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사랑은 하늘을 이고
-시조(時兆)와의 인연- 정정숙
사랑에 홀로 춥고 삶에 멍울진 마음, 밑도 끝도 없는 투병사리에 꿈 날개를 접어야 하는 체념은 늘 가슴이 시리고 마음이 저렸다. 인간은 사랑에 대한 ‘끼’ 때문에 상처입고 쓰러져 죽음에 이르기도 하고, 신앙적 ‘기(氣)’로 연단의 징계 속에서 일생을 소진하기도 한다. 이것은 인간의 의지로는 어쩔 수 없는 숙명인지, 예정된 신의 섭리인지 나는 모른다.
1962년 친정을 등에 업고, 어머님의 유언대로 꽃다운 나이에 결혼을 했다. 남편의 절대적인 유교가풍에 따라 유년시절부터 믿어온 나의 기독교 신앙에 빗장을 질렸다. 생전 어머님의 가르침대로 참을 인(忍) 자를 가슴에 묻고 아이 셋 엄마로 살면서 ‘생명의 말씀은 어둠속으로 사라지며 찬양은 메아리로 멀어져 갈 때,.. ’ 자신도 알게 모르게 우울병이란 사망의 골짝기로 접어들고 있었을까. 꿈과 소망! 산다는 것에 대한 존재의 의미를 잃고 절망의 나락(奈落)에서 곡예놀음을 할 때 1984년 대장 게실염란 종양수술을 받았다.
개복 수술시 만약을 위해서 잘라낸 맹장 자리가 훗날 문제를 일으켜 난치병이 되고, 끝내 어디에도 쓰임 받지 못하는 '대장 기형' 장애인이 되었다. 연이어 1987년 늘어진 신장(腎臟)을 끌어 올리는 고정수술을 했다. 콩팥의 흔들림으로 정신을 혼미 시키는 빨간 신호는 내 몸에 두 번의 칼을 대게 했다. 내과에서는 무기력한 대장 연동작용을 위해 열심히 걷고 또 걸으란다. 비뇨기과에서는 근육에 고정시킨 콩팥이 다시 내려올 만약을 대비해 누워있어야 한단다. 고장난 배설관 팽창, 풍선이 된 가스찬 배는 속이 메스껍다. 심한 난시 근시가 무릎관절염 절뚝발이의 시야를 가리고, 급기야 목이 쉬더니 벙어리가 되었다. 목이 돌아오려면 한 5년간 깊은 산속 같은데서 혼자 요양해야 한다는 - 소화기 내과, 이비인후과, 정신과의 진단에 따라 1992년 미개척지였던 경기도 분당에 보금자리 둥지를 틀게 되고 홀로서기의 투병생활이 시작된 것이다.
살아 있는 내가 지겨웠다. 굶주린 짐승같이 자연식을 하는 가정요양원을 전전하다 1995년 안식일 재림 기별을 접하게 되면서, 불치병 암환자에게도 희망을 안겨주는 뉴 스타트 생명적인 생활에 눈을 뜨고, 그동안 굳게 닫아걸었던 신앙의 빗장을 열었다. 유년시절 시골예배당에서 만났던 첫사랑님께 다시는 '포도나무 가지에서 떨어져 나가지 않겠노라'는 언약으로 교회에 발을 들여 놓았을 때 - 또한 이질적인 종교문제에 부디 쳐 남편 말을 거역하는 집안 망칠 여자로 낙인 찍혔다. 세상에서 병든 자보다 더한 죄인이 있을까. 우울과 허기로 방황 할 그때 내게 용기를 불어 넣어준 시조 편집장이었던 박 목님과의 인연을 떠 올리는 지금 나는 흑흑 사무치는 감희(感喜)로 통곡을 한다. 그는 나에게 ‘하늘은 사랑을 이고’라는 시를 선물하면서 생명수가 흐르는 우물(삼육대학 호수) 가로 인도 했다. 길 모퉁이에 핀 들꽃 향기에 정결한 고독을, 투명함으로 영원을 사모하며 ‘하나님의 사람 에녹과 같이’ 이제 나도 어느 때 어느 곳에서도 외롭지 않으리라는 소망으로 상처뿐인 몸뚱이를 미련 없이 던질 수 있었다. 그 후 2000.9. 뉴밀레니엄 새 세기에 삼육대학 침례 장에서 영혼의 첫사랑과 중생의 결혼을 하고, 남편과 신앙의 연단에 더 이상 견딜 수 없게 된 나는 한 달 후 서부 카나다 밴쿠버 행 비행기에 몸을 맡겼다. 내가 살아온 모든 것을 태평양에 수장(水葬)하고, 규례를 어기고 ‘죽으면 죽으리라’는 각오로 나라를 구한 에스더의 열정적인 믿음을 생각하면서 고국을 떠났다. 육 개월의 비자기간을 이용해 왕복 두 번째 당시 <시조> 편집장에게 부탁을 했다. 몰론 부족한 글인 줄 알지만 “시조에 글 한편만 실어 달라"는 내게 차마 거절할 수 없었던지 "한두편 밖에 실어 줄 수 밖에 없습니다" 내 작은 글서나마 고목에 꽃이 피는 순간이었다.
