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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효온 南孝溫(1454~1492)】「"死가 두려워 충신의 이름을 없앨 수 없다".」
개국공신 남재의 5대손이다. 남효온의 아버지는 남전, 어머니는 이곡의 딸이고 남효온의 할아버지는 남준, 할머니는 강석덕의 딸이며 증조할아버지는 남간이다. 남효온의 아내는 성도 이름도 전혀 알려지지 않았는데 아내와의 사이에서 아들 남충세와 2명의 딸을 얻었다. 첫째 사위는 임성, 둘째 사위는 이온언으로 이온언은 한산군 이손의 셋째 아들이다. 병조판서를 지낸 남이 장군, 영의정을 지낸 남곤, 문신 남포와는 친척이다. 남효온은 김종직의 제자이자 김시습의 제자로 김굉필, 정여창 등과 함께 김종직에게 가르침을 받았고 주계정, 심원, 안응세 등과 친교를 맺었다. 세조가 단종을 몰아낸 일이 마음에 걸린 남효온은 현덕왕후 권씨의 소릉 복위를 상소하였으나 임사홍, 정창손 등 간신들의 저지로 뜻을 이루지 못하자 세상을 등지고 유랑 생활로 인생을 마쳤다. 사망 후 갑자사화 때 김종직의 문인이고 현덕왕후 소릉의 복위를 주장했다하여 부관참시당했다가 중종 때 소릉 복위가 실현되자 좌의정에 추증되었다. 그가 저술한 육신전은 숙종 때 간행되었으며 정조 6년에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먼저 김시습의 사상과 연계되는 점을 보면 김시습의 사상체계는 도일기일심(道-氣-心)으로 이어지는 형태였는데, 남효온의 사상체계 또한 거의 같다. 이는 도-심으로 연계되는 구조인데 남효온에게 있어 도와 심은 연계 내지 일치되며, 특히 이 모든 것이 심으로 귀결되는 것으로 심을 통해서 전 우주의 생성 변화가 이루어지는 것으로 보았다. 남효온이 심을 강조한 사상체계는 <성론>에서도 드러난다. 당시 일반적으로 본연지성과 기질지성을 양분해서 이해하는 경향이 일반적이었는데, 이에 대해서 성은 하나라고 하면서 기질지성은 성에 담겨지는 것이라고 설명하였다.
남효온의<심론>은 그의<귀신론>에서 보다 구체적으로 제시되었다. 그가 다시 귀신론을 지었던 것은 당시 만연하던 무불의 습속을 이론적으로 공격하는데 있었다고 본다. 남효온도 다른 당대 유학자들처럼 불교가 무속처럼 사람의 눈을 흐리게 한다고 비판했기 때문이다. 이는 다시 말하면 당시에 무속이든 불신이든 사람들의 운명을 이들 귀신들이 좌우하고 있어 귀신에게 기도하면 복이 온다는 생각이 만연되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이에 대해 남효온은 귀신이란 이기(理氣)와 다름이 없다고 주장했다. 요컨대 우주 만물의 생성과 변화를 주관하는 도교의 도에 해당하는 것으로서 이것은 심에 의해서 구현되는 것이라고 본 것이다. 그는 동시에 귀신이 바로 이이기 때문데 禮가 아닌 것은 흠향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하면서 무불에게 드리는 기도가 결국은 흠향되지 않을 것임을 지적하였다.
아울러 이치에 근거하여 당시에 행해지고 있던 습속들에 대해서 하나하나 논박하였다. 이를테면 귀신에게 점을 쳐 화복을 구하는 테세나 풍수지리를 따지는 풍속 등을 귀신의 이치를 가지고 설파하였다. 결국 남효온은 당시 널리 퍼져 있는 귀신화복론에 대해 귀신은 사람에게 화를 끼치지 않음을 말하면서 무석술가의 설이 만연되고 있는 것은 도학이 밝지 않은 데 있다고 지적하였다.
南孝溫(1454-1492)의 <六臣傳>에 소개된 성삼문ㆍ박팽년ㆍ하위지ㆍ이개ㆍ유성원ㆍ유응부 6명을 가리킨다.
