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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104 살림교회 주일공동예배(성탄 후 둘째 주일/신년주일)
주님의 빛으로 우리가 빛을 봅니다
렘31:7~14; 엡1:3~14; 요1:9~18
오늘은 성탄 후 둘째 주일이자 2026년 신년주일입니다. 별빛을 따라가던 동방박사들이 “아기예수”를 만나 기뻐했던 것처럼, 여러분을 인도하는 빛을 따라 올해 여러분이 “보아야 할 빛”을 볼 수 있는 한 해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새해 첫 아침에 뜨는 해를 보러 많은 사람들이 해맞이를 합니다. 빛을 보고 싶은거지요. 희망을 보고 싶고, 앞으로 나갈 힘을 받고 싶은 거지요. 빛은 이렇게 우리가 이 지상에서 소원하고 바라는 뭔가를 상징합니다.
시편 36:10절에 “생명의 샘(원천)이 주님께 있으니, 주님의 빛으로 우리는 빛을 봅니다”<키 임므카 메코르 카임, 베오르카 니르에 오르>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주님의 빛으로 보는 빛”은 어떤 빛일까요? 우리 새번역 성경은 “우리는 주님의 빛을 받아 환히 열린 미래를 봅니다”라고 번역을 했습니다. 주님의 빛으로 보는 빛을 “환히 열린 미래”로 의역을 한 것이지요. “환히 열린 미래”! 틀린 번역은 아니지만, 잘못 받아들이면, 오해할 수도 있겠다 싶습니다. 반짝인다고 다 금은 아니라는 말처럼, “반짝이는 것들”이 다 우리가 소망하는 “빛”은 아닙니다. 우리는 늘 반짝이는 것에 쉽게 현혹되어 살고 있습니다. 그러다 쉽게 실망하고 물러나곤 하지요. 올 한 해는, 우리가 자주 현혹되는 “반짝이는 것들”보다, 진정 주님의 빛으로 보는 빛을 보았으면 합니다.
시인 신동엽은 <새해 새 아침은>이라는 시에서 이렇게 노래합니다. “새해 새 아침은/ 산에서도 바다에서도/ 오지 않는다.// 금가루 흩뿌리는/ 새 아침은 우리들의 안창/ 영원으로 가는 수도자의 눈빛 속에서/ 구슬 짓는다.”
“새해 새아침은 산에서도 바다에서도 오지 않고, 우리들의 안창, 영원으로 가는 수도자의 눈빛 속에서 구슬 짓는다.” 이 시인의 언어는, “껍데기는 가라”고 외쳤을 때의 결기와 비슷합니다. 그러고 보면, 지난 송구영신 예배 때 말씀드렸던, 문정희 시인의 “해마다 어김없이 늘어가는 나이/ 나무처럼 속에다 새기기로 했다”는 싯구와도 닮아 있습니다.
제가 보기엔, 밖에서 반짝이는 것에 현혹되지 않고, 자신 안에서 비치는 빛을 따라가겠다는 새해의 다짐 같아 보입니다. 그러고 보면, 동방박사들을 비치던 그 별빛은 그들 안에서 비치던 빛을 따라 간 것을 상징하는 듯 합니다. 그들은 마침내 그 빛을 따라가 참 빛이신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비추는 빛을 따라 정말 빛을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우리의 삶이 지긋지긋한 “이야기 짓기”로 시작해서 “이야기 짓기”로 끝나는 상상과 환상 의 무한한 펼쳐짐이 아니라, 소박하게 빛을 품고, 빛을 따라가고, 또 빛을 보는 빛의 펼쳐짐이면 좋겠습니다.
이런 소망을 담아, 오늘 신년 첫 주일에 읽은 본문은 요한복음1장의 말씀입니다. “참 빛이 있었다. 그 빛이 세상에 와서 모든 사람을 비추고 있다.” 예수님이 우리의 빛으로 오셨고 우리를 비추고 있음을 선포하는 말씀입니다. 그 앞에는 이런 말씀도 있습니다. “(모든) 창조된 것은 그에게서 생명을 얻었으니, 그 생명은 사람의 빛이었다. 그 빛이 어둠 속에서 비치니, 어둠이 그 빛을 이기지 못하였다.”
어쩌면 관념적으로 들리고, 또 식상하게 들릴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정말 자신에게 빛이 비추기를 간절히 원했던 사람들에게는 절실한 말씀이고, 또 계속해서 곱씹을 신비의 말씀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어둠 속에서 살고 있고, 무지 가운데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온전한 자유인이기보다는 종살이하듯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환경이 안 풀리고 답답해서 종살이를 하고 있다기보다는 우리가 어둠 속에 있고 무지 속에 있기 때문에 우리는 그렇게 밖에 볼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교회력이 시작되는 대림, 성탄, 주현 시기에 빛이 비추었다는 선언을 듣게 됩니다. “어둠 속에서 헤매는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운 땅에 사는 사람들에게 빛이 비쳤다”(사9:2) 그리고 오늘, “참 빛이 있었다. 그 빛이 세상에 와서 모든 사람을 비추고 있다.”라는 선언을 듣습니다. 오늘 말씀은 우리에게 빛이 되라고 말하는 대신 “빛이 비추었다”고 선언합니다. 우리는 빛을 받아야 빛을 내는 반사체들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이 빛을 받는 비결은 무엇일까요?
