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9년] 미국 아폴로 11호 암스트롱 인류최초 달착륙
← 미국 우주인 올드린이 달의 대지에 굳게 발을 딛고 서 있다. 먼저 내린 암스트롱 선장의 모습이 우주복 헬멧에 비쳐 보이고 있다.
미국 아폴로11호 우주비행사 닐 암스트롱이 1969년 7월 20일 바위로 뒤덮인 달의 `고요한 바다` 표면에 인류최초로 발을 내디뎠다. 1957년 소련의 스푸트니크1호 발사와 함께 시작된 미소간의 우주개발 경쟁에서 미국이 처음으로 전세를 역전시키는 순간이었다. 소련은 그동안 첫 유인우주선 발사, 첫 지구궤도 선회, 첫 우주유영 등에서 미국을 앞서 나갔다.
아폴로11호 착륙은 계획대로 진행됐다. 달 착륙선 이글은 암스트롱과 올드린을 태워 모선 콜롬비아를 떠났고, 함께 출발한 콜린스는 달 주위를 110km 상공에서 계속 돌았다. 마침내 달 착륙선의 해치가 열렸고 인류최초로 달에 내린 암스트롱은 "이것은 한 인간의 작은 발자욱이지만 인류에게 있어서는 거대한 도약"이라고 감회를 표현했다. 18분 늦게 달에 착륙한 올드린은 첫 발을 내디면서 "아름답군, 아름다워, 멋진 황량함이야"라고 말했다. 그러나 역사적인 사진의 주인공은 올드린이 차지했다. 암스트롱만이 카메라를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2시간 31분을 달에 체류하며 예정대로 임무를 모두 마친 이들은 달을 떠나 모선인 콜롬비아호와 도킹하고 지구로 귀환해 하와이 남서쪽 1500km에 위치한 태평양에 무사히 착륙했다.
17일 발사된 이래 119시간 18분이 소요됐고 120만km의 우주여행이었다. 닉슨 대통령은 비행사들을 직접 환영하기 위해 항공모함 호네트에 타고 있었으나 유리창 너머에서만 이들을 대면할 수 있었다. 비행사들은 엄격한 검역으로 3주간 격리되어야 했기 때문이다. 검역이 끝난 후 뉴욕과 시카고에서는 국가적인 영웅을 환영하는데 어울리는 퍼레이드를 벌였고 전 미국은 열광했다. 이후 미국은 아폴로 11호를 시작으로 1972년 12월 17호까지 다섯번 달착륙에 성공했다./조선
[1996년] 제26회 애틀랜타 올림픽 개막
20세기 마지막 지구축제 96하계 올림픽대회가 1996년 7월 20일 오전 9시30분 미국남부 조지아주 애틀랜타시 올림픽 스타디움에서 화려한 개막식을 갖고 16일간의 열전에 들어갔다. 인종 종교 국경을 초월한 온 인류가 한자리에 모인 제26회 하계올림픽대회 개막식은 '지상최대의 쇼'로서 올림픽 최대 하이라이트 '영웅들을 부른다'는 주제로 4시간 가까이 진행됐다.
한국 선수단은 알파벳순에 따라 케냐에 이어 오전 11시10분쯤 남자배구의 기수인 최천식을 앞세우고 96번째로 입장했다. 이번 올림픽대회에서 한국은 유도 양궁 배드민턴 레슬링 등에 금 7개 은 15개 동 5개를 획득해 우크라이나(금 9개)에 이어 종합 10위를 차지했다. 1996년 8월 5일 주경기장서 폐막식을 끝으로 올림픽 창설 1백년 째에 거행된 애틀랜타 올림픽이 막을 내렸다. /조선
[1994년] 벨기에의 초현실주의 화가 폴 델보 사망
벨기에의 화가. 리에주 안타이트 출생. 특이한 초현실주의의 화가로 지목된다. 처음에는 건축을 지망하였으나 화가로 전환하였다. 1920∼1924년 브뤼셀의 미술학교에서 배웠고, 초기의 M.블라맹크를 닮은 포브적(fauve 的:野獸派的)인 풍경·인물은 벨기에의 표현파 화가 안소르와 페르메크의 영향을 받았다. 얼마 뒤 형이상회화(形而上繪畵)의 화가 G.키리코에게 자극을 받아 독자적인 꿈과 향수의 세계를 구축하고 있다.
