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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3장 진로선택 (進路選擇)
백동일이 주루로 들어갔을 때, 제일 먼저 그의 시야에 들어온 것은 주루에 꽉 들어찬 많은 손님들이었다. 대왕루가 뜻하지 않은 일로 문을 닫게 되어서 이쪽으로 사람들이 많이 몰린 탓이었다.
백동일은 날카로운 눈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리다 이내 자신이 찾던 사람을 발견했다.
그자는 화려한 장포를 걸치고 만면에 환한 웃음을 지은 채 몇며 ㅊ사람들에 둘러싸여 있었다.
백동일은 한동안 그 자리에 우뚝 선 채 그자를 묵묵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자는 구렛나루를 기르고 얼굴이 유난히 붉었는데, 양쪽 귀의 크기가 심하게 차이가 나는 짝귀였다.
짝귀의 사나이는 왼쪽 뺨에 칼자국이 나 있는 장한과 무언가 이야기를 하고 있다가 백동일의 시선을 느낀 듯 슬쩍 고개를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치자 허공에서 불똥이 튀는 듯 했다.
짝귀의 사나이는 잠시 눈썹을 찌추리더니 이내 입가에 의미를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깐만 기다리게."
그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백동일에게로 향했다. 백동일은 그들이 모두 네 명이며, 하나같이 호락호락한 인물들이 아님을 알아보았다.
하나 그는 그들에게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어차피 그가 만나고자 한 인물은 한 사람뿐이었으며, 그 사람은 자신을 향해 성큼성큼 다가오고 잇었던 것이다.
"이게 누군가? 장성에서 날리던 절명검이 아닌신가?"
백동일의 얼굴은 철갑을 씌운 듯 무표정했다.
"팔 년 만인가?"
"칠 년 만이지. 장성 근처의 어하보(魚河潽)에서 만난 적이 있었지 않나?"
그렇군. 자네가 이 근처에 정착했다는 말을 들었네."
짝귀의 사나이는 히죽 웃었다.
"나도 자네 소식을 들었지. 초가보에 초빙되어 귀한 대접을 받고 있다고ㅓ 말일세."
백동일은 조금도 표정이 변하지 않은 채 짝귀의 사나이의 얼굴을 빤히 주시했다.
"장사가 잘되나 보군."
짝귀의 사나이는 시큰둥하게 웃엇다.
"그냥 그럭저럭 굴러가고 있네. 오늘은 여기까지 어인 일인가?"
회포를 풀고 싶다면 내가 근사하게 한 상 차려 주지."
"쓸데없이 생색내길 좋아하는 그 버릇은 예전과 조금도 달라지지 않앗군. 내가 그런 걸 좋아하지 않는 줄 알면서괜히 해 보는 말이 아닌가?"
짝귀의 사나이는 조금도 민망해하거나 무안해하는 표정을 짓지 않고 여전히 입가에 웃음을 담았다.
"자네의 그 톡 쏘기 좋아하는 버릇도 여전하군. 그런데 진짜 여기에는 무슨 일인가? 갑자기 옛날의 동문(同門)이 그리워서 찾아 왔을 리는 없을 텐데......"
백동일의 입가에 냉소가 떠올랐다.
"동문? 나한테 동문 같은 건 없어. 있다면 죽이고 싶은 놈들뿐이지."
짝귀의 사나이는 백동일의 살기 짙은 말에 손을 내저었다.
"나한테까지 그렇게 인상 쓸건 없네. 나도 자네와 마찬가지로 종남파 따위는 진즉에 잊고 지내는 사람이니 말일세. 도대체 문파의 명예나 의리 따위에 목숨을 내거는 놈들은 어떠너 부류들인지 모르겠단 말이야."
"자네의 그런 점이 마음에 들었지. 자네는 나와 비슷한 족속일세."
"흐흐...... 자네의 입에서 나온 말이니 칭찬으로 들어야겠지만 왠지 귀가 따가운걸. 그런데 나를 칭찬하려고 일부러 여기까지 들렀나?"
백동일은 돌연 허리춤에 매고 있던 장검 중 하나를 풀기 시작했다. 짝귀의 사나이가 흠칫 놀라 보니 백동일은 자기의 장검 외에 또 다른 검 하나를 더 차고 있었다. 그것은 시중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철검(鐵劍)이었다.