端宗 복위 운동에 참여한 성승ㆍ박팽년ㆍ유응부ㆍ성삼문ㆍ이개 등은 처형된 뒤에 한강 기슭 노량진(露梁津-新增東國輿地勝覽 果川縣)에 묻혔다고 전해진다. 正祖 때인 1782년 이곳에는 사육신의 충절을 기리는 神道碑가 세워졌다.
「육신전」은 박팽년(朴彭年)·성삼문(成三問)·이개(李塏)·하위지(河緯地)·유성원(柳誠源)·유응부(兪應孚) 순으로 한 사람씩 전을 기록한 뒤에 마지막에 찬(贊)을 붙였다. 각 인물의 성격이 잘 표현되어 있으며, 특징적인 면모를 보여줄 수 있는 일화를 곁들이고 있다.
박팽년은 단종이 폐위되자 경회루 못에 빠져죽으려 하였다. 그러자 성삼문이 후일을 도모하자며 말린 일을 기록하였다. 성삼문은 단종이 세조에게 선위(禪位)하자 옥새를 안고 통곡하였다는 사실을 기록하였다. 세조는 왕위에 오른 뒤에 하위지를 예조참판으로 삼았다. 하위지는 녹을 먹기를 부끄러워하여 한 방에 쌓아두었다 한다.
무인이었던 유응부는 단종복위계획이 발각된 뒤에 세조가 무사를 시켜 그의 살가죽을 벗겼으나 굴하지 않았다. 그는 성삼문 등을 돌아보며, “사람들이 서생(書生)과는 일을 꾀할 수 없다더니 과연 그러하구나.”라며 탄식하였다고 한다.
또한, 불에 달군 쇠로 단근질을 하여도 낯빛을 변하지 않으며, “이 쇠는 식었으니 다시 달궈오라.”며 끝내 굴복하지 않았다는 이야기를 비장미가 넘치게 서술하고 있다.
사육신의 행적을 모두 서술한 뒤 남효온은 찬을 통하여, “누가 신하가 못되리요마는, 지극하도다, 여섯 분의 신하됨이여! 누가 죽지 않으리요마는, 크도다, 여섯 분의 죽음이여!”라며 신하로서의 의리를 지킨 육신들의 절개를 높이 평가하였다.
이 <六臣傳>의 힘입어, 成宗 때에는 그들의 후손도 관직에 오를 수 있도록 禁錮된 것을 풀어 주었으며, 肅宗 때인 1691년에는 사육신 6명의 관작을 회복시키고 鷺(露)梁津(1895년 前에는 果川縣 所屬)에 愍節書院을 지어 이들의 위패를 안치하였다. 英祖 때에는 김문기ㆍ박중림 등의 관작도 회복되었다. 正祖 때인 1791년에는 단종의 능인 莊陵에 配食壇을 세울 때 세종의 아들로 단종 복위 운동에 참여해 탄압을 받은 和義君(世宗의 9째아들) 이영(李瓔)의 충절도 사육신 못지않으므로 함께 모셔야 한다는 상소가 올라오자 화의군 말고도 사육신에 못지않은 사람들을 모두 함께 配享하기로 하여 규장각과 홍문관에 명하여 <御定配食錄>을 작성했다. 이때 六宗英이라 하여 安平大君부터 錦城大君ㆍ和義君ㆍ漢南君ㆍ永豊君ㆍ李穰(태조의 이복동생 義安大君 李和의 손자)까지 왕실의 종친 여섯 명을, 四懿戚이라 하여 宋玄壽부터 權自愼(端宗의 外叔)ㆍ鄭悰ㆍ權完까지 왕실의 인척 네 명을, 그리고 金宗瑞ㆍ皇甫仁ㆍ鄭苯 세 재상을 三相臣, 閔伸ㆍ金文起ㆍ趙克寬을 三重臣, 成勝ㆍ朴崝을 兩雲劒으로 하였다. 이외에 사육신과 그들의 가족, 허후(許詡)ㆍ허조(許慥)ㆍ박계우(朴季愚)ㆍ이보흠(李甫欽)ㆍ정효전(鄭孝全) 등 계유정난과 단종 복위 운동의 과정에서 희생된 인물들의 위패를 함께 안치하여 제사를 지내게 하였다.
