었던 제자들이 파견되어서 주어진 사명을 충실하게 수행하고 있습니다. 소유와 욕심을 버릴 때, 우리는 참된 주님의 제자가 될 수 있습니다.
2달간 뉴욕에 머무시던 신부님은 제게 말은 하지 않으셨지만 행동으로 사제의 길을 보여주셨습니다. 매일 아침 미사를 혼자 준비하셨습니다. 미사에 오는 교우들을 위해서 간단한 아침식사를 준비하셨습니다. 80이 넘은 노구에 힘이 들기 마련이지만 신부님을 찾아오는 신자들을 따뜻하게 맞아 주셨습니다. 허리가 아픈 사람, 다리가 아픈 사람, 잠을 잘 못자는 사람, 말이 어눌한 사람, 늘 피곤한 사람들이 찾아왔습니다. 신부님은 정성껏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주셨고, 수경침으로 도움을 주셨습니다. 돌아갈 때는 활짝 웃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예수님께서 ‘나는 이스라엘의 다른 마을로도 복음을 선포하여야 한다.’라고 하셨던 것처럼 신부님도 뉴욕에서의 시간을 마무리하시고 LA로 가셨습니다. 그곳에도 신부님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처럼 아무것도 지니지 않고 훌쩍 떠나셨습니다. 내년에도 건강한 모습으로 오시도록 기도합니다. 오늘 하루 ‘나의 세례명’은 무엇인지, 나의 성인께서는 어떤 삶을 사셨는지 묵상했으면 좋겠습니다. 내 뜻이 이루어지기 보다는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일을 먼저 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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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도회(부산 분도명상의 집) 박재찬 안셀모 신부님]
<두말 말고 오소>
“어떤 집에 들어가거든 그곳을 떠날 때까지 거기에 머물러라.” 낯선 이들을 집에 받아들이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오늘날에는 더욱 그러합니다. 받아들이지 않는 이들에게는 “발에서 먼지를 털어 버리라” 라고 하십니다. 제자들의 활동을 위해 이렇게 제자들을 받아들이는 이들이 있었는가 하면 배척한 이들도 있었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을 받아들이며 살 때가 있는가 하면 위기 앞에 혹은 이익이 되지 않을 때 혹은 지금까지와는 다른 낯선 예수님이 다가오실 때, 주님을 배척하거나 무시하고 살기도 합니다. 미사를 봉헌하기에 앞서 우리 모두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시며 절대 우리를 향해 발에 묻은 먼지를 털지 않으시는 예수님의 그 마음을 헤아리며 주님의 자비를 청하도록 합시다.
오늘은 안타깝고도 재미있는 이야기로 강론을 시작하겠습니다.
평생을 독신으로 사는 할아버지가 놀이터 의자에 앉아 있는데 동네 꼬마들이 몰려와 옛날 이야기를 해달라고 졸랐습니다. 그러자 할아버지는 조용히 이야기를 시작했습니다. "얘들아, 옛날에 어떤 남자가 한 여자를 너무너무 사랑했단다. 그래서 그 남자는 용기를 내어 여자에게 결혼해 달라고 프로포즈를 했지. 그러자 그 여자는 "두 마리의 말 말고 다섯 마리의 소를 갖고 오면 결혼하겠어요."
이렇게 이야기를 했단다. 남자는 그 뜻을 알 수가 없었고, 두 마리의 말과 다섯 마리의 소를 구하기 위해 열심히 돈을 벌었지만 여자와 결혼을 할 수가 없었어. 결국 남자는 혼자 늙어가면서 오십 년이 흘러 할아버지가 되고 말았단다. 그리고 아직까지도 그 남자는 그 여자만을 사랑하고 있지. 할아버지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고 있던 한 꼬마가, "에이~~!" 하더니 대수롭지 않게 말했습니다. "할아버지, 두 마리의 말이랑 다섯 마리 소면 "두말 말고 오소"라는 뜻 아니어요?" 아이의 말에 갑자기 할아버지는 무릎을 치더니 "오잉~~ ????? 아하 그렇구나~~! 그런 뜻이었구나~~! 아이고, 내가 그걸 왜 몰랐을까.....?
아이고, 벌써 오십년이 흘러 부렀네에...아이고 아이고~~!!!!"
늦기 전에 그대여!! 두 말 말고 오소!!!
할아버지는 젊은 시절 그 여자가 자신에게 두 5말 말고 오라는 말을 알아듣지 못하고 평생을 허비했습니다. 그냥 할아버지에게 여자가 “좋아요. 오세요!” 했음 되었을 텐데 여자들의 마음은 정말 알다가도 모를 일입니다. 그래서 “여자는 남자의 감정을 느낌으로 알고, 남자는 여자의 감정을 말해줘야 안다”라는 말이 맞나 봅니다. 아내가 남편에게 “그걸 꼭 말해줘야 아나?”하는데 진짜 남자는 말해 줘야 압니다^^
몇 가지 더 말해 드릴까요?
“여자는 남자가 무심할 때 떠나고 싶고 남자는 여자가 무시할 때 떠나고 싶다.
여자는 무엇이든 이야기하는 사이가 되고 싶고 남자는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사이가 되고 싶다.
여자는 몰라도 되는 일에 지나친 관심을 갖고 남자는 꼭 알아야할 일에 지나치게 무관심하다.”
어떻게 공감이 가십니까?
사랑해서 함께 사는 부부도 서로를 받아들이고 이해하고 변함없이 사랑하는 것이 참 어려운 것처럼, 앞의 이야기에서 그 여자는 할아버지를 받아들였음에도 불구하고 할아버지는 그것을 못 알아들은 것처럼 그렇게 우리 역시 예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받아들이지 못하고 이해하지 못할 때가 많은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받아들여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죄와 무지, 욕심과 욕망은 우리가 그분을 받아들이는 것을 방해할 때가 많은 것 같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낯선 예수님의 제자들을 받아들인 사람들인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렇게 예수님의 이름으로 일하며 복음을 선포하는 이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거부하고, 내 뜻대로 말하고 행동하지 않는다고 단죄하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이런 이들에게 ‘발의 먼지를 털어 버려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을 가만히 묵상하다 보면 복음 선포를 위해 많은 능력을 제자들에게 주시고 파견하실 때 조건이 있었습니다. “아무 것도 가져가지 마라. 지팡이도 여행보따리도 빵도 돈도 여벌 옷도 지니지 마라” 실제로 오늘날 상황에서 이렇게 복음 선포를 하기는 쉽지 않을 것입니다. 사실 누군가에게 신세를 진다는 것이 얼마나 불편한지 잘 아실 것입니다. 가족이 아닌 이상, 아니 명절을 지내셔서 더 잘 아시겠죠! 가족이라도 힘든 가족은 ‘빨리 갔으면…’ 하는 마음이 들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이 말씀의 궁극적인 의미는 “그런 것들은 야훼 이레! 주님께서 다 마련해 주실 테니, 복음 선포에만 집중하여라”는 의미입니다. 복음 선포에 따르는 부수적인 것들에 집착하지 말라는 의미입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을 돕는 여인들이 있었던 것처럼 그렇게 예수님의 일을 하는 이들에게는 성령께서 풍성한 선물을 베풀어 주심을 믿고 자유롭게 살아야 할 것입니다.