초현실주의에 적극적으로 참가하지는 않았으나, 1935년 이후 초현실주의전(展)에 출품하였다. 그의 꿈은 반복을 노리는 것으로 명쾌한 원근법(遠近法) 속에 반복해서 나형(裸形)과 건물이 부상한다. 배경에는 그리스 신전이 자주 쓰이지만, 이것도 순결 그대로의 나부(裸婦)와 마찬가지로 정신의 증표이다. 그리하여 고전적인 스타일을 활용하여 달빛이 쏟아지는 황량한 풍경 속을 몽유병 환자처럼 방황하는 나부를 주제로 그린다. 대표작에 《불안한 거리》(1941) 《메아리》(1943) 등이 있다. /naver
[1978년] 고리원전 1호기 준공
국내 첫 원자력발전소인 고리원자력발전 1호기가 7년 7개월에 걸친 공사 끝에 1978년 7월 20일 준공됐다. 이로써 우리나라는 세계에서 21번째, 그리고 동아시아에서는 일본에 이어 두 번째로 원자력발전소 보유국이 됐다.
당시 원자력 1호기의 시설용량은 58만7천kw로 우리나라 전체 발전용량 6백59만kw의 9%선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외자 8백40억원 등 총 1천5백60억원의 공사비가 든 고리원전 1호기는 발전 시설용량 58만7천kw의 가압경수로형으로서 당시 국내 기술이 전무해 미국의 웰코사가 전반적인 건설책임을 지고 원자로 설비와 연료공급을 맡았고 영국에 제너럴일렉트릭사가 터빈 발전기 공급과 토건공사의 감독을 맡았다. 국내에서는 현대와 동아건설이 원자로와 터빈 공사에 하도급업체로 참가했다.
세계각국이 급증하는 전력의 공급선을 공해가 비교적 적은 핵에너지에서 찾기 시작한 것은 고리원전 1호기 준공일로부터 불과 20여년전의 일이었다. 1956년 9월, 영국의 칼더홀 원자력발전소가 세계최초의 상업발전을 시작한 이래 각국은 다투어 원자력 발전소를 건설하기 시작했다. 에너지자원이 부족하기만 했던 우리나라도 새로운 에너지원 개발에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 그러던 1962년 원자력발전소 건설구상을 하기 시작, 1971년 고리원전 1호기를 착공, 7년 7개월 만인 1978년 오늘 그동안의 온갖 우여곡절을 뒤로하고 고리원자력발전소가 준공됐다. /조선
[1976년] 美 무인우주선 바이킹1호 화성 연착 성공
미국 NASA의 무인우주선 바이킹1호가 1976년 7월 20일 11개월간의 비행 끝에 화성 크리세 플래니티아(황금의 땅)에 연착륙하는데 성공, 지구의 사막 지형과 놀랍도록 유사한 바위투성이의 화성표면 사진을 보내기 시작했다. 오랫동안 수수께끼로 남아있던 화성의 신비가 풀리는 순간이었다. 착륙 25초 후부터 화성표면 사진촬영에 들어갔고 19분 만에 지구로 첫신호를 보냈다.
우주개발에 있어 가장 중요한 과제였던 화성탐사를 진행해왔던 미 항공우주국(NASA)은 화성 사진촬영, 토양분석, 기상관측, 그리고 최대의 관심사인 ‘화성에는 지금 생명체가 존재하는가, 아니면 과거에 존재했었는가’의 조사를 목적으로 약 1년 전 2대의 무인탐사기를 쏘아올렸다.
착륙후 주변풍경 관찰과 기상관측, 그리고 대기와 토양 분석 등의 조사가 이루어졌지만, 생명활동의 존재를 나타내는 증거는 찾을 수 없었다. 화성표면이 바위투성이의 검붉은 사막으로 구성되어있고, 토양 분석 결과 희박하게나마 수분을 포함하고 있다는 것과 생명체의 4대 요소인 질소 산소 수소 탄소가 있다는 사실이 판명되었을 뿐이었다.