백동일은 철검을 풀어 그에게 던져 주었다.
"받게."
짝귀의 사나이의 안색이 처음으로 변했다.
"왜 이러나?"
"검을 잡고 자세를 취하게."
짝귀의 사나이는 백동일의 돌연한 행동에 당혹감을 느낀 듯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정말 성미 한번 고약하군. 그래도 예전에는 형제처럼 지내던 사이인데 몇 년 만에 불쑥 찾아와서는 대뜸 싸우자고? 사람을 하도 죽여서 이제는 아는 사람만 찾아다니며 살인을 하려는 건가?"
상대가 무어라 하건 말건 백동일은 표정 하나 변하지 않은 채 자신의 장검을 움켜잡았다.
"일초(一招)면 되네."
장내의 공기가 심상치 않게 돌아가자 조금 전에 짝귀의 사나이와 함께 이야기를 나누던 네 명의 장한들이 어슬렁거리며 다가왔다.
짝귀의 사나이는 손을 내밀어 그들을 제지시킨 후 백동일을 향해 우뚝 섰다.
"좋아. 모처럼 한 수 겨뤄 보지. 절명검의 솜씨가 얼마나 대단한지 어디 볼까?"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백동일은 출수를 했다.
팟!
중인들의 눈에는 그저 때 아닌 섬광 한 줄기가 번뜩거리는 것으로만 보일 뿐이었다. 그러나 안목이 있는 고수들은 그것이 좀처럼 보기 힘든 무시무시한 일검임을 깨닫고 안색이 변했다.
땅!
주루 안이 뒤흔들릴 정도로 격렬한 마찰음이 터지며 섬광은 이내 씻은 듯이 사라져 버렸다. 중인들이 놀라 보니 짝귀의 사나이는 처음의 자세에서 하나 발쯤 뒤로 몰러나 잇었다. 주중에 들고 잇던 철검은 검신이 통째로 어딘가로 사라져 버렸고, 손잡이 부분만 남아 잇을 뿐이었다.
짝귀의 사나이의 발밑에 부서진 검 조각이 수북하게 쌓여 있었다.
짝귀의 사나이는 억지로 웃었다.
"정말 대단하군, 한 번만 더 공격해 들어왔다면 감당하지 못할 뻔했어."
백동일은 어느새 장검을 검집에 회수한 채 우뚝 서 있었다. 어찌 보면 그는 아무런 손도 쓰지 않았는데 짝귀의 사나이의 검만 저절로 박살 나서 흩어져 버린 것 같았다.
"많이 늘었군. 제대로 진검승부(眞劍勝負)를 했다면 만만치 않았겠어."
"이제 어떻게 된 영문인지 이야기 좀 해 주게."
"한 사람을 찾고 있는 중이야."
"그게 나인지 알아보려고 덤을 썼단 말인가?"
"그렇다네."
"찾고 잇는 자가 대단한 고수인 모양이군."
백동일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짝귀의 사나이는 호기심이 이는지 다시 물었다.
"누굴 찾고 있나?"
"일검에 삼십육방을 찌를 수 있는 자."
그 말에 짝귕의 사나이의 안색이 무겁게 굳어졌다.
"그런 자는 없네."
"있어. 내눈으로 확인했어."
짝귀의 사나이의 얼굴 근육이 부르르 떨렸다.
"그런 초식은 내가 알기로 하나밖에 없어. 그리고 누구도 그 초식을 그 경지까지 익힌 사람은 없다구. 그건 내가 누구보다도 잘 알아."
".......!
"왜 그런지 안나? 나는 그 초식을 삼십 년 동안이나 연마했단 말이야. 그런 나도 일검에 찌를 수 있는 방위는 스물네 군데가 전부일세."
짝귀의 사나이의 시선이 백동일의 얼굴에 고정되었다.
"자네는 중도에 포기했으니 나보다 떨어지겠지. 그러니 당금 천하에서 나보다 더 그 초식을 오래 연마한 사람은 없단 말이야. 이제 알겠지? 그런 사람은 없어. 자네가 잘못 본 거야."
백동일의 음성은 단호했다.
"내 눈을 의심하는 건가?"
짝귀의 사나이는 잠시 멈칫했다. 백동일은 무얼 잘못 보거나 할 사람이 아니었다. 특히 그 무공의 흔적은 절대로 잘못 볼 리가 없었다.