무엇보다 우선하는 것은, 우리가 어둠 속에 있다는 깨달음입니다. 내가 어둠 속에 살고 있구나, 내가 노예처럼 살고 있구나 라는 깊은 통찰입니다. 이것이 어둠과 무지에서 벗어나는 거의 유일한 길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여전히 반짝이는 것들에 속아 그것을 우리의 “빛”으로 착각하고, 자신 앞에서 반짝이는 것들에 계속 입질을 하고 있다면, 우리는 반짝이는 것들에 낚일 수 밖에 없습니다. 이것은 마치 우리에게 오는 빛을 차단하고 지하에 처박혀 있든지, 아니면 창문 없는 집에 틀어박혀 살고 있는 셈입니다. 토머스 머튼이 말한 적이 있지요. “우리 마음은 까마귀와 같아, 우리 둥지가 온갖 쇠붙이로 아무리 불편해지더라도 반짝거리기만 하면 무엇이나 다 주워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아 이게 불편하구나, 반짝인다고 다 끌어 모아 내 둥지가 불편해졌구나 하는 것을 아는 깨달음, 이것이 빛을 받는 비결입니다. 역설이지요. 어둠 속에 있음을 알아야 빛을 보게 되고, 불편한 것에 몸서리쳐야 그 불편한 것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사실은 우리가 어둠 안에 있다는 것, 무지 가운데 있다는 것, 온갖 반짝이는 쇠붙이를 끌어모아 둥지가 불편하다는 것을 아는 것도 빛을 받아야 알 수 있습니다. “enlightment”, 빛을 받을 때 깨닫게 되지요. 하지만, 결국 이런 깨달음의 시작도, 아, 어둡구나, 뭔가 불편하구나 하는 것을 자각하는 것에서 시작을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거의 이 어둠을, 이 불편을 어둡구나, 뭔가 불편하구나 하는 자각을 하는 대신, 여전히 그리고 잽싸게 반짝이는 쇠붙이로 보상받으려 반짝이는 것을 찾아 나섭니다. 그래서 악순환에 빠지는 것이지요. 하지만, 우리의 어둠과 불편함을 잘 알아차리고, 그것을 빛을 받는 기회로, 빛의 안내자로 삼을 수도 있디면, 우리는 진정한 돌아섬, 메타노이아를 한 것이지요.
우리는 걱정과 염려의 노예가 될 때, 깊은 두려움에 빠질 때, 뭔가 길을 잃어버렸다는 느낌이 올 때, 바로 그 순간을 알아차리고, 이때를 돌아설 기회, 다시 말하면 기도의 기회로 삼을 수 있습니다. 걱정과 염려, 두려움, 뭔가 길을 잃은 느낌은 우리가 어둠 속에 있음을 알려주는 싸인과 같은 것입니다. 그런데, 걱정과 염려, 두려움, 길을 잃은 느낌과 같은 것들을 하지 말아야 하는, 빨리 내게서 몰아내야 하는, 나를 힘들게 하는 적들로 생각해서는 돌아설 기회를 얻기가 어렵습니다. 오히려 이런 어둠의 징표들에 대해 우리는 좀더 관대해야 합니다. 내게 온 손님으로 잘 받아들여야 합니다. 내가 빛을 받을 수 있게 하는 안내자로 알아보아야 합니다.
루미의 <여인숙>이라는 시를 언젠가 소개한 적이 있지요. “기쁨, 절망, 하잖음, 매일 아침 새로운 손님으로 나의 여인숙에 찾아올 때, 그 모두를 환영하고 잘 맞아들이라”는 시였습니다. “그들이(아침마다 찾아오는 손님) 네 집을 거칠게 휩쓸어 방안에 아무 것도 남겨두지 않는 슬픔의 무리라 해도, 조용히, 정중하게 그들 각자를 손님으로 모셔라. 그가 너를 말끔히 닦아 새 빛을 받아들이게 할 것이다. 암울한 생각, 수치와 원한이 찾아오거든 문간에서 웃으며 맞아들이라. 누가 오든지 고맙게 여겨라. 그들 모두 저 너머에서 보내어진 안내자들이니.”