그러나 약 1개월 후 다시 발사된 ‘바이킹2호’가 지진계 고장으로 지진관측의 임무를 다 하지 못한 ‘바이킹1호’를 대신함으로써 화성이 지구보다 내부의 활동이 적다는 것도 밝혀졌다. 이 바이킹계획의 성공으로 지구에 보내진 방대한 사진과 데이터가 화성의 지도작성과 지질학, 기상학 등의 연구에 크게 공헌하게 됐다. /조선
[1973년] 브루스 리(Bruce Lee, 李小龍) 사망
1940. 11. 27 ~ 1973. 7. 20
불세출의 쿵푸 스타 브루스 리(32, 본명:이진번 李振藩)가 애인인 여배우 베티 팅 베이의 맨션에서 쓰러져 홍콩의 퀸 엘리자베스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1973년 7월 20일 사망했다. 사망원인에 대해서는 ‘영화계 흑막에 의한 암살’, ‘뇌수종ㆍ가슴통증 때문에 마셨던 진통제에 의한 알레르기 반응’ ‘애인 베티 팅 베이와 성관계 중 돌연사’ 등 여러 설이 있다.
그는 그때까지 당시 미국영화에서는 볼 수 없었던 뛰어난 액션으로 미 영화계에 센세이션을 불러 일으켰다. 미국 샌프란시스코 출생인 그는 홍콩으로 돌아와 홍콩을 중심으로 동남아시아에서 인기를 누리며 영화회사인 골든 하베스트사와 계약한 후 1971년 홍콩 골든하베스타사(社) 제작의 ‘당산대형(唐山大兄)’에 출연하면서부터 크게 인기를 끌었다. 영화의 스토리는 진부하고 유치했지만 빛나는 그의 육체미가 영화의 성공에 한 몫을 담당했다. ‘비폭력 맹세를 하고 꾹 참아오지만, 악인의 비도덕적 행위에 결국 철봉을 휘두른다’ 라는 캐릭터가 잘 맞아 떨어진 것이다. 이로써 그는 중국인이기 때문에 미국사회에서 받아야하는 갖가지 인종차별에도 불구하고 끝끝내 실력으로 스타의 반열에 올랐다. 계속해서 그는 ‘정무문(精武門)’ ‘용쟁호투(龍爭虎鬪)’ 등의 영화를 통해 중국인의 강한 이미지를 서양인들에게 심어 주었다.
그러나 이날 돌연 요절한 것이다. 액션 배우가 된 그의 아들 브랜든 리마저 1993년 ‘The Crow’ 촬영중 실탄이 장착된 줄 모르고 연기하다 발생한 뜻밖의 사고로 목숨을 잃자 이후 ‘저주받은 부자(父子)’라고 불리워지며 세간을 떠들썩하게 했다. /조선
[1948년] 국회, 초대대통령에 이승만, 부통령에 이시영 선출
1948년 5월 31일 제헌국회(制憲國會)가 개막된 뒤, 국회에서 선출된 헌법기초위원과 전문위원들이 초안한 헌법안(憲法案)이 국회 본회의에서 통과되었다. 이어 같은 해 7월 17일 국회의장 이승만(李承晩)이 서명 공포함으로써 효력이 발생하고, 동시에 정부조직법이 통과되면서 같은 달 20일에 제1대 대통령·부통령선거를 실시하였는데, 이 선거가 대한민국 최초의 대통령선거이다.
선거 방식은 국회 재적의원 3분의 2 이상 출석과 출석의원 3분의 2 이상의 표를 얻어야 당선되는 국회에 의한 간접선거 방식을 채택하였다. 후보는 대한독립촉성국민회(大韓獨立促成國民會)의 이승만, 무소속의 김구(金九)·안재홍(安在鴻) 3명이 출마하였다. 선거 결과는 국회 재적의원 198명 중 197명이 출석해(투표율 99%) 이승만이 92.3%의 압도적인 득표율로 당선되었고, 김구는 13표, 안재홍은 2표를 얻었으며, 기권이 2표였다.
이와 함께 부통령선거에서는 출석의원 197명 가운데 133표를 얻은 이시영(李始榮)이 초대 부통령으로 선출되었고, 이 선거 결과에 따라 같은 해 7월 24일 대통령·부통령이 취임함으로써 제1공화국 출범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제1대 대통령선거) /naver
[1945년] 프랑스 시인 폴 발레리(Valéry, Paul) 사망
1871. 10. 30 ~ 1945. 7. 20
프랑스의 시인이며 비평가, 사상가였던 폴 발레리가 1945년 7월 20일 74세로 파리에서 사망했다. 시신은 국장을 거쳐 고향 해변의 묘지에 안장됐다. 남프랑스의 항구도시 세트에서 태어난 발레리는 그의 대표적 평론집 '바리에테'에서 전생애에 걸친 그의 다양한 관심을 쏟아냈다.