"그렇다면...... 무언가 다른 초식이겠지. 아무튼 그 초식을 그 경지까지 익힌 사람은 없네. 자네 사부가 되살아난다 해도 어림없는 일이야."
백동일의 안색이 갑자기 험악하게 변했다.
"그 이야긴 하지 마."
"알았어. 아무튼 내 말은 분명한 사실이야. 자네가 잘못 본 게 아니라면 그건 전혀 다른 무공의 흔적일 거야. 절대로 그 초식은 아니냐."
백동일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짝귀의 사나이는 안색을 잔뜩 찌푸린 채 백동일을 보고 잇었으나, 눈치가 빠른 사람이라면 그도 무언가 복잡한 상념에 잠겨 있다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을 것이다.
한참 후에 백동일은 다시 입을 열었다.
"자네는 삼십 년 간 그 초식을 익혔다고 했지?"
"그래, 정확히는 삼십이 년 간이야."
"그동안 자네가 실제로 그 초식에 투자한 시간은 얼마인가?"
짝귀의 사나이는 백동일이 묻는 의도를 알지 못해 어리둥절한 얼굴이 되었다.
"뭐라고?"
"삼십이 년 간 아무것도 안 하고 그 초식만 익혔을 리는 없잖은가?"
그 사람은 어dl가 없는지 피식 웃었다.
"그거야 당연한 일 아닌가?"
"그러니까 기간은 삼십이 년이지만 실제로 그동안 자네가 무공에만 전념한 시간은 그보다 훨씬 적을 거란 말이지."
"그야......"
"무공에 매진한 시기만 따지면 사오 년쯤 될까? 그 기간에서 먹고 자고 다른 일을 하는 시간을 제외하면 정확히는 반년도 채 되지 않을 거야."
"......!"
"구런데 누군가가 침식(寢食)을 거르다시피 하고 면 년 간 매진한다면 굳이 자네처럼 수십 년 간 무공을 익히지 않아도 자네를 능가할 수 있단 말이지."
짝귀의 사나이는 안색이 몇 차례 변하더니 씹어뱉듯이 퉁명스럽게 말했다.
"종남에는 그럴 만한 놈이 없어."
"그거야 모르는 일이지."
짝귀의 사나이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이제 알겠군. 자네는 모처럼 나에게 와서 시비를 걸고 싶었던 거야. 정말 나하고 한번 제대로 붙어보고 싶나?"
백동일의 얼굴에는 처음으로 미소가 떠올랐다. 냉랭하고 싸늘했으나 그래도 미소는 미소였다.
"다음에 기회가 닿으면. 오늘은 일검으로 충분해."
"그럼 그만 가 보라구. 굳이 바래다 줄 필요는 없겠지?"
"그야 당연하지."
백동일은 천천히 몸을 돌려 주루를 벗어났다.
짝귀의 사나이는 그때까지도 인상을 찡그린 채 그의 뒷모습을 노려보고 있었다.
네 명의 장한들이 그에게 다가왔다.
"저자는 누구요? 거만하기 이를 데 없던데 우리가 손을 봐줄 걸 그랬나?"
얼굴에 칼자국이 있는 장한이 말하자 짝귀의 사나이는 냉랭하게 쏘아붙였다.
"자네들 실력으론 어림없지.""
""저자가 누군데? 지옥(地獄)의 사신(死神)이라도 되는 거요?"
"비슷하지. 아무튼 자네들도 웬만하면 저자와 시비를 벌이지 말라구."
칼자국 장한이 두 눈을 날카롭게 빛냈다.
"그 말을 들으니 더욱 호기심이 생기는군. 다음에 만나면 꼭 손을 섞어 봐야겠소."
"마음대로 하게. 하지만 그는 나처럼 손에 사정을 봐주는 사람이 아니니 일단 손을 쓰게 되면 목숨을 내놓을 각오를 해야할 걸세."
"이거 으스스한데......"
장한들은 서로 마주보고 웃었다. 짝귀의 사나이는 그들이 결국에는 백동일에게 시비를 걸다 혼쭐이 날 것이라는 생각에 혼자 씁쓸하게 웃고 말았다.
