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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驪興閔氏 大宗會 카페 원문보기 글쓴이: 민병권[閔丙權]
조선조 중,후기 [4대 최고 문형가문] 광산김씨, 명문의 메카, 사계 김장생 종택
논산에서 대전으로 가는 4번 국도에서 1번과 4번 국도의 분기점이 나오면 대전 방향의 4번 국도로 접어든다. 4번 국도에서 두계역 방향의 우측 진입로를 따라 철길을 건넌 후, 오른쪽의 두계 마을로 들어서고 다시 좌측으로 들어가면 은농재가 나온다. ,,,,,이 가옥은 사계 선생의 고택으로 은농재는 사랑채의 이름이다. 두마면 남쪽에 위치한 천호봉 자락에 북으로 길게 흐르다가 이 마을에 이르러 끝자락을 맺으면서 대전과 경계를 이루는 곳이 바로 이 마을이다. 천호봉 끝자락이 마을 뒤에서 약간 솟아 이름 없는 봉을 형성하는 것이 은농재의 배산이 된다. 좌우로 구릉이 감싸고 있으며 전면에는 농경지가 형성되어 있다. 이러한 지형조건에 따라 집을 배치하다 보니 동북향을 하게 되었다. 마을의 북쪽에는 넓은 들이 있고, 들 가운데로 두계천이 동으로 흐르며, 두계천을 따라 호남선이 지나가고 있다.
은농재는 사계 선생의 8대손인 두계공의 장자로부터 16대손까지 세거해온 곳이다. 현재 은농재를 비롯하여 안사랑채, 안채, 문간채, 광채, 부속채 등이 하나의 커다란 건축군을 형성하면서 나지막한 구릉을 배경으로 배치되어 있다. 은농재의 서쪽 뒤로는 후에 지은 별채가 있고 그 앞에는 정자와 연못이 있다......목원대 건축과 이왕기 교수 글
충청남도 논산시 두마면 두계리 96번지에 사계 김장생의 고택이 남아 있는 것은 기적이다. 숱한 외침과 내란을 거치면서 갖은 풍파 속에서도 그 의연한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니 이것이 기적이 아니고 무엇이랴! 세칭 조선 4대 명문,,,,등의 명성을 휘날리던 조선조를 대표하는 명문대가의 500년 종택이 남아 있는 곳이 거의 없다. 이 고택이 현존하는 것은 우리의 복이다. 이래 저래 옛날 것이 다 사라져 가는 오늘날 조선 명문의 상징이라 할 사계 종택이 남은 것은 눈물이 날 정도로 감격스러운 일이다.
이 가문에서 문묘 배향 명현이 둘[김장생,김집]이나 배출 되었다. 그것도 부자 문묘 배향이다. 문묘는 공자를 모신 사당이다. 그 문묘는 태조 7년에 건립되고 두어 차례 중건하여 오늘에 이른 성균관 대성전을 일컫는 말이다. 고결한 인품이 우선해야 하고 높은 학문과 두터운 덕망이 겸비한 도덕군자라야 이 곳에 배향된다. 유교를 숭상한 조선조에서는 이 곳에 배향되는 것이 최고의 영예였음은 두 말할 필요가 없다.
이 가문은 3대 대제학이 배출되었다. 김만기, 김진규, 김양택이 영광의 주인공이다. 또한 형제 대제학이 배출되었다. 김만기, 김만중이 그 주인공이다. 이상의 4인을 비롯하여 김익희, 김영수, 김상현을 합쳐 7인의 대제학을 냈다. 이것은 175개 가문에서 제1위다. 조선조 단위별 문중에서 대제학 배출 순위가 제1위라는 영광은 조선조 최고 영예인 부자 문묘 배향에 버금가는 것이다.
이 두 기록은 노론의 권문세가들이 누렸던 영광과는 차원이 다르다.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른 [문중8강]이 도저히 넘볼 수 없는 경지다. 조선조 유교사회가 만든 최고의 예술품이다. 사계 김장생의 고택이며 광산김씨 김장생 가문의 종택인 은농재는 조선조 성리학이 찬연하게 꽃을 피워 이룩한 최고 예술품의 산실로서 조선 명문의 메카라고 부를 수 있다.
할머니 허씨의 음덕!
충남 논산시 연산면 고정리에 충청남도 지정문화재 제109호인 양천허씨 정려각이 서 있다. 이 조그마한 정려각은 조선시대의 화려한 건축양식을 자랑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조선조 사대부가의 귀감이 되는 여인상을 보여 주고 있다.
조선 태조때 대사헌을 지낸 허응의 딸이 광산김씨 가문으로 시집을 갔다. 조선 개국 후에 충청도 관찰사를 지낸 김약채의 며느리가 되었다. 김약채의 아들 김문은 어린 나이로 급제하여 한림원 벼슬을 지냈다. 이 김문의 아내가 허씨다. 김문의 아내 허씨는 17세의 나이로 홀몸이 되었다. 이에 친정 부모가 개가 시키려 하자 유복자인 김철산을 데리고 500리나 떨어진 연산지방의 시댁으로 걸어 내려와 갖은 고생 끝에 자식을 훌륭히 키워 집을 일으켰다.
스무살도 안 되는 새댁 허씨는 아비 없는 핏덩이 어린 아들 철산을 귀중히 여기며 알뜰살뜰 키워 사헌부 관리를 만들어 종6품의 감찰이 되게 하였다. 그는 비록 직위는 낮지만 관리들의 비위를 규찰하고 회계를 감사하는 중요한 직책을 맡아 소임을 다했으며 아들 국광과 경광을 낳아 어머니를 기쁘게 했다. 허씨는 아들을 키우느라 고생은 많았지만 아들이 장성하여 일가를 이루고 손자들이 영특하여 그들의 장래가 촉망되더니 드디어 큰손자 국광이 1441년[세종23] 문과에 급제하여 할머니를 한없이 기쁘게 하였다.
김국광은 황해도 도사, 성균관 주부를 거쳐 아버지가 하던 사헌부 감찰이 되었으며 1448년 사은사 서장관으로 중국을 다녀와 교리가 되었다. 할머니 허씨는 초년고생 끝에 노후 복락을 한껏 누리다 1455년 79세의 나이로 별세하였다. 그뒤 큰손자 김국광이 좌의정에 오르고 적은손자 김경광은 예조판서와 좌참찬을 지내고 청백리에 뽑혔다. 이것이 모두 허씨 할머니의 크나큰 음덕의 소치라고 칭송하였다. 1467년 세조는 허씨 할머니의 절행을 기려 고향에 정문을 세우도록 명했다. 손자의 귀로 허씨 할머니는 정경부인에 추봉되었다. 허씨 할머니의 뜨거운 정성이 김국광의 현손 김계휘에게까지 이르렀다. 김계휘는 고조모 허씨가 별세한지 71년만인 1526년에 태어났다.
김계휘는 "3, 4세에 문자를 알고 7, 8세에 문의를 통하고 15세 이전에 경서와 사기를 거의 다 읽었고 점차로 장성하여서는 제가서를 두루 열람하여 일견에 열 줄을 함께 내려보고 한번 보면 다 기억하였다."고 한다.