1919년 이래 20여년간에 발표된 주요 논문, 연설, 강연, 수상 등을 다섯 권, 1천여 페이지에 수록한 이 책은 '다양성'이라는 뜻의 책 제목이 암시하듯 철학 미학 정치평론 시론 교육론 회고 등 실로 다양한 분야에 걸친 그의 폭넓은 관심을 담고 있다. 탁월하고 명쾌한 지혜와 비평정신이 돋보이며 프랑스 산문 문학의 한 정점을 이룬다는 평을 받고 있다. 1925년 아카데미 프랑세즈 회원으로 선출된 뒤 수많은 문학ㆍ학술 단체의 대표를 지냈고 콜레주 드 프랑스에서 시학을 가르쳤다. 그러나 발레리는 평론가나 사상가이기 이전에 시인이었다. 어려서 법학자의 꿈을 간직했던 발레리가 첫 시를 쓴 것은 1888년이다. 주로 상징주의 영향을 받은 그의 시는 북유럽인과는 다른 지중해 정신을 표현하고 있다. 지중해 정신이란 모호하고 신비하고 격정적인 정신에 비하여 명쾌하고 지적이며 정서적인 정신을 의미한다.
대표작으로 꼽히는 장시 '젊은 파르크'는 19세기 프랑스에 개화한 상징시의 봉우리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발레리는 자신의 의식을 투명하게 관찰하는 하나의 도구로 시를 상정했다. 그에게 시란 자기 정신의 움직임을 관찰하는 도구였고 그 과정을 엄격하게 계산하면서 쓰는 것이 시였다. 발레리는 1888년∼1891년에 걸쳐 많은 시를 썼고, 그 중 몇편은 상징파를 표방하는 잡지에 발표해 호평을 받았지만, 예술적 좌절감과 짝사랑에서 오는 절망감 때문에 1892년에는 감정에 몰두하기를 거부하고 갖고 있던 책을 거의 다 처분해버렸다. 1894년부터 죽을 때까지는 날마다 새벽에 일어나 몇시간 동안 과학적 방법론과 의식 및 언어의 본질에 대한 묵상에 잠겼으며, 자신의 단상과 잠언들을 기록했다. 이 기록은 나중에 유명한 '노트'로 출판됐다. /조선
[1987년] 유학생 이재환, 오스트리아 빈에서 납북
미국 MIT대 경영대학원 박사과정에 재학중이던 이재환씨(25세)가 여름 방학을 맞아 배낭여행을 하던 중 1987년 7월 20일 오스트리아 빈에서 북한 기관원에 의해 납북됐다. 북한 중앙방송은 사건 발생 19일이 지난 8월 8일 “미국에서 공부하고 있던 한국 유학생 이재환씨가 3국을 통해 의거입북했다”고 보도했다. 그러나 북한측은 국제적십자사를 통해 본인의 자유의사를 확인하자는 우리 정부의 요구에 응답을 하지 않았다.
있는 서울대 영문과 재학중이던 83년 도미해 미시간대, 스탠퍼드대를 거쳐 MIT 대학원에 재학중이었다. 납북 후 이씨가 결혼해 다국적기업의 횡포에 대한 연구와 강연활동을 하고 있다는 소식이 들리기도 했으나 국가정보원은 1999년 1월 이씨가 탈북하려다 붙잡혀 정치범 수용소에 수감돼 있는 것을 확인했다고 밝혔다. 정치범 수용소에 수감돼있던 이씨의 사망소식이 알려진 것은 2001년 2월 북한 조선적십자사가 이 사실을 전하고 나서였다.