그는 한동안 허공을 응시하다가 혼잣말처럼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삼십육방이라...... 천하무궁을 십이 성 익힌 자가 있을 리 없지. 이번에는 백동일이 잘못 보았을 거야."
짝귀의 사나이, 이미 오래 전에 종남파르 떠났던 노해광은 자기 자신에게 다짐하듯 몇 번이고 같은 말을 되뇌고 있었다.
* * *
"그녀의 말을 어떻게 생각하느냐?"
진산월의 물음에 동중산은 신중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일단 거짓은 아닌 듯싶습니다. 검보가 초가보와 사돈을 맺기 위해 하나뿐인 여식을 초가보로 보낸다는 소문은 저도 들었습니다.
"검보의 여식이라...... 정말 못 말릴 아가씨로군."
"검보에서 방백검을 잃어버렸고, 해천팔검이 그것을 되찾기 위해 이 일대에 나타난 것도 사실인 것 같습니다. 문제는 빙백검을 훔쳐간 자들이 누구이며 해천팔검이 어디로 사라졌느냐 하는 것인데, 지금으로썬 어느 것도 짐작조차 할 수 없군요."
쌍쌍인랑이 그여를 제거하려고 했던 이유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느냐?"
"제자가 판단하기로는 두 가지 경우 중 하나 같습니다. 첫째는 그들이 검보에 개인적인 원한을 가지고 있을 경우이고, 다른 하나는 그들이 빙백검을 훔친 흉수와 관련이 있을 경우입니다. 만약 두 번째 경우라면 해천맢검이 실종된 이유도 자연스럽게 설명될 수 있을 겁니다."
진산월은 눈빛이 번쩍 빛났다.
"두 번째 경우에 대해서 좀더 말해 보아라."
"빙백검을 훔친 흉수가 사건을 은폐시키려 했다면 자신의 행방을 추적해 오는 해천팔검의 존재가 껄끄러웠을 겁니다. 그러면 해천팔검을 제거함과 아울러 그들과 함께 있었던 그녀에 대해서도 무언가 조치를 취하려 했겠지요."
"네 말대로라면 흉수는 혼자가 아니라 적지 않은 인원을 가진 조직이란 거로군."
"그건 어디까지나 저의 짐작이므로 속단할 수는 없습니다. 쌍쌍인라의 출현은 그 사건과는 전혀 별개의 일일 가능성도 충분히 있으니 말입니다."
진산월은 잠시 생각에 잠겨 있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취미사의 혈겁은 겉으로 드러난 것보다는 훨씬 더 복잡하고 치밀한 무언가가 숨겨져 있음이 분명하다. 지금의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본산을 되찾는 일이니 아무래도 그 일은 더 깊이 간여치 않는 게, 좋을 것 같구나."
"제자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진산월은 다시 물엇다.
"그녀에 대해서는 어떻게 했으면 좋겠느냐?"
동중산은 외눈을 번뜩이며 진산월을 응시하더니 무거운 음성으로 말했다.
"제자가 판단하기에 우리에게는 상책(上策)과 중책(中策), 그리고 하책(下策)의 세 가지 길이 있다고 봅니다."
"상책이 무엇이냐?"
"그녀가 검보의 여식이라는 사실을 최대한 이용하는 겁니다. 검보의 보주에게 은밀히 사람을 보내 그녀가 우리와 함께 있음을 알린다면 검보와 초가보의 연맹을 막을 수 있을뿐더러 우리에게 유력한 조력자(助力者)가 생길 수도 있습니다."
"......!"
"그렇게 된다면 제가 일전에 말씀드렸던 위험한 방법을 쓰지 않고도 본산을 쉽게 되찾을 수 잇을지 모릅니다. 우리의 피해를 최소화하고 그녀도 무사히 집으로 되돌아갈 수 잇으므로 지금 선탹할 수 잇는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됩니다."
"중책은?"
"그녀를 이대로 되돌려보내는 겁니다. 어차피 그녀와 우리는 아무런 상과닝 없는 사이이므로 그녀로 인해 번거로운 일을 겪지 않아도 되고, 앞으로의 계획도 변함없이 추진할 수 잇습니다. 이득도 없지만 손실도 없는 방법입니다."
진산월은 세 번째 질문을 던졌다.
"하책은 무엇이냐?"