端宗(1441-1457)도 사후 200여 년 후인 1681년(숙종 7)에 伸寃되어 魯山 君에서 大君에 追封되었으며, 1698년(숙종 24) 임금으로 복위되어 廟號를 端宗이라 하였다. 陵은 단종이 목숨을 끊은 강원도 寧越의 莊陵이다. 妃는 宋玹壽의 딸인 定順王后(1440-1521)로 陵은 思陵으로 南楊州 眞乾邑 思陵里에 있다. 定順王后는 淨業院에서 지내며 늘 端宗을 그리워하였단다. 東望峰, 東望亭.
남효온은 젊어서부터 글을 읽어 큰 뜻이 있었다. 성종조에 글을 올려 일을 말했다가 기휘(忌諱)하는 바에 저촉되어 옥에 갇혀 국문을 당하기도 했다. 그러자 스스로 그 뜻을 세상에 행할 수 없음을 알고 마침내 방일하여 얽매이지 않아 시속과 더불어 오르내리지 않았다.
그리고 노자와 장자의 고허한 의론을 본받아 혜강(嵇康)·완적(阮籍)의 방달한 행동을 하였다. 문장을 지음에 역시 초매하여 고체(固滯)한 누습이 없었으며, 더욱이 시에 능하여 당나라 시인의 풍격이 있었다.
그러나 세속의 세태에 격분하여 여기저기 떠돌아다니며 이단이 되어 죽음에 이르도록 깨닫지 못했으니, 진실로 우리 도의 죄인이라 하겠다. (<연산군 일기> 1498년 8월 16일자)
여기에 나오는 혜강과 완적은 중국 고사 죽림칠현에 나오는 절의의 인물들이다. 연산군 시대의 사관이 남효온을 '죄인'이라 기술하면서도, 혜강·완적에 비할 정도로 그는 절의 있는 방외인의 삶을 살았다. 후세에 생육신으로 추앙받은 사유가 있었다.
남효온은 어릴적에 서울 낙선방에서 공부하고 흥천사에서 일암 스님에게서 배웠다. 이어서 선비 김수온에게 시를 배우고 33살 때에는 당대의 학자 김종직을 만나 사제관계를 맺었다. 김종직은 '조의제문(弔義帝文)'으로 부관참시를 당한 조선유학의 거두이다. 이런 인물들을 찾아 배우고 교유한 청년 남효온의 범상하지 않음을 보게 한다.
18살을 전후하여 성균관에 입문하여 강응정·박연·정여창 등과 소학계를 맺고 학문에 정진하는 한편 가까운 벗들과 한강 주변을 누비면서 분방한 청년기를 보내었다.
남효온은 20살 이후 추강이라는 호를 쓰기 시작하면서 나라의 일에 관심을 보였다. 25살이 되던 1478년(성종 9) 4월 15일 느닷없이 하늘에서 흙비가 내렸다. 요즘 중국에서 날라온 황사와 비슷한 현상이었지만, 당시에는 큰 이변 또는 변괴로 인식되었다. 성종은 자신의 부덕의 소치라고 생각하면서 전국의 선비들에게 조언을 구하였다.
추강은 그동안 생각해온 대로 단종의 어머니 소릉의 복원을 청하는 등 8개조로 이루어진 상소를 올렸다. 세조가 쿠데타를 일으켜 단종을 폐위했다가 죽이면서 그의 생모도 서인으로 강등되어 묘(소릉)가 종묘와 능묘에서 내쳐졌다. 추강의 상소는 이것을 복원하라는 내용이었다. 1478년이면 세조가 죽은 지 10년밖에 안되는 시점이다.
추강의 상소는 집권세력으로부터 거센 반발을 받았으나, 임금이 구언을 청하여 올린 상소를 공개적으로 단죄할 수는 없었다. 그 대신 추강은 골수 훈구파에게 '찍히게' 되었다.
추강은 이후 관직에 나가는 길을 포기하고 <육신전(六臣傳)>의 집필에 나섰다. 육신이란 단종의 복위를 시도하다가 변절자의 밀고로 능지처참을 당한 박팽년·성삼문·이개·하위지·유성원·유응부를 일컫는다.
