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의 평화
영화명 : Into Great Silence (위대한 침묵)
감독/국가/분류 : 필립 그로닝/프랑스·독일/다큐멘터리
제작년도 : 2005
이 영화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카톨릭교회에서 봉쇄수도원인 가르멜회보다도 더 엄격한 수도원인 카르투지오회에 대해서 알아야 한다. 카르투지오회 수사님들의 일상을 있는 그대로(as it is) 담은 다큐멘터리 영화이기 때문이다.
1. 카르투지오회와 성 브루노(창립자)
카르투지오회는 1084년 프랑스 샤르트뢰즈에서 성 브루노(1032~1101, 축일 10월 6일)가 창설한 관상수도회로 고독한 은수자의 생활과 수도원 공동생활을 병행했다. 성 브루노가 창설한 카르투시오회는 엄격한 규율과 철저한 봉쇄수도회다. 수도회원들은 하루 한끼만 먹으며 기도와 관상, 노동으로 살아간다. 즉 그들은 기도, 연구, 식사, 취침을 모두 각자의 독방에서 해결하고, 밤기도와 아침미사, 저녁기도 때만 성당에 모였다. 특히 카르투지오회 수사들은 거친 모직 수도복을 입고 고기를 전혀 먹지 않으며 청결, 청빈, 순종 서원을 통해 오직 하느님과 합일을 추구하는 수도생활을 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엄격한 관상 수도회 카르투지오 회의 창립자인 브루노는 1032년경 독일 쾰른의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다. 유년 시절에는 쾰른에 있는 성 꾸니벨트 학교에서, 청년 시절에는 프랑스 랭스에서 공부하였다. 그곳에서 가장 뛰어난 학생이었으며, 공부를 마칠 때쯤에는 이미 훌륭한 시인에다 탁월한 철학자요 신학자로 소문이 나 있었다. 사제로 서품된 후 랭스 학교에서 18년간 교편을 잡았으며, 그에게서 높은 성덕과 가르침을 전해 받은 제자들 중에 적지 않은 이들이 유명한 인물이 되었다. 그 중 한 인물이 교황 우르바노 2세였다. 랭스 학교의 교장을 역임하고 랭스 대교구의 고문이 되기도 하였다(1073년). 제자들은 그를 “올바른 길의 안내자, 예지의 스승이며 스스로 하고자 하는 바를 타인에게 가르치는 분”으로 설명함으로써 교사로서도 대단한 명성을 날렸음을 알 수 있다.
그는 교황 그레고리오 7세의 개혁 운동을 적극 지지하여 교회 쇄신에 앞장서기도 하였다. 성직 매매 사건으로 말썽을 일으킨 랭스 대교구 마나세 1세 대주교가 브루노의 규탄으로 퇴위하게 되자 교황사절은 그를 대주교로 추천하였다. 그러나 그는 이를 극구 사양하고 그리스도의 가난한 생활 즉 수도 생활을 원하였다. 후에 시토 회의 창립자가 된 성 로베르또의 의견을 듣기 위하여 찾아갔다. 그에게서 은수 생활을 권고받고, 그러한 장소가 많은 그레노블 교구에 가서 왕년의 제자였던 성 후꼬 주교에게 도움을 청하였다.
후꼬 주교는 꿈에서 샤르뜨뢰즈 유곡 위에 일곱 개의 벌이 떠 있는 것을 보았던 적이 있었다. 브루노와 여섯 동료들을 보고는 그들이 바로 꿈속의 일곱 별들임을 확신하여 꿈에 본 그 장소로 그들을 인도하였다. 브루노는 그 장소를 보고 자신의 이상에 너무나 꼭 들어맞는 곳인지라 참으로 기뻐하면서, 그곳에 소성당과 일곱 개의 작은 초막을 지었다. 그리고는 기도와 묵상, 노동 생활을 하며 청빈을 지키고 엄격한 침묵 생활을 했다. 이것이 카르투지오 회의 시작이었다. 해발 l,300미터의 골짜기에서 6년 동안 그 공동체를 이끌었지만, 그는 너무 유명해져 더 이상 침묵의 은수 생활을 할 수 없게 되었다.
