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서운동가(愛書運動家) 백민 이양재(白民 李亮載)
지난 회에서 학포(學圃) 양팽손(梁彭孫, 1488~1545)을 다루며, 그와 함께 교유하였던 충암 김정과 영천자(靈川子) 신잠(申潛, 1491~1554) 등 3인은 모두 조광조(趙光祖, 1482~1519)를 따르던 당시의 신진 사류(士類)였음을 언급하였다. 이 3인은 모두 시서화(詩書畵)에 능했던 중종조(中宗朝, 1506~1544)의 선비화가였다. 이번에는 충암 김정에 관하여 논하고자 한다.
1. 충암 김정
충암(冲庵) 김정(金淨, 1486~1521)은 조선전기의 문신이자 시인으로 본관은 경주(慶州)이고, 자는 원충(元沖)이며, 호는 충암(沖庵)과 고봉(孤峯)이다. 호조정랑을 지낸 김효정(金孝貞, ?~1500년)의 아들이다.
10세 이전에 사서를 통하고 1504년 사마시에 합격하였으며, 성균관 전적, 홍문관수찬지제교겸경연검토관, 춘추관기사관, 병조좌랑, 사간원정언을 거친 후 1507년 문과에 장원급제하였다. 이후 병조정랑, 홍문관부교리, 교리, 사간원헌납 등을 지냈다. 1511년 충청도도사로 부임했다가 1512년 다시 내직으로 돌아와서 교리, 이조정랑을 거치고 1513년 독서당에 들어갔다. 그러나 얼마 후엔 벼슬을 사양하고 다시 고향으로 내려왔다.
1514년(중종 9) 순창군수에 제수되어 부임하였다. 1515년 순창군수로 있던 중 그는 장경왕후 윤씨가 인종을 낳다가 산증으로 사망했는데, 이때 일부 조정 대신들은 중종의 총애를 받고 있던 후궁 숙의 박씨를 천거했다. 그러나 김정은 담양부사로 있던 박상(朴祥, 1474~1530)과 함께 이를 반대했다. 그리고 담양부사 박상과 함께 중종비 신씨를 복위해야 한다는 상소를 올렸다. 이 일로 인하여 왕의 노여움을 사서 고향땅인 보은의 함림역(현, 보은읍 학림리)으로 유배되었다.
1516년 다시 등용되어 부제학, 동부승지, 도승지, 이조참판, 대사헌, 병조판서를 역임하고 조광조와 미신 타파와 향약 시행 등 개혁 정치에 힘썼으나, 1519년 기묘사화로 몰락해 충청도 금산으로 유배되었다. 곧이어 다시 제주도로 이배되었다가 위리안치(圍離安置)된 뒤, 1521년 10월 사약을 받고 36세에 사사된다.
1545년(인종1) 복관되고, 1646년(인조24)에는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시호는 문정으로 나중에 문간으로 고쳐졌다. 중종조의 청백리로 녹선되었다. 보은의 상현서원(象賢書院), 청주의 신항서원(莘巷書院), 제주의 귤림서원(橘林書院), 금산의 성곡서원(星谷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충암 김정은 시서화(詩書畵)에 능했으며, 문집으로 『충암집』이 있다. 문집 초판본 권지3에 수록된 제주 유배시 지은 「제주풍토록」은 제주와 관련한 매우 중요한 기록이다.
2. 충암 김정의 시서화(詩書畵)
충암 김정의 그림은 3점이 현전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가장 널리 알려진 작품으로는 지본담채로 된 「산초백두도(山椒白頭圖, 宿鳥圖)」1)가 있다. 세로는 32.1, 가로는 21.7cm로 국립제주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는데, 가시나무 가지에 새 두 마리가 앉아 있는 모습을 그린 그림이다.