낯선 제자들을 받아들였던 사람들은 주님의 축복을 받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도 예수님의 제자라는 이유로 냉수 한 그릇이 아니라 많은 영적 물적 도움을 주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로부터 큰 상을 받을 것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을 받아들이고 돕고 협조해 주는 것은 그들을 조종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예수님 때문에 그 일을 해야 하며 겸손하게 그것이 드러나지 않게 할 때 더 큰 상을 받을 것입니다. 신세지는 것이 부담이 되듯이 설령 예수님의 이름으로 했다 하더라도 제자들은 자신들을 받아 주고 친절을 베풀어 준 그들을 위해 기도하고 그들의 고마움을 잊지 않을 것입니다.
자매 형제 여러분, 예수님께서는 오늘도 우리를 “두말 말고 오소”라고 초대하고 계십니다. 집 나간 둘째 아들처럼 마음을 돌려 우리의 죄와 우리의 허물과 상관없이 두말 말고 그분께 달려 가 안기도록 합니다. 나아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일하는 이들을 두말 말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며 그들이 예수님의 일을 잘 할 수 있도록 도와주도록 합시다. 낯선 우리를 향해 절대 발에 묻은 먼지를 털지 않고 있는 그대로를 다 받아 주시는 주님의 그 마음으로 예수님의 이름으로 일하는 이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며 판단은 예수님께 맡겨 드리도록 합시다.
“두말 말고 오소서 주 예수여!” 아멘.
"이미 네 곁에 네 안에 있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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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종교구 임성호 베네딕도 신부님]
<무소유와 떠나는 지혜!(무존귀떠!)>
"길을 떠날 때 아무것도 지니지 마라. 지팡이나 식량 자루나 빵이나 돈은 물론, 여벌 내의도 가지고 다니지 마라. 이 말씀을 듣고 프란치스코 성인은 크게 외치면서 하느님께서 주신 구체적인 소명을 깨닫고 가난의 길, 무소유의 길로 들어서면서, 철처히 이를 실천 하신다.
우리도 무소유의 길로 접어들 때에 완전한 자유를 누릴 수 있다. 이를 위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철저히 자신을 낮추는 겸손의 길이다. 그리고 이웃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다.
"이웃이 나에게 해 주길 바라는 것을 이웃에게 해주라"는 복음 말씀 따라, 이웃을 존중하고 이를 위해서 이웃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것은, 복음을 삶 속에 실천하는 좋은 방법이다.
어쩌면 복음을 산다는 것은 아주 단순한 것인지도 모른다. 바로 내 옆에 있는 이웃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것! 이웃의 아픔에 귀를 기울이는 것! 이웃의 의견에 귀를 기울이는 것! 이웃의 바램에 귀를 기울이는 것! 내가 존경 받길 원하듯이, 이웃을 소중하게 대하고, 인격체로 대하고, 나보다 낫게 여기며, 나 자신을 낮추는 것! 그래서 이웃을 섬기는 것! 이런 조그만 마음과 노력들이 자신을 버리는 작업이고, 무소유의 길로 들어서는 것이라 하겠다.
"어느 집에 들어가든지 그곳을 떠날 때까지 그 집에 머물러 있어라. 그러나 누구든지 너희를 환영하지 않거든 그 동네를 떠나라."
그러나, 예수님게서는 복음을 전하면서도 너무 스트레스 받지 말도록 지혜로운 행동 방식도 가르쳐 주신다. 환영하지 않거든 그 동네를 떠나라는 말씀에 따라, 복음을 전하는 당신 제자들에게 부정적인 반응을 보이는 사람들에게는 어떻게 대응하라는 지침도 주신다. 그 사람들과 싸우지도 말고, 따지지도 말고, 그냥 떠나면서 발에 묻은 먼지를 털어라고 말씀하신다.
우리의 삶도 복음을 전할 때, 우리를 환영하는 사람들에게는 머물러야 하지만, 우리를 환영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는 곳은 그 장소를 미련없이 떠나야 할 것이다.
이는 앞을 내다 보시는 예수님께서 당신 제자들에게는 긍정적인 태도로 환영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환영하지 않을 부정적인 사람도 있을 것이기에 이에 대한 제자들의 대응 양식을 미리 가르쳐 주신 것이다. 이제 우리는 지혜롭게 살아야 한다.
무소유의 삶,(무)
이웃을 존중하고,(존)
이웃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복음도 살아야하고,(귀)
동시에 환영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는 곳은 발에 먼지를 털고 떠나는 삶도 살아야 하는 것이다.(떠)
(기도)
참으로 좋으신 하느님 아버지!
우리가 무소유의 자유로운 삶을 살도록 허락하시고, 우리 이웃을 존중하고, 그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사는 삶을 허락하시고, 동시에 우리를 환영하지 않는 곳은 언제든지 미련없이 떠날 수 있게 우리를 인도 하소서!
이 모든 말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비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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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바오로회 故 유광수 야고보 신부님]
<아무것도 가져가지 마라>
어제 복음에서 "예수님의 어머니와 형제가 된다."는 것은 예수님과 같은 운명의 삶을 산다는 것이다.