물론 이것이 쉽지 않습니다. 고난도의 삶의 기술입니다. 우린 곧바로 이것들을 무슨 침입자나 괴한으로 생각하여 빨리 몰아내려 하고, 그러다 보면 더 복잡한 감정과 연결되고 이야기 짓기로 상상의 나래를 피게 되고, 그러다 보면 이 손님(실은 침입자)들에게 완전히 휘말려 이 침입자들과 한바탕 씨름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때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심호흡을 크게 하고, 몸을 움직이고(운동을 하든지, 산책을 하든지 청소를 하든지), 계속 뻗어나가는 생각에서 지금 여기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대신 여러분은 올해 뽑은 성서말씀을 읍조릴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걱정을 하나님께 맡기는 방법”이고 더 나아가 “걱정을 기도로” 바꾸는 일입다. (“여러분은 걱정을 모두 하나님께 맡기십시오. 하나님은 여러분을 돌보고 계십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우리는 빛이 아닙니다. 빛을 받아 빛을 볼 뿐입니다. 오늘 복음서에서 요한은 “빛을 맞아들인 사람”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이 주어진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빛으로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 안에서 그리스도로 살아계십니다. 오늘 에베소서의 짧은 본문에서 사도바울은 “그리스도 안에서”(엔 크리스토)(혹은 아들 안에서)라는 말을 9번 쓰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시고 사랑해 주셔서, 하나님 앞에서 거룩하고 흠이 없는 사람이 되게 하셨습니다.” “이 아들 안에서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를 따라... 죄 용서를 받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신비한 뜻을(그분의 뜻의 신비를) 알려 주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상속자로 삼으셨습니다.”
여러분, 여기서 쓰여진 이 말씀들은 추상적이거나 관념적인 말이 아니라, 사도바울이 자신의 삶으로 경험한 실제적인 말씀들임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우리 안에도 구체적인 현실로 그리스도가 계시고, 그리스도는 우리의 바탕, 우리의 진정한 정체성으로 우리가 누구인지 알려줍니다. 이것은 추상적인 것이 아니라 정말 구체적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바로 이것을 알려주셨습니다. 당신의 신성이 우리 안에도 빛나고 있다고, 나를 믿고, 나를 보내신 분을 믿고, 너희 안에 빛나는 그리스도를 믿으라고!
그리스도는 우리 안에 비추이는 빛이십니다. 우리의 길을 안내하는 빛이고, 우리를 살아있게 하는 빛입니다. 우리는 우리 예수님을 떠올리며 그 빛을 상상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 빛을 통해 그리스도를 감지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침묵 속에서 우리의 가장 깊은 정체성을 확인할 수 있고, 그 안내를 받을 수 있습니다.
걱정과 염려를, 우리 안에 찾아온 온갖 객들을 귀한 손님으로 맞아들이듯이, 하루의 모든 일과와 지극히 평범하고 지루한 우리의 일상을 귀한 손님으로 맞아들이면, 하나님께서는 그런 모든 것들을 가지고 우리를 빛으로 안내할 것입니다. “주님의 빛으로 빛을 보는 것”입니다. 주님이 갑자기 환한 빛으로 변하여 사람들에게 자신을 나타내는 일은 거의 없습니다. 우리가 이런 기적 같은 것만 바라면, 우리는 계속 빛을 보지 못할 것입니다. 오히려 그분은 작은 일상들 가운데서 빛을 비추셨고, 손가락으로 빛을 가리켜 주셨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리고는 사람들을 만나고, 약한 자들을 붙잡아 주고, 아픈 사람들을 고쳐주고, 위로하시는 말을 하시면서, 그분은 빛이 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당신의 자비로 이 빛을 비추어 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빛을 통해 이렇게 말씀하실 것입니다. “지금 너의 삶을 귀하게 여겨라. 이 땅에서 사는 동안, 너의 삶을 사랑하여라. 너 자신에 매몰되는 사랑이 아니라, 다른 이를 사랑하면서 너 자신을 사랑하여라. 내가 너 자신을 사랑할 만큼의 빛을 너에게 주었다. 한 발을 앞으로 내딛딜 만큼의 빛을 너에게 주었다. 내가 그만큼의 빛을 너에게 주는 것은 나도 그만큼의 빛으로 이 세상을 살았기 때문이다. 누구나, 아니 모든 피조물이 그만큼의 빛으로 자신의 삶을 산다.”
여러분, 하나님의 빛은 언제나 우리에게 비치고 있습니다. 우리가 저항하고 거부하지 않는다면, 누구나 받을 수 있는 빛입니다. 세상의 기준에서 보면 불공평할지 모르지만, 하나님은 공평하게 누구에게나 빛을 비추십니다. 아니, 하나님은 빛을 비추는 것 밖에는 알지 못하십니다. 우리가 마음을 열고, 담대하게 지금을 살면, 그 빛은 우리 안에서 빛나고 있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자꾸만 눈앞에 어른거리는 반짝이는 것들에 유혹될 때마나, 하나님께서 내 안에 빛을 비추고 계시다는 것을 더 깊이 알아차리십시오. 우리가 그 빛에 의해 인도받고 안내받고 있음을 기억하십시오. 우리가 그 빛에 의해 인도받고 안내받고 있음을 기억하는 것, 그것이 우리가 빛을 받는 적극적인 길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