(좌) 「산초백두도」, 김정, 1521년 이전, 지본담채, 32.1×21.7cm. 이병직 구장. (우) 「산초백두도」 첨제, 김광국, 1780년. [사진 제공 – 이양재]
가시가 삐죽삐죽하게 튀어나온 위태로운 나뭇가지에 새 한 마리는 고개를 깃털 속에 파묻고 자고 있고, 다른 새 한 마리는 이를 내려다보고 있다. 새는 머리와 뺨에 하얀 반점 같은 문양이 있어 할미새(白頭鳥)라고 하는데, 가시가 있는 산초나무에 즐겨 앉는다. 이 그림에서 충암은 두 마리의 새 주변에 푸르스름한 담채를 엷게 칠하여 밤의 정경을 표현하고 있다.
그림에 충암의 관지는 없고 영-정조의 수장가이자 감식가로 유명한 석농(石農) 김광국(金光國, 1727~1797)2)이 그림의 천변(天邊, 그림의 웃 부분)에 별도의 종이를 붙여서 아래와 같이 제첨하고 있다.
“忠庵金先生之道學文章炳若日星人皆見之至 其書畵雖爲公餘事然 當時猶称三絶而 但束俗貿貿不甚慕惜 是以不多傳于世 惟此一彽淂保於滄 喿厌刼之餘流傳 至今其爲寶翫奌膏 連城墨樂而止哉 後之賢是畵者咋但取其品格 亦可因之而想先生之儀形則尤 當爲山仰之一助也 庚子南至日慶州金光國謹識” / 의역(意譯) ; “충암 김 선생의 도학과 문장은 해와 별과 같이 빛나서 많은 사람이 알고 있다. 공에게 서화는 중요하지 않은 일이다. 당시에 삼절이라 불리었는데, 우리나라의 풍속이 그림에 밝지 못하여 그림을 아낄 줄 몰랐다. 이런 까닭으로 세상에 많이 전하지 못하고, 오직 이 한 조각의 그림이 난리 속에 보존되어 남아 전하니, 그 보배로운 가치야 어찌 연성(連城) 묵락(墨樂)에 비길 뿐이겠는가. 뒷날 이 그림을 보는 현인(賢人)은 그 품격만 취할 것이 아니라, 또한 이로 인해 선생의 모습을 상상하게 될 것이니, 더욱더 어진 이를 우러러보는 일에 일조할 것이다. 경자년(1780년) 남지일(南至日, 동짓날) 경주인 김광국이 삼가 쓰다.”
이러한 조선초기의 화조화에는 두 가지 유형이 있다. 나뭇가지에 앉아 있는 ‘숙조도(宿鳥圖)’ 등을 그린 절지화조(折枝花鳥)의 유형이 있고, 물가나 계곡 주변에 바위나 절벽을 배경으로 새를 그린 유형이 있다. 이 「산초백두도」는 절지화조의 유형으로, 새가 가시나무 가지에 매달려 자는(宿鳥) 모습을 그린 것이다. 기묘사화로 몰려나 요절한 김정의 인생 역정으로 볼 때 이 새의 모습은 위태로운 자신의 처지와 심경을 그린 것으로 볼 수도 있다.
그런데 충암 김정의 이 「산초백두도」는 조선시대의 화조도 가운데 작가가 고증되는 가장 오래된 작품으로 보인다. 선비화가 충암 김정의 화조도가 중요한 이유는 거기에 있다.
(좌) ②「영모산수도」, 김정, 지본수묵, 1521년 이전, 65.5×40.0cm, 유복열 구장. (우) ①「영모절지도」, 김정, 지본수묵, 1521년 이전, 65.5×43.9cm, 유복열 구장. [사진 제공 – 이양재]
한편, 「산초백두도」 외에도 김정의 작품으로 전하는 화조도는 유복열(劉復烈, 1900~1971)의 편저 『한국회화대관(韓國繪畵大觀)』(1969년)에 그의 소장품 두 점을 흑백 도판으로 수록3)하고 있다. ①「영모절지도(翎毛折枝圖)」, 김정, 지본수묵, 1521년 이전, 65.5×43.9cm., ②「영모산수도(翎毛山水圖)」, 김정, 지본수묵, 1521년 이전, 65.5×40.0cm.