즉 "예수님과 같은 일을 하고 예수님과 같은 방법으로 살고 예수님과 하나되는 삶을 산다."는 것이다. 이렇게 생활할 때만이 "도대체 이분이 누구시기에 바람과 물에게 명령하시고 또 그것들이 이분께 복종하는가?"(8,25)라는 그분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그분의 삶을 살지 않고서는 도저히 그분을 안다고 할 수 없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과 같은 일을 하도록 부르심을 받은 이들이 어떻게 살아야하는 가에 대한 가르침이다. 파견된 이들의 목적은 모든 이들에게 생명의 빵을 주기 위함이다. 이런 사람이 되게 위해서 예수님은 첫 번째 제자들을 부르시어 당신을 따르도록 하셨고(5,1-11), 두 번째, 그들 중에서 열두 제자들을 구성하시어 하나의 공동체를 만드셨고, 그들을 교육시키셨다.(6,12-8,56까지)
그리고 이제 이렇게 준비된 이들을 파견하신다. 이것은 모든 그리스도인이 걸어가야 하는 길이며 교육의 목적이다. 즉 부르심-교육-파견은 모든 그리스도인의 교육과정이며 그 목적은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고 병자들을 고쳐 주기 위함이다." 예수님은 이 일을 하게 하기 위해서 제자들을 부르셨고 교육시키셨고 또 그 일을 하는데 필요한 힘과 권한을 주셨다.
오늘 복음은 이런 일을 하기 위해서 제자들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제시해주고 있다. 따라서 제자는 자기의 사명이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알아야 하고 또 그 일을 하기 위해서 어떻게 생활해야하는 가를 알아야 한다.
그럼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주신 힘과 권한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마귀가 갖고 있는 힘과 권한이 아니라(4,32.36) 죄를 사해주는 힘과 권한이다. 이 힘과 권한은 "더러운 영들에게 시달리는 이들을 낫게 해주는 것이다."
우리 모두는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고 병자들을 고쳐 주라고 파견된 사람들이다. 이 일을 하기 위해 불러 주셨고 양육시켜 주셨고 파견하시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느님 나라의 신비는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이 허락된 사람들만 알고 다른 이들은 비유로만 알아 듣기 때문에 하느님의 나라에 대해서 잘 모른다.
따라서 선교는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고 병자들을 고쳐주는 것이다. 선교를 하지 않으면 그리스도 신자라고 할 수 없다.
참된 선교사인가 아닌가는 내가 어디에 있든 또 어떤 신분으로 있든 반드시 내가 있는 그곳에서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고 병자들을 고쳐주는 일을 하고 있는 가에 달려있다.
내가 그리스도 신자이면서 아직까지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할 용기가 없고 또 어떻게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해야하는지 잘 모를 뿐만 아니라 병자들을 고쳐줄 수 있는 힘이 없다면 왜 그런가를 생각해보아야 한다.
사람은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을 전하는 법이다. 내 안에 하느님의 나라가 없다면 또 병자들을 고쳐줄 수 있는 힘이 없다면 하느님의 나라를 전할 수 없고 또 병자들을 고쳐줄 수 없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제자들이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고 병자들을 고쳐줄 수 있는 힘을 갖게 하기 위해서 그동안 여러 가지 방법으로 하느님의 나라에 대해서 설명해주셨고 그런 교육을 통해서 병자들을 고쳐줄 수 있는 힘을 기르도록 훈련을 시키셨다.
오늘 복음 이전의 모든 교육은 바로 제자들이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할 수 있도록 교육시키신 내용들이다.
우리도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고 병자들을 고쳐줄 수 있는 힘을 가지려면 성당에만 왔다 갔다 한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니고 또는 맹목적으로 믿기만 해서 되는 것은 아니고 제자들처럼 직접 예수님을 따라 다니면서 예수님의 가르침을 배우고 훈련을 받아야 한다.
그것은 좀 더 구체적으로 복음을 공부하는 것이고 공부하고 묵상한 말씀을 실행하면서 복음적으로 사는 삶의 방법을 훈련받을 때 가능한 것이다. 복음 선포자는 어떻게 생활해야 하는 지 오늘 복음에서 가르쳐 주신 내용들을 묵상하자.
"아무것도 가져가지 마라"는 것이다. 그것이 무엇인가? 지팡이, 여행 보따리, 돈, 여벌 옷이다.
복음 선포자가 여행을 떠날 때 아무것도 가지고 가지 마라는 것은 복음 선포자의 기본적인 자세이다. 즉 선교는 아무것도 지니지 않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이것이 예수님이 생활하신 방법이다.
"그리스도 예수는 하느님과 본질이 같은 분이셨지만 굳이 하느님과 동등한 존재가 되려 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당신의 것을 다 내어 놓고 종의 신분을 취하셔서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 되셨습니다."(필립2,6-7)
복음 선포는 물질적인 것을 아무것도 지니지 않는 것에서부터 출발한다는 것은 복음 선포는 물질적인 것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힘으로 하는 것이라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다.
또 "그분은 부요하셨지만 여러분을 위하여 가난하게 되셨습니다. 그분이 가난해지심으로써 여러분은 오히려 부요하게 되었습니다."(코후8,9)
복음선포자가 아무것도 지니지 않은 가난한 모습에서부터 시작하라는 것은 자기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자기를 위해서 사용하지 말고 다른 사람을 부요하게 해주기 위해서 사용하라는 것이다.
복음선포자가 가난하면 가난할수록 더 많은 것을 다른 이에게 줄 수 있다. 이토록 가난한 모습으로 시작할 수 있는 것은 복음 선포는 나의 능력이나 재물에 의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힘과 능력에 달린 것이기 때문이다.
바오로는 "나는 그리스도를 위해서 약해지는 것을 만족하게 여기며, 모욕과 빈곤과 박해와 곤궁을 달게 받습니다. 그것은 내가 약해졌을 때 오히려 나는 강하기 때문입니다."(코후12,10)이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하느님은 가난한 이들에게서 활동하신다. 제자들이 가지고 가지 말아야할 것들은 우리들 삶에 있어서 가장 기본적인 것들이고 필수적인 것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것들을 지니지 마라고 한 것은 무슨 뜻인가?
복음 선포자는 선교를 떠나면서부터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차려 입을까?" 하며 걱정 하지 말고 "그런 것들은 모두 다른 민족들이 애써 찾는 것이다.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아야 한다. "(마태 6,32-33)
지금은 우리가 이 정도의 수준까지 도달하지 못했다 하더라도 우리의 신앙 생활의 여정은 항상 나만을 위한 생활에서 다른 이에게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고 병자들을 고쳐줄 수 있는 힘을 가질 수 있을 때까지 진보하고 성숙해지는 여정이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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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양주분회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오늘 <복음>은 열 두 제자의 파견 장면입니다. 이는 세 가지 장면으로 되어 있습니다. 곧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파견하시기 이전의 장면, 파견하시는 장면, 그리고 파견 받은 이들이 그 사명을 이루는 장면입니다.