1090년 그의 제자였던 교황 우르바노 2세는 스승을 흠모하여 브루노를 교황청으로 불렀다. 브루노는 순명의 정신에 따라 눈물을 흘리며 은수처를 떠났고, 교황의 보좌로서 교회의 어려운 문제들을 해결하는 데 협력을 아끼지 않았다. 그러나 은수 생활에 대한 동경을 어찌할 수 없었다. 교황도 그의 뜻을 이해했으나 일단 렉기오의 대주교로 임명코자 하였다. 그는 이를 사양하고 은수 생활을 간청한 나머지 허락을 얻었고, 로마를 떠나 제자들과 함께 조용한 곳을 찾아 샤르뜨루즈에서와 같은 생활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감추인 생활이었지만 빛나는 성덕은 곧 알려지게 되었다. 어느 날 사냥을 나온 시칠리아의 영주 로저 백작이 이들의 생활을 보고 감탄하여 남 이딸리아의 칼라브리아에 있는 라 또레의 땅을 기증하였다. 브루노와 동료들은 여기에 각각 떨어져 있는 독방들과 기도실을 신축하는 등 두 번째 수도원을 설립하였다. 이들은 매일 아침 기도와 저녁 기도 시간에만 만날 수 있었고 나머지 시간은 침묵과 고독 가운데 지냈으며 대축일에만 함께 식사하였다. 그들의 주요한 일의 하나는 성서 사본을 필사하는 것이었다.
브루노는 카르투지오 회의 회헌을 쓴 일도, 수도원을 설립할 의도도 없었으나 첫 카르투지오 회의 회원들이 생활한 규범이 회헌으로 정리되고, 그들에 의해 창설자로 추앙되었다. 그는 “한 번도 타락하지 않았기 때문에 한 번도 개혁된 적이 없는 수도원을 창설했다”는 칭송을 받았다. 그는 동료들에 대한 애정이 깊었으며 자연의 아름다움을 감동적으로 묘사하는 시적 감정도 풍부하였다. 그의 남아 있는 작품으로는 금욕에 대한 두 통의 편지와 시편 주해 및 사도 바오로 서간의 주해, 그리고 죽기 전에 받아쓰게 한 신앙고백서와 속된 세상을 경시하는 14절의 비가가 있다.
1101년 10원 6일 칼라브리아에서 자신의 죽음을 예견한 그는 제자들을 가까이 불렀다. 그 동안의 부족했던 점을 용서 청하고 신경을 외면서 이 세상에서의 은수 생활을 마쳤다. 그의 시신은 라 또레의 성 마리아의 은수자 묘지에 묻혔고 그 뒤 그곳 성당으로 옮겨졌다가 다시 성 스떼파노 성당에 안치되었다(1193년). 1514년 교황 레오 10세에 의하여 시성되었고, 1623년 그레고리오 15세에 의해 10월 6일로 축일이 정해졌다. (출처 : 평화신문, 카톨릭신문)
2. 영화감상 (not 영화평)
영화평이라고 하고 싶지 않다. 이 영화의 출연자들과 감독은 평가를 필요로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저 '보여 줄 뿐'이다. 감독의 역할도 그저 촬영할 뿐이다. 연기자에 대한 지도라는 개념은 아예 존재하지도 않는다. 사실 감독이란 개념은 이 영화에서 없다. 수사님들과 똑같이 침묵하고 보여준 것을 그대로 촬영하는 촬영자만 있을 뿐이다. 수사님들은 '그저 보여주고', 감독은 '그저 촬영할 뿐'이다. 그러므로 이 영화에 대해서 평가를 하는 것은 이들에 대한 모독이다. 그저 감상할 뿐이다.