유복열은 이미 60여 년 전의 구장자이고, 현재 소장처는 확인되지 않아 실물을 보기가 불가능하다. 유복열 구장의 이 두 작품은 크기가 거의 같다. 이 두 작품과 「산초백두도」는 화풍이 같고, 이 가운데 「영모절지도」에 그려진 나무는 「산초백두도」에 그려진 가시나무와 같은 것을 보면, 현전하는 이들 작품은 같은 시기에 같은 작가의 그림임을 유추하게 한다.
「김정 서한(金淨 書簡)」, 초서, 『근역서휘』 제3책 수록. 형에게 보낸 편지. [사진 제공 – 이양재]
충암 김정을 삼절(三絶)이라 부른 것을 보면 그는 글씨에도 매우 능하였다. 그러나 현전하는 그의 글씨는 좀처럼 확인이 어렵다. 더군다나 그의 문적은 기묘사화로 흩어졌고, 1552년에 발행한 그의 문집 『충암집』 초판본마저도 임진왜란으로 판목이 훼멸(毁滅)하여, 현전하는 초판본 후쇄본도 매우 희소하다.
3. 충암 김정의 『충암집(冲庵集)』 초판본
충암 김정은 제주에 유배되었던 인물이지만, 그는 중종조에 제주 지방의 교학(敎學)에 공헌한 명현이다. 충암의 『충암집』은 5권5책으로 두 종의 목판본 판본이 있다. 초판본은 조카인 김천우(金天宇)가 1549년경 가장(家藏)을 수집하였고, 신광한(申光漢, 1484~1555)에게 교정을 부탁하여 1552년(명종7) 공주에서 발행하였고, 재판본은 초판본의 편차를 달리하여 1636년(인조14) 간행하였다.
『충암집』 권지3, 김정, 1552년 초판본, 목판본, 제주문학관 소장(필자 구장본). [사진 제공 – 이양재]
『충암집』 초판본은 그 현전본이 매우 희소하여 아쉽게도 제주문학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낙질 2책(권지3, 권지4)과 후손이 대전시립박물관에 기증은 낙질 2책(권지1, 권지2)을 합하여도 권지5가 없어, 초판본은 완질 5권5책이 채워지지 않는다. 「제주풍토록」를 포함하여 『충암집』 초판본 권지3에 수록된 제주도에 관련된 8종의 문헌은 아래와 같다.
①「한나산 기우제문(漢那山祈雨祭文)」 : 한나산(漢那山)에 기우제를 지내는 글 / ②「장올산 기우문(長兀山祈雨文)」 : 장올산에 비를 비는 글. / ③「제용문(祭龍文)」 : 용에게 비를 비는 글. / ④「제연문(祭淵文)」 : 연못에 비를 비는 글. / ⑤「중제산문(重祭山文)」 / ⑥「중제용문(重祭龍文)」 / ⑦「도근천 수정사 중수권문(都近川水精寺重修勸文)」 / ⑧「제주풍토록(濟州風土錄)」 : 제주도 유배시에 보고 들은 제주도의 풍물과 자신의 생활을 정리한 문헌. 이상의 기우제문 ①~⑤은 제주도에 유배되었을 때 목사의 청으로 지은 글이다. ⑧「제주풍토록」은 제주도의 특수한 기후 조건과 이에 따른 가옥 구조, 풍속, 특히 뱀신과 무당의 피해, 관원의 횡포, 토지 경작의 양상과 제주도의 동물과 조류, 토산물에 대한 설명, 그리고 자신의 유배 생활 모습을 기록하고 있다. 이 글은 사실상 최초의 제주학 저서이자 기행문학으로 평가된다.
4. 맺음말 ; 충암 김정 그림의 이해
시서화에 능하여 삼절이라고 불렸던 충암 김정은 조선초기 중종조의 선비화가이다, 그러나 화가로 보다는, 신진 사류에 속한 개혁주의자이자 중종조의 청백리(淸白吏)로 널리 알려진 인물이다. 그는 당대의 사회 개혁과 문화계 발전을 위해 꼭 필요한 선비였지만, 기묘사화에 조광조(趙光祖, 1482~1519) 일파로 얽혀 1521년 10월 중종에 의하여 유배지 제주에서 36세를 일기로 사사(賜死)된다.