<첫 장면>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파견하시기에 앞서, 먼저 사랑으로 그들을 불러 모으셨습니다.
그리고 그냥 보낸 것이 아니라, 당신의 권능과 권한을 부여하시어 파견하십니다.
“열 두 제자를 불러 모으시어 모든 마귀를 쫓아내고 질병을 고치는 힘과 권한을 주셨다.”(루카 9,1)
<둘째 장면>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파견하시면서, 복음 선포자가 갖추어야 할 조건과 자세를 가르쳐주십니다.
“길을 떠날 때는 아무것도 가져가지 마라. 지팡이도 여행 보따리도 빵도 돈도 여벌옷도 지니지 마라.”(루카 9,3)
그렇습니다. 길을 떠나면서 그 어떤 다른 것을 가지고 가야 할 필요가 없습니다. 지팡이도, 여행 보따리도, 빵도, 돈도, 여벌옷도, 지닐 필요가 없습니다. 몸 걱정도, 치장도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가져야할 것을 이미 가졌기 때문입니다. 마귀를 쫓아내고 질병을 고칠 힘도 권한도, 말씀도, 예수님도 이미 가졌기 때문입니다.
사실, 우리도 이미 이 모든 것을 가졌습니다. 그런데 왜 그 권능이 우리에게서는 드러나지 않을까? 그것은 우리가 무능하지 않기 때문일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사도 바오로에게 나타나셔서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내 은총을 넉넉히 받았다. 나의 힘은 약한 데서 완전히 드러난다.”(2코린 12,9)
이는 우리의 초라함, 우리의 무력함, 우리의 허약함이 당신의 권능을 더욱 더 드러낸다는 말씀입니다. 우리 자신이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당신이 드러나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무능력하지 않으려고 자신의 능력을 자랑하고 자신의 능력을 앞세우기에 결국 그분의 권능이 드러나지 못하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 자신의 능력에 집착하지 말고, 오로지 주님께만 의탁하여 사명을 수행하라는 말씀입니다.
<셋째 장면>에서, 파견 받은 자들이 하느님 나라가 왔음을 알리고, 그 증거로 병든 자들을 고쳐주도록 하셨습니다.
“그들은 어디에서나 복음을 전하고 병을 고쳐주었다.”(루카 9,6)
오늘, 우리도 분명 예수님께 파견 받은 이들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서 그분의 권능이 드러나야 할 것입니다. 내 형제들에게서는 치유가 일어나고 질병이 고쳐져야 할 것입니다.
만약 나를 만나는 이들에게서 치유가 일어나지 않고 있다면, 내가 무능하지 않으려하고 오히려 능력을 부리려다 하느님의 권능이 이루어지는 것을 방해하고 있는 까닭은 아닐지 살펴보아야 할 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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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길을 떠날 때에 지팡이 외에는 아무것도,
빵도 여행 전대에 돈도 가져가지 말라”(루카 9,3)
주님!
제가 길을 떠나온 것이 아니라, 당신이 보내셨습니다.
저를 뽑아 부르시어 당신의 권한과 말씀을 심어 보내셨습니다.
여행 보따리도 전대도 필요하지 않음은 당신께만 의탁하고자 한 까닭입니다.
더 이상은 다른 것이 필요하지 않음은 당신의 말씀이 전부인 까닭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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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길을 떠날 때에는 아무것도 가져가지 마라."(루카9,3)
<제자들의 파견!>
https://youtu.be/CjlmywXsrn8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들을 불러 모으시어, 그들을 세상 안으로 파견하십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두 가지 파견목적을 제시하십니다. 하나는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병자들을 고쳐 주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떠나가서 이 마을 저 마을 돌아다니며, 어디에서나 복음을 전하고 병을 고쳐줍니다.
열두 제자들에게 부여된 두 가지 일은 지금 여기에 있는 '또 하나의 제자들'인 우리가 해야 할 일입니다.
그러니 우리도 내가 머무는 삶의 자리에서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고, 병자들을 고쳐주어야 합니다.
하지만 이것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닙니다. 아니 내 힘으로 가능한 일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를 파견하시면서 그들에게 이렇게 이르십니다. "길을 떠날 때에 아무것도 가져가지 마라. 지팡이도 여행 보따리도 빵도 돈도 여벌 옷도 지니지 마라."(루카9,3)
예수님의 이 말씀은 한마디로 오직 주님께만 의지하면서 전도에 헌신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오직 주님께만 의지하는 '무소유의 삶', 이에 대한 역설인 '성령의 충만함' 속에서 살아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성령의 충만함 안에서 누리는 의로움과 평화와 기쁨이 '하느님의 나라'이고, 나의 성령의 충만함이 너에게로 전해질 때 너의 아픔까지도 낫게 할 수 있습니다.
요즘 우리가 듣고 있는 '에즈라기의 말씀'은 '제2의 출애굽 사건'이라고 불리는 '바빌론 유배에서의 귀환(해방)'을 전하고 있습니다.
오늘 독서에서 에즈라는 하느님께 감사기도를 드리면서 먼저 자신의 잘못을 하느님께 깊이 고백합니다.
"저의 하느님, 너무나 부끄럽고 수치스러워서, 저의 하느님, 당신께 제 얼굴을 들 수가 없습니다."(에즈9,6)
우리도 에즈라처럼 하느님 앞에서 나의 연약함을 자랑하도록 합시다! 그래서 새롭게 다시 태어나는 또 하나의 제자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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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1)길을 걷다가>
루카 9,1-6 (열두 제자를 파견하시다)
예수님께서는 열두 제자를 불러 모으시어, 모든 마귀를 쫓아내고 질병을 고치는 힘과 권한을 주셨다. 그리고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고 병자들을 고쳐 주라고 보내시며, 그들에게 이르셨다. “길을 떠날 때에 아무것도 가져가지 마라. 지팡이도 여행 보따리도 빵도 돈도 여벌옷도 지니지 마라. 어떤 집에 들어가거든 그곳을 떠날 때까지 거기에 머물러라. 사람들이 너희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그 고을을 떠날 때에 그들에게 보이는 증거로 너희 발에서 먼지를 털어 버려라.” 제자들은 떠나가서 이 마을 저 마을 돌아다니며, 어디에서나 복음을 전하고 병을 고쳐 주었다.
