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봄날은 간다 4
2014. 3. 금계
3월 27일, 고윤혁 선생의 차를 타고 고금도로 갔다. 고금중학교는 고 선생이 1994년에 복직하여 3년간 근무했던 곳이다. 이번에는 고금중학교 교감으로 부임한 정권율 선생을 축하하기 위하여 행차했다. 고 선생 복직했을 때 놀러갔었는데 벌써 스무 해가 지났다. 세월의 덧없음에 새삼 놀라게 된다.
“무영 씨 때문에 못 살것소야.”
목포를 출발할 때 고 선생이 우는 소리를 했다.
“어째서 못 살겄는가?”
“전번에 무영 씨 따라서 거제도 갔어요.”
열 시간 이상 등산을 했단다. 지리산처럼 한번 능선에 올랐다 하면 쭉 올라간다든지 내려간다든지 하는 게 아니라 거제도에서는 올라갔다가 평지로 내려오고 다시 올라갔다가 평지로 내려오고 하는 바람에 아주 곤욕을 치렀단다.
“와하하하, 이 사람아, 그게 뭐 억울할 일이여. 보약 먹었구만.”
기독치과 원장 김무영 씨는 내로라하는 등산가다. 지리산 종주를 밥 먹듯 하는 사람이다. 그 사람한테 걸렸다가는 썽썽할 사람이 별로 없다.
고 선생은 해직 동안 나와 테니스를 시작했다. 복직 후에는 주로 배드민턴을 쳤다. 그러다가 한 때는 문희경 선생이랑 패러글라이딩을 한다고 야단법석을 피우더니 이제는 또 무영 씨의 등산 쪽을 기웃거리는 모양이다. 테니스면 어떻고 등산이면 어떤가. 무엇이라도 한 가지 운동에 취미를 붙이는 것은 건강에 아주 중요한 일이다. 운동은 몸과 마음을 건강하게 유지하는 첫 번째 비결이고 운동 없는 건강은 생각하기 어렵다. 내 경험으로는 최소한 일주일에 세 번 이상 육수를 뽑아야(땀을 흘려야) 한다.
꽃바구니를 하나 마련하면 어떨까 하다가 오렌지 한 상자와 빵을 선생님들한테 선사했다. 교장실에 들어가니 후덕하고 점잖게 생긴 교장 선생님이 반갑게 맞이해주신다. 요즘에는 교훈을 새긴 비석을 마련하고 싶은데 수백만 원이나 먹히는 경비 때문에 골머리를 앓고 있단다.
“교장선생님, 작년에도 이 학교 계셨지요?”
고개를 끄덕이신다. 그러고 보니 작년에도 살짝 뵈었던 분이다. 작년에는 고금중학교 교감이 안영익 선생이었다. 안영익 선생과는 목포제일중학교에서 1987년 평교사회를 함께 조직하면서 인연을 맺었다. 안 선생을 만나보려고 작년 2월말 고금중학교를 방문했을 때 학교 텃밭에서 삽질을 하던 바로 그 교장선생님이었다. 나는 면장갑을 끼고 일하는 교장선생님을 보면 고개가 저절로 수그러진다. 텃밭을 가꿀 정도라면 아주 훌륭한 교장임에 틀림없다. 바로 이 사진이 작년에 찍은 사진이다. 작년에도 뵈었노라고, 밭을 파는 교장선생님을 얼마나 선전했는지 모른다고 했더니,
작년에 판 밭을 반마다 나누어주고 감자를 기르게 했더란다. 밭일로 수고하신 분들한테도 조금씩 드리고 나머지는 급식시간에 삶아서 학생들한테 먹이니 자기가 가꾼 감자를 먹는 즐거움까지 곁들여 일석이조였더란다.
충무사 본 건물은 선조 31년(1598년) 명나라 도독 진린이 그들의 군신 관왕을 모시기 위해 건립하였으며, 현종 7년(1666년) 수군절도사 유비연이 중수하고 동무(東廡)에는 진린, 서무(西廡)에는 충무공을 모셨는데 해방 이후 고금도 유림이 중심이 되어 충무사 현판을 걸고 충무공을 정전에 모셨다.
충무공이 고금도로 진을 옮긴 후 3월에 장흥에 있던 왜적들이 흩어져 나와 살육 약탈을 자행함으로 녹도 만호 송치종에게 정예군을 주어 추적케 했다. 적들이 놀라 순천 방면으로 도망치자 전라병사 이광악에게 소탕하게 하였다. 적선 16척을 격침시키고 수급을 모조리 베었다.