"검보에 연락을 하거나 그녀를 돌려보내지 않고 지금처럼 그냥 계속 데리고 다니는 것입니다. 비록 그녀를 당장 살수들의 위협에서 보호할 수는 있지만 대신에 자칫 우리가 그들의 표적이 될 위험이 있을뿐더러 그녀로 인해 본산을 되찾으려는 우리의 계획이 차질을 빚을 우려가 높습니다. 한마디로 우리에게 이득은 전혀 없고 무거운 짐만 지워지게 되는 겁니다. 이 방법은 무조건 피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진산월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엿다. 그런 다음 별다른 고민도 하지 않고 선택을 했다.
"세 번째 길로 가자."
동중산은 가습속에서 우러나오는 한슴을 내쉬었다. 에상은 하고 있었지만, 진산월은 역시 가장 험준한 길을 선택했다. 적지 않은 세월이 흘렀고, 그토록 모진 고생을했햇음에도 장문인의 심성(심성)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던 것이다.
진산월은 자신이 그러한 선택을 한 것에 대해 구구절절한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동중산 또한 그에게 선택을 재고해 달라는 말 같은 건 아예 하지 않았다. 다만 그는 공손하게 머리를숙였을 뿐이다.
"알겠습니다."
* * *
서문연상은 구석진 자리에 앉아서 주위를 힐끔거리고 있었다.
그녀에게 특별히 말을 걸어오는 사람은 없었다. 단지 조금 전에 보았던 소년이 문득 고개를 돌렸다가 그녀와 시선이 마주치자얼굴이 빨갛게 상기된 채 허겁지겁 시선을 돌리고 있을 뿐이었다.
그녀는 한숨이 흘러 나왔다.
‘내가 어쩌다 이런 신세가 됐지? 이제는 저런 철부지까지 나를 넘보려 하다니...... 그냥 집으로 돌아갈까?’
그녀는 이내 도리질을 했다.
‘아니야. 여기서 돌아갔다가는 정말로 옴짝달싹못하고 시집을 가게 될지도 몰라. 생전 얼굴도 못 본 놈이랑 결혼하느니 차라리 여기서 지내는 게 더 나아.’
그녀는 머리속이 복잡해서 터질 것만 같았다.
‘그나저나 종남파는 이미 오래 전에 멸문(滅門)해 버린 줄 알았는데 정말 뜻밖이네. 저런 실력을 가지고 있으면서 왜 그렇게 허만\ㅇ한 꼴을 당한 거지?’
그녀는 직접 눈으로 목격했던 진산월의 무공을 떠올리고는 나직하게 진저리를 쳤다. 그전에 맨손으로 싸울 때는 그저 조금 강하다고만 생각했었는데, 단순한 나무막대 하나를 손에 쥐었을 뿐인데 그는 전혀 다른 차원의 고수가 되어 있었다.
그 나무막대가 움직이면서 벌어진 광경을 그녀는 영원히 잊지 못할 것 같았다.
‘역시할아버지 말씀은 틀리지 않앗어. 손에 귀면상이 있는 걸 알앗을 때부터 이상하더라니까.’
그녀의 귓전으로 예전에 할아버지에게 들었던 음성이 똑똑하게 되살아났다.
━ 손바닥에 귀면상을 지닌 자를 만나면 절대로 시비를 걸지 마라. 그런 자의 검이 한번 움직이면 이 할아비도 피한다고 자신할 수가 없다.
그때 그녀는 그 말을 무심결에 흘려들었는데, 그러한 귀면상을 지닌 자를 직접 만났을 뿐 아니라 그 무공까지 보게 되었으니 운이 좋다고 해야 할지 나쁘다고 해야 할지 분간이 잘 가지 않았다.
문득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그녀의 시선에 며칠 전에 만났더 ㄴ어린 소년이 들어왔다. 처음에는 괴인의 아들인 줄 알앗는데, 나중에 제자라는 말을 듣고 그녀는 몸시 뜻밖이라고 생각했다.
그토록 무시무시한 무공을 지닌 일파의 장문인의 제자가 이렇게 피죽도 못 얻어먹은 것처럼 왜소하고 볼품없는 소년이라고는 쉽게 믿어지지 않았던 것이다. 하나 아들이 아니라는 말을 듣고 안심이 되는 것도 사실이었다.
그녀느 손짓해 그를 불렀다.
"얘, 이리 와 봐."