<길을 걷다가>
길을 걷다가
가끔씩은
무엇을
걷고 있는지
물어야 하는 거야
길을 걷다가
가끔씩은
누가
걷고 있는지
물어야 하는 거야
길을 걷다가
가끔씩은
왜
걷고 있는지
물어야 하는 거야
길을 걷다가
가끔씩은
어떻게
걷고 있는지
물어야 하는 거야
길을 걷다가
가끔씩은
참으로
걷고 있는지
물어야 하는 거야
++++++++++++++++++
(2)
파견받아 떠나는 길에서 예수님께서 흩어져 있던 사람들을 당신께로 모으십니다. 하느님의 권능을 주어 세상에 보내기 위함입니다.
하느님을 잊고 지내던 사람들에게 다시금 믿음을 불러일으켜 아름다운 세상, 하느님 나라를 세우시기 위함입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의 사람들을 세상에 보내십니다.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라고, 병자를 고쳐주라고 보내십니다.
하느님 나라는 지금 이 곳에서 시작되어 마침내 다가올 마지막 날 완성될 나라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현재를 포함하지만, 현재를 넘어서 미래를 향해 열려있는 나라입니다.
병자는 아픈 사람입니다. 육신이, 마음이 아픈 사람입니다. 자신 때문에, 사람 때문에, 사회 때문에 아픈 사람입니다. 어제가 아닌 오늘, 내일이 아닌 오늘 이 시간 아픈 사람입니다. 바로 지금 아픔으로부터 벗어나고픈 사람입니다. 바로 지금 아픔으로부터 구해줄 손길을 기다리는 사람입니다.
하느님 나라의 선포는 현실적 세계를 포함하면서 초월적이고 궁극적인 구원을 말합니다. 병자의 치유는 현실안에서의 고통의 극복, 해방, 자유를 말합니다. 하느님 나라의 선포 그리고 병자의 치유 예수님의 파견을 받은 이들이 함께 짊어지고 가야 할 사명입니다.
개인의 취향이나 선호도에 따라 취사선택할 수 있는 무엇이 아닙니다. 예수 운동, 그리스도인의 사회 참여는 여타의 사회운동과는 다릅니다. 철저히 현실을 바닥에 깔고 있으면서도 동시에 현실을 초극하기 때문입니다.
현실 개혁과 궁극적인 구원이 하나로 어우러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믿는 이들은 하느님 나라를 일구는 운동가입니다. 믿는 이들은 복음에 바탕을 둔 사회운동가입니다. 운동가로서 믿는 이들에게 요구되는 세 가지의 자세가 있습니다.
"길을 떠날 때 아무 것도 지니지 마라."
믿는 이들은 자신의 능력이나 물질적 기반에서 힘을 얻지 않습니다. 믿는 이들의 힘은 하느님입니다. 자신의 능력, 물질적 기반에 의지할 때, 그리스도인으로서 수행하는 운동은 퇴색하고 맙니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하느님 나라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복음이 아니라, 자신의 나라, 자신의 복음을 떠들게 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이 계시기에, 하느님께 대한 믿음이 있기에, 기꺼이 빈손으로 길을 떠나는 것이 믿는 이들의 자세입니다.
"그곳을 떠날 때까지 머물러 있어라."
믿는 이들은 지금 주어진 것에 충실합니다. 지나간 사람, 일에 머뭇거리거나 희미한 미래를 공상하며 현재를 소홀히 하지 않습니다. 지금의 구체적 현실에 머물러 혼신의 힘을 다하는 것이 믿는 이들의 자세입니다.
"받아들이지 않거든 떠나라."
믿는 이들은 반하느님적인 무엇, 비복음적인 무엇과 타협하지 않습니다. 함께 해서는 안되는 세력들과 적당히 타협하지 않습니다. 과감한 단절이 있을 뿐입니다. 현실 안에 살아가면서도, 결코 현실과 타협하지 않는 결단이 믿는 이들의 자세입니다.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고 현실 안으로 파견된 믿는 이의 한 사람으로서 믿음을 무기로 삼아 지금 주어진 사명에 철저히 복음을 거스르는 시대의 흐름에 적당히 타협하지 않으면서 신앙의 길을 쉼없이 걸어가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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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저는 스포츠 경기를 좋아합니다. 예전에는 몸으로 직접 하는 것을 좋아했지만 이제는 체력도 안 되고 또 여건도 되지 않아서 보는 것으로 만족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응원하는 팀이 생겼습니다.
며칠 전에도 응원하는 팀의 경기를 보고 있었습니다. 여유 있게 이기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막판에 실수가 계속 터져 나오면서 역전되어 지고 말았습니다. 너무 속상하고 화가 났습니다. 그냥 신경질적으로 텔레비전 전원을 껐습니다.
원래 어떤 경기든 승자와 패자가 존재하기 마련입니다. 따라서 이길 수도 있고 반대로 질 수도 있는 것입니다. 졌다고 해서 신경질을 내는 것은 무조건 이겨야 한다는 나의 욕심대로 흘러가야 한다는 이기심에서 나온 것이 아닐까요?
자기 뜻대로 되기를 바라는 생각을 버리지 못하면 불평불만을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자기 뜻을 내려놓으면 삶 자체를 즐길 수가 있습니다. 자기 뜻을 내려놓고 주님의 뜻을 따르면 세상의 눈으로는 어렵고 힘든 삶처럼 보이지만, 분명히 의미 있고 보람 있는 삶이 될 수 있습니다. 참으로 만족할 수 있는 삶이 됩니다.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를 불러서 모든 마귀를 쫓아내고 질병을 고치는 힘과 권한을 주십니다. 여기까지는 당연히 그렇게 해줘야 할 것 같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뒤이어 나오는 주님의 말씀은 조금 고개를 갸웃거리게 합니다. 글쎄 아무것도 가져가지 말라고 합니다.
조그마한 유혹에도 금방 흔들리는 제자들이 아닙니까? 제자들이 예수님 없이 처음으로 세상에 기쁜 소식을 전하러 나가니까 부족함 없이 챙겨줘야 할 것 같지 않습니까? 그러나 아무것도 가져가지 말고, 오로지 주님께서 주신 권한만을 간직할 것을 명하십니다.