무려 10세기(1,000년)동안 방문객을 전혀 허락하지 않았던 봉쇄수도원이 딱 1번 문을 열어 세속인들이 보게 된 것은 수도회가 교황요한바오로2세성하의 가르침(교회 안의 것을 세상에 보여주라)을 받아들인 덕분이다.
필립그로닝감독은 19년을 기다린 끝에 촬영을 허락받았고, 감독 혼자서만 들어와서 카
메라만(조명기기. 사운드 등 각종 장비 불허) 가지고 촬영할 것, 일체의 대화를 하지 말것, 수사들과 똑같은 침묵 생활을 할 것, 어떠한 해설도 붙이지 말고, 어떠한 논평도 하지 말 것, 영화제에 첫 개봉 할 것 등을 서약하고 촬영을 했다고 한다. 이 서약을 하면서 필립그로닝감독은 당연하게 생각했고, 촬영을 허락해 주신 수사님들에게 깊은 감사를 드렸다고 한다. 알프스 산맥의 해발 1,300미터에 위치한 수도원에서 6개월간 수사님들과 똑같이 생활하며, 침묵으로 있는 그대로 촬영했다.
이 영화는 '완전한 침묵과 위대한 침묵'이 무엇인지를 잘 보여준다. 수사님들은 철저하게 독방생활과 침묵을 기본 생활 원칙으로 해서 기도와 관상(성서 필사 포함) 그리고 노동으로 하루 생활을 반복한다. 식사는 하루 한끼(영화상으로는 빵, 과일, 죽)이고 고기는 평생동안 먹지 않는다. 하루에 성무일도와 미사시에만 수도회성당에 모이고, 말을 하는 경우란 오로지 공동체 기도(미사포함)일 때 뿐이다. 일주일(주일과 특별한 전례일)에 한번 4시간 동안의 산책이 허락되고 이 시간에만 대화가 가능하다. 이 시간에 마을 주변을 산책을 하는 경우에도 마을 주민들에게 말을 걸어서도 안되고, 무엇을 주거나 받아서도 안된다. 완전한 침묵이다. 즉, 수도회는 완전한 침묵이다. 이 침묵 속에서 영화상에서 수도지망자가 입회서원을 할 때 본원의 원장수사님이 회칙에 따라 말한 그대로, 완전한 침묵으로 내적 거룩함으로 하느님과 일치되는 길을 걷는 것이다. 영화의 총 시간은 168분이다. 현장에서 직접 재 본 시간이다. 약 3시간짜리 영화다. 그런데 수사님들이 입을 뗀 시간(공동체기도 포함)은 다 합해 봐야 5분도 되지 않는다. 심지어 배경으로 깔린 그레고리안 성가의 합창소리를 포함해도 10분을 넘지 않는다. 영화 전체가 완전한 침묵이 무엇인지를 보여준다.
그럼에도, 이 영화는 전혀 지루하지 않았다. 항상 동일한 하루 일과, 독방생활(심지어 식사도 각 방으로 외부에서 작은 문을 통해서 밀어 넣어준다. 마치 감옥독방처럼), 자급자족수준의 소박한 노동, 언제나 동일한 주변환경, 방문객은 없고, 만나는 사람도 동일하고 대화는 절대 불가다. 입을 여는 때는 오로지 공동체기도일 때 뿐이고, 일주일에 1번있는 4시간의 산책일 때 뿐이다. 그것도 외부인과는 안된다. 이런 삶은 매우 지루할 것 같다. 아마도 이런 삶을 살아보라고 하면 1년을 버틸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아마도 거의 없을 것이다. 이런 삶은 매우 힘든 삶이다. 그래서 카르투지오수도회의 수사님들의 수는 전 세계 19개 지부에서 370명에 불과한지도 모르겠다. 이 지루해 보이는 삶이 지루해 보이지 않는 것은, 바로 '완전한 침묵'이 '위대한 침묵'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영화 제목은 정말 잘 작명했다. '위대한 침묵 속으로'
수사님들의 위대한 침묵의 삶은 한마디로 '하느님의 은총과 섭리에 완전히 의탁하는 삶'이라고 할 수 있다. 하느님의 섭리에 위대한 침묵으로 점점 민감해지고, 하느님의 은총의 흐름에 자신을 완전히 맡기는 것이다. 바람이 불어 구름이 바람이 부는대로 그대로 흘러가듯이 바로 그렇게! 하느님의 소리를 듣기 위해서 그외 모든 것에 의도적인 차단을 하는 것. 위대한 침묵!
