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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12월 18일(수)
* 시작 기도
주님...
도무지 잠이 오지 않아서 새벽도 되기 전에 말씀 앞에 앉았습니다.
그냥 몽롱한 정신으로 누워 있을까 하다가 성령의 강권하심이 느껴져서 박차고 일어나 말씀 앞에 나아가나이다.
나의 영을 주의 오른손으로 장악하시고 붙드셔서 주님의 행동하심을 믿음으로 온전히 수용하여 주님과 연합한 무덤의 자리가 되게 하소서.
말씀으로 지어지는 무덤의 성소에서 주님의 생명과 함께 나의 새 생명도 일으킴을 받게 하소서.
순간순간 육신의 소욕으로 넘어지는 이 종의 죄악들, 지금까지 그 죄악들을 먹고 마셨던 죄의 양식을 이제는 지나간 때로 족한 줄 알고 이방인의 뜻을 따라 행하던 것은 그치게 하소서.
이 한 몸 주를 위해 드리기 원하오니 볼품없고 미물에 지나지 않는 자이나 주님께 드리는 복음의 도구로 쓰임 받기 원합니다.
나의 옛 사람을 십자가에 못 박아 거룩한 불구자로 서게 하시고 겉사람은 시간이 지나면 낡아지지만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게 하옵소서.
나는 주님의 소유입니다.
주의 뜻대로 사용하소서.
내가 여기 있나이다.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성경본문 / 엡 4:1-6
제목 :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1. 그러므로 주 안에서 갇힌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부르심을 받은 일에 합당하게 행하여
2.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3.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4. 몸이 하나요 성령도 한 분이시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받았느니라.
5. 주도 한 분이시요 믿음도 하나요 세례도 하나요
6. 하나님도 한 분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시고 만유 가운데 계시도다.
* 나의 묵상
3장에서 에베소 교회 성도들을 향한 바울의 두 번째 중보적 기도는 첫째, 성도들의 속사람이 능력으로 강건해지게 해달라는 것(16절), 둘째, 그리스도께서 성도들 안에 내주(內住)하여 주실 것(17절), 셋째, 성도들이 사랑으로 굳게 서게 해달라는 것(17절), 넷째, 성도들이 그리스도의 절대적인 사랑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그들도 충만에까지 이르게 해달라는 것(18,19절)이다.
오늘 본문을 보면 먼저 바울은 성도들이 하나님의 부르심에 합당하게 행하여 교회의 연합을 이루라고 권면하고 있다(1-3절).
여기서 하나님의 부르심에 합당하게 행하는 것은 구체적으로 겸손과 온유 그리고 오래 참음으로서 서로를 용납할 것이며(2절),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께서 하나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는 것(3절)을 말한다.
그리고 4-6절에서는 성도들이 연합과 일치를 이루어야 할 당위성과 그 근거를 제시한다.
곧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교회, 성령, 성도들이 부르심을 받은 소망,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 믿음과 세례, 하나님도 하나이며, 또한 하나님은 만유의 아버지로서 만유 위에 초월하여 계시면서 만유를 통해 역사하시고 만유 가운데 내재하여 계시기 때문이다.
우리 성도들이 서로 연합과 일치를 이루어야 하는 합당한 근거는 결코 우리에게 있지 않다.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교회가 하나이고, 성령도 한 분, 하나님으로부터 부르심을 받은 성도들의 소망이 하나인 하나님 나라 곧 영생이며, 하나님도 한 분이시기에 우리가 이 땅에서 살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으로 하나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본문 3절은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고 강권하신다.
그렇다면 우리가 교회 안에서 힘쓰는 일들이 무엇인지 진솔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
우리는 정기적으로 공적 예배에 참석한다.
기도와 전도의 일을 한다.
시험에 든 자를 찾아가 위로와 권면을 한다.
물질의 어려움을 겪고 있는 형제를 구제한다.
병든 자를 심방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어 준다.
또한 웃는 자들과는 함께 웃어준다.
실수한 형제를 용서하며, 성도간에 서로 우애하고 존중한다.
이것은 성도의 삶으로서 이런 일이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이 하나되게 하신 일을 지키는 일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쉽게 생각하면 상기한 내용들을 새롭게 지켜야 한다고 생각하기 쉬우며 특히 우리가 하나되기 위하여 마땅히 날마다 이런 일을 행해야 하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성경은 평안의 매는 줄로 하나가 되게 하는 것은 이미 성령께서 하신 일이라고 분명한 어조로 강조하고 있다.