세상의 관점이 담겨 있는 자기 뜻을 내려놓고 대신 주님의 뜻을 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도 있어야 하고 저것도 있어야 할 것 같지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오로지 주님께서 주시는 권한만 있으면 충분하다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이를 직접 체험하게 됩니다. 이 마을 저 마을 돌아다니며 어디에서든 복음을 전하고 병을 고쳐 줄 수 있었습니다. 성공적인 전교 여행을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 세상을 사는 우리는 많은 것이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주님께 얼마나 많은 청원 기도를 바치고 있습니까? 그런데 정작 가장 필요한 주님의 뜻을 품을 수 있는 마음은 청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저 세속적이고 물질적인 것만 청하면서, 점차 주님을 내 삶에서 제외합니다.
만족의 삶이 아닌, 불평불만의 삶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의미 있고 보람 있는 삶이 아닌, 어렵고 힘든 삶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진정으로 행복할 수 있는 만족의 삶은 주님의 뜻을 품을 수 있을 때만 가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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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 안에서의 감사>
저는 오랫동안 비염으로 고생하고 있습니다.
한 번은 이 비염으로 인해 숨을 쉬기도 힘들 정도가 되었습니다. 여기에 코로나 팬데믹으로 인해 마스크까지 써야 하니 미칠 지경이었지요.
그때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코만 뻥 뚫리면 정말로 행복할 텐데….’
이렇게 코가 꽉 막힌 날은 1년 중에 며칠 되지 않기에 위와 같은 생각을 자주 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평소에는 잘 모르다가 코가 막혔을 때 비로소 코의 뚫림이 얼마나 행복한지를 깨닫게 됩니다.
일상 안에 행복한 일이 전혀 없을까요? 아닙니다. 행복해서 감사할 일이 너무 많은데 이를 보지 않고 있을 때가 많습니다.
전신 마비로 유일하게 눈꺼풀만 움직일 수 있어서 눈의 깜빡거림으로 ‘잠수종과 나비’라는 책을 쓴 장 도미니코 보비는 말합니다.
“끊임없이 입속에 과다하게 고이다 못해 입 밖으로 흘러내리는 침을 정상적으로 삼킬 수만 있다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 된 기분일 것 같다.”
누군가에게는 침을 삼키는 것도 행복의 이유가 됩니다.
평범한 일상의 반복이 가장 행복한 사람일 수 있습니다. 따라서 불행보다는 행복의 이유를 찾아야 합니다. 감사할 일이 너무나 많아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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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근본에 충실하라>
사람들은 자기의 기대와 바람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위해서 온갖 노력을 합니다. 그러나 때로는 수고와 땀을 흘리지 않은 채 좋은 열매만을 기다릴 때도 있습니다. 그것이 잘못인 줄을 알면서도 마음을 다잡지 못할 때가 많아 큰일입니다. “봄에 씨 뿌리지 않으면 가을에 거둘 것이 없습니다.” 당연한 이치입니다. 그럼에도 자신은 예외인 것처럼 생각합니다.
앉아서 찾아오기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처럼 힘들고 어려운 사람들을 찾아 나서야 한다는 것을 잊고 살아갑니다. 가정을 방문하여 기도해 드리고 사업장을 방문하여 격려해 드려야겠다는 다짐을 하면서도 손발이 움직이지 않습니다. 지나는 길에 들러 생색만 내고는 그만입니다. 환자들을 돌보고 봉성체를 해 드리는 것을 일상으로 생각해야 하는데 그저 미사 봉헌하는 것으로 하루의 의무를 다한 것처럼 지낼 때가 많습니다. 한 사람, 한 사람 만나면 삶이 풍요로워지고 그 안에서 주님의 손길을 느끼면서도 정작 그런 기회를 자주 마련하지 못하는 게으름을 부끄러워합니다. 복음을 전하는데 코로나19가 핑계가 될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파견하시면서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고 병자들을 고쳐주라.”고 하셨습니다. 사실 하느님 나라의 선포는 우리의 사명입니다. 그런데 그 나라는 지금 여기서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주님의 사랑을 사는 곳이 하느님의 나라요, 사랑이 없으면 지옥입니다. 그리고 오그라든 마음을 주님의 마음으로 회복하도록 하는 것이 고치는 일입니다. 그러나 그 소명을 잊고 세상 것에 더 집착하고 마음을 빼앗길 때가 많습니다. 천상의 축복보다는 현세적인 축복에 목을 매는 것이 현실입니다. 천상은 나중의 일이니 지금 즐기고 인정받고 싶습니다. 가끔은 이렇게 하늘의 문이 이 지상에서 열린다는 것을 잊고 삽니다.
“길을 떠날 때에 아무것도 가져가지 마라. 지팡이도 여행 보따리도 빵도 돈도 여벌옷도 지니지 마라”(루카 9,3).하시면서 한 눈 팔지 말 것을 신신당부하신 주님의 말씀을 일깨워야 하는 오늘입니다.
근본을 얻으면 모든 것을 얻은 것입니다. 그러나 근본을 잃으면 아무리 많은 것을 차지했다 하더라도 그것은 소용없는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먹을 것, 마실 것, 입을 것을 걱정하지 말라 하시며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아라. 그러면 이 모든 것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마태 6,33). 하고 약속해 주셨습니다. 우리가 믿고 의지할 분은 오로지 하느님뿐임을 잊지 않아야 하겠습니다. 세상 것에 의지하지 않고 하느님을 선택하는 순간들에 기쁨이 넘쳐나길 기도합니다. 우리가 세상 것에 의지하는 동안 하느님의 힘의 가능성을 상실하게 된다는 사실을 잊지 않기를 바랍니다.
약속을 믿고 그대로 하는 것이 신앙입니다. 그리고 세상을 이기는 힘이 신앙에 있습니다. 믿음에 따르는 실천과 활동을 위해 수고와 땀을 아끼지 않는 오늘이기를 바랍니다. 누구든 만나십시오. 우리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외면하지 마십시오. 지금은 사랑할 때입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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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주님 중심의 본질적 삶>
-회개와 감사, 파견과 선포, 환대와 평화-
우리는 주님의 제자들이자 사도들입니다. 주님 중심의 본질적 삶은 바로 주님의 제자로서, 사도로서 충실히 사는 삶을 의미합니다. 주님이 바로 그 삶의 목표가, 방향이, 중심이, 의미가 된 삶입니다. 새벽 교황님 홈페이지를 여는 순간 두 기사 제목이 한눈에 들어왔습니다.
“하느님 백성에 가까이함이 바로 우리를 형성한다.”