이 영화를 끝까지 졸지 않고 볼 수 있으면 좋겠다. 지루해 하지 말고. 침묵의 의미와 한 평생을 이런 지루해 보이는 삶을 살아가는 수사님들의 삶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느끼기를 바란다. 큰 깨달음을 얻을 것이라 확신한다. 내가 얻은 깨달음은 바로 이것이다.
"오직 한 분이신 하느님 뿐이십니다. 그 외는 모두 허상입니다!"
작은 것 1. 수사님들이 연구하는 것은 모두 성경와 성인들이 직접 쓴 깨달음, 수도회칙뿐이다. 해설서는 단 하나도 나오지 않는다. 성경 필사를 항상 하신다. 이는 매우 중요하다. 평신도 그리스도인들도 해설서는 볼 필요가 없다. 해설서는 사실 의미가 없는 것이다. 성인전도 의미가 없다. 진정 깨달음을 얻으려면 언제나 '원전'을 보아야 한다. 해설이 들어가는 순간, 이는 새로운 책이기 때문이고, 오류가 끼어들기 때문이다. 검증된 것은 오로지 원전뿐이다. 평신도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성경과 성인들이 직접 쓴 책이나 글, 교황회칙 등이 원전이 될 것이다.
작은 것 2. 영화에서 수사님들이 사용하는 성가책(가죽표지의 오래된 책) 악보는 4선지다. 5선지가 아니다. 빨간색으로 줄이 쳐 있는 4선지를 지금도 그대로 사용하고 계신 것이다. 전통을 고수하는 모습이다. 재미있는 것은 한 수사님이 사용하시는 노트북컴퓨터다. IBM Thinkpad다. 그것도 아주 오래된 버전의 컴퓨터다. 이 영화가 2003 혹은 2004년 경에 6개월 동안 촬영되었으니까, 아마도 20년 이상은 사용하신 것 같다. 전기는 개설이 되어 있지만, 전기를 사용하는 모습은 거의 드물다. 전기라는 개념이 아예 없었던 1,000년전에 세워진 그대로(1,600년대에 개축) 햇빛이 잘 비치는 위치에 책상이 위치해 있고, 채광이 건물 전체에 고루고루 잘 들도록 훌륭하게 설계되어 있다.
작은 것 3. 영화에서 한 수사님이 일주일에 한 번 있는 대화 시간에 다른 수사님에게 잠시 '세울'에 간다고 한 장면이 있다(영화에서 사용하는 언어는 프랑스어다. 독일어가 보조 언어로 사용되었다). 한국의 서울을 지칭한 말이다. 아마도 이는 한국 경북 상주에 수도회지부를 설립하시기 위해서 파견된 것인 모양이다. 한국의 경북 상주에 있는 카르투지오수도회한국지부는 2005년 1월에 설립미사를 안동교구 주교님을 모시고 집전했기 때문이다. 영화에서 나오는 바로 그 수도원(그랑드 샤르뜨뢰즈 수도원, Le Grande Chartreuse)이 성 브루노께서 창설하신 바로 그 자리이고, 카르투지오수도회의 본원이다.
작은 것 4. 나무로 만든 스키. 영화의 마지막 부분에 나오는 장면이다. 한 수사님이 나무로 만든 타원형 모양의 작은 스키를 메고 나가신다. 일주일에 한 번 있는 산책의 시간이다. 동료 수사님들 6~7분과 함께 수도회 주변으로 가셔서 스키를 타신다. 눈썰매와 같다. 이 부분에서는 모두 웃어도 좋을 시간이다. 그 장면 하나로도 인간의 순수함의 전형을 보기에 충분하다 할 것이다.