1549년 문과에 급제하여 사가 독서하였다. 이조정랑, 집의, 응교 등 청환직을 고루 지내고 1566년 문과 중시에 장원했다. 그 뒤 동부승지, 이조참의를 거쳐 황해도 관찰사, 형조참판 등을 역임했다. 1575년 심의겸과 함께 가까이 지냈으나 당쟁 완화에 진력했다. 우리나라의 산하의 형세와 농작물의 생산현황, 전통문화에 대한 여러 가지 저술을 남겼다.
"평생 치가에 뜻을 두지 않고 조선의 유업외에는 한 식구의 먹을 것이나 한 이랑 밭이라도 증산한 바 없고 어진 이를 좋아하고 재주있는 이를 사랑함을 지성으로 하고 내 몸을 낮추어 아랫사람을 대하되 나이와 지위를 생각하지 아니하고 남의 착한 일을 반드시 들어내며 착하지 못한 일은 듣지 않은체 하며 더욱 종척과 향당 사이를 두텁게 하니 유식한 사람은 그 의리에 복종하고 무식한 사람은 그 어질고 온후함을 그리워하였다."고 신도비에서 칭송했다. 김계휘는 사계 김장생의 아버지다. 김장생이 누군가? 조선 명문의 대명사가 아닌가? 고려 명문벌족으로 성망이 높던 광산김씨를 조선조 명문으로 또다시 일으켜 세운 두 거인 김국광과 김장생의 등장은 허씨 할머니 덕이 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할머니의 음덕이 큰 것은 70년이란 세월이 흘러도 그 기맥이 따스한 법이다. 우리 조선조의 할머니는 이처럼 말없이 위대하다. 광산김씨와 같은 명문이란 알고 보면 할머니, 어머니의 헌신 위에 꽃핀 것이다
문원공(文元公)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의 조부는 현감(縣監)을 지낸 김호(金鎬)이며, 조모(=할머니)는 전의이씨(全義李氏)로 형조 정랑(刑曹正郞) 이광원(李光元)의 딸이다. 전의이씨는 1504(연산군 10,갑자)년에 태어나 1569(선조 02,기사)년에 향년 66세로 졸하였다. 부인은 평소 자화(慈和)하여 규법(규法)이 있으니 자녀들 성취(成就)에 가르침이 많았고, 슬하에 4남 2녀를 두었으니 곧 김계휘(金繼輝)이니 대사헌(大司憲)이요, 다음은 김은휘(金殷輝)이니 현령(縣令)이요, 다음은 입휘(金立輝)이니 별제(別提)요, 다음은 공휘(金公輝)이니 찰방(察訪)이요, 딸(女)은 이흠·채유근에 각각 출가했다.
---율곡(栗谷) 이이(李珥)가 지은 김호(金鎬) 묘갈명(墓碣銘)에서---
4대 최고 문형가문, 광산김씨의 3대 화려함!
고려를 뒤로 하고 조선조를 앞세운 이성계가 삼천리 8도 강산을 호령하는 새 임금으로 군림하였다. 따라서 전주이씨가 명실상부한 신흥 왕족으로 이제야말로 삼한갑족의 으뜸이라 굳게 믿었다. 마침 광산김씨 어느 대신 하나가 대전에 들리자 "경은 조선의 성씨 중에서 어느 성씨를 제1이라 생각하는가?"라고 물었다. 그 대신은 둘째 손가락을 치켜들면서 "전주이씨입니다"고 대답했다. 태조는 속으로 그럼 그렇지, 그렇고 말고. "그 다음은 어느 성씨인가?"라고 다시 물었다. 대신은 셋째 손가락을 들고 어느 성씨를 댔다. 그 다음도 넷째 손가락을 치켜들고 차례로 대답했다. 태조가 이야기를 듣다보니 엄지 손가락이 빠져 있지 않는가? 괴이히 여겨 "경은 왜 엄지손가락만 그대로 두는 가?"고 따졌다. "엄지는 광산김씨 몫입니다." 기분이 언짢아진 태조는 자리를 뜨면서 "고얀지고..."라고 중얼거렸다.
그렇다. 광산김씨는 옛부터 이름있는 씨족이다. 시조 김흥광이 무진주 서일동[현재 담양군 평장동]에 터를 잡았고 고려조에서 정2품인 평장사를 8명이나 배출했다. 이에 그곳을 평장동이라 불렀다.
조선조에 들어와 청상으로 홀로 늙은 조모 허씨의 사랑 속에 청년 시절을 보낸 김국광이 좌의정에 오르자 광산김씨 가문에 서기가 감돌았고 사계 김장생에 이르러 조선조 문중사에 새 장이 열렸다.
김장생은 1548년[명종3]에 태어나 1631년[인조9년]에 별세했다. 자는 희원,호는 사계다. 어려서부터 정중하고 엄숙하여 함부러 말하거나 실없는 장난을 하는 법이 없었다. 아버지가 대견해 했으며 장래에 기대를 크게 걸었다. 12세에 구봉 송익필 문하에 들어가 사서와 근사록을 배웠고 20세에 즈음하여 율곡 이이 문하로 들어가 수신치가의 요령과 위기지학을 공부하였다. 율곡도 그 기국으로 보아 큰 재목임을 알고 심히 중히 여겼다.
1578년 학행으로 천거되어 창릉참봉이 되고 동몽교관, 인의, 정산현감 등을 지냈다. 임진왜란 때 호조정랑으로 명나라 군사의 군량조달에 공이 커 종친부 전부로 승진했다. 그 뒤 여러 벼슬이 내려졌으며 더러 나가기는 했으나 임천을 그리워하며 늘 사양했다. 1613년 계축옥사때 동생[김경손, 김평손]이 연루되어 대역죄로 죽었다. 혹시 화가 미치지 않을까 염려하는 친척들에게 " 길흉화복은 천명이니 사람의 힘으로 피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고 태연히 말했다. 임금[광해군]이 옥사에 관련자들을 친국하면서 고변을 한 박응서에게 "김장생도 이 일을 아느냐?"고 물으니 "김장생은 어진 사람이라 이 일을 알면 만류할까 염려되어 일부러 숨겼나이다."고 대답함으로 죄를 면하였다.
인조반정이 성공하자 도성의 사대부집 부로는 말할 것도 없고 8도의 백성들이 새 나라를 세운 듯이 기뻐서 어쩔 줄 모르며 술을 따라 서로 권하며 어깨춤을 췄다. 인조반정으로 서인이 집권하자 임금[인조]이 하교하되 「김장생은 내가 잠저에 있을 때에 그 이름을 익히 들었다」하고 사헌부 장령을 제수하였다. 그 뒤 원자 보도의 임무를 수행하면서 만언소 열세가지를 조목
으로 들어 진주하였다. 1627년 정묘호란 때 양호호소사로 의병을 모아 활약했다. 같은 해에 형조참판 등에 올랐으나 줄곧 그리던 고향 연산으로 돌아와 세상일을 잊고 오직 성리학에 침잠하며 예학을 이루었다. 성리학은 율곡의 학설을 본받아 그 뜻을 폈으며, 예학은 구봉을 계승하였다. 이 예학을 아들 집이 이어 받았으며 집은 송시열에게 전하여 예학파의 한 주류를 이루었다. 이로써 김장생은 조선 예학의 태두로 받들어졌다.
인조반정은 성리학의 지상 목표인 왕도정치의 구현을 꿈꾸는 조선 유교 사회의 전성기를 이루는 전야제인 동시에 조선조 가문의 황금기를 여는 축하 행사였다.
