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건적의 한갈래는 유주성을 노리고 진군해왔다. 유주태수 유언(劉焉)은 자가 군랑(君郞)이고 본래 강하군 경릉현 사람으로 전한 경제의 아들인 노나라 공왕(恭王)의 후손이다.
유언은 일찍이 도를 닦은 바 있는데 당시 현자로 이름난 동부(董扶)는 그에게 익주에 천자의 기운이 있다는 것을 넌지시 알려준 바 있다. 그는 야심이 대단한 인물이어서 후일 익주에 들어가 익주를 독립왕국처럼 만들고야 만다. 그의 아들이 바로 훗날 유비에게 촉을 내주는 유장이다. 그러나 이러한 일은 먼 훗날의 일이고 그 둘의 첫 만남은 태수와 의용병 대장으로서의 대면이었다.
유언은 적은 관군으로 유주성을 지키기 어렵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교위(校尉) 추정(鄒靖)을 불러 앞으로의 일을 상의하기 시작했다.
“황건적이 이리로 쳐들어오니 어쩌면 좋겠는가?”
“지금 우리의 병력이 적으니 능히 적도를 막아내기 어려울 것입니다. 마땅히 의군(義軍)을 모집하여 널리 인재를 구하는 것이 옳을 줄 아옵니다.”
이리하여 유언은 성내 곳곳에 의군을 모집하는 방을 내걸었고 유관장 삼인의 의기를 모으게 된 셈이다.
유비는 관우, 장비와 의형제를 맺기 바쁘게 평소 자신을 따르는 무리에 의협을 따르는 사람들을 모아들였다. 장세평과 소쌍이 그 소문을 듣고 찾아와 다시 말떼를 몰아와 거사에 쓰라고 건네주었다.
“이것이야말로 하늘의 뜻이 우리에게 있다는 증거가 아니겠는가.”
현덕은 기꺼움을 감추지 못하고 두 아우를 돌아보았다. 장세평과 소쌍은 다시 금은 오백냥과 빈철 천근을 더 내놓았다. 빈철이란 질이 좋은 철을 가리킨다.
현덕은 그 철로 각종 무기를 만들도록 하고 자신도 쌍고검(雙股劍:넓적하게 생긴 큰 검 두자루)을 만들었다.
관우는 청룡언월도(靑龍偃月刀)를 만들었으니 일명 냉염거(冷艶鋸)라 부르는 이 거대한 칼은 무게가 82근이나 나갔다. 냉염이란 쌀쌀하면서도 곱다는 뜻이고 거는 톱과 같다는 뜻이니 그 이름이 그럴 듯 하다. 이 칼의 자루만도 열자가 넘어 본래 거구의 관우가 들고 서니 역신(力神)이 따로 없어 보였다.
우리 말로는 그저 칼이라 부르지만 중국에서는 칼을 도와 검으로 구분한다. 검이란 양날을 가진 칼이고 도는 한 날을 가진 칼이다. 사실 검은 양날을 만들기 때문에 만들기는 어려워도 부러지기 쉬워 실전에서는 일찌감치 탈락한 물건이었다. 실제 전투에 사용되기보다는 지휘관의 상징으로 이용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도는 다시 허리에 차고 다니는 칼과 커다란 대도로 구분되었다. 대도는 긴 자루에 한쪽에 칼날이 달린 무기로, 관우의 냉염거 역시 언월도라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휘어진 칼날을 가진 대도였다. 이런 대도는 기병이 이용하면 높은 곳에서부터 회전력을 가지고 상대를 베어버릴 수 있는 최강의 무기가 된다.
장비 역시 이 쇠로 꼬불꼬불한 창날을 가진 여덟자 창을 만드니 장팔사모(丈八蛇矛)라 불리는 창이 여기서 만들어진 것이다. 사모라는 것은 창대가 날창날창하게 휘어지는 것이 뱀과 같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창날이 꼬부라진 형태를 말하는 것은 아니다.
이들은 용사 오백 명을 거느리고 유주를 방문했다. 유언의 입장에서는 오백 명이라는 수는 보잘 것 없는 것이었지만 그들의 대장이라는 현덕을 만나는 순간 그런 생각이 사라지고 말았다.