“십자가 안에서, 하느님의 자비는 인간의 모든 측면을 껴안는다.”
두 말마디 모두 교황님 말씀입니다. 참으로 이웃과의 가까이 하는 사랑이 우리를 주님을 닮은 삶으로 형성해간다는 말씀이며, 주님의 십자가 안에서 우리는 모두 받아들여지며 참으로 치유되고 온전해 진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니 십자가의 파스카 주님을 바라보면서 늘 주님의 제자이자 사도로써 우리의 신원을 새롭게 확인해야 하겠습니다. 과연 주님의 제자이자 사도로써 주님 중심의 본질적 삶은 무엇일까요?
첫째, 회개와 감사의 삶입니다.
바로 제1독서 에즈라기는 에즈라 예언자의 기도입니다. 에즈라의 진솔한 기도가 심금을 울립니다. 기도의 모범을 보여줍니다. 바로 주님 앞에서 회개와 감사의 기도를 통해 참나를 회복하는 것입니다. 이런 회개와 감사의 기도는 삶으로 그대로 연장되기 마련입니다. 바빌론 유배에서 풀려나 귀환하여 예루살렘에 성전을 짓게 된 에즈라가 백성을 대표하여 무릎을 꿇고 두 손을 펼쳐 주 하느님께 말씀드리는 기도하는 모습이 인상적입니다.
“저의 하느님, 너무나 부끄럽고 수치스러워서, 저의 하느님, 당신께 제 얼굴을 들 수가 없습니다. 저희 죄악은 머리 위로 불어났고, 저희 잘못은 하늘까지 커졌습니다. 저희 조상 때부터 이날까지 저희는 큰 잘못을 저지르며 살아왔습니다.”
그대로 작금의 우리 현실을 빗댄 기도처럼 느껴집니다. 예나 지금이나 죄악이 만연된 세상이요 죄악에 중독되어 이의 심각성을 모르고 살아가는 우리들입니다. 참된 진짜 회개가 절박한 오늘의 시점입니다. 회개로 깨끗해진 마음의 눈에 그대로 드러나는 하느님 베풀어 주신 감사의 현실입니다.
“주 하느님께서 은혜를 내리시어, 저희에게 생존자를 남겨 주시고, 당신의 거룩한 곳에 저희를 위하여 터전을 마련해 주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저희 눈을 비추시고, 종살이하는 저희를 조금이나마 되살려 주셨습니다. 정녕 저희는 주님의 종입니다.”
에즈라의 진솔하고 겸손한 기도가 참 감동적이고 아름답습니다. 주님의 종으로서 회개와 감사의 삶에 충실해야 할 우리의 신원을 새롭게 확인하게 됩니다.
둘째, 파견과 선포의 삶입니다.
우리 모두 예수님처럼 세상에 파견되었고 바로 이것이 우리의 존재이유입니다. 결코 무의미한 허무한 존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의 제자들처럼 날마다 파견되어 복음 선포의 삶을 살아가는 우리들입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모든 마귀를 쫓아내고 질병을 고치는 힘과 권한을 주시고 파견하십니다. 목적은 둘입니다. 하느님 나라의 선포와 질병의 치유입니다.
“길을 떠날 때에 아무것도 가져가지 마라. 지팡이도 여행 보따리도 빵도 돈도 여벌 옷도 지니지 마라.”
최소한도의 소유로 탐욕을 떨쳐내고 모든 것은 하느님 자비의 섭리에 맡기고 복음 선포와 치유의 본질적 삶에 충실하라는 것입니다. 소유가 아닌 존재에 충실한 삶입니다. 소유의 짐으로 삶이 비대해지면 복음 선포의 동력은 떨어지기 마련입니다. 그리하여 제자들은 어디에서나 복음을 전하고 병을 고쳐줍니다.
우리는 여기서 중요한 진리를 깨닫습니다. 복음 말씀과 병의 치유입니다. 말씀은 살아있고 힘이 있습니다. 영육의 치유에 복음 말씀이 결정적임을 보여줍니다. 하느님 말씀은 말 그대로 식食이자 약藥입니다. 근원적 영육의 건강과 치유에 말씀의 생활화가 얼마나 본질적인지 깨닫습니다. 말씀은 인간의 본질입니다. 복음 말씀과 떨어져 허무와 무지 속에 살아가기에 죄도 병도 많은 세상같습니다.
셋째, 환대와 평화의 삶입니다.
제자들이 무소유로 복음 선포에 전념할 수 있는 배경을 알아야 합니다. 당시 믿는 이들은 물론 근동의 아름다운 풍속인 환대가 있었기에 가능했습니다. 이런 환대는 우리 옛 시골집들의 아름다운 풍속이기도 했습니다. 바로 이런 손님들을 위해 웬만한 집들은 사랑방(舍廊房; 한국의 전통주택에서 가부장의 생활공간이자 학문과 예술로 마음을 닦아 맑게 하고, 손님을 접대하며 묵객墨客들이 모여 담소하거나 취미를 즐기던 공간)이 마련되어 있었습니다.
“어떤 집에 들어가거든 그곳을 떠날 때까지 거기에 머물러라. 사람들이 너희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그 고을을 떠날 때에 그들에게 보이는 증거로 너희 발에서 먼지를 털어 버려라.”
제자들뿐 아니라 사람 환대는 그대로 주님을 환대하는 것이니 냉대는 얼마나 큰 죄고 어리석은 일인지 깨닫습니다. 참으로 이웃을 환대할 때 주님은 평화의 축복을 주십니다. 참으로 곳곳에 산재한 신자들의 환대가 있었기에 제자들은 복음 선포와 병의 치유활동에 전념할 수 있었고 환대한 집들에 평화를 선물할 수 있었습니다.
이제는 아파트집들이 주류라 환대의 전통은 거의 사라졌지만 정주 수도원인 여기 요셉수도원만은 환대의 수도전통을 그대로 잇고 있습니다. 환대와 더불어 그리스도의 평화를 선물할 수 있다면 하느님 나라의 복음 선포와 병의 치유는 저절로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러니 환대의 제자이자 사도인 우리들은 평화의 사람이자 힐링(치유)의 사람임을 깨닫습니다.