작은 것 5. 알프스의 아름다움. 거대한 바위(특히 스키를 타러 가시는 길 장면에서 나오는, 한국의 산에서는 절대로 볼 수 없는 대륙적인 느낌인 한 덩어리의 거대한 바위), 수도회 주변의 전체적인 산과 겨울과 봄의 모습. 아름다운 수도회 전경과 내부의 모습. 정말로 아름답다. 이것도 이 영화의 즐거움거리 중 하나다.
작은 것 6. 이 영화는 계절로 보면, 겨울부터 봄/초여름까지를 주로 담고 있다. 물론 정확한 것은 아니다. 미루어 짐작해 보는 것이다. 영화는 어떠한 해설도 없기 때문이다. 아마도 추측하건데, 대림절에서 시작해서 부활절까지를 담고 있는 것 같다. 초반부의 어둠속에서 수사님들의 장엄한 그레고리안 성가 합창과 함께 빛이 밝혀 나오는 부분은 예수님성탄대축일미사 전례 중 일부인 '빛의 예식'으로 보인다. 그리고 2시간을 넘어가는 부분에서 나오는 성체거동과 미사는 예수님부활대축일미사로 보인다. 그래서 아마도 영화에서 담아낸 부분은 교회전례력으로는 대림절에서 부활절까지라고 본다. 물론 연중시기도 모두 포함하고 있다. 성경상으로 이 기간은 '모든 기간, 전체 기간, 시작과 끝이 완결되는 기간'이다.
작은 것 7. 연극의 '막' 역할을 하는 문구. 문구 중에서 '자랑하지 말라'는 것이 있는데, 이 부분이 매우 새롭게 다가왔다. 모든 것은 하느님께서 주신 것인데, 안 받은 것 처럼 자랑하지 말라는 것이다. 이를 역으로 뒤집어 보면, '자랑한다는 것은 바로 하느님께로부터 안 받았다고 하는 것과 같으며, 이는 자신 스스로가 창조주/구원자라고 선언하는 것과 같으니, 바로 악의 전형적인 모습인 것'이다. 그러므로, 자랑하는 것은 '하느님을 부정하는 것'이다. 작은 깨달음이었다.
작은 것 8. 하느님께 목숨을 건다는 것. 이는 매일을 치열하게 전투적으로 속도전으로 살아간다는 그런 의미가 아니다. 카르투지오회 수사님들이 하느님께로 향하는 내적인 여정의 속도는 '현대 시대의 속도라는 관점'에서 보면 느리다. 너무나 느려터져서 굼벵이 같다. 수사님들의 내적 여정의 속도는 우보(牛步, 황소걸음)로서 뚜벅뚜벅 천천히 나아가는 그것이다. 그리고 한결같다. 이것이 진정한 하느님께로 향한 여정의 발걸음 속도다. 매우 의미있는 중요한 깨달음이었다. 1) 하느님을 향한 하나 뿐인 한 길을 한결같이, 2) 황소처럼 느리지만 뚜벅뚜벅 걸어서 3) 하느님께 나아가는 것! 이것이 하느님께 목숨을 건다는 것의 속도다! 동양의 속담으로, 우보만리다!
작은 것 9. 장님수사님의 말을 통한 영화의 결론. 정확한 표현을 기록할 수는 없지만, 이런 내용이었다. '내가 장님이 된 것은 하느님께서 내 영혼의 유익을 위해서 해 주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선하시고 전능하십니다. 또한 하느님께서는 오로지 인간에게 유익한 것만을 생각하시고 유익한 것만을 허락하시고 주십니다. 이것을 잊지 마세요."
'위대한 침묵', 이 영화를 적극적으로 추천한다. 과거 '그리스도의 수난'과 함께 진실로 마음껏 추천하고픈 영화이다. 이 영화에서 얻는 깨달음은 아마도 사람마다 다를 것이다. 이 영화는 분명히 은총이다. 특히, 그리스도인들이라면 이 '은총의 영화'를 보는 기회를 놓치지 말기 바란다.