(3절)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이처럼 교회 안에서 성령이 하나되게 하신 평안은 이미 주신 것이다.
따라서 성령께서 주신 교회의 평안과 연합을 잘 유지하기 위해서 힘을 쓰라는 것이다.
여기서 ‘힘써’로 번역된 헬라어 ‘스푸다조’는 ‘애를 쓰다, 노력하다’는 뜻의 명령 분사 현재형으로 사용되었다.
여기서 분사 현재형이란 한 번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지속과 반복을 의미한다.
이런 성령께서 이미 주신 평안과 연합을 유지하기 위하여 성도들 모두가 지속 반복적으로 애를 써야 한다는 말이다.
서로 전혀 알지 못하고 이질적이던 다양한 부류의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을 통한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서로 간에 막힌 담을 헐고 함께 그리스도의 한 몸을 이루었는데, 이러한 하나됨이 끝까지 유지되기 위해서는 한 몸을 이루는 지체 한 사람 한 사람이 지속적인 노력이 중요한 것이다.
그렇다면 성령께서 이미 주신 교회의 평안과 연합을 유지하기 위해서 무엇을 어떻게 지속하고 노력해야 하는가?
그것은 나의 힘이나 노력으로 무엇을 행하라는 말이 아니다.
성령께서 이미 이루셨는데 거기에 내가 무엇을 더 할 수 있단 말인가?
이것은 세상적인 관점에서 말하는 것이 아니다.
영적인 측면, 더 나아가 하나님의 뜻인 영생을 날마다 이루라는 것이다.
영생을 이룬다는 말은 영생의 주체가 내가 아니라 하나님과 아들의 생명인데, 날마다 그 생명 안에서 살 것을 촉구하는 것이다.
(히 8:9-12) 또 주께서 이르시기를 이 언약은 내가 그들의 열조의 손을 잡고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에 그들과 맺은 언약과 같지 아니하도다. 그들은 내 언약 안에 머물러 있지 아니하므로 내가 그들을 돌보지 아니하였노라. 또 주께서 이르시되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과 맺을 언약은 이것이니 내 법을 그들의 생각에 두고 그들의 마음에 이것을 기록하리라. 나는 그들에게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게 백성이 되리라. (11)또 각각 자기 형제를 가르쳐 이르기를 주를 알라 하지 아니할 것은 그들이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나를 앎이라. 내가 그들의 불의를 긍휼히 여기고 그들의 죄를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교회는 머리되신 주님의 몸이요 그 안에서는 믿음도 하나이며 세례도 하나이고, 하나님도 한 분이시며 성령도 한 분이시므로 교회 공동체를 이루는 성도들 역시 하나님께로 부르심을 받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받았다.
따라서 교회는 내가 원하는 것을 하고, 내가 좋아하는 것을 하는 곳이 아니다.
예를 들면 목사의 생각대로 교회를 운영해 나가는 회사도 아니고, 성도들이 자기실현의 장으로 교회를 사용해서도 안 될 것이다.
어제 정말 가슴 아픈 이야기를 들었다.
시골에 어느 한 교회가 있다.
예배당을 멋지고 아름답게 지었다.
그 교회를 어느 목사가 담임을 하는데 그 목사는 성경대로가 아니라 자기의 뜻과 생각대로 교회를 운영하는 CEO인 것 같은 생각이 든다.
하나님의 뜻을 성경에서 찾지 않고 자기 교회에 예언을 하는 몇몇 권사와 성도들의 예언에서 찾는다고 한다.
그것도 예언을 한다고 해서 모두에게 권위를 주는 것도 아니고 특히 권사 한 사람의 말에 무게를 두고 그 예언에 귀를 기울인다고 한다.
자신은 예언이나 방언을 하지 못하지만 설교를 하다보면 성도들이 그렇게 방언을 하고 예언도 하고 환상을 본다는 것이다.
그 목사는 그것이 너무 자랑스러운 나머지 매주 월요일마다 세미나를 열어 여러 목사들을 초청하여 자기들의 목회패턴을 가르쳐 주고 있단다.
그런데 헌금을 할 때는 반드시 자기 이름을 적어서 헌금하라고 하고, 사택에 무슨 선물을 갖다 놓을 때는 이름을 적지 말고 아무도 모르게 갖다 놓으라고 하는가 하면, 병원에 입원한 성도가 있으면 개별적으로 심방하지 말고, 그 환자에게 줄 봉투를 교회봉투에 한 데 모아서 목돈이 되게 하여 교회 이름으로 전달한단다.