유소응은 누군가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가 그녀가 자신을 향해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는 광경을 보았다.
"누나 기억하지?"
유소응이 고개를 끄덕이자 서문연상은 기쁜 듯 방긋 웃었다.
"이리 좀 와 봐. 누나와 얘기하자."
유소응은 가만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할 얘기 없어요."
"얘 좀 봐. 그때 누나가 말도 안 하고 그냥 가서 삐쳤구나? 사내대장부가 그런 사소한 일로 삐치면 되니? 여자가 한 일 가지고 삐치면 그건 남자도 아닌 거야."
제법 멀리서 이 말을 듣고 있던 방취아가 피식 웃었다.
"말은 잘하네. 정말 보면 볼수록 당돌한 아가씨 같지 않아요?"
그녀의 옆에 잇던 소지산이 무뚝뚝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몇 년 전의 사매를 보는 것 같군."
방취아의 이마가 하늘 높이 솟구쳤다.
"농담 말아요. 내가 저랬단 말이에요?"
소지산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방취아는 어이가 없는지 그를 잔뜩 노려보다가 손가락을로 자기 가슴을 가리켰다.
"내가 저렇게 천방지축으로 날뛰었단 말이에요? 그럴 리가 없어요. 난 정말 얌전하고 착실한 아이였어요. 그래서 장문사형이 나를 제일 귀여워했잖아요."
ㄱ,때 누군가가 그녀의 말을 받았다.
"귀여워하긴 했지. 하지만 양점하고 착실해서 그런 건 아니었다. 오히려 말괄량이에 소문난 사고뭉치였지."
방취아는 성난 얼굴로 소리가 난 곳을 쳐다보다가 이내 표정이 풀어지며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장문사형, 농담이 너무 지나쳐요."
어느새 나타났는지 진산월이 그녀의 옆으로 다가오며 입가에 모처럼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농담인지 아닌지는 네가 가슴에 손을 얹고 잘 생각해 보면 될 것이다."
그녀가 재차 무어라고 대꾸하려 할 때, 소지산이 불쑥 끼여들었다.
"그녀를 어떻게 하실 겁니까?" 진산월의 시선이 서문연상에게로 향했다.
서문연상은 그때까지도 유소을을 다독거러서 말상대라도 하려고 애를 쓰고 있었다.
"이 누나한테 정말로 너 같은 나이의 동생이 있다니까. 아니지, 못 본 지 이삼 년 됐으니까 너보다 조금 많겠구나. 아무튼 그런 동생이있어서 널 보면 꼭 그 아이를 보는 거 같아. 그러니 너도 나를 친누나처럼 생각해야 돼."
유소응이 여전히 아무런 반응이 없자 그녀는 답답한 듯 얼굴이 빨개졌다.
"무슨 아이가 이렇게 말이 없니? 이건 명령이야. 날 누나라고 불러, 빨리."
언선을 높이던 그녀는 문득 누군가가 자신에게로 다가오는 것을 느끼고 고개를 쳐들었다. 앙산하게 마른 얼굴에 홀쭉한 뺨을 지닌 진산월이 그녀의 앞에 와서 담담한 표정으로 그녀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녀는 엉거주춤하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셨어요...... "
상대가 한 문파의 장문인임을 안 이상 그를 대하는 태도가 종전과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 진산월은 돌연 멀리 떨어져 있는 방화를 불렀다.
"방화야, 이리 오너라."
방화는 찔끔거리고 있다가 주춤주춤 그에게로 다가왔다.
"부르셨습니까?"
진산월은 방화와 서문연상을 잠시 바라보다가 조용하면서도 묵직하게 가라앉은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이건 두 사람 모두에게 해당되는 이야기라서 너도 불렀다. 이제 우리가 누구인지는 알게 되었을 것이다. 또한 우리가 앞으로 무엇을 하려는지도 대충 짐작할 수 있겠지."
방화와 서문연상은 바짝 긴장된 표정으로 진산월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너희들에게는 두 가지의 선택할 길이 있다. 하나는 이대로 우리와 헤어져 각자의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고, 다른 하나는 우리와 행동거지를 같이하며 나가는 길이다. 둘 중 어느 길을 택할지 지금 결정하도록 해라.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고 있던 서문연상이 도발적으로 물었다.