[1932년] 비디오 퍼포먼스 예술가 백남준 출생
← 지난 1992년 7월 국립현대 미술관에 전시되어 있는 자신의 예술작품을 설명하고 있는 생전의 백남준
"원래 예술이란 본능을 따르는 행위입니다." - 백남준
백남준은 현대예술에서 비디오 아트라는 새로운 장르를 창시한 한국이 낳은 세계적인 예술가이다. 일찍이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 예술학교에서 작곡과 음악미학, 미술사 등을 공부했고, 독일의 뮌헨대학교에서 음악을 전공했다. 처음에는 전공을 살려 작곡과 퍼포먼스를 중심으로 활동했으나, 1970년대부터는 비디오 작업에 주력했다. 이미 1963년에 부퍼탈의 파르나스 화랑에서 미술 사상 최초의 비디오 전시가 되는 역사적인 개인전을 열었고, 1978년 퐁피두 센터 전시회를 비롯해 1982년 뉴욕 휘트니 미술관에서 대규모 회고전을 가졌다. 이후 파리, 취리히, 바젤 등 세계 각국의 전시회를 통해 실험적인 작품들을 선보였다. 1993년에는 세계 3대 비엔날레 중 하나로 꼽히는 베네치아 비엔날레에서 대상을 수상해 세계 최고의 예술가로 인정받았다. 1988년 서울 올림픽 경기대회를 기념하는 대형 비디오 설치 작품 <다다익선 多多益善>도 그의 작품이다. /브리태니커
[1944] 히틀러 암살미수사건 발생 - 독일 7월암살음모사건[July Plot]
1944년 7월 20일 독일 육군 중령 클라우스 필리프 셴크 그라폰 폰 슈타우펜베르크는 연합국 진영으로부터 보다 유리한 평화조건을 끌어내기 위해 히틀러 암살 계획을 세우고 히틀러가 군 수뇌부와 회동하고 있던 동프로이센 라슈텐부르크의 볼프스샨체 야전사령부 회의실에 폭탄을 넣은 서류가방을 놓고 나왔다. 슈타우펜베르크는 오후 12시 42분 폭발을 목격하고 히틀러가 죽었다고 생각하고 최고사령부를 장악하기 위해 베를린으로 갔지만, 히틀러는 가벼운 부상만을 입은 채 빠져나올 수 있었다. 다음날부터 게슈타포가 공모자를 찾아나섰다. 즉시 총살된 주모자를 제외한 약 180~200여 명의 공모자가 교수형 또는 총살형을 당하거나 잔인한 방법으로 살해당했다./브리태니커
[1919년] 최초의 에베레스트 정복자 에드먼드 힐러리(Edmund Percival Hillary) 출생
1919. 7. 20 ~ 2008. 1. 11
뉴질랜드의 등산가이자 탐험가. 뉴질랜드의 히말라야 원정대 대장을 하였고 뉴질랜드의 남극횡단 원정대에서도 활약하였다.
오클랜드 출생. 뉴질랜드 알프스에서 등산을 시작하여 1951년 뉴질랜드의 가르왈 원정대에 참가, 처음으로 히말라야산맥을 접한 이래로 1952년에 초오유산 원정에 참가하였다. 1953년에는 영국의 에베레스트산 원정대원으로 선발되어 5월 29일 셰르파 텐징 노르가이와 함께 에베레스트산을 첫 등정하였다. 그 공로로 엘리자베스 여왕으로부터 기사 작위를 받았다. 1954년에는 뉴질랜드의 히말라야 원정대 대장이 되었고, 1957∼1958년 뉴질랜드의 남극횡단 원정대에서도 활약하였다. 1960∼1966년 뉴질랜드 ·미국 ·영국의 합동 히말라야 원정대 및 1967년 남극 히셀봉 원정대를 지휘하였다. 주요저서에 《대모험 High Adventure》(1955) 《실수는 허용되지 않는다 No Lautitude for Error》(1961) 《High in the Thin Cold Air》(1962, D.도익과 공동저술) 등이 있다. /naver
[1900년] 독립운동가 임우민(林又民) 출생
1900. 7.20 ~ 1975. 5.26
경상북도 안동(安東) 사람이다.