“유공은 혹시 제실의 종친이 아니신가?”
이에 현덕이 자신의 족보를 아뢰자 유언은 촌수를 따져 보았다.
“허, 그대는 바로 나의 조카뻘이 되는군.”
“황감하옵니다.”
“조카가 이렇게 군사를 이끌고 아재비를 도우러 오니 든든하기 그지없네.”
사람을 만나기만 하면 흡입력을 발휘하는 유비의 인품이 다시 한번 빛을 발했다. 유언은 유비를 선봉에 임명하고 추정과 함께 황건적을 막을 것을 명했다. 아울러 술과 고기를 내려 의병들을 위무하는 것 또한 잊지 않았다. 이들의 첫 출진은 멀지 않아 다가왔다. 황건적의 장수 정원지(程遠志)가 군사 5만을 이끌고 유주성으로 쳐들어 오고 있다는 첩보가 입수되었다. 유언은 교위 추정과 유비에게 적을 막을 것을 명했다.
정원지의 황건적이 쳐들어 온 곳은 바로 유비의 고향인 탁군이었다. 유비는 대흥산 아래에 진을 치고 황건적을 기다렸다. 시끌벅적한 소리가 나며 드디어 대군의 머리가 보이지 시작했다. 선두에 선 청색 갑주를 받쳐 입은 자가 정원지인 모양인지, 유비군을 발견하고 손을 들어 일행을 정지시켰다. 들판에 누런 물결이 일렁이고 있었다. 그리고 그 누런 물결 속에서 비웃음의 소리가 유비군까지 들려왔다.
‘이것도 병력이라고 저지하러 나왔냐 이거군.’
현덕은 씁쓸하게 웃으며 탁군의 의협남아들을 바라보았다. 모두들 긴장하고 있음에 틀림없었다. 창을 쥔 손에 피가 맺히도록 힘이 들어가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유비는 태연히 말을 몰아 진영 앞으로 나섰다. 관운장과 장비도 유비를 따라 죄우에서 말을 몰았다. 현덕은 채찍을 들어 큰소리로 정원지를 꾸짖었다.
“나라를 배반한 역적 놈아! 어찌 빨리 말에서 내려 항복하지 않는가!”
일순 시끄러움이 사라졌다. 현덕의 우렁찬 목소리도 목소리였지만 감히 오백의 군사를 거느리고 너무나 당당한 현덕의 자세에 황건적도 할 말을 잃은 것이다.
정원지는 불같이 화를 냈다. 지금까지의 진군에 걸리적거리는 일이 없는 것이 관군이었다. 심지어 얼른 누런띠를 찾아 머리에 두르고 합류까지 하는 판이었다. 그런데 보아하니 급조된 병력임에 분명한 조잡한 갑주를 걸친 자가 마치 천자라도 되는 양 큰소리를 치고 있지 않은가.
“저 무례한 촌부에게 천사(天師)의 위엄을 보여주어라.”
정원지는 부장 등무(鄧武)에게 명을 내렸다. 사실 별로 무용을 자랑할 기회도 없었던 등무는 신이 난 듯 창을 빙빙 돌리며 박차를 가해 현덕을 향해 일직선으로 말을 몰았다. 현덕이 미처 지시를 할 겨를도 없이 장비는 고리 눈에 불똥을 튀기며 달려나갔다. 장비는 냅다 괴성을 뽑아내며 말을 달렸다.
“으아아아아!”
장비의 고함소리에 놀란 탓이었을까? 등무가 움찔거리며 한 창을 뻗어내는 순간 이미 장비의 창이 등판을 꿰고 나와버렸다. 장비는 그대로 창에 꿰인 등무를 들어올려 땅바닥에 패대기 쳐버렸다. 너무나 엄청난 광경에 양군이 모두 기가 질린 모양이었다.
그래도 일군의 대장인 정원지가 정신을 먼저 가다듬었다. 기세 싸움에서 밀리면 안 된다고 생각한 정원지는 직접 말을 달려 장비를 향했다. 바보 같은 짓이었다. 차라리 전군을 몰아서 짓밟으려 드는 것이 나았을 것을.
정원지를 향해 장팔사모를 다시 겨누는 장비의 등 뒤로 종울음같은 굉음이 울려퍼졌다.