들은 이야기가 많지만 다 생각이 나지 않아서 적기도 힘들다.
하지만 교회는 이런 것이 결코 아니다.
목사는 자신의 생각이나 뜻으로 교회를 운영하는 CEO가 되어서는 절대 안 될 것이다.
왜냐하면 교회는 수익을 내는 기업이 아니기 때문이다.
또한 교회는 숫자 불리는 다단계회사가 아니기 때문이다.
교회의 존재 목적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이며 그 뜻을 날마다 힘써 지켜서 주도 하나요 하나님도 한 분이시며 성령도 하나이듯 삼위 하나님의 하나됨과 같이 교회도 하나가 되어야 할 것이다.
교회가 땅의 것에 집중할 때 그 교회는 아무리 시쳇말로 부흥하고 저 푸른 초원 위에 그림 같은 성전(?)을 짓고 목사가 큰 차를 타고 다닌다 할지라도 우리 주님께서는 ‘내가 너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고 하신다.
주여 주여 한다고 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예언을 하고 방언을 하며 환상을 본다 한들 영생을 누리는 것이 아니다.
오직 하늘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바로 하나님 나라 곧 영생을 맛보며 누리게 되는 것이다.
(마 7:21-23)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안ㄹ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내 아버지의 뜻 곧 하나님의 뜻은 이 땅에 있지 않다.
땅의 것에 집중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하는 자들이다.
그래서 세례 요한은 이렇게 말한다.
(요 3:31) 위로부터 오시는 이는 만물 위에 계시고 땅에서 난 이는 땅에 속하여 땅에 속한 것을 말하느니라. 하늘로부터 오시는 이는 만물 위에 계시나니
아무리 예언과 방언 그리고 환상을 본다 할지라도 이것이 주님과의 교제와 사귐을 통한 영생으로 나가지 않는다면 이 또한 땅에 속한 것이 되고 만다.
왜냐하면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할 것이기 때문이다.
(고전 13:8) 사랑은 언제까지나 떨어지지 아니하되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리라.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나오는 사랑만이 영원하다.
이 사랑은 아버지가 아들을 사랑하여 주신 생명이며 아버지의 생명을 받은 아들의 사랑은 아버지의 계명을 지키는 복종으로서의 사랑이다(요 15:10).
따라서 두 분의 사랑의 내용은 다르지만 그 기원은 아버지께로부터 나오는데 그 사랑이 곧 하나님의 본질의 계시인 영광이다(요 5:26).
우리는 이 땅에서 나의 의를 위하여 하늘에 닿는 탑을 쌓는 자들이 아니라 늘 성령께서 이미 하나되게 하신 교회를 힘써 지키는 자들이다.
그 하나되게 하신 교회를 힘써 지키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인 영생을 누리는 것이다.
(요 6:40)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살리리라 하시니라.
그렇다면 영생은 과연 무엇인가?
죽지 않고 영원히 사는 것?, 아니면 죽어서 천국에 가는 것?
분명한 의미는 이 둘 다 아니다.
영생이란 성경에서 분명하게 제시하고 있다.
(요 17:3)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따라서 새 언약 백성은 말씀을 통하여 삼위 하나님과 날마다 교제와 사귐을 통하여 아는 것이다.
이것은 누가 누구에게 가르칠 필요도 없고 배워서 되는 것이 아니다(히 8:11).
교회 공동체를 이루는 성도 각자가 말씀으로 하나님께 나아가 그 분과 교제하는 것이다.
이것이 자기 자신의 의를 드러내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의를 드러내며 하나님 나라를 구하는 것이다(마 6:33).
예수님은 지혜로운 자와 어리석은 자를 비교하여 말씀하신다(마 7:24-27).
누구든지 주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자 곧 쉐마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과 같다.
이 사람이 지은 집은 비가오고 바람이 불어도 무너지지 않을 것은 기초를 반석(예수 그리스도) 위에 놓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님의 말씀을 듣고도 행하지 않는 자는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자와 같은 어리석은 사람이다.
비가 내리고 바람이 불 때 그 집은 곧 무너져 무너짐이 심하게 될 것이다.
주님의 뜻대로 하는 자는 날마다 성령 안에서 말씀 곧 복음으로 주님과 교제와 사귐을 갖는 자이다.
주님의 뜻인 영생을 누리는 자는 주의 말씀을 반석 위에 지은 자와 같아서 어떠한 풍파에도 끄떡하지 않고 견딘다.