1919년 3월 21일 임하면 금소동·신덕동(臨河面琴韶洞·新德洞) 일대의 독립만세운동을 주동하였다. 그는 전국적으로 독립만세운동이 전개되고 있음을 알고 임찬일(林燦逸)·김원진(金源鎭)·노말수(盧末守)·임동숙(林東淑)·임윤익(林潤益)·유북실(柳北實)·임춘섭(林春燮)·박유석(朴有石)·임석현(林錫鉉) 등과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의하였다. 처음에는 동지들과 3월 16일의 길안(吉安) 장날을 이용하여 만세운동을 전개하기로 계획하였으나, 3월 21일 금소동에서 시작하여 경찰주재소와 면사무소가 위치하고 있는 신덕동으로 시위행진하기로 계획을 변경하였다. 3월 21일 오후 6시경, 금소동에 모인 3백여명의 시위군중은 독립만세를 외친 뒤, 신덕리로 시위행진하였다. 이날 오후 9시경, 신덕리에 도착한 시위군중은 경찰주재소를 포위하고 독립만세를 외쳤다. 그러나 주재소에서 경비중이던, 일본경찰의 무차별 발포로 말미암아 약간의 사상자가 발생하자 일단 후퇴하였다.
오후 11시, 사상자가 발생함에 따라 격분을 참지 못한 그는, 5백여명으로 늘어난 시위군중과 함께 다시 주재소로 달려가 몽둥이와 돌로 건물과 기물을 파괴하고 서류를 파기하였다. 이같은 시위군중의 위세에 눌린 일본 경찰은 급히 뒷산으로 도망하였다. 이어 그는 면사무소로 몰려가서 다시 건물과 기물을 파괴하고 서류를 대부분 파기하였다.
이튿날 일제는 병력을 보강하여 주동자를 검거하였는데, 결국 그도 이때에 체포되었으며, 이해 5월 10일 대구(大邱)복심법원에서 소위 소요 및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1년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3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1938년] 한국화가 이종상(李鍾祥) 출생
본관은 광주(廣州), 호는 일랑(一浪)이다. 1938년 충청남도 예산에서 태어나 대전고등학교와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회화과를 거쳐 1989년 동국대학교 대학원에서 동양철학을 전공하고 철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1968년부터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동양화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으며, 2002년 현재 서울대학교 박물관장, 문화재위원회 박물관분과 전문위원, 한국벽화연구소장 등을 맡고 있다.
1962년 공보부 신인예술상 최고상(국가재건최고회의장상)을 받으면서 주목받기 시작한 이래, 주로 벽화와 영정 등 전통적인 한국화 작업에 몰두해 왔다. 그러나 전통 한국화에 천착하면서도 현대 한국 회화의 교조적인 유묵(儒墨) 시비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분방한 필법으로 행위의 역동성을 강조하는 한편, 조형의 기호화를 통해 원초적인 자연 속에 들어 있는 생성의 질서를 되찾는 데 주력해 왔다.
2001년까지 17회의 개인전을 열었고, 400여 회에 달하는 국내외 단체전에 출품하였다. 작품 활동 외에 대한민국미술대전 심사위원과 각종 미술대전 심사위원장·운영위원장(1976∼2001), 서울국제미술제 부이사장(1990), 1995 중앙비엔날레 운영위원장, 제2회 광주비엔날레조직위원회 부위원장(1996), 한국문화예술진흥원 미술회관 운영자문위원장(1997), 제3회 광주비엔날레 전시기획위원(1999), 서울시립미술관 개관준비기술위원장(2001) 등을 역임하였다.
주요 작품에 벽화 《십이장생도-좌청룡 우백호》(1973), 《원형상(源形象)》 연작(1989∼1997)과 영정 《광개토대왕상》(1975), 《원효대사상》(1976), 《장보고상》(1977) 등이 있고, 저서에 수필집 《화실의 창을 열고》(1980), 《솔바람 먹내음》(1987) 등이 있다. 1963년 대한민국미술대전(국전)에서 특선(문교부장관상)을 하고, 월간 미술전문지 《미술시대》가 제정한 제1회 '2001, 한국 미술을 빛낸 미술인'에 선정되었다. /naver
2009년 6월 유통된 5만원권 화폐의 도안을 했다.