“아우는 잠시 창을 멈추라. 저 자는 내 몫이다!”
관우가 82근의 청룡언월도를 머리 위로 호기롭게 휘두르며 말을 달려나왔다. 한번 공기를 가르자 살벌한 쇳소리가 5만군의 심장을 얼리는 듯했다. 정원지는 대도를 들어 냉염거의 칼날을 막아보지도 못한채 그대로 두 동강이 나 말 아래 나뒹굴고 말았다.
현덕이 때를 놓치지 않고 군사를 진격시키고 관우와 장비가 역시 말을 달려 황건적을 향하자 이들은 개미떼처럼 흩어져 달아나기 시작했다. 걸음이 느린 자는 뒤에서 쫓기는 사람의 발에 밟혀 죽으니 아비규환이 따로 없는 생지옥이었다.
농민 반란군이라는 것이 본래 군대가 아니니 그들을 움직이는 것은 오로지 사기일 뿐이었다. 믿고 의지하는 사람이 꺾이면 군대라 하더라도 동요하기 마련인데 하물며 어제까지는 논갈고 밭갈던 사람들일 바에야. 단지 이들을 흩어 놓기만 해도 당분간 유주에는 근심거리가 없어질 판이었다.
또한 현덕의 5백 용사들은 그들의 지휘관에 대해 무한한 경외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특히 정원지의 피로 칠갑을 한 관운장의 늠름한 모습은 무신(武神)이라는 단어를 절로 연상케 했다. 임협의 세계에서 물론 의리와 신의를 지키는 덕목이 으뜸이기는 해도 역시 그 바탕에는 무력에 대한 흠모가 존재하기 마련이었다. 이들이 지금까지 현덕의 덕에 의지해 왔다면 이제 관운장과 장비의 절륜한 무예와 힘은 그들의 가슴에 절대적인 것으로 자리했다.
도망치기에 지친 황건적들은 그 자리에 무릎을 꿇고 엎드려 유비군의 자비를 구걸했다. 허망한 농민반란군이었다.
유비군의 승전보는 바로 유주성으로 전달되어 태수 유언은 몸소 성문 밖으로 나와 유비군을 영접했다. 전곡과 피륙을 내어 유비군의 노고를 치하하니 군(軍)의 사기는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았다.
이튿날, 파발 하나가 유주성 관아로 달려왔다. 청주(靑州) 태수 공경(龔景)이 황건적 수만에 둘러싸였으니 원군을 청한다는 내용이었다. 유언은 곧 현덕을 불러 상의했다.
“청주는 유주와 지호지간(指呼之間)에 있으니 모른 척 내버려 둘 수는 없는 노릇이지만, 지금 군사를 빼기도 어려운데 어찌하면 좋겠는가?”
“유주의 황건적은 어제의 패배로 이미 그 뿌리가 뽑혔으니 무엇을 심려하십니까? 이 비(備) 비록 용렬한 재주를 가진 사람이지만 구원군을 내려주신다면 분골쇄신하여 적당을 물리치겠나이다.”
유언의 입장에서야 구원 요청이 왔으니 모른 척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내심 현덕이 움직여줬으면 하는 판이었는데 자진해서 전쟁터로 가겠다고 하자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조카의 병사가 적어서 걱정이니 교위 추정에게 오천의 병사로 조카를 돕게 하겠네. 부디 군공을 세워 입신양명의 기회로 삼게나.”
유언은 큰 인심쓰듯이 말했다. 유주의 위험은 덜어졌고 유비를 선봉으로 보낸다 하더라도 5천의 군사는 유주군이고 교위의 지휘 아래 놓이니, 이기면 자신의 공이 될 것이고 지면 유비에게 책임을 물으면 그만이라는 속셈이었다.
그러나 현덕은 현덕대로 속셈이 있었다. 그들은 본래 고향을 지키겠다는 명목으로 모여든 의용군이었다. 하지만 이제 유주 경내를 벗어나 중원으로 진출하게 되면 그런 본래의 목적과는 상관없이 자신의 사병집단이 되고 마는 것이다. 세상을 향해 한발을 디디고 무명(武名)을 떨치는 계기가 될 싸움이 눈앞에 다가왔다.