"그냥 가겠다면 순순히 보내주겠어요?"
"그렇소."
"우리가 당신들의 정체를 알고 있는데도 말인가요?"
"그렇소."
진산월이 계속 짤막하게 대답하자 그녀는 바짝 약이오르는지 심술궂은 표정으로 집요하게 물었다.
"내가 이대로 쪼르르 초가보로 달려가 당신들에 대해 모두 불어도 상관없단 말이에요?"
진산월의 표정은 옂ㄴ히 담담하기만 했다.
"그건 소저가 알아서 할 일이지 우리가 관여할 일은 아니오."
그녀는 말문이 막히는지 한동안 흑백(黑白)이 분명한 눈알을 이리저리 굴리다가 다시 물었다.
"이대로 이곳에 있겠다면...... 종남파에 입문해야 하나요?"
"그럴 필요는 없소. 다만 이곳에 있는 동안은 내 말에 절대적으로 복종해야 하고, 혼자서 제멋대로 행동할 수는 없소."
"그러면 당신이 나에게 무슨 이상한 짓을 시켜도 무조건 따라야 한단 말이에요?"
그녀가 짓궂게 물었으나 진산월의음성은 한결같았다.
"그렇소. 또한 일에 따라서는 목숨을 내놓아야 할지도 모르오."
그녀의 표정이 갑자기 진지해졌다.
"결국 굉장히 어렵고 위험한 길이란 말이군요."
"그게 싫으면 쉽고 편안한 길로 가면 되오."
그녀는갑자기 인상을 찡그리더니 그녀답지 않게 가느다란 한숨을 내쉬었다.
"나는 조금 생각을 해봐야 겠어요."
진산월은 이내 방화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너는 마음을 결정했느냐?"
방화는 주저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저는 당신을 따라 가겠습니다."
진산월은 깊은 신광(神光)이 번뜩이는 눈으롤 그를 똑바로 주시했다.
"후회하지 않겠느냐?"
방화의 얼굴에 한 줄기 결연한 빛이 떠올라 있었다.
"그런일은 없을 겁니다.
"목숨이 위험할지도 모르는데 말이냐?"
"내 목숨이 중하다고 생각해 본 적은 없어요. 단 한 번이라도 내 뜻대로 살 수만 있다면 목숨 같은 건 오늘 당장 끊어져도 여한(餘恨)이 없어요."
항상 겁 많고 소심한 모습의 그에게서 단호한 음성이 흘러 나오자 모든 사람들이 뜻박이라는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진산월은 욱욱히 그의 빛나는 눈동자를 응시하고 있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럼 네게 첫번째 지시를 내리겠다."
"무엇입니까?"
"네 목숨을 소중하게 여기도록 해라."
방화의 눈자위가 한차례 실룩거렸다. 그는 우두커니 진산월을 쳐다보더니 고개를 떨구었다.
"예."
장승표가 어느새 다가와서 그의 어깨를 툭 쳤다.
"어쨌든 정식으로 일행이 되었구나. 축하한다."
동중산도 빙그레 웃으며 말을 건네 왓다.
"앞으로 잘해 보자. 어려운 일이 있으면 주저하지 말고 나에게 와라."
장승표가 눈을 부라렸다.
"동 형이 잘하는 게 뭐가 있다고? 나한테 와라. 내가 다른 건 몰라도 힘쓰는 일은 제법 하거든. 대신에 넌 그저 가끔 나하고 술 상대나 되면 된다."
"이 아이를 장 형 같은 술주정뱅이로 만들 셈이오?"
"그게 뭐 어때서? 동형이 모르는 모양인데, 술이야말로 남자를 진짜 남자답게 만드는 거라구. 이녀석도 나하고 술 몇 번만 가팅 마시면 성격도 확 달라져서 시원시원하게 변할 테니 두고 보시오."
두 사람이 자신을 사이에 두고티키격태격하자 방화는 웃을 수도 없고 울 수도 없어 어정쩡한 모습으로 서 있었다.
그때 서문연상이 특유의 앙칼진 음성으로 소리쳤다,
"나도 결정했어요."
중인들의 시선이 그녀에게로 향했다. 그녀는 사람들의 이목을 자신에게 집중시킨 게 흐뭇했는지 조금 전보다 한결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나도 여기에 남겠어요. 대신에 나한테는 절대로 술 마시라는 소리 하지 말아요. 만약 그랬다가는 무슨수를 써서라도 그 사람의 옷을 홀라당 벗겨 버리고 말겠어요?"