[1873년] 브라질 항공기 산업의 선구자 산투스 두몽(Santos-Dumont, Alberto) 출생
← 산투스 두몽
1873. 7. 20 ~ 1932. 7. 23
브라질의 비행기 개척자. 산투스-두몽에 있는 커피 재배가의 집안에서 태어났으며, 18세 때 프랑스로 건너가서 평생의 대부분을 그 곳에서 보냈다. 1898년에 가솔린 기관을 이용한 연식(軟式) 비행선을 처음으로 만들어 실험비행을 하였다. 1901년 상 쿠르와 에펠탑(塔) 사이를 30분 동안에 왕복비행하여 10만 프랑의 상금을 받았고, 1903년 누이이에 세계 최초의 비행선 기지를 건설하였다. 미국의 라이트 형제가 성공을 거둔 뒤, 그는 1906년 9월에 유럽 최초의 공개비행을 하였으며, 그 해의 10월에는 220m를 21초 동안에 날았다. 그러나 자기가 발명한 비행기가 제1차 세계대전에서 무기로 사용된 것을 몹시 괴롭게 여겼다. 게다가 1928년에 배를 타고 모국으로 돌아오는 도중에 일어난 호위기의 사고 등에 대하여 고민한 끝에, 상파울루에서 자살하였다. /naver
[1864년] 스웨덴의 시인 카를펠트(Karlfeldt, Erik Axel) 출생 - 1931년 노벨 문학상 수상
← Erik Axel Karlfeldt
1864. 7. 20 ~ 1931. 4. 8
폴케르나 출생. 향토중심주의(鄕土中心主義:regionalism) 신낭만파 시인으로서 다라나 지방의 사람과 평생 동안 자연을 노래하였다.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보조교사 등을 하면서 12년간이나 대학에 적을 둔 끝에 웁살라대학교에서 학위를 받아 졸업하였다. 그 후 1900년에 왕립도서관 사서(司書)가 되었고, 3년 후에는 농업협회의 사서직을 맡았으며, 한편으로 시작(詩作)에 몰두하였다.
처녀작 《황무지와 사랑의 노래 Vildmarks och K rleks visor》(1895)에 이어 발표한 《프리돌린의 노래 Fridolins visor》(1898) 《프리돌린의 낙원 Fridolins lustg rd》(1901)은 그의 명성을 굳혀 준작품들이었다. 이 시들은 ‘다라나의 벽화시(壁畵詩)’로도 알려졌다. 1904년 스웨덴 아카데미 회원이 되었고, 1912년에는 상임 이사에 임명되었다. 시집에 《플로라와 포모나 Flora och Pomona》(1906) 《플로라와 벨로나 Flora och Bellona》(1918) 《가을의 뿔피리 H sthorn》(1927) 등이 있다. 생전에 그가 수상(受賞)을 사양했던 노벨문학상이 죽은 직후에 추증되었다. /naver
[1304년] 이탈리아의 학자, 시인, 인문주의자 페트라르카(Petrarca, Francesco) 출생
← 페트라르카
1304. 7. 20 ~ 1374. 7. 19
이탈리아의 시인이자 인문주의자. 토스카나주 아레초 출생. 아버지 페트라코로는 피렌체의 서기였으나, 귀족옹호파인 흑당(黑黨)으로부터 추방당했으므로 페트라르카는 망명지에서 태어났다. 1311년 피사로 이사하였으며, 그 후 아비뇽으로 갔다. 몽펠리에 및 볼로냐대학에서 법학을 공부한 후 아비뇽으로 돌아가 교황청에서 직업을 얻었다. 여기서 시인으로서 성장하는 데 결정적인 영향을 받은 것은 연애 경험이었다. 1327년 성키아라 교회에서 라우라(Laura:?∼1348)라는 여성을 만나 연애시를 쓰기 시작하면서 평생 그녀의 모습을 노래하였다. 또한 교황청의 방대한 장서를 탐독함으로써 교양을 쌓았다.
30세를 넘길 무렵 그에게 예술적 성숙기가 찾아와 1337년 라틴어 서사시 《아프리카 Africa》의 집필을 시작했으나, 같은 해 로마의 여행에서 자극받은 고대에 대한 애착이 성숙해졌다. 현실 사회에 대한 혐오에서 이상으로 하는 고대의 연구였다. 여기서 이 시인의 인문주의의 밑뿌리를 받견할 수 있다. G.보카치오도 그의 제자 중의 한 사람이며, 이후 두 사람의 우정은 이탈리아 문학사에서 기본적인 것을 형성하였다. 1341년 로마에서 계관시인(桂冠詩人)의 영예를 안았다. 이듬해 프로방스에서 그의 사생아가 태어나 주교(主敎)였던 그의 동생 게랄도의 개입으로 그에게 정신적 위기가 찾아왔다. 이때에 성아우구스티누스와 대화형식으로 자기의 고민을 고백한 라틴어 작품 《나의 비밀 De secreto conflictu curarum mearum》(1342∼1343)을 집필하였다.