충암 김정은 우리나라의 회화사에서 화조(花鳥)를 잘 그린 선비 화가로 기억되고 있다. 그러나 그의 그림은 좀처럼 찾아보기가 어렵다. 우리나라의 회화사에서 화조는 고려불화에서 그 요소의 일부 찾아볼 수가 있고, 고려중기 이후의 청자에 화조가 상감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묵적(墨跡)으로서의 화조도는 김정의 그림이 가장 연대가 올라가는 것으로 파악된다. 그러므로 충암의 화조에 관한 충분한 이해가 없이는 조선중기와 조선후기의 화조를 이해하기가 어렵다. 이러한 충암 김정의 작품을 전칭작으로만 주장하는 것은, 결과적으로 우리 화화사에서 화조화의 시작을 뭉그러뜨리는 행위가 된다.
우리나라의 회화사를 정립하기 위해서는, 누구의 작품이든 일정한 수준 이상의 옛 그림이라면 한 점 한 점을 소중히 하는 마음가짐으로 검토 및 탐색하여야 한다.
주(註)
주1) 「산초백두도」는 김광국의 『석농화원(石農畫苑)』에서 떨어져 나와 족자로 꾸며져 있다. 1986년 아시안 게임 개최를 계기로 마련된 국립중앙박물관이 주최한 ‘조선초기회화전’에서 처음 소개되었다. 이 그림은 이후 일제강점기 시절 내시화가였던 이병직(李秉直, 1896~1973)이 소유하였다가 그의 이성(異姓) 손자 곽영대(郭英大)에게 전해져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유복열 편 『한국회화대관』에는 「이조화명도(二鳥和鳴圖)」라고 제호(題號)하고 있다.
주2) 석농 김광국의 가계는 5대조 김경화(金慶華)가 의과에 입격한 이래, 손자 김시인(金蓍仁)에 이르기까지 7대에 걸쳐 의관직을 세습한 중인 집안이다. 김광국 이후 서화 애호 분위기도 함께 전승되어 후손들도 이 분야에 자취를 남겼다. 석농 김광국은 이미 10대였을 때부터 고서화에 관심을 두고 김광수(金光遂), 심사정(沈師正) 등 당대 저명한 수장가, 서화가들과 교유하였다. 양반가 중 유한준(兪漢雋)과 유만주(兪晩柱), 유한지(兪漢芝) 등 기계 유씨(杞溪兪氏) 집안 인물들과 친분이 두터워, 이들과 함께 자신이 수집한 서화 작품을 감상하고 서발문(序跋文)을 받기도 하였다. 또한 정충엽(鄭忠燁), 이인상(李麟祥), 김응환(金應煥), 김용행(金龍行) 등 화가들뿐 아니라 표구사였던 방효능(方幼能), 시인 홍신유(洪愼猷) 등 중인 및 여항인들과도 폭넓게 교유하였다. 친분이 있던 이들 주변 인물들을 통해 나름대로 감식안을 키우고 작품도 직간접적으로 구한 것으로 보인다.
석농은 21세 때인 1747년 의과에 입격하고 1749년부터 내의원에서 정식으로 근무하였다. 이후 실력을 인정받아 수의(首醫)를 역임하였고 공로를 인정받아 가선대부, 동지중추부사에 제수되었다. 처가는 화원 집안으로 유명한 인동 장씨(仁同張氏)였고, 슬하에 4남 3녀를 두었는데, 장남 김종건(金宗建)은 부친의 서화 수집 활동을 적극 도왔으며, 수장품을 정리하는 역할을 담당하였다. 수집한 작품에는 나름의 비평가적인 식견을 담은 평가를 남겼고, 그는 자신의 촌평(寸評)을 아들 김종건을 비롯해 유한지, 이한진(李漢鎭) 등 유명 서예가들에게 대필시켜 『석농화원(石農畵苑)』, 『화원별집(畵苑別集)』, 『화원속첩(畵苑續帖)』을 만들었다.
주3) 유복열(劉復烈) 편, 『한국회화대관(韓國繪畵大觀)』 pp.97~98., 1969, 문교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