산림에 있던 김장생이 서인의 영수로 부상하면서 광산김씨 가문에 찬란한 햇빛이 세 가닥이 들었다. 이것은 광산김씨 김장생 가문만이 뽐내는 [3대 화려함]이다.
[3대 화려함]은 태산, 북두, 은하다. 이것은 조선에 어느 가문도 넘을 수 없는 최우수성을 자랑하는 인품, 학문, 덕행의 소산이다. 후자의 세 가지는 겸손의 결정체다. 겸손도 지극하면 화려해지는 것을 여기서만 볼 수 있다.
첫번째 화려함인 태산은 김장생 부자다. 김장생이 문묘에 배향되는 최대의 영광을 안았다. 여기에 아들 집마져 문묘에 배향되는 겹경사가 생겼다. 이것은 오늘로 말하자면 올림픽 마라톤 종목에 아버지와 아들이 동시에 승전고를 울려 전무후무한 세계 기록을 세우고 아들이 아버지를 목마 태워 함께 월계관을 쓴 영광에 견줄 수 있다. 태종이 우리나라 임금들 중에 가장 뛰어난 아들 세종대왕을 둔 것 모양 김장생은 조선 천하에서 제일 훌륭한 아들을 뒀다. 이것은 태산과 같은 김장생의 영광이며, 김장생 부자가 이룬 [인품, 학문, 덕행]의 화려한 예술품이다.
두번째 화려함인 북두는 7인의 대제학이다. 조선 대제학의 영화를 오늘로 말하면 문교부 장관의 지위에다가 서울대학교 총장의 명예를 보태고 그 위에다가 국무총리의 관록을 얹어 놓은 정도로 보면 된다. 이 영화를 누린이가 김장생 집안에서 일곱이나 쏟아져 나왔다. 한 가문에서 7인이 나온 것은 조선에서 전무후무한 기록이다. 이 7인의 대제학이 바로 김장생 가문의 [북두칠성]이다. 이 7인의 대제학은 북두칠성 모양 조선의 밤하늘을 화려하게 수놓았다.
세번째 화려함인 은하는 김장생의 제자들이다. 탈속을 한 성인 맹자에게 기쁨이 있다면 천하의 영재를 가르치는 것이라 했다. 그 기쁨을 최대로 누린 이가 김장생이다. 충청도 유림의 5현 중 송시열, 송준길, 이유태, 유계가 김장생 문하에서 나왔다. 좌의정 조익, 우의정 강석기, 우의정 이후원 등 상신을 비롯해 장유, 정홍명, 최명길, 이덕수 등 대제학이 쏟아져 나왔을 뿐만 아니라 김집, 송시열, 송준길 등 문묘 배향자가 속속 나왔다. 그 외에도 김경여,이목,이시직,윤순거,윤원거,이상형,임의백,이경직,송시영,송국택,이상형 등의 명사들이 행성의 무리가 은하를 이루듯 기호지방에 남북으로 즐비했다. 은하가 찬란하듯이 김장생의 제자들 또한 화려했다.
위에서 열거한 세 가지는 조선조 문중사에 그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기록이다. 이것을 크게 보면 조선의 유교사회가 낳은 왕도정치의 부산물이며 도덕지상주의가 쌓아올린 조선 예학의 금자탑이다. 이것을 작게 보면 광산김씨 가문의 최대 영광이며 [3대 화려함]이라 할 수 있다.
4대 최고 문형가문, 광산김씨 [문중평론방]의 "봉숭아 학당"
오늘은 모방송국에서 인기리에 진행되고 있는 코미디 프로 "봉숭아 학당"을 흉내내보고자 한다. 인간은 속에 있는 말을 거침없이 내뱉고 싶은 본능이 있다. 그러나 하고 싶은 말을 다 못하고 사는 것이 인생살이다. 그래서 우리가 못할 말을 골라 하는 코미디 프로가 인기가 있다.
이 [문중평론방]도 주로 홈지기가 호객 행위하는 잡놈 같이 남이 보거나 말거나 그저 지껄이고 있다. 이것도 알고 보면 하고 싶은 말을 멋대로 하고자 하는 인간의 기본 욕구에서 나온 것이다. 이 놈의 말들이 동네 복덕방이나 아파트 경로당의 잡담보다 조금 나은 수준 일른지는 모르나 명색이 문중 연구라는 거창한 구호를 내건 탓에 함부로 말을 할 수 없다. 홈지기가 속은 얕고 행동은 촐랑거려도 여기서만은 근엄해야 된다. 홈피 만들어 좀 아는체도 하고 멋대로 지껄여 스트레스나 풀려고 했는데 "함부로 말할 수 없는 올가미"에 걸려 자다가도 일어나 미친듯이 지껄여야 굴러간다. 잠시라도 이 올가미를 벗는 길은 " 일일 봉숭아 학당 운영" 뿐이라는 결론을 얻었다. 오늘은 파탈하고 멋대로 지껄이련다.
김장생과 김집이 누가 더 나은가? 분명히 둘이 우열이 있을 텐데 도무지 알 길이 없다. 아둔한 내 머리로는 사계가 더 나은 것 같기도 하고 신독재가 더 나은 것 같기도 하다. 그래서 언제나 헷갈린다.
복사를 하면 원본보다 오히려 복사본이 더 선명할 때가 있어 어느 것이 원본인지 복사본인지 모를 때가 있다. 원본을 계속 복사해보고 복사본을 계속 복사해 보면 원본은 아무리 많이 복사해도 똑 같은데 복사본은 계속 복사하면 나중에 흐릿하게 나온다. 원본의 우월성이 드러난다. 원본이 이처럼 우월하듯이 아비만한 자식이 없고 형 만한 동생이 없다. 이것이 세상의 순리다. 그렇다면 김장생이 김집보다 낫기 마련이다. 그 쉬운 원리를 두고 뭐 그리 부질없는 질문을 스스로 하는가?
그런데도 세상 사람들은 아들이 아비보다 낫다든지 동생이 형보다 낫다고 하는 말을 종종 한다. 왜, 그런가? 그 순리인가 뭔가 하는 게 엉터리란 말인가? 아니다. 그 순리는 맞는 말이다. 단지 세상일에는 예외가 있기 마련이다. [청출어람] 즉, "마디풀인 일년초 쪽에서 뽑아낸 푸른 물감이 쪽보다 더 푸르다."는 말이 있기 때문이다. 분명한 것은 아버지가 형조참판을 지냈고 아들은 이조판서를 지냈으니 벼슬은 아들이 아버지보다 낫다. 그러나 이 곳은 벼슬을 따지는 곳이 아니라 인품이나 학덕을 논하는 곳이니 그것은 먹히지 않는다. 둘 다 예학을 했으나 누가 더 학문이 깊은 지는 알 길이 없다. 아버지가 예학을 시작하고 아들이 마감했으니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다. 부자가 똑같이 문묘에 배향되었으니 그 영광의 크기가 복사판처럼 똑같다. 김
장생의 제자가 송시열, 송준길....이었는데 김집의 제자도 송시열, 송준길....이니 이것도 피장파장이다. 김장생이 만83세에 졸했으며, 김집도 만82세에 졸했다. 다 같이 천수를 누렸으니 이것도 피장부 아장부다. 문묘에 배향된 아들을 둔 김장생이나 문묘에 배향된 아버지를 둔 김집이나 그 복이 그 복이니 이것도 장군이야! 멍군이야! 다.