1347년 로마에서 일어난 콜라 디 리엔치(Cola di Rienzi)의 반귀족정치의 혁명을 지지하였으나 그 혁명은 좌절하고 말았다. 이듬해 파르마 체재 중 라우라의 사망 소식을 들었다. 지상(地上)의 것은 덧없음을 호소하는 새로운 사건이었다. 만년에 그는 아르쿠아에 은퇴하여 단테의 《신곡(神曲)》을 모방한 이탈리아어 작품 《승리》를 집필하고 그곳에서 죽었다. 당시 속어였던 이탈리아어 작품을 경시했던 그를 불멸의 시인으로 만든 것은, 1342년경부터 집필한 이탈리아어로 된 서정시 《칸초니에레 Canzoniere》이다. 지상의 것에 집착한다는 것은 신에 대한 전면적 헌신과 양립하지 않는다는 그의 고민에 찬 의문이 발생한다. 그의 경우 지상의 것을 버릴 수 없었기 때문에 생전과 사후의 라우라로 가득 채워진 이 서정시집은 인간적인 것, 성스러운 것의 투쟁의 증거로서 남게 되었다. 그런데 그의 미녀 찬양과 쪼아 다듬은 시풍은 소네트의 한 극치로서, 후년 ‘페트라르카 시풍(petrarchismo)’이란 이름으로 서유럽 각국의 시인의 규범으로 숭앙되기에 이르렀다. /naver
그밖에
2005년 동해 육군 해안초소 총기탈취사건
2005년 보건의료노조 전면 파업
2005년 제3차 남북장성급군사회담(판문점)
2004년 최규하 전 대통령 부인 홍기 여사 별세
2003년 토니 블레어 영국총리 청와대서 노무현 대통령과 정상회담
2002년 북한 고려항공, 양양공항(南)∼선덕공항(北) 남북직항로 첫 시험비행
2002년 수단 내전 당사자인 수단정부와 수단인민해방군, 내전종식안 합의
2001년 이종범 선수, 연봉 3억5천만원에 기아 타이거즈 입단
1998년 응용화학계의 토대를 마련한 한국의 화학자 김동일 별세
1989년 정부, 민간인 방북신청 첫 허용
1989년 미얀마 아웅산 수지 여사 가택연금
1987년 신문협회, 중앙지의 지방주재기자제 부활 결의
1985년 ‘1985년 한국미술 20대의 힘’전 출품작품 강제철거
1985년 남아공 보타 대통령, 비상사태 선언
1982년 중국, 일본의 역사교과서 왜곡 비난
1982년 체육부, 국가대표-체육유공자 위해 체육인복지기금 설치키로
1981년 한국, 인도네시아 석유화학공사에 참여키로 결정
1981년 제7회 주요선진국 정상회담 개막(캐나다 오타와)
1978년 고리원자력발전 5-6호기 기공
1977년 유엔안보리, 베트남의 가맹 승인
1968년 중앙정보부, 임자도 거점 고정간첩단 118명중 거물급 27명 구속 발표
1963년 소련-중공 회담 결렬
1960년 미국 잠수함서 IRBD 폴라리스 미사일의 수중발사에 성공
1953년 공산측, 휴전협정 조인에 동의
1951년 압둘라 요르단 국왕 암살
1950년 북한군, 대전 점령
1950년 대전함락. 딘 소장 실종
1947년 인도네시아-네덜란드 교전
1937년 이탈리아의 물리학자, 라디오 전신체계(1896)의 발명가 마르코니 사망
1930년 단천 농민 천여명 폭동 (11명 사망-26명 중경상)
1917년 케렌스키 조각, 레닌에 체포령
1914년 의사시험규칙 공포
1907년 고종 양위식
1907년 강태현-송영근 등 국민결사대 구국선언서 살포
1899년 베네수엘라 대통령 구스만 블랑코 사망
1895년 프랑스 모밧사 사망
1890년 그리스의 왕 게오르기오스 2세 출생
1866년 독일의 수학자 리만 사망
1836년 짧은 체온계를 발명한 영국의 의사 올벗 출생
1810년 콜롬비아 독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