또 명나라 수군들이 고금도에 도착한 후 민가를 함부로 드나들며 약탈을 일삼으니 충무공이 침구와 의복을 배에 싣게 하였다. 진린이 놀라 명나라 수군들의 잘못을 징계할 권한을 충무공에게 주었다. (이상 고금도 충무사에 비치한 팸플릿에서 옮김)
월송대 바로 곁 솔밭에서 함께 간 문희경 선생과 사진 한 장.
문희경 선생은 드물게도 부부 해직교사였다. 혼자 잘리기도 힘든데 둘이 한꺼번에 잘린다는 것은 당시로서는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그 부부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저 뜨거웠던 1989년 여름, 명동성당에서는 600여 명의 교사들이 정부의 전교조 탄압에 맞서서 단식투쟁을 벌였다. 일주일가량 굶었던가. 온몸에 힘이 빠지고 얼굴이 쭈그러지고 눈이 움푹 들어가고 하늘이 노래졌다. 여수 한창진 선생은 쓰러져서 백병원으로 실려 가기도 했다.
지금은 일로 체육고등학교 진로교사. 부인도 목포 인근에 근무해서 남악에 보금자리를 마련했다. 인연 맺은 지 스무 해가 넘는 동지와 여전히 술잔을 나눌 수 있어 나는 아주 행복하다.
고금도와 조약도(약산)을 잇는 연도교(連島橋).
20년 전에 같은 학교 근무하던 국어과 윤 선생 차를 타고 고금중학교 고윤혁 선생을 만나러 왔다. 그 때 뜻밖에도 윤 선생은 고금중학교에 근무하던 대학교 국문과 후배 우 선생을 만났다. 내가 고 선생과 손을 부여잡고 반가움을 나누고 있을 때, 윤 선생과 우 선생은 뜻밖의 해후에 어쩔 줄 몰라 서로 보듬고 펄쩍펄쩍 뛰었다.
더 기막힌 인연은 그로부터 몇 년 후 나는 우 선생과 우수영중학교에서 함께 근무하고, 윤 선생은 고 선생과 목포상고에서 함께 근무하게 되었다. 서로 얽히고 교차하는 만남과 인연의 교묘함이 이와 같았다.
20년 전 나와 윤 선생과 고 선생, 우 선생은 약산이 빤히 바라다 보이는 이 부근 주막에서 술을 마셨다. 그 주막 주인 내외는 오늘도 여전히 사이좋게 가게 앞에 나앉아 그물을 손보고 있었다. 주막 천장은 낮았으며 시골스런 형광등이 어슴푸레 빛나고 있었다. 근처에서 잡은 싱싱한 우럭 회는 칼로 저민 곳마다 침침한 형광등 불빛에도 번쩍번쩍 찬란한 무지개 색을 뿜어내고 있었다.
오줌이 마려웠다. 살그머니 주막을 나와 집 뒤쪽으로 돌아갔다. 바다를 향해 오줌을 누었다. 달밤이었다. 보름달이었다. 바다에 달기둥이 섰다. 얼마나 황홀하게 아름다운지 거기에서 오줌을 누어보지 못한 사람은 알 길이 없다. 술자리에 돌아온 나는 윤 선생한테 강제로 바다에 가서 오줌을 누고 오라 했다. 윤 선생이 다녀왔다.
“뭐 느낀 점 없는가?”
“야, 달기둥이 환상적이데요.”
“됐어, 됐어, 합격!”
나와 문희경 선생이 고윤혁 선생 차를 타고 먼저 오고 별호사는 재판이 있어서 조금 늦게 사무실 차를 타고 왔다. 별호사와 정권율 선생은 스무 해 가까이 교수한테 사서삼경을 함께 배우는 학문의 동지다. 게다가 정 선생은 별호사가 운영하는 장학재단의 실무를 도맡아 수고하고 있다.
작년에 고금중학교 교감으로 근무하던 같은 코끼리떼(일중학교 교사들 친목모임) 회원 안영익 선생은 생일중학교로 전근 갔다. 그 대신 안영익 선생의 따님이 고금중학교로 첫 발령을 받았다. 아무한테도 부탁조차 한 일이 없는데 그냥 그리 되었단다. 인연의 공교로움이 이와 같다. 이제는 월요일 아침 아버지가 딸을 이 학교에 내려주고 약산 쪽으로 간단다. 요즘 임용고시 통과하기가 하늘의 별따기처럼 어렵다는데 그 어려운 관문을 뚫고 당당히 교단에 선 딸이 얼마나 자랑스러울지 그 아비가 되어보지 않고서야 어찌 알겠는가.