박찬호와 박세리 둘 중 누가 더 나은가? 이것은 대답이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아주 어리석은 질문이다. 각자 다른 분야에서 각각 세계 정상에 선 두 선수의 우열을 어떻게 가를 수 있단 말인가? 태종과 세종대왕 둘 중 누가 더 나은가?"라는 질문도 마찬가지다. 세종대왕이 올림픽 금메달을 딴 선수라면 태종은 금메달리스트의 코치 격이다. 금메달을 딴 선수도 세계1류 코치는 자동으로 될 수 없고 세계1류 코치도 손수 금메달을 딸 수는 없다. 각기 제 분야에 세계 제1일 뿐이다. 이처럼 분야가 다른 두 사람이 똑같이 뛰어난 것은 우열을 가르기가 불가능하다. 저 위에서 열거한 바대로 모든 면에서 똑같이 뛰어난 김장생과 김집 두 사람은 말해 뭐하겠는가?.
그런데 부자 문묘배향이란 사실은 둘 다 똑 같은 영광 이상의 그 무엇이 분명 있는 느낌이다. 상신 판서나 대제학은 형제도 많이 했으며, 부자도 여럿이 했다. 부자 문묘 배향은 딱 한 번이다. 이것은 일어날 수 없는 일이 일어 났다고 본다. 이것은 실수다. 유림의 노망이다. 아버지가 문묘에 배향되면 아들은 될 수 없는 것이 유교 사회의 기본 상식이다. 아버지가 되면 아들이 양보하고 아들이 되면 아버지가 양보하는 것이 기본 예의다. 부자는 겸상도 하지 않는다. 벼슬이야 욕심 덩어리 세계이니 겹에 겹을 한들 어쩌랴만 문묘배향이란 유림의 최고 원로에 왕관을 씌우는 작업이다. 어느 가문이든 문장이 하나며 원로도 하나다. 그런데 어찌 이런 망발이 생겼는가?
그 답은 오직 하나다. 이것은 아들 김집이 아버지 김장생보다 더 낫다는 말이 된다. 태양은 두 개가 있을 수 없다. 아버지 김장생이 낫다면 아들 김집은 문묘배향의 대상이 자동으로 안 된다. 김장생 하나로 족한 것이 둘로 된 것은 아들 김집의 뛰어남을 드러내고도 남는 일이다. 그런 뜻에서 되지 않았다면 이것은 분명 조선조 유림이 보인 사족의 표본이며, 조선양반 장식문화가 낳은 허영의 단면이거나 망령된 처사 탓이라 할 수 밖에 없다. 이것으로 [봉숭아 학당] 강설을 마친다.
아들의 위대성을 강조하다 보니 아버지한테 본의 아니게 불경한 언사가 됐다. 그러나 아버지는 아들이 자기보다 잘 낫다고 할 때가 기쁜 것이다. 이제 김집의 인생 역정을 간략하게 살펴보기로 하자.
******김 집********
1574년에 태어나 1656년에 졸했다. 만8세에 조부 황강공[김계휘]이 별세했으니 그 때까지 그 엄하고도 인자한 할아버지의 훈도를 받았다. 이어 송상현에게 글을 배웠으나 아버지 사계의 깊은 학문의 요람에서 행운아로 성장했다. 진사시에 2등으로 합격하였으나 벼슬에는 뜻이 없어 고향 연산의 임천에서 줄곧 가학에 전심했다. 한때 동생이 무고를 당해 장래를 예측키 어렵게 되었다. 이에 대궐로 들어가 아우 반과 더불어 대죄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고[서제]가 진실로 망언을 하였으나 그 부형이 모두 어지므로 특별히 용서한다."고 하였다.
부여현감, 임피현령 등을 거쳐 동부승지, 우부승지, 공조참판, 예조참판 등을 지냈다. 그러나 늘 아버지가 계신 곳을 그리워하며 연산에 돌아가 아버지의 예학을 이어 받는데 심혈을 기울였다. 또한 아버지가 가르치던 천하의 영재들을 대를 이어 가르치는 기쁨으로 충만했다.
벼슬을 버리곤 줄곧 귀향하니 그 덕을 사모하는 태학의 유생들이 벼슬에 머물도록 해달라고 임금에게 상소하는 진풍경이 벌어지기도 했다. 76세에 김상헌의 주청으로 이조판서에 임명되었으나 세 번 상소하고, 임금을 알현하여 사양하였으나 임금이 허락지 않았다. 조선조의 상례가 서로 틀린 곳이 많아 생활에 불편이 많으므로 아버지가 찬한 [의례문해]를 교정하는 등 저술활동을 펼치면서 주자의 논설을 상고하여 책 한권을 만들어 임금에게 받쳤다.
"율곡의 석담 강학을 뿌리로 하고 사계의 순박하고 진실한 공적을 이어 받아 그 종통을 얻었다. 순수한 자질로 정도를 닦아 기호학파의 꽃을 만개시켰다.
"아름답다 선생이여! 오직 진실을 힘썼도다. 학문이 전일하고 행실이 돈독하며 효도하고 우애하였도다. 노년까지 어버이를 모시니 양세가 도학의 종장이 되었도다. 태산은 무너졌으나 동량은 남아있네 임금 앞에 계책을 진달하니 순 임금과 우 임금이 주고받던 일이로다. 성상이 보위에 올라 제일 먼저 불렀도다. 정사도 묻고 학문도 물으니 어진 지혜를 아뢰었네 사람들이 선생이라 하니 참으로 의롭고 인하도다. 임금을 도와 이 나라 사람을 훈화하기를 모두 원했는데 향리에 돌아오니 선비들도 눈물을 머금고 탄식하네. 깊은 연못에 엷은 얼음을 밟은 듯 평생을 조심하며 예학 연찬을 늙어도 쉬지 않았네. 조예 법도가 깊고 험이 없었도다. 어찌 백년을 살아 우리 후생을 일깨워 주지 않는고? 천호산 봉우리가 높이 솟았으니 억만년이 지나도 길이길이 그 영조가 남을 것일세."----- 문인 송시열이 찬한 신도비명에서-------
-------충남 연산에는 해가 셋이 있네. 하나는 하늘에 뜬 해고, 그 다음은 김장생의 해요, 다음다음은 김집의 밤에 뜨는 해네.---------------
4대 최고 문형가문, 광산김씨 왕기 90도 좌향좌
왕기는 흐르는 것이다. 이놈은 언제나 변덕스럽다. 똑바로 가는 것을 즐기지 않는 듯이 갑자기 획! 꼬부라지는 성질이 있다. 율곡 이이로부터 훌쩍 건너 뛰여 옮겨온 기호지방의 왕기는 김장생. 김집 부자에 이르러 정월 대보름달처럼 충만해지더니 김집 후손으로 쪽 바로 내려 가지 않고 휙 꼬부라져 김집 동생 김반 집으로 90도 좌향좌 해버렸다.
사계 가문에 내공[안내,공적공]이 많은 2대 인물 [김반] [김익겸]
김장생 가문은 4인의 거물이 있다. 김장생, 김집, 김반, 김익겸이다. 전자 2인은 외공[바같외, 공적공]이 많고 후자 2인은 내공이 많다. 전자 2인은 조선 천하가 다 아는 인물인 반면에 후자 2인은 사람에 따라서는 생소한 인물이기도 하다. 어느 가문이든 간에 이 내공이 많은 인물로 인해 가문이 번성하는 법이다. 이미 내공이 많은 인물로 허씨부인이 모범을 뚜렷이 보였고 김반이 그 할머니에 그 후손답게 김장생 가문에 주춧돌이 되고 김익겸이 선대 할머니와 아버지가 무색 하리 만큼 이 가문에 대들보가 되었다.