유비군이 청주를 구원하러 오고 있다는 것은 청주의 황건적에게도 금방 알려졌다. 이미 유주로 향했던 정원지 군의 패배 사실을 접한 황건적은 병력을 반으로 나눠 유비군에 대항하게 했다. 청주성으로 향하는 길목을 점거하고 있던 황건적은 유비군을 보자 그대로 난전(亂戰)으로 돌입했다. 이렇게 되면 관운장과 장비의 무술이 아무리 뛰어나도 버텨낼 도리가 없어진다. 더구나 추정이 거느린 유주군 오천 명은 이렇다할 싸움도 하지 않은 채 적의 숫자에 기가 질려 뒷걸음치기 시작했다.
현덕은 피해가 더 커지기 전에 퇴각 명령을 내려 삼십 리를 후퇴하여 진을 벌렸다. 적들도 날이 어두워지자 더 이상 추격하지 않았다. 현덕은 막사로 두 아우를 불렀다.
“적당의 수가 너무 많아 이기기가 쉽지 않구나.”
“우린 저보다 더 많은 적도 한방에 부쉈지 않수. 다 유주 놈들이 뼈가 물러서 그래요.”
장비가 입이 한 나발 나와서 투덜거렸다. 추정의 군대가 일찌감치 무너지는 바람에 지고 말았다는 것이다.
“꼭 그렇게 볼 것은 아니다. 병법에 정공(正攻)만 있는 것은 아니니 이번에는 기병(奇兵)을 써서 적을 물리치도록 하자.”
현덕은 관운장에게 일천 병사를 주어 산의 왼쪽에 매복하게 하고 장비에게도 일천 병사를 주어 산의 오른쪽에 매복하도록 일렀다. 다음날 아침 현덕은 추정과 함께 진을 몰아 황건적과 대치했다. 북과 나발을 불고 기치를 번쩍번쩍 들어올리며 진군을 하자 이번에도 역시 황건적은 어제 재미 본 대로 난전을 벌이려 짓쳐들어왔다. 유비는 잠시 대항을 하는 듯 하다가 곧 징을 울려 퇴각 명령을 내리니 싸움은 전일의 그것과 똑같아지고 말았다. 황건적은 어제와 다름없이 승리했다고 믿고 현덕의 뒤를 쫓아 아무 의심도 없이 매복군이 있는 산모퉁이까지 따라왔다. 돌연 요란한 북소리가 울리더니 산비탈을 따라 양쪽에서 군사들이 밀고 내려오지 않는가.
“함정에 빠졌다! 퇴각해라! 퇴각!”
누군가가 외치는 소리에 황건적은 일대 혼란에 빠져들었다. 대오와 정렬을 잃어버린 군대는 이미 군으로써의 가치를 상실하는 법이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고대의 전투는 항상 누가 먼저 상대를 포위하는가가 관건이 된다. 공격의 효율성은 항상 전면으로 맞춰져 있기 때문에 측면이나 후면에서 공격을 받으면 속수무책으로 쓰러지게 되고 만다. 그 때문에 측면이나 후면에서 공격이 가해지면 병사들이 가지는 심리적인 압박도 엄청나다. 변변한 군사 훈련없이 급조된 황건적과 같은 군대는 이런 상황에 놓이면 전투 의지 자체를 상실하고 무너지게 된다.
황건적은 쳐들어오는 관군의 규모 따위를 생각해 볼 겨를도 없었다. 당연히 어떤 작전 명령도 주어지지 않은 채 거대한 산사태처럼 무너져 버리고 말았다.
청주성을 에워싸고 있던 반절의 황건적 역시 엎어지고 넘어지며 몰려오는 패잔병을 보자 그들의 뒤를 쫓아오고 있는 유비군을 상대해야 하는지, 청주성을 계속 공격해야 하는지 감을 잡지 못하고 우왕좌왕하기 시작했다. 적진이 어지러워지는 것을 지켜보던 청주 태수 공경은 절호의 기회를 놓치지 않고 성문을 열고 군사를 내보냈다. 앞뒤로 적을 맞이한 황건적은 여름날 장대비에 온갖 쓰레기가 떠밀려가듯 붕괴되고 말았다.