사육신은 조선왕조에서는 반역자의 무리에 속한다. 1456년 6월에 육신이 처형되었으니, 추강이 이들의 전기집필을 시작한 때는 불과 25년이 경과한 시점이다. 세조의 아들이 왕이고, 계유정란의 공신과 그 후예들이 권좌에 앉아 있었다. 추강의 <육신전> 집필은 섶을 지고 불로 뛰어드는 위험천만한 모험이 아닐 수 없었다. 더욱이 그는 소릉복원의 상소건으로 훈구파에게 찍혀 있는 처지였다.
추강은 여러 해 동안 많은 자료를 모으고 관련자들을 만난 증언을 토대로 <육신전>을 집필했다. <육신전> 외에도 계유정란 때 세조를 따르지 않았던 허후(許詡)의 전(傳)도 별도로 저술하였다. 그 때에 추강이 아니었으면 사육신의 고결한 행적은 우리 역사에서 사라지고 말았을 것이다.
※ 生六臣 - 金時習(1435-1493)· 元昊· 李孟專(1392-1480)· 趙旅(1420-1489)· 成聃壽(成三問과 6촌간)· 南孝溫(1454-1492)인데, 남효온 대신에 權節(1422-1494)을 넣기도 한다.
『星湖全集』에 <書南秋江事蹟後>가 있기도 하다.
※ 世宗 1397-1450, 昭憲王后 1395(태조 4)∼1446 – 8남 2녀 / 文宗 1414-1452 顯德王后 權氏 1418-1441 / 世祖 1417-1468, 貞熹王后 尹氏(1418-1483) / 安平大君 1418-1453 / 金宗瑞 1383-1453 / 端宗 1441-1457(1452-1455), 定順王后 宋氏(1440-1521) 宋玹壽(世祖의 친구, 1457년 금성대군이 사사되자 鄭昌孫과 兩司의 주장으로 주살당함)의 女 / 金礩 1422-1478, 鄭昌孫 1402-1487 / 南孝溫 1454-1492(南怡의 7촌 조카) / 韓明澮 1415–1487 / 申叔舟 1417–1475 / 權擥 1416–1465 寒羹郞 / 鄭麟趾 1396-1478 / 南怡 1441-1468 / 李浚 1441-1479 / 德宗(懿敬世子) 1438-1457 桃源君, 昭惠王后(仁粹大妃-韓確之女1437-1504) / 成宗 1457-1494 / 太宗 1367-1422 元敬王后 閔氏(1365-1420) / 金宗直(1431-1492) /

첫댓글 「육신전」은 박팽년(朴彭年)·성삼문(成三問)·이개(李塏)·하위지(河緯地)·유성원(柳誠源)·유응부(兪應孚) 순으로 한 사람씩 전을 기록한 뒤에 마지막에 찬(贊)을 붙였다. 각 인물의 성격이 잘 표현되어 있으며, 특징적인 면모를 보여줄 수 있는 일화를 곁들이고 있다.
박팽년은 단종이 폐위되자 경회루 못에 빠져죽으려 하였다. 그러자 성삼문이 후일을 도모하자며 말린 일을 기록하였다. 성삼문은 단종이 세조에게 선위(禪位)하자 옥새를 안고 통곡하였다는 사실을 기록하였다. 세조는 왕위에 오른 뒤에 하위지를 예조참판으로 삼았다. 하위지는 녹을 먹기를 부끄러워하여 한 방에 쌓아두었다 한다.
무인이었던 유응부는 단종복위계획이 발각된 뒤에 세조가 무사를 시켜 그의 살가죽을 벗겼으나 굴하지 않았다. 그는 성삼문 등을 돌아보며, “사람들이 서생(書生)과는 일을 꾀할 수 없다더니 과연 그러하구나.”라며 탄식하였다고 한다.
또한, 불에 달군 쇠로 단근질을 하여도 낯빛을 변하지 않으며, “이 쇠는 식었으니 다시 달궈오라.”며 끝내 굴복하지 않았다는 이야기를 비장미가 넘치게 서술하고 있다.
사육신의 행적을 모두 서술한 뒤 남효온은 찬을 통하여, “누가 신하가 못되리요마는
지극하도다, 여섯 분의 신하됨이여! 누가 죽지 않으리요마는, 크도다, 여섯 분의 죽음이여!”라며 신하로서의 의리를 지킨 육신들의 절개를 높이 평가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