참으로 각자 파견받은 삶의 자리에서 주님의 제자와 사도답게. 주님의 종답게 사는 일이 절실한 시절입니다. 바로 한결같이 회개와 감사. 파견과 선포, 환대와 평화의 본질적 삶에 충실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우리 모두 주님의 제자와 사도로 항구할 수 은총과 힘을 주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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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알타반의 말씀 사랑♡
오늘 미사의 말씀에서는 우리를 되살려 주시는 주님을 만납니다.
"저의 하느님, 너무나 부끄럽고 수치스러워서, 저의 하느님, 당신께 제 얼굴을 들 수가 없습니다."(에즈 9,5)
제1독서에 등장하는 에즈라의 기도는 바빌론 유배가 끝난 뒤 돌아온 유배자들이 성전을 다시 지어 봉헌하고 파스카 축제를 지낸 뒤의 일입니다. 이후 예루살렘에 도착한 에즈라는 아론 가문 출신으로 모세의 율법에 능통한 학자였는데, 유다인들이 이민족들과 혼인하여 그들의 풍습과 우상을 따라간다는 말에 충격을 받아 망연자실 있다가 주님께 기도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저희 눈을 비추시고, 종살이하는 저희를 조금이나마 되살려 주셨습니다."(에즈 9,8)
"정녕 저희는 종입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 저희에게 자애를 베푸시어 저희를 되살리셔서"(에즈 9,9)
에즈라는 나라의 멸망과 유배, 귀환에 이르기까지 이스라엘 백성의 흥망성쇠의 원인을 자신들의 죄악과 잘못에서 찾습니다. 하지만 그에게 희망이 없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의 주인이신 하느님이 "되살리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온 세상을 지으시고 사람을 빚어 코에 숨을 불어넣어 주실 때부터, 하느님은 살리는 분이십니다. 죄악으로 넘어지고 죽어가는 인간을 다시 일으켜 세우는 분도 주님이시지요. 그리고 언젠가 마지막 날이 오면 당신을 믿는 모든 이들을 영원히 살게 하실 분도 주님이십니다. 한마디로 하느님은 살리고, 되살리고, 마침내 영원히 살게 하는 분이시지요.
복음에서는 되살리시는 하느님의 활동이 성자 예수님을 거쳐 제자들에게로 이어지고 있음을 보여 줍니다.
"예수님께서는 열두 제자를 불러 모으시어, 모든 마귀를 쫓아내고 질병을 고치는 힘과 권한을 주셨다. 그리고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고 병자들을 고쳐 주라고 보내시며"(루카 9,1-2)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에게 당신의 능력을 나눠 주시고는 세상으로 보내십니다. 구마와 치유, 하느님 나라 선포 등등, 그들에게 원래부터 그런 능력이 있었을 리 만무하지만, 주님께서 권한을 부여하시고 파견하시니 믿고 가야 합니다.
"아무것도 가져가지 마라. ... 머물러라. ... 떠날 때에 먼지를 털어 버려라."(루카 9,3-5)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주시는 지침은 소유와 머무름, 떠남에 대한 것들입니다. 구마나 치유, 선포 등 내용에 대한 것은 애초부터 그들의 것이 아니었으니 필요한 순간에 그분께서 친히 채워 주실 겁니다.
이제 제자들에게 필요한 건 믿음입니다. 교통이나 지역 정비가 잘 되어 있지 않은 시대에 길을 떠나면서 식량과 옷, 생필품과 무기 등을 챙기지 않는 것은 안전은 물론 목숨까지도 내어맡기는 결단입니다. 미지의 고장에서 신세지거나 떠나는 일조차 일면식 없던 사람들의 호의에 맡겨야 하니, 그 호의나 배척 뒤에 자리한 하느님의 섭리를 철저히 믿을 수밖에 없습니다.
"제자들은 떠나가서 이 마을 저 마을 돌아다니며, 어디에서나 복음을 전하고 병을 고쳐 주었다."(루카 9,6)
제자들은 자기들을 파견하신 예수님을 믿고 되살리는 일에 전념합니다. 그들이 전하는 말씀이 어둠에 갇힌 이들을 희망으로 되살리고, 구마와 치유로써 악령과 질병에서 그들을 되살립니다. 제자들을 통해 드러나는 하느님 나라의 현존이 억울하고 지치고 절망스런 영혼들을 되살립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생명은 단 한 번의 단발적 사건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눈조차 떼지 않으시고 지켜 주시는 그분은 우리의 생명이 죄와 질병과 두려움으로 스러져갈 때마다 지치지 않고 반복해서 되살려 주십니다.
우리의 어둠이 아무리 짙고 절망이 커도 우리를 결코 잊지 않으시는 주님께서 반드시 다시 일으키러 오실 것이니, 언제라도 온 힘을 다해 그 손을 붙잡을 수 있도록 깨어 기다려야 합니다. 그분이야말로 우리에게 유일한 생명, 영원한 생명이십니다. 아멘.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복음 환호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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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youtu.be/V7YCREpEJ_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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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어디에서나 복음을 전하고 병을 고쳐 주었다."(루카 9, 6)
새로운
날이다.
돌보시는
주님께
드리지 못할
것은 없다.
사람과
함께 하시는
복음의
주님이시다.
우리가
아프면
예수님께서도
아프시다.
끝이 없으신
지극한
사랑이다.
못난
우리들의
마음과 몸을
고쳐주신다.
묶이고 갇힌
우리들 삶을
복음으로
활짝
열어주신다.
치유없이
우리는
성장하지
않는다.
한계와 결핍이
주님의 치유를
만나는 은총이
된다.
주님의 치유는
사랑이다.
참된 사랑으로
성장하는 것이다.
올바른 삶으로
우리를 이끄신다.
사람들과
함께 하시며
사람들을
돌보시는
복음이다.
고통을
치유하는
복음을 우리는
오늘도 만난다.
복음은
새로운 차원의
하느님 사랑을
만나게 한다.
회복시켜
살게하시는
하느님이시다.
복음 앞에
우리의 상처와
아픔 그리고
연약함을
봉헌하는
새로운 날이다.
온전히
우리를
사랑하시는
주님을 나는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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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도회 왜관 수도원 윤원진 요한 마리아 비안네 신부님]
<서소문 밖 네거리 순교성지 영성특강>
1회 '한국 천주교회의 시작'
https://youtu.be/6_E_QdrFM6g
2회 '김대건 신부님의 스승들'
https://youtu.be/T24ZOMUoac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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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합니다■
[이름,본명,지역(본당),축일,연령,연락처]를 문자로 보내주세요.
010-3284-9295 | 카톡ID jijive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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