*******김반*********
1580년[선조13]에 태어나 1640년[인조18]에 졸했다. 알다시피 그 유명한 사계 김장생의 적은 아들로 태어나 얼마나 영특했던지 할아버지 황강공[김계휘]이 등을 쓰다듬으며 "이 아이가 우리 집을 일으킬 것이다."며 흡족히 여겼다. 형인 집은 송상현에게 글을 배우고 동생 반은 송익필에게 글을 배웠으나 둘 다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가학을 이어 받아 김씨 가문을 지키는 튼튼한 쌍벽이 되었다.
1605년 사마시에 합격하여 성균관에서 공부하였다. 1613년 계축옥사가 일어나 숙부[김경손, 김평손]가 무참히 죽자 고향 연산으로 돌아가 10여년 동안 초야에 묻혀 성리학 공부에 심혈을 기울였다. 1624년 이괄의난 때 어가를 따라 공주로 가서 공주 행재에서 실시한 정시문과에 급제하였다.
이조정랑,응교,대사간,우부승지,대사성,부제학 등 요직을 거쳐 예조,이조,병조의 참판과 한성부 우윤 등을 지냈다. 1636년 병자호란 때 성이 위급 지경에 이르자 독전어사로 남성을 지키는 아들 익희에게 [국은에 보답키 위해 직책에 충실해야 마땅하다"며 부자 맹세한 뒤 수레를 타고 성에 올라 친히 독전하며 여러 장군들과 함께 힘껏 싸웠다.
"선조가 나라를 다스릴 때 여러 현인이 나타났으니, 우계 율곡 이이의 도학이요 황강 김계휘의 문장이로다. 연원이 흘러내려 사계가 걸출했고 그의 형제가 쌍벽으로 그 가풍을 이었으니 나가면 세상에 쓰여 견줄 사람이 없었다. 고난의 과정을 거쳐 행한 도가 더욱 굳었도다. 난리에 임금을 모실 때에 대의가 일월같이 빛났으며 ....중략.... 임금의 은혜가 두터웠고 선비의 중망이 컸도다. 사헌부의 수반이요 이조의 차석이다. ........... 돌을 깎아 글을 새김에 조금도 꾸밈이 없도다. 앞으로 닥아올 천년에도 군자는 반드시 공경하리"라고 김상헌이 신도비명에서 그의 유덕을 칭송했다.
김장생과 김집은 이 집을 지키는 태산이고 김반은 이 집의 주춧돌이다. 김반이 없었으면 김장생 부자가 외로울 뻔했다. 김집의 후손은 봉제사 접빈객에 분주하느라 고단했으며, 선업을 수성하기에만도 벅찼다. 반면에 김반은 아들을 많이 낳아 후사를 튼튼히 하였다. 다섯 아들[ 대제학 김익희, 광원부원군 충정공 김익겸, 형조참판 충헌공 김익훈, 정자 김익후, 관찰사 김익경]이 모두 현달하여 김씨 가문의 주춧돌을 튼튼히 놓았다. 이 다섯 아들이 김장생 가문을 일으켜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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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다섯 가운데서도 가장 비참하게 죽은 이가 김익겸이다. 만 스물 한살의 피 끓는 청춘을 폭파하는 화약고의 불길 속에 아낌없이 던져 조국을 위해 타죽었다. 어머니도 오랑캐에 몸을 더럽힐까봐 목숨을 끊었다. 조선 여인의 수정같이 아름다운 마음이 청군에게 짓밟히는 강화도를 핏빛으로 아롱지게 했다. 세살짜리 아들 [김만기]와 뱃속에 든 [김만중]을 남겨두고 화약냄새가 진동하는 불길 속에서 불쌍한 아들 생각에 눈을 감지 못한 채 타죽었다. 이 유복자 만중이 자라 유배지에서 [구운몽]을 쓰면서 아버지 얼굴 한 번 보지
못한 것을 천추의 한으로 여겼다. 이 아버지가 김장생 가문의 오늘을 있게 한 1등 공신이다.
********김장생 가문의 대들보, 김익겸***********
1614년[광해군6]에 태어나 1636년[인조14] 만21세로 순국했다. 자는 여남이다. 1636년에 건주의 오랑캐가 황제를 칭하였다. 이때 후금의 태종이 국호를 청으로 고치자 이를 축하하기 위해 청나라에 사신으로 갔던 나덕헌이 청나라 사신 용골대와 함께 우리나라에 왔다. 이에 분연히 일어나 성균관 유생들과 함께 그들을 성토하기를 "추로가 참역하는 천지의 대변을 만나 흉한 무리와 화친하라 하니 청컨대 몽고의 사신을 죽여 그 머리를 함에 담아 명조에 알리고 대의를 들어 삼군을 격려하면 벙어리와 앉은뱅이라도 백배나 기운이 날 것이니 어찌 힘이 적은 것을 근심하랴."하였다. 이말을 들은 청나라 사신이 급히 돌아갔다고 한다. 이해 겨울에 오랑캐가 쳐들어왔다.
부형들은 어가를 모시고 남한산성으로 가고 동생과 어머니 서부인을 모시고 강도로 갔다. 1637년에 오랑캐가 강을 건너오는 지라 동지들과 함께 사수할 것을 약속하고 활을 잡고 성에 올라 말하되 한사람씩이야 대적하지 못하겠느냐 하였다. 사세가 급박하므로 선원 김상용과 같이 남성 초루에서 분신자살하였고 그 익일에 서부인도 자결하였다. 재주가 높고 기운이 맑으며 뜻이 개결하고 행검이 준정하였다. 또 가학을 익혀 날로 진취하니 할아버지 사계 김장생이 심히 사랑하여 원대한 기대가 있었는데 불행히 여기서 그쳤다.----
[우암 송시열이 찬한 신도비명에서]----
조정에서 사헌부 지평을 추증했고 나중에 영의정에 가증했으며, 광원부원군에 추봉하였다. 또 강화도에 있는 충렬사 [김상용의 사당]에 배향하였고 충정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4대 최고 문형가문, 광산김씨 숙종 국구 김만기 길흉화복
김만기는 사계 김장생의 증손자다. 1633년에 태어나 1687년에 별세했다. 자는 영숙, 호는 서석 혹은 정관재라 한다. 청나라 오랑캐의 칩입으로 강화성이 함락되자 아버지 김익겸은 김상용과 함께 화약고에 불을 지르고 그 불길 속에서 21세란 아까운 나이에 죽었다. 할머니도 분신자결했다. 이 무렵 동생 만중은 태중에 있었고 만기는 겨우 3-4세에 불과했다. 어머니 윤씨의 품에 안겨 죽음의 공포와 두꺼운 적막만이 짓누르는 폐가로 돌아왔다.
