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초중반까지만해도 미국야구 메이저리그는 백인들만의 야구였고, 다른 인종들은 딴 리그에서(ex 니그로 리그) 경기하는게 상식이었습니다.
(영화 42 트레일러의 한 장면)
심지어 메이저리그 관중석도 "White"와 "Colored"가 구분되어 있었던 1940년대 미국
이렇게 보수적이었던 미국 야구계는,
MLB 초대 커미셔너이자 극악스러운 인종차별주의자로 악명높았던 케네소 랜디스가 죽으면서 서서히 풀리기 시작했다.
이에 브루클린 다저스(현 LA 다저스) 단장 브랜치 리키는 니그로 리그에서 잘나가는 한 흑인 선수를 데려올 계획을 짰는데,
그 선수가 바로 오늘 알아볼 이 글의 주인공, "재키 로빈슨(Jackie Robinson)"이었습니다.
재키로빈슨은 UCLA 대학 육상부 출신으로 운동에 다재다능을 보였습니다. 2차 세계대전에는 장교로 복무해 참전했지만, 역시 군대내 인종차별에 맞서다가 면직당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2차 세계대전 종전후 야구계로 뛰어들었습니다.
1945년, 재키 로빈슨은 니그로리그 소속인 캔자스시티 모나크스에서 뛰고 있었습니다.
위에서 언급했던거와 같이 다저스 단장 브랜치 리키가 불러 1947년 메이저리그에 데뷔하게 되는데, 초기에 그는 엄청난 인종차별들과 시련에 부딪쳤습니다.
로빈슨은 처음 팀에 입단하자마자, 검둥이(nigger)와 뛰지 않겠다는 같은팀 백인 동료들의 항의에 부딪쳤고,
레드넥들의 협박과
심지어 남부 주에서 연습 경기를 진행할땐 팀 전체가 경기 거부를 당하기도 했습니다.(대표적으로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의 에노스 슬로터를 주축으로 대놓고 보이콧까지 일어났던적이 있었습니다)
로빈슨은 이러한 굴욕들을 속으로 삭히고 참을수 밖에 없었지만
팀 기강을 다잡아주는 브루클린 다저스의 감독, 레오 듀로셔와
백인이었지만 열린 마음을 가지고 있었던 같은팀 동류 유격수 피 위 리즈 (Pee Wee Reese) 같은 동료들이 있었기에, 로빈슨은 버틸 수 있었습니다.
중간엔 필라델피아 감독 겸 선수였던 밴 채프먼이란 백인에겐 대놓고 인종차별 당한거 사과를 받아내기도 했습니다(영화 42에 상세히 나옵니다)
1947년 메이저리그 흑인 최초로 MLB 신인상(Rookie of the Year Award)을 탔고
1955년 월드시리즈에서 뉴욕 양키스 상대로 우승해 우승 반지까지 챙기게 되었습니다!
이듬해 1956년 시즌 끝으로 재키 로빈슨은 선수생활 은퇴합니다.
은퇴이후, 사업을하면서 흑인 인권운동에 뛰어들었고, 그 유명한 마틴 루터 킹 주니어 목사와도 교분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지병인 당뇨병으로 인해 1972년 사망하게 됩니다. (1962년 명예의전당 헌액)
이후 다저스 구단은 재키 로빈슨의 등번호 42번을 영구 결번으로 지정했고, 1997년 4월 15일 메이저리그 사무국에서 전 구단을 통틀어 42번을 영구결번으로 다시 지정했으며,
매년마다 4월 15일에 "재키 로빈슨 데이(Jackie Robinson Day)"를 기념해 이 날만큼은 메이저리그 선수들 전원 등번호 42번만 입고 경기합니다.
첫댓글 숫자보고 좀 더 찾아보니 젠슨이 진짜 아깝게 진듯요. ERA+129에 bWAR 기준 로빈슨이 4.1 젠슨이 5.1, fWAR 기준으로 로빈슨 3.5 젠슨 4.1 클래식이면 다승 2위에 승률 1위니 말할 것도 없고요.
신인왕 본격 수상 시작이 1947부터인거 생각해보면 더 아까울듯.
다저스의 강속구 투수 젠슨(포수출신으로 투수로 전업) 얘기인가보군요.
@Wehrmacht 아념. 님이 올린 글 신인왕 2위한 선수요
클래식으로는 아쉬운게 ERA와 삼진이네요. 그래도 대체로 탑10급.. 반면 재키 로빈슨도 도루 1위에 나머지 성적이 대체로 탑10급이긴 하니 그리 달리진 않고..
제 생각엔 팀의 문제가 큰거 같네요. 그 해 브루클린 다저스는 1위 뉴욕 자이언츠는 4위.. 요즘도 MVP는 우승팀 후광이 있는데 그 시절 팀 우승 못시켰음 어쩔 수 없죠(..)
@Rhox 아하ㅎ
사실 하프 인디언 짐 소프와 유대인 최고 야구스타 행크 그린버그도 있긴 하지만 센세이션을 일으킨 인물로 재키 로빈슨은 정말 중요하다고 하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