공경은 구원군으로 온 현덕과 추정을 성안으로 모시고 가 극진한 대접을 했다. 물론 군사들에게도 그 노고를 치하하는 은급이 내렸다.
다음날 날이 밝자 추정은 유주성이 걱정이 된다면서 돌아가겠노라고 말했다. 그러나 현덕은 돌아가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이제 세상을 향해 첫발을 디딘 셈이 아니던가.
“유주 경내에는 이제 별 문제가 없을 것입니다. 이 비(備)가 없어도 지장이 없을 터이니 교위께서는 태수 나리께 잘 말씀드려 주십시오.”
추정이 깜짝 놀라 반문했다.
“유장군께서는 유주가 고향 아닙니까? 아니 돌아가신다면 어디로 가시겠다는 말씀입니까?”
“듣자하니 노(盧) 중랑장(노식)께서 적괴 장각과 광종(廣宗)에서 결전을 벌이고 계시다 합니다. 노 중랑장은 바로 이 몸의 스승이시니 제가 어찌 모른 척 할 수 있겠습니까? 달려가 작은 힘이라도 보태드려야 마땅할 것입니다.”
현덕이 스승의 은혜를 들어 돌아갈 수 없다고 하자 추정으로써도 만류할 명분이 없었다. 유비, 관우, 장비의 재능과 무용이 아깝기도 했지만 워낙 자질이 뛰어난 청년들이라 자칫 자신의 자리가 위태롭지나 않을까 걱정하던 추정은 차라리 잘됐다고 생각하고 그길로 자신의 병마 오천을 회수해서 유주로 돌아갔다.
현덕은 추정에게 말한 데로 광종으로 노식을 돕기 위해 달려갔다. 탁군의 오백 용사 중 누구도 고향으로 돌아가겠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그들은 이미 현덕의 수족과 같은 심복들이 되었다. 광종은 기주 신도군에 속하는데 장각의 고향인 거록과 바로 이웃하고 있는 고을이다.
광종에 도착하여 노식의 군막을 찾아가자 노식은 크게 놀라면서 옛 제자를 반갑게 맞았다.
“난세를 맞아 제자가 옛 스승을 잊지 않고 찾아오니 이렇게 기꺼운 일이 또 있을고.”
“제자가 복이 많아 스승님을 또 뵈옵게 되니 감개가 무량합니다.”
현덕은 재삼 노식에게 절을 하고 자리에 좌정했다. 관운장과 장비도 유비의 뒤에 시립하고 섰다.
“저 두 호걸은 어떻게 되는 사이냐?”
“저와 결의형제 한 사이로 만부당의 용맹을 지닌 아우들입니다.”
현덕은 그렇게 말하며 두 사람을 소개했다. 관운장과 장비가 군례를 올리자 노식은 흐뭇한 눈길로 그들을 바라보았다.
“그래 현덕아, 네게는 인복(人福)이 있다. 앞으로 난세를 헤져나갈 튼튼한 재목감이로구나. 네 녀석은 본래 글공부를 좋아하지 않아 문사가 되리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늘 개나 말을 돌보는 것을 즐기고 음악이나 듣고 좋은 옷이나 챙기는 걸 보고는 걱정이 많았다만... 오늘날 이런 헌헌장부가 되어 일군을 지휘하는 것을 보니 장하고 장하구나.”
노식은 두 아우를 바라보며 말했다.
“여기 현덕은 의(義)를 숭상하는 기개만큼은 천하에 둘도 없는 사람이니 그대들은 항상 그를 믿어 의심치 말기를 바라네.”
노식은 앞서 말한 바와 같이 문무겸전의 장재로 그 명성이 한의 하늘을 울리는 사람이었다. 물론 관운장과 장비가 의형을 믿고 따르는 데에는 한 치의 사심도 없었지만 노식과 같은 사람의 입에서 이런 말을 듣자 두 사람의 가슴에는 새삼스럽게 유비에 대한 존경의 염이 솟아올랐다.
“이곳의 전황은 어떻습니까? 제 작은 힘이나마 다해 스승님을 도울 것입니다.”
노식은 손을 내저었다.