겉은 태연하지만 극도의 슬픔으로 흐느끼는 어머니의 품속에서 따스한 사랑을 받으며 씩씩하게 자랐다. 삼촌 익희에게 글을 배우다가 송시열 문하에 들어가 본격적인 공부를 하였다. 몸을 가지는 태도가 의젓하고 침착했으며 사리에 밝고 심성이 너그러웠다. 어머니를 통해 아버지의 충의정신을 배우고 스승을 통해 대대로 내려오는 가정의 올바른 가르침을 이어받았다. 1652년 사마시에 합격하고 이듬해 문과에 급제하여 정언, 교리 등을 지냈다. 1659년 효종이 죽자 자의대비 복상문제로 논쟁이 있을 때 기년설을 주장하여 3년설을 주장하는 남인 윤선도에 맞섰다.
그의 딸이 1670년[현종11] 세자빈으로 간택되어 의동 별궁에 들어갔고 1672년[현종13] 3월 22일 왕세자빈으로 책봉되었다. 현종 임금 내외는 왕세자 내외의 친영례를 받았다. 임금은 세자를 보면서 "세자가 이제 의젓하구나."라며 미소를 지었다. 중전 김씨도 왕세자빈을 물끄러미 쳐다보며 만면에 웃음을 띄웠다. 임금은 왕세자에게 " 학자 집안 규수를 며느리로 맞았으니 왕세자는 학문과 덕을 쌓아야 하느니라."고 당부를 한 뒤에 다담상을 받고 과일, 화채 등을 맛있게 먹는 어린 아들과 며느리를 남겨둔 채 중전 김씨와 함께 모처럼 궁궐 뜰을 거닐었다.
중전이 말문을 열었다. "마마! 아기가 앞으로 절세미인이 되겠나이다." "나도 놀랐소. 열 한살 어린 아기가 한떨기 장미 꽃송이처럼 아름답구려!" 임금도 맞장구를 쳤다. 왕세자빈은 장희빈이 무색할 정도로 절세미인이었다. 임금 내외는 어린 왕세자빈의 미모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 1674년 현종이 승하하고 숙종이 등극했다. 사위가 상복을 벗고 면류관을 쓰고 곤룡포를 입고 조선 19대 왕위에 오른 것이다. 문무백관들이 신왕의 등극을 축하하여 천세를 삼창하였고 이어서 대사령이 반포되어 죄인들이 사면되었다.
병조판서로 있던 장인 김만기는 숙종이 왕위에 오르므로 광성부원군에 봉해지고 영돈녕부사에 승진하였으며 총융사를 겸하여 병권을 쥠으로써 13살 소년왕의 우익이 되었다. 또한 김수항의 천거로 대제학에 올랐다. 1680년 경신환국 때 훈련대장으로 남인과 끝까지 맞섰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딸인 왕비 김씨가 같은해에 천연두를 앓다가 8일만에 19세로 죽었다.
남인의 거두 허견이 복선군을 임금으로 세우려 한다는 [삼복의 옥사]가 터졌다. 김만기는 이 사건을 다스려 보사공신1등에 책록되었다. 노론의 핵심 인물로 지목되어 1689년 기사환국 때 삭탈관직되었다. 나중에 복직되고 현종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시호는 문충이다. 저서로 서석집 18권이 있다.
학문과 인품으로 문형이 되고 천운의 길조로 임금의 장인을 겸하여 명예와 권력을 함께 얻어 한 때의 영화가 성했으나 태어나 3,4세에 21세의 아버지를 잃는 횡액이 덮쳐 불행했고 노후에는 사랑하는 딸을 가슴에 묻어야 하는 비극을 맞아야 했다. 특히 태산같은 자랑인 왕비김씨가 19세에 요절하므로 참담하기가 그지 없었다. 더구나 남인의 시퍼런 칼날이 등뒤에서 번쩍이는 갈등과 긴장의 연속이었다. 일생의 영광이 크고 욕됨은 적었으나 인생의 희비가 남달리 심한 가운데 천수를 넉넉히 받지 못하고 54세의 아까운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하늘은 왕후장상에서부터 시정잡배에 이르는 만백성에게 길흉화복을 고루고루 주는가 보다. 위대하도다, 하나님이시여! 거룩하도다, 하늘님이시여!
"효종이 승하한 뒤로 국세가 쇠약해지고 국력이 차츰 무너지므로 벼슬을 버리고 정양할 뜻이 있었으나 갑자기 국구가 되어 거취가 양난할 뿐 아니라 위기를 당하여 형세가 급박하고 사화가 잇따르니 공이 충심과 지혜를 다하여 종사를 편안케 하고 훈업을 이룬뒤 벼슬을 헌신짝같이 버리고 일이 없는 듯이 자처하려 했으나 나라에서는 주석같이 의지하고 선비들은 산악같이 우러렀다. 그러나 공은 더욱 겸손하고 침착하여 착한 말에 험이 없었다."
----[우암 송시열 찬 신도비문]에서----
4대 최고 문형가문 ,광산김씨 효자 김만중
이조참판 윤지의 딸 해평윤씨는 사계 김장생가로 출가하여 김장생 손자 김익겸의 배위가 되었으며 만기, 만중 형제를 낳았다. 이 해평윤씨는 선조의 부마 해숭위 윤신지의 손녀다. 해평윤씨의 조부 윤신지는 선조의 딸 정혜옹주를 아내로 맞이했으니 정혜옹주는 해평윤씨의 조모가 된다. 해평윤씨는 증조부[윤방]가 영의정이고 고조부[윤두수]가 영의정으로 양대 영의정을 낸 명문 출신이다. 해평윤씨가 사계 가문으로 시집을 갈 때 할머니인 정혜옹주가 손녀의 손을 잡고서 "사계 집안은 예학을 하는 집이니 매사에 조심하여 할미가 손녀를 잘못 가르쳤다는 말을 듣지 않게 하여라."고 신신 당부했다.
이 해평윤씨의 부군 김익겸이 병자호란에 순국하자 세살박이 만기를 등에 업고 만중을 잉태한 채 조그마한 배를 간신히 얻어 타고 난리를 피해 두 아들의 목숨을 건졌다. 두 아들은 어머니의 남달른 엄한 가정교육을 받았다.
이 해평 윤씨의 둘째 아들이 김만중이다. 자는 중숙이요 호는 서포다. 젖 떨어지기 전에 이미 글을 배웠고 영특하고 숙성하여 14세에 초시에 합격했고, 16세에 진사시에 장원했으며 1665년에 정시에도 장원했다.
그뒤 정언, 지평, 수찬, 교리 등 청요직을 두루 거치고 1671년에 경기와 삼남의 암행어사로 나갔다. 1675년 동부승지로 있을 때 인선대비의 복상문제로 삭직되었다. 1679년 예조참의로 복귀하고 1680년 경신대출척으로 남인 허적과 윤휴가 사사되자 서인들이 정권을 잡았다. 1683년 공조판서, 1686년 대제학이 되었다. 1687년 장숙의 언사사건에 연루되어 선천으로 유배되고 1689년 남해에 위리안치되어 그곳에서 한많은 생을 보냈다.
서포 김만중은 세상에 널리 알려진 효자다. 아버지 얼굴 한번 보지 못한 것을 평생의 한으로 여기며 어머니 곁을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며 어머니의 시중을 들었다. 어머니는 자식의 교육을 위해 늘 책읽는 모습을 아들에게 보였다. 아들은 어머니가 독서를 즐기는 것을 보고 어머니가 좋아할만한 책은 있는 대로 구해다 드렸다. 옛날 사기에서부터 패관잡기에 이르기 까지 온갖 서적을 구해다 드리고 나이 들어서는 눈이 어두워지기 시작한 어머니를 위해 책을 밤낮으로 읽어 드리며 심지어 어린이 흉내, 동물 흉내까지 내면서 어머
니를 기쁘게 해드렸다.