성령께서 이미 이루신 교회의 평안과 연합을 우리가 힘써 지키는 것은 나의 힘과 노력이 아니라 오직 성령 안에서 말씀으로 주님과 연합하여 영생을 누릴 때 가능하다.
이것은 누구도 무너뜨리지 못하는 영원한 생명이다.
나는 주님의 교회, 성령께서 이미 이루신 평안과 연합을 힘써 지킨다는 말을 오해한 자였다.
나는 내가 힘써 애를 쓰고 나의 힘과 의지로 하나되도록 해야하는 줄로 착각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아무리 애를 쓰고 노력을 해도 조금 되는가 싶으면 다시 무너지고 하나되는가 싶으면 다시 깨지고 마는 것을 얼마나 많이 보아왔는지 모른다.
나는 마치 해변가에서 모래성을 쌓는 그 일을 무한 반복하고만 있었던 것이다.
이는 복음 곧 말씀을 알지 못한 데서 오는 나의 義였다.
말로는 주님께서 하신다고 하면서도 내가 하여 내가 이루고자 했던 것이다.
그것은 조금 되는 것 같지만 결국 무너지고 만다.
왜냐하면 땅에 속한 것이요 쇠락의 법칙에 적용을 받기 때문이다.
예언이나 방언 환상과 같은 성령의 은사라도 언젠가는 다 없어지고 말 것이다.
특히 주의해야 할 것은 주님의 말씀 곧 복음이 있는 곳에서 성령께서 함께 역사하시지, 성령은 결코 독단적으로 역사하지 않으신다.
따라서 말씀은 제쳐두고 성령의 은사만 강조하며 그것을 최고로 여기면 지금 당장은 세워지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것 역시 모래성에 지나지 않는다.
물론 좀전에 예로 든 그 교회를 폄훼하고자 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나는 그 교회를 잘 알지 못하지만 그 교회를 잘 아는 분으로부터 들은 이야기이며, 무엇보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그 교회에 빠져 있다는 말을 들었을 때 너무나 안타까운 마음이 들어서 예로 제시한 것이다.
오늘도 주님께서는 우리가 당신의 생명으로 교제하며 영생의 삶을 누리길 원하신다.
나 또한 주님의 말씀을 통하여 주님의 뜻이 무엇인지 분명히 알고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는 일에 애를 쓰되 그것은 다름 아니라 영생임을 기억하여 그 영광에 들어간다.
여러 가지 상념들이 나를 짓누르고, 여러 염려와 근심이 나를 에워싸지만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고 하신 말씀(빌 4:6)처럼 내가 염려한다고 되는 것이 아님을 알기에 주님의 말씀 안에서 성령이 하나되게 하신 그 은혜 안으로 들어가 평안과 연합을 누린다.
그러면 모든 지각에 뛰어나신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의 마음과 생각을 지켜 주실 줄 믿는다.
* 묵상 후 기도
주님...
주님의 말씀을 안다고 하면서 얼마나 많이 오해하고 그것을 오용하고 있는지요.
주님의 말씀을 기쁨으로 향유해야 하는데 그 말씀을 나의 유익을 위해서 이용하는 악한 자로 살아왔음을 고백하나이다.
주의 말씀은 존재이신 주님이시기에 그 말씀이 성령 안에서 나의 생명임을 믿나이다.
오늘도 다른 것으로 평안하거나 연합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 안에서 주의 말씀으로 평안을 누리며 우리 주님과 연합하오니 주여, 이 종을 주의 품에 품어 주옵소서.
사랑하는 이를 그 구덩이에서 건져내 주시고 온전한 복음, 곧 통합복음이 선포되는 교회에서 정말 하늘의 것을 사모하며 생명으로 삶을 누리를 수 있도록 인도하옵소서.
임장로님, 오늘 수술을 합니다.
주께서 선하신 손길로 인도하여 주시고 이런 일들을 통하여 오히려 하늘의 기쁨을 누리게 하옵소서.
땅에서 주의 뜻을 찾는 이들을 주께서 만져주셔서 그들이 이제는 땅의 것을 찾는 일이 지나간 때로 족한 줄 알고 그들의 영적 눈이 위 곧 만물 위로 올라갈 수 있도록 인도하소서.
연약한 자들을 돌보시고 주의 여종들에게 긍휼을 베풀어 주사 고통 중에도 날마다 말씀으로 주의 품에 거하는 영생의 삶을 살게 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