이 말에 사람들이 어처구니가 없는 듯 웃음을 터뜨렸다. 툭히장승표가 다른 누구보다도 크게 웃었다.
"크하하...... 그런 일은 아예 없을 테니 걱정 말라구. 아니지 한번 멱여 보고 내 옷 좀 벗겨 달라고 해볼까?"
서문연상이 쌍심지를 곤두세우며 그를 쏘아보았다.
"이봐요, 털북숭이 아저씨. 제발 동경(銅鏡)이라도 좀 보고 다녀요. 얼굴에 음식 찌꺼기를 더덕더덕 묻힌 상태로 웃음이 나와요?"
장승표의 눈이 동그래졌다.
"어? 그런가? 동 형, 내 얼구렝 뭐가 묻었소?"
장승표가 수염으로 뒤덮인 얼굴을 두꺼운 손으로 이리저리 떨어내자 동중산이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까부터 얘기해 주려고 했었소. 좀더 왼쪽으로, 아니 아래...... 조금 더 오른쪽으로......"
장승표는 동중산의 말대로 손으로 얼굴을 벅벅 문지르다가 사람들이 모두 박장대소를 하고 웃는 모습을 보고서야 겨우 사타를 파악하고는 손을 멈추었다.
"동 형, 정말 이럴 수 있소? 우리끼리 돕고 살아도 시원치 않을 판에 동 형까지 나를 놀리는 거요?"
동중산은 시치미를 뚝 떼었다.
"방금 전까지 잔뜩 묻어 있었소. 이제는 모두 떨어냈으니 그만해도 되오."
장승표는 긴가민가하여 동중산을 빤히 쳐다보았다. 동중산은 천연덕스럽게 물었다.
"내 얼굴에도 뭐가 묻었소?"
장승표는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저기 많이 묻었소. 내가 닦아 줄 테니 이리 오시오."
장승표가 솥뚜껑만한 손을 쳐들려 하자 동중산은 재빨리 몸을 돌렸다.
"장 형을 번거롭게 하기 싫으니 내가 나중에 동경을 보고 닦아내도록 하갰소."
장승표는 손을 번쩍 쳐든 채 동중산을 계속 따라갔다.
"하나도 안 번거로우니 신경 쓰지 말고 이리 오시오."
"필요 없소."
"자꾸 정말 이럴 거요? 내가 잘 닦아준다니까."
서문연상은 이 광경을 보고 허리를 잡고 웃었다.
"호호...... 그렇게 좋으면 앞으로는 얼굴을 마주보고 서로 닦아주면 되겠네."
방취아는 연신 웃음을 터뜨리고 있는 서문연상의 얼굴을 요모조모 뜯어보더니 고개를 갸웃거렸다.
"저 여자애가 어딜 봐서 나를 닮았다는 거야? 내개 저런 말괄량이었다니 말도 안 돼."
그녀는 애꿎게 옆에 가만히 있는 소지산을 툭 쳤다.
"솔직히 말해 봐요. 내가 예전에 저 여자애와 비슷했다고 한 건 농담이었죠?"
소지산은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 보니 닮지 않은 게 있는 것도 같군."
"그렇죠?"
"사매는 술을 좋아하는데, 저 여자는 술을 삻어한다잖아. 확실히 그점은 틀려."
방취아는 이마를 치켜세운 채 소지산을 노려보다 이내 찬바람 나게 몸을 돌려버렸다.
이렇게 해서 진산월의 일행은 모구 여덟 명이 되었다.
남자 여섯에 여자 둘, 그 중 두 명은 무공에 문외한이며, 두 명은 부상 중이고, 두 명은 종남파와 아무런 상관도 없는 인물들이었다.
수백 명의 무사들과 수십 명의 절정고수들을 지닌 초가보와 대적하기에는 한심할 정도로 적은 숫자였다.
첫댓글 즐독합니다,
점입가경
오늘두. 행복한 하루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즐독하였습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즐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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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수록 흥미진진합니다
감사합니다.
그래도 잘 해보자 ~~~
즐독입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오늘도 잘보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잘 보고 갑니다............^^
잘 보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