유배지에서 고생하고 있을 아들 걱정에 병이 든 어머니를 위로하기 위해 [구운몽]을 썼다. 한글소설로 당시 아녀자들이 즐겨 읽었다. 한문을 숭상하는 시대에 한글 문학작품을 남겨 국문학의 선구자가 되었다.
서포는 " 우리 나라의 말을 버리고 다른 나라의 말을 배우고 있다." 고 안타까움을 표했다. 이것은 고루한 시대에 아무나 할 수 없는 파격적인 선언이다. [서포만필]에서 송강 정철의 가사문학을 격찬하면서 국문의 가치를 높이 평가했다. 이것은 서포의 견해가 탁월함을 입증한 것이다. 서포의 전반적인 학문이 높은 경지에 있었기에 한글의 소중함까지 살피는 진보적인 사상이 움텄다고 본다.
남해에 귀양살이 하는 동안에 어머니가 오매불망 아들이 무사히 돌아 오기만을 기다리다 병들어 결국 돌아가셨다. 서포는 유배지에서 신위를 차려놓고 조석으로 음식을 올리며 어머니를 그려 통곡하니 섬 사람들이 그 광경을 보고 따라서 슬퍼 울지 않는이가 없었다. 담제를 마치고 애통한 나머지 그 역시 병들어 죽었다. 향년이 56세이다. 1694년(숙종 21) 복관되어 부조의 은전을 받았으며 숙종(肅宗) 묘정에 배향되었고 1706년에 나라에서 그가 행한 효행을 인정하여 정문을 세웠다. 시호는 문효이다. 저서로 구운몽, 사씨남정
기, 서포만필(西浦漫筆), 영정(影幀)이 있다.
"일을 의론할 적에는 권귀의 세력을 꺼리지 아니하며 친한 정의도 아랑곳 없고 경연에서 강할 때에는 말이 화평하고 강론하는 의사가 밝고 자상하니 사람들이 참된 학사라 하였다."----------[이조판서 우봉 이재 묘표]에서------
4대 최고 문형가문 광산김씨,봉숭아 학당 [내 족보는 진짜야!!]
---- 광산김씨 김장생 가문의 문과 급제자 수를 크게 바로 잡아 주신 이 집안의 동암 김춘득님[사계 김장생 선생과 신독재 김집 선생 후손]에게 고맙다는 인사의 서두를 꺼내다가 족보 이야기가 길어졌습니다. 얼마전 이 사이트를 긴장시킨 족보 진위 논쟁에 대한 견해를 곁들였기 때문입니다. 명문 선정 작업 이외 논쟁에 참여할 시간적인 여유가 별로 없어서 이런 기회를 이용하게 됨을 여러분께서 이해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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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문은 가짜 족보가 없다. 가짜가 없기에 명문이다. 가짜가 있으면 명문이 될 수 없다.명문은 족보를 만들 때 선조에 대해서 오류가 있을까 전전긍긍한다. 휘[돌아 가신 선조의 이름]를 잘못 적는다든가 댓수를 잘못 기재하면 두고두고 지적을 받는다. 그 족보를 만든 유사[혹은 집사]는 선조님에게 죄스러워 어쩔줄 모르고 그 사실을 알게 된 집안 어른들 모두 하나같이 송구해 한다. 이런 글자 하나 잘못되어도 떠들썩한데 어느 놈이 감히 선조의 행적을 위조할 수 있단 말인가?
예를 들어 관직 하나만 하더라도 없는 것을 있다 한다든가 한 계급 올리든가 한 계급 낮추는 일은 생각할수 없는 일이다. 했다면 만고에 불효가 되고 주위 사람에게 손가락질을 받는다.
옛날 명문의 족보는 자기 집안 뿐만 아니라 여러 문중이 두루 두루 알고 있다. 법조계 인사들이 6법전서를 알고 있는 것보다 유림의 명사들이 남의 족보를 더 잘 알고 있다. 호남의 명사는 호남의 족보를 영남의 명사는 영남의 족보를 자기 손바닥의 손금처럼 들여다보고 있다.
민주주의가 성숙하면 쿠테타를 꿈꿀 수 없는 것처럼 명문이 형성되면 족보위조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다. 민주사회에서 쿠테타보다 명문에서 족보위조가 더 힘든다. 더러 고증이 안되는 선조의 행적은 수백년이 흘러도 그 후손들이 따지고 따지며 말썽이 그치지 않는다. 진실을 밝히는 것이 선행이며, 효도이기 때문이다. 명문의 자손은 선조의 벼슬보다 그 인품과 학덕을 더 사모기에 선행이나 효행을 자랑스럽게 여기며 족보의 진실을 사수하는 것이다.
여기 175개 가문은 어디까지 명문인지 아닌지 단언할 수 없다. 그러나 많은 시일을 두고 이들 족보를 갖고 씨름해 본 결과로는 이들의 족보는 가짜가 거의 없다. 175개 가문의 족보상 문과급제자와 국조방목의 명단이 90% 일치했다. 10% 정도의 오차도 대개 고의성이 없는 착오나 착각, 혹은 편집자의 기타 실수에 불과하다.
175개 가문의 족보에 나오는 정3품 당상관[지방수령도 포함]부터 고위직에 이르는 관리의 직책과 수 십종의 보학 서적 및 각종 인물사전에 수록된 직책을 여러 차례 비교해 보아도 90%이상이 일치했다. 일치하지않는 관직은 세월이 오래되어 고증이 부족한 경우로 살았다 할 수도 없으며 죽어 없어지지도 않는 치매들린 노파 신세에 불과하다. 이런 것은 그냥 내려 올 뿐 그것을 어느 누가 드러내거나 자랑하는 법이 없는 [족보 속의 미라]들이다.
175개 가문 이외 족보 중에 명문으로 소문난 족보들을 대충이나마 들여다 볼 기회가 있는데 그들 역시 175개 가문과 같다는 심증이 간다. 그러나 그 이외의 많은 족보들이 겉은 화려하지만 내용이 엉망진창이다. 그것들은 믿을 수 없는 엉터리 족보라는 것을 보학을 좀 하는 사람은 한눈에 알아 볼 수 있다. 더구나 명문을 연구하는 사람은 김포 국제공항에서 귀신같이 밀수품을 찾아내는 [600만불 짜리] 수색견보다 더 빨리 가짜 족보를 판별할 수 있다. 아닌게아니라 현재 나돌고 있는 족보는 그 내용 중 상당한 부분이 허위일 가능성이 있다.
가짜 족보에 대해 본격적인 연구를 해본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 수치를 정확하게 이야기 할 수 없지만 가짜와 진짜는 분명히 있다. 그 가짜 족보들이 성행한 시기를 분명하게 그을 수도 없지만 조선이 망하면서 나온 양장본 족보는 가짜의 개연성이 아주 높다. 조선이 살아 있을 때 나온 목판본 족보는 거의 진짜다.
