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 10:32~39)
‘또한 우리는 우리가 드릴 예물로 우리 밀의 첫 수확물과
모든 종류의 나무 열매와 새 포도주와 기름의 첫 수확물을
제사장들에게 가져와 우리 하나님의 집 방에 들이고
우리 땅에서 난 것의 십일조를 레위 사람들에게 가져오기로 했습니다.
레위 사람들은 우리가 일하는 모든 성들에서 십일조를
받아야 할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37절)
본문은 성전 예배를 회복하기 위해 필요한 물질적 소요를 해결하기 위해
세부적인 부분까지 어떻게 했는가를 보여주는 내용이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기 위한 노력이라 해서
하나님이 마술사처럼 “쨔안~”하고 모든 것을 해결해 주시지 않으신다.
하나님이 매우 기적과 같은 일을 가끔 하시기는 하나
대부분의 경우는 우리의 최선의 노력을 기본으로,
거기에 은연중 힘을 보태신다.
그런데 그 은연중 보내신 그 힘이 사실은 목표로 한 것을
성취시키는데 절대적인 portion을 차지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은 우리의 노력을 귀중하고 가치 있게 평가하신다.
현실에서의 체계와 제반 준비에 충실한 모습은
하나님을 향한 마음을 간직하고 있다면
필수적이기도, 우리의 책무이기도, 마땅히 해야할 일이기도,
하나님의 피조물로서 가장 가치 있는 일 중의 하나이기도 하다.
그럼으로 마땅하고 당연하다.
그런데 그릇된 최근의 교회가 그런 인간의 노력을
자아 강화, 인간적 노력 등 죄성으로 치부하는 분위기가 있다.
그리고 마치 그 모든 인간적 노력을 배척한 크기와
하나님의 전격적인 기적을 기다리는 크기가
믿음의 척도인 양 인식하고 있다.
허경영이 물을 뿌리며 기적의 은사를 취하면
사람들이 은혜로워하고,
장경동 목사가 치유 기도를 하면서 툭툭치면
사람들이 좌우로 픽픽 나가떨어진다.
하나님이 주신 몸을 하나님의 창조 원리대로
적절한 음식 조절과, 적당한 운동, 스트레스 조절 등으로
건강을 유지하고
만약 질병이 생기면 하나님이 이 세상에 주신
기법과 약재를 통해서 치료하고 하나님께서 완치하시도록
기원하는 것이 당연한 하나님의 뜻이다.
사람들의 당연한 노력은 하나님이 당연히 우리에게
기대하시는 일이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영역이다.
하나님은 전인격적이신 분이지 기적을 일으키는 일에만 편협한
기능을 발휘하시는 분이 아니시다.
오늘 본문에서 십일조의 현실에서의 주요 기능은,
제사를 주관하는 레위인의 생계를 유지시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생계를 책임져 주시고
목회자들의 생계도 당연히 책임져 주시지만
그 과정과 절차는 사람들의 행동을 기본으로 한다.
거기에 하나님의 은연중의, 부지불식간의 결정적 힘을
불어 넣어주신다.
목회자들의 역할을 존중하고 거기에 내 노력의 몫을
존중한다면 감사함으로 십일조를 헌금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십일조나 헌금이 ‘본질적인 것’은 아니다.
‘비본질적인 것’이다.
세상에 본질적인 것은 나는 단 하나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하나님이 가르쳐 주시고 의미하시는
‘사랑’뿐이다. 본질적이고 절대적이다.
그 사랑은 곧 하나님이시다. 그 원리 그대로 하나님의 인격이시고
원칙, 원리이기 때문이다.
십일조를 이행하는 방법은 얼마든지 변경될 수 있다.
최근의 김의식 목사에게 9억 원 전별금을 울며겨자먹기식으로
지불하는 교회라면 나는 그 교회에 십일조를 헌금하지 않는다.
(물론 하나님이 혹여 그래도 헌금하라고 명령하시기 전까지는)
그리고 가난이나 여러 가지 상황의 변화로 인해서
이행하고 싶은 마음은 있지만 심각한 재정적 문제가 닥치게 된다면
고민 끝에(기도하면서) 십일조를 줄이거나 일시적으로 중지하는 것도
충분히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또한 교회가 의지적으로 헌금의 사용이 부적절하다면,
그것이 고질화된다면, 헌금하지 않는 것을 고민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또한 십일조를 헌금하는 것 자체나
어떤 기준으로 헌금하는가(총수령액, 실수령액 등)에 대한 것 등
제반사항에 대한 것과 관련해서는
성경의 배경과 상식적인 지식, 은혜에 관해서 ‘교육’할 수는 있지만
심각하게, 거의 강제와 강요식으로 압력을 넣는 것에는
찬성할 수가 없다. 100% 성도의 선택에 맡겨야 한다.
<오늘의 명언>
‘주님께 순복하는 것은 내 모든 권리를 그분께 맡긴다는 의미다.’
-어윈 W. 루처-
아마도 요즘 교인들은 위의 명언을 대할 때
내 모든 권리가 하나님께 옮겨지는 것, 그러니까
나를 제거하고 하나님으로 채운다는 의미에 집중할 것이다.
그것은 맞는 말이지만, 이것을 과도하게 해석하거나 받아들여서
나를 무기력하게 만들거나 허수아비로 만드는 것이 미덕.
나의 어떠한 점도 내세우는 것은 죄악이라는
근본주의적 해석이 따를까봐 걱정된다.
저 문장에서 동시에 고려해야 할 점은
‘맡긴다.’는 동사의 주어가 ‘나’라는 것이다.
이 일을 주도하는 것은 엄연히 ‘나’이다.
내가 그 일을, 그 선택을 적극적으로 하는 것이다.
역설적이지만, 적극적으로 나의 죄된 자기중심성을
스스로 선택하여 억제하고
하나님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여기서 ‘자기중심성’을 버리는 것이
하나님이 우리 각자에게 주신 ‘주체성’을 버리라는 것은
절대 아님을 명심해야 한다.
주체성은 하나님이 주신 고귀한 선물이다.
내가 나 되게 하는 일이다.
나는 허수아비가 아니다. 그래서 하나님도
나의 선택권을 침해하실 수 없다.
적극적으로 나의 자기중심성이 극소화 되는 길,
나의 죄성을 자제하는 태도를 취하는 것이다!
“하나님! 오늘 밖에서 잠시 산책했는데, 선선해진 날씨가
기분을 많이 전환시키게 해 주었습니다. 때때로 이런 배려로
우리를 사랑으로 감싸 주심이 너무 감사합니다.
우리가 창조질서를 무너뜨려서 지구가 망가지고 있습니다.
저희를 용서하소서. 기후도, 우리의 마음도
하나님의 창조질서로 회복될 수 있도록
믿는다고 하는 우리가 진정으로 ‘분투’의 삶을 살게 해 주소서.
정환이, 지켜 보호해 주시기를 바라옵고 또 바라옵니다.
소영이가 아랫배가 아픕니다. 치유해 주시옵소서.
소망이가 새로운 차를 구입했습니다.
안전하게 운전하게 해 주시고 그 차를 통해서 많은 좋은 일,
하나님과 함께 하는 일들이 있게 해 주시옵소서.
감사드리며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