영화는 서울의 씨네코드선재에서 상영되고, 하루에 4번 상영된다. 위치는 풍문여고, 덕성여고 길에, 정독도서관 맞은 편에 위치해 있다. 지하철의 경우, 지하철 3호선 안국역 1번 출구에서 조금 걸으면 풍문여고가 있고, 골목길을 따라 쭉 걸어가면 씨네코드선재가 있다. 골목길 참 예쁘게 조성되어 있다. 풍문여고에서 씨네코드선재로 가는 길의 맞은 편이 인사동길이다. 주차장은 4대 정도로 협소하다. 도서관에 주차를 해도 될 것 같기는 한데, 주차가 불편하니까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자세한 내용은 씨네코드선재싸이트(http://cafe.naver.com/artsonjearthall)를 참조하기 바란다.
3. 평신도그리스도인과 카르투지오수사님들
나의 블로그에서 항상 이야기 하듯이 평신도그리스도인과 수도자/성직자의 삶의 모양은 다르고, 달라야 한다. 소명이 다르고, 역할도 다르다. 그러나, 누구나 하느님과의 일치라는 목표는 동일하다. 단 하나의 목표다.
평신도그리스도인은 카르투지오수도회의 방식으로 하느님과 일치를 이루어갈 수는 없다. 세상속에서 수 없이 많은 대화를 '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평신도그리스도인은 침묵을 해서는 안되는 존재다. 침묵을 하면 오히려 이는 악이다. 물론, 지나친 말의 사용은 당연히 자제해야 하지만, 평신도그리스도인은 말을 해야하고, 선포해야 하며, 타인과 사회와 적극적인 의사소통을 해야 한다. 이것이 평신도그리스도인의 삶의 방식이다.
그런데 이 안에서 카르투지오수사님들과 같은 침묵을 경험할 수 있다. 즉, 위대한 침묵이다. 자신의 가정과 직업, 직장, 일, 노동, 취미, 동호회 등 모든 생활, 모든 것에서 하느님을 선포하고, 하느님을 살려고 목숨을 걸고 노력하면 하느님을 제외한 모든 것(= 허상)이 점차로 사라져 간다. 허상에 의해서 휘둘리지/영향받지 않고 기존의 허상도 벗겨져 사라진다(허상의 노예가 아니라, 하느님 모상으로 홀로서기하는 모습). 수 없이 많은 정보와 현란한 네온사인과 수 없이 많은 글과 말 속에서도 허상들은 '흩어 지나가는 바람'처럼 사라진다. 그리고 홀로서기한 나와 하느님만 남는다. 그리고 하느님과 나와의 일치다. '절대진리에 기반한 우선순위가 분명한 삶은 바로 이렇게 위대한 침묵과 같다!'
평신도그리스도인은 완전한 침묵은 해서도 안되지만, 위대한 침묵은 해야 한다. 평신도그리스도인은 삶의 우선순위를 그리스도 예수님과 일치시켜서 의도적인 차단을 할 수 있다. 언제나 분별할 수 있다. 성령께서 함께 하심으로. 평신도그리스도인에게 위대한 침묵은 바로 '삶의 우선순위를 그리스도 예수님께 맞추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수도자와 평신도 그리스도인은 같다. 역할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삶의 방식은 다르지만, 본질은 언제나 그리스도 예수님으로 같다. 그리스도 예수님은 포도나무이시고, 평신도그리스도인, 수도자, 성직자는 모두 가지다. 그리스도예수님께로부터 나온 한 형제자매다. 그리스도예수님을 뿌리와 자양분으로 그리스도예수님과 함께 그리스도예수님을 향해서, 서로 다른 역할과 방식으로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걸으신 길을 같이 걸어가는' 동반자들이다!"
첫댓글 2005년도작이면, 일반 비디오 가게에서 비디오로도 빌려 볼 수 있는걸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