아버지가 영어과인데 따님도 영어과라 한다. 같은 계원의 딸이 근무한다는데 안 보고 갈 수도 없다. 정 선생한테 부탁하여 종례를 마치고 나온 따님을 교정에서 만난다. 생전 처음 대하는 얼굴이다. 아무리 뜯어보아도 아버지 안 선생의 흔적을 찾기 어렵다. 누구를 닮았는지 물어보니까 성격은 아빠를 더 닮고 얼굴은 엄마를 더 닮았단다.
아들 같았으면 부담 없이 기왕에 가는 술집에서 술잔이라도 나눴으면 좋겠지만 딸이라 조심스러워서 근무 잘 하라면서 섭섭하게 작별한다. 얼마 후 바닷가로 구경 나가는데 안 선생한테서 전화가 온다.
“딸이 그러는데 고금 오셨다면서요, 언제 생일도에도 한 번 놀러오세요, 허허허!”
“그럼세, 전화 하고 감세. 잘 계시게나. 하하하.”
고금중학교를 빠져나온 일행은 저녁을 먹기 전 바람을 쐬려고 해가 지는 서쪽 바다를 찾는다. 자전거를 타고 놀던 그 동네 꼬마 친구가 알아듣기 어려운 말을 외국어처럼 지껄이면서 접근한다. 우리가 사진을 찍자니까 두 말 없이 찰싹 별호사 품에 안긴다. 나중에 알고 보니 이 꼬마의 목표는 자동차였다. 고 선생이 꼬마를 싣고 살짝 몇 바퀴 움직여주었다.
해가 뉘엿거리는 석양 무렵, 고금도 서쪽 바다는 감미로운 봄바람이 혀로 핥듯 부드럽게 스쳐갔다.
무지개 식당, 작년 안 교감과 술잔을 나누었던 바로 그 방에서 일 년 만에 이제는 정 교감과 술잔을 나누게 되었다.
위의 큰 사진이 간재미 회. 상추 위의 검은 것이 간재미 애, 회색 부분이 간재미 코, 노란 것이 알, 상추 밖의 기다란 부분이 살, 가운데 토막이 뼈다짐, 세상에나 작은 간재미 한 마리를 이렇게 정성들여 부위별로 예쁘게 내놓는 곳은 이 식당밖에 없을 것이다. 음식을 맛으로만 먹는 게 아니다. 보기 좋은 떡이 먹기도 좋다지 않던가. 맛 또한 일품이다.
문희경 선생이 간재미 회 맛 좋다고 감탄한다. 문 선생은 20년 전 진도로 복직했다. 진도도 간재미라면 빠지지 않는 섬이었다. 진도 생각이 난다 했다. 옛날 진도에서 먹던 간재미와 회 맛이 비슷하다 했다. 목포에서는 그런 맛을 느낄 수 없다 했다. 내가 맞는 말이라고 응수했다.
4,5년쯤 전일까. 정권율 선생이 노화중학교로 발령 받았다. 고 선생 차로 셋이서 미리 학교를 둘러보러 갔다. 횟집에서 매운탕을 시켜 점심을 먹으려는 참인데 담배를 피우려고 밖으로 나와 보니까 수족관에서 간재미가 유유히 까딱까딱 헤엄을 치고 다녔다.
“어야, 정 선생, 간재미 한 마리 시키세.”
“그러입시다.”
그 회 맛이 각별했다. 그 뒤로 해마다 봄이 되면 노화에서 먹던 간재미 회 생각이 저절로 났다. 정 선생도 입맛이 비슷했던 모양이다. 노화도 간재미 생각하며 목포에서 간재미 회를 시켜 먹었더니 전혀 그 맛이 아니더란다.
남악 고 선생 집에 차를 세우고 우리는 또 그 부근에서 운전 때문에 술을 못 마신 고 선생을 위하여 이차를 갔다. 한치 안주에다 간단히 한 잔씩 소주를 나누었다. 술집 벽 그림이 이채로웠다. 참으로 긴 하루였다.
고금도 놀러가는 사람들은 음주 운전을 조심해야 한다. 그 길목에서는 벌건 대낮부터 밤늦게까지 음주 단속을 하고 있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