“나는 오만의 정병으로 적당 십오만을 상대하고 있네. 비록 적의 머리수가 많아도 별 어려움은 없을게야. 자네는 이곳보다는 다른 곳을 도와주게.”
“다른 곳이라 하오면?”
“장각의 아우 장보와 장량이 영천(穎川)에서 황보숭, 주준의 군사와 대치하고 있네. 내가 따로 일천 군마를 내어줄테니 그곳으로 가 형세를 살피고 적도를 소탕하도록 하게.”
노식은 군정이 하루가 급한 것이라고 재촉하여 현덕은 밤을 도와 영천으로 달려갔다. 영천은 예주(豫州)에 속한 곳으로 수도 낙양으로 들어가는 길목이 된다. 그 이유 때문에 노식이 유비를 보냈던 것이다. 만에 하나 영천의 관군이 무너지면 그 파급은 상상을 불허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뒷날 조조의 허도(許都)가 위치하는 곳도 바로 영천이다.
그런 이유로 황보숭과 주준도 처음에는 이곳을 굳게 지키기만 하였다. 비록 황건적의 수가 몇 배로 많았지만 잘 조련된 관군과 부딪치자 이길 가망성이 없었다.
이에 장보와 장량은 군사를 물려 장사(長社)로 후퇴했다. 그곳은 풀밭이 우거진 곳이라 기병(騎兵)이 움직이기 불편하리라 생각한 것이다. 적당들이 영채(營寨)를 세우는 것을 지켜보던 황보숭이 웃으며 주준에게 말했다.
“어리석은 도적들이 제 무덤을 파는구려.”
주준도 웃으면서 말했다.
“오늘 밤 화공(火攻)을 가한다면 나라의 큰 근심을 덜 수 있을 것이오.”
영을 내려 병사들에게는 저마다 짚단을 한 묶음씩 준비하도록 했다. 밤이 이슥해지자 적의 영채 주위에 병사들을 매복시킨 뒤, 바람이 불기를 기다려 짚단에 불을 붙여 영채로 던져 넣기 시작했다. 일제히 막사에서 불길이 치솟아 오르자 황보숭과 주준의 본대가 와하고 쳐들어가기 시작했다. 본래 풀밭에 지어진 영채라 한번 불이 붙자 그 기세는 걷잡을 수 없었다. 불길 밖으로 뛰쳐나가면 바로 관군이 창을 겨누고 있었으니, 항복하는 자 역시 수를 헤아릴 수 없었다.
장보와 장량은 구사일생으로 빠져나와 정신없이 달아나다가 문득 정신을 차려 인마를 점검하니 수가 절반으로 줄어 있었다.
“어느 놈이 풀밭으로 들어가면 관군의 공격을 피할 수 있다고 한 게냐!”
옮기자고 할 때는 좋다고 찬성했던 장보가 버럭 성질을 부렸다.
“형님, 지금 잘잘못을 따질 때가 아닙니다. 이제 낙양을 치는 것은 틀렸습니다. 큰형님이 계신 광종으로 가서 병력을 합쳐서 새로 궁리를 내봅시다.”
좀 더 침착한 장량의 말에 장보도 정신이 번쩍 들었다. 벌써 언덕너머에 흙먼지가 오르는 것을 보니 적이 코밑까지 쳐들어올 모양이었다. 이랴, 한 소리를 내뱉으며 말 엉덩이를 채찍으로 사정없이 갈기고는 광종을 향해 내달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불과 십여 리를 갔을까?
“역적의 무리들아! 어서 말에서 내려 오라를 받아라!”
장보가 눈을 들어 보니 붉은색 전포에 붉은 색 갑주, 붉은 색 투구로 치장을 한 늠름한 사내가 말에 올라 길을 막고 있었다. 그 뒤로 도열한 병사들도 대오가 정연한 것이 보통 군대가 아님을 한눈에 알 수 있었다.
“네 놈은 감이 누군데 천사(天師)의 진로를 가로 막느냐! 천벌이 두렵지 않으면 게 서 있어라!”
장보가 일단 기가 죽을 수 없다고 큰소리를 한번 쳤다.
“네깟 촌놈이 내 이름을 들은 바 있겠느냐? 대한(大漢)의 기도위(騎都尉) 조조(曹操)가 바로 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