명문의 족보는 가짜가 거의 없다고 위에서 장담했는데 그것은 골격을 이야기 했을 뿐이다. 한점 두점 붙인 살절음은 쓸모없는 비계 덩어리가 종종 끼여 있다. 조선조에서 나온 명문 목판본은 그렇지 않지만 요즈음 나온 양장본 족보는 명문이라도 슬쩍슬쩍 가짜가 끼여 있다. 조상의 대가 끊긴 곳에 그 문중 사람들 아무도 모르게 슬쩍 입양[?]시킨 가짜 후손들이 더러 생겨 났다. 그래도 명문은 이렇게 슬쩍 끼워 넣기가 여간 힘든 게 아니다. 문중 여러 사람들의 밝은 눈을 속이는 것은 김정일이가 화경같이 부라리는 부시의 눈을 피해 영변에 핵 감추기보다 훨씬 힘들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렇게 떳떳하지 않게 입양[?]하는 것이 훌륭하다고는 할 수 없지만 그것을 보고 큰일난 것같이 걱정할 필요는 없다. 대가 끊겨 외로운 귀신을 모셔 주면 서로 좋은 일이 아닌가? 옛날에도 대가 끊기면 제일가까운 혈족으로 대를 잇게 하지 않았던가? 그것이 여의치 않으면 10촌,20촌 넘는 방계에서 하기도 하였고 외손 봉사도 했으니 타성으로도 대를 이은 셈이다. 명문의 좋은 가풍을 단절시키는 것보다 여러 사람에게 전파하는 것이 뭐 그리 나쁜가? 족보가 없던 우리 동포가 다 족보를 갖게 된 것은 경하해야 할 일이지 화낼 일은 아니다. 아무리 그렇더라도 역사 속에 명문은 펄펄하게 살아 있으니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일을 뭐 그리 걱정들을 하는가? 5000만 동포가 단군할배 후손으로 모두 명문된 것은 단군의 홍익인간 사상에도 부합되고 현대의 자유평등 사상에도 맞아떨어지는 시대의 소명이 아닌가?
오늘날 누가 명문의 후손이냐가 중요한 화두가 아니다. 왕손이 빌어먹어도 오불관언이며 어제의 우리 집 머슴이 내일 대기업의 사장이 되어도 낭패날 일 없다. 오히려 그이는 대중으로 하여금 눈물을 동이로 쏟게 할 감동의 주인공이지 발길질 당하는 머슴의 아들은 아니다.
명문 선정 작업은 몇안되는 명문의 진짜 후손 잔치판이 아니라 한겨레의 보물찾기요, 조선역사 핵심알기 운동으로서 모두 참여하여야 하며 족보에 관심을 기울이는 사람도 있어야 한다.
그런데 명문의 족보가 세상에 드러나지 않고 오히려 장농 속에 숨는 경향이 있다. 지방에 있는 명문일수록 그것이 심하다. 어디라고 공개하기는 곤란하지만 세상 사람들이 제일 명문이라 손꼽을 만한 그 명문도 국립 중앙도서관이나 서울 시립 도서관에 양장본 족보[근,현대를 알려면 양장본 족보가 필요함] 한질 없다.
그런 명문의 족보는 구해 보려면 족보를 갖고 있는이가 간첩 잡는 수사관 처럼 이래 저래 무엇 때문이냐고 꼬지꼬지 물으면서 좀처럼 주지 않으려고 한다.
명문은 자기네 집안을 세상이 다 안다고 자부하기 때문에 족보를 화려하게 만들지도 않을 뿐 더러 족보 선심이 짠돌이다. 대한민국이 들어서서 생긴 신흥 귀족은 족보도 화려하고 족보 선심도 후하다.
이 홈피에서는 사계 김장생 가문의 문과급제자 수를 38명으로 적어 놓았다. 이것을 김춘득님이 정신문화연구원 연구자료에 근거한 수치까지 제시하면서 75명으로 수정해 주었다. 어떻게 이런 오차가 생길까 여러분은 의아해 할 것이다. 이 창에서는 [광산김씨 양간공파보]를 서너번 확인하여 통계 뽑았다. 그런데 이렇게 오차가 생긴 것은 이 족보에 미단이 많기 때문으로 짐작된다. 미단이란 족보를 만들 때 족보에 기록할 명단을 받는 것을 말한다. 족보 대금 지불을 전제한 것이다. 족보 명단을 받는 문중 행사에서 빠지는 파가 많을 때 이런 오차가 생길 수 있다.
미단이 많이 발생하는 일은 문중 사정이 나름대로 있기 때문일 것이지만 대제학을 지낸 분까지 족보에서 누락된 것을 보면 지금도 의아할 뿐이다. 이런 연유로 인해 사계 가문의 통계 오차가 문과급제 뿐만 아니라 여러 항목에서 많이 생겼을 것으로 보고 있다.
여기 나온 수치만으로 가문의 우열을 논하는 것은 대단히 위험하므로 이 곳에서는 수치 싸움을 하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있다. 그러나 가문이나 지역에 따라 신뢰성이 높은 경우도 있고 족보의 항목 따라 정확한 경우도 많다. 선별적으로 그 통계에 의존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 있다.
--------------[봉숭아 학당 강설]을 마치고---------------
사계 가문의 문묘 배향 2명, 대제학 7명은 세상이 다 아는 일이므로 수치가 틀릴 리가 없다. 상신과 같은 굵직한 항목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정2품, 종1품[11명]이나 참판급[13명] 및 정3품 당상관[5명] 수치만 해도 큰 차이가 날 것 같아 걱정스럽다. 부디 이 수치로 우열을 속단하지 말기를 바란다. 오랜 시간을 두고 끈기 있게 정정할 계획이다.
미단이 많은 족보를 통해 문중 인물의 흐름을 정확하게는 말할 수 없지만 굵직하게 드러난 인맥만을 짚어보기로 한다. 좀더 앞에서 말한 대로 신독재 김집의 후손은 봉제사,접빈객 등 선업 수성에만도 벅차 그 후손들의 대외활동이 미미했다. 김집의 동생 김반 집으로 왕기가 다 몰려가 다섯 아들이 현달했다고 말했다. 이 중에서도 김익희와 김익겸 집이 더욱 성했다. 익희와 익겸 형제 중에도 김익겸 집이 제일 번창했다.
김익겸이 21세 나이로 강화도에서 순국하자 그 두 아들 만기, 만중이 분발하여 형제 대제학이 되었다. 만중의 후손은 글 잘하는 선비를 좀 낸 반면에 만기 후손은 조선에서 손꼽는 명문으로 부상했다.
김만기 집은 대제학이 4명이다. 이 중에 3대 대제학[만기, 진규, 양택]이 배출되고 만기 맏아들 진구 후손에 대제학[영수]이 한명 나왔다. 김양택은 대제학에 영의정을 더 했다. 만기의 맏아들 진구가 호조판서, 진구의 맏아들 춘택이 대호군에 문장가며, 적은 아들 보택이 관찰사, 운택이 호조참판, 조택이 관찰사, 김영수의 아들 학수가 지돈녕원사, 김양택의 아들 하재가 이조참판을 지냈다.
김익겸의 형 익희 집도 만만치 않다. 김익희가 대제학, 익희의 손자 진옥이 관찰사, 진옥의 아들 원택이 한성판윤, 원택의 아들 상복이 영의정, 익희의 적은 아들 만증이 지중추,만증의 현손 희가 우의정을 지냈다.
김익겸의 동생 익훈의 아들 만채가 병조참판, 만채의 아들 진항 후손에 대제학[상현]이 하나, 참판[상익, 기상]이 둘, 장헌세자 사위 기성도 호조참판, 진항의 동생 진상이 좌참찬을 지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