2000.10.말 이국땅에 발목을 묻고, 영어에 울며 고독에 몸부림치는 나를 징계했다. 가족과 의론 없이 완고한 남편의 허락 없이 병든 몸으로 떠난 내가 어떤 이유로던 누구에게 무슨 할 말을 할 수 있겠는가. 경제적으로도 최하의 밑바닥에서 나를 시험했다. 눈만 뜨면 ‘아직 살았구나.’ 하면서 밴쿠버시립도서관구석에서 고국의 신앙 지 <시조>에 보낼 간증 글을 피 눈물로 그렸다. 뿌리가 없는 글쓰기 작업이기에 쓰고 잘라내고 수정하고 다듬고 마지막 순간의 목숨처럼 혼신으로 매달인 결과 2002.4.부터 타이틀 ‘사람과 사연’이란 연재로 8번을 실어 주었다. 그것이 발판이 되어 2005.12.말 『 바위를 뚫고나온 구절초 』 수필집을 출간하는 특혜를 얻었다. 모두를 내러놓은 절망의 난간에서 사력을 다한 힘이 나(사탄의 작란)를 이기게 했는가. 문명과 세상을 등지고 누어만 있던 내가 이젠 밥도 먹고 말도 하고, 앉아서 예배도 보고 조금씩은 컴퓨터 자판도 두들기며, 배에 핫 팩을 감지 않고도 잠을 잔다. 가족과 함께 살지 못하는 자격지심으로 사람을 기피하던 불안증도 없다. 신앙의 자유만 허락 된다면 가정으로 돌아 갈 준비를 하고 있다.
나는 안다. 시련이 많은 곳에 은혜가 넘치나니…. 흑돌이 된 내 눈물과 고독이 반석(체험)이 되어 미숙하지만 수필작가도 되고 병아리 시인도 면했다. 그동안 컴 사이트에서 중구난방으로 돌아다니는 나의 투병 글을 모아야겠다는 필요성을 인식하고 나만의 창고를 열었다. 2006년10. 카페이름 《뉴 스타트 구절초향기》를 개설했지만 아직도 완전치 못한 고질병 증후로 하여 세상 밖에서 사람과 어울리지 못하고 있다. 군중 속에서 이루어지는 문인들과의 교류가 없기에 마땅히 카페로 초청 할 사람도 없다. 어쩌다 인터넷 컴사이트를 기웃거리는 나그네가 우연히 ‘구절초향기’ 따라 가입하는 회원을 기다리며 오늘을 살아간다.
그러나 나는 더 이상 외롭지 않다. 무에서 내가 쌓아올린 가정이란 성을 떠나서 20여년간 허송세월을 보낸 어굴함도, 쓰임 받지 못하는 애절함도 없다. 내 아이들이 세상으로 나가서 오랫동안 소식이 없어도, ‘왜 혼자 사느냐’는 대답하기 곤고한 질문에도 초연(超然)하다. 일생을 하나님과 동행한 애녹처럼 사랑은 하늘을 이고 내 상한 영혼을 위로하며 반겨주는 <시조>와 대화하면서 - 지금껏 그랬듯이 하늘을 향한 구절초의 정결한 향기로 살아간다면, 검은 머리칼 파뿌리 되도록 살아온 백년가약 남편도 언젠가는 신앙의 자유를 주리라. 첫사랑님 보시기에 참된 믿음은 내가 참고 기다리며 살아 숨 쉬는 생명의 원동력이기에 ... //
첫댓글 "하나님과 동행한 애녹처럼 사랑은 하늘을 이고 " 너무 멋있는 글입니다. 청향님의 간절함을 첫사랑님은 분명 알고 계실것입니다.
이제, 좋은 날만 남은 것 같다는 생각 안 드세요? 시련,,,겪을만큼 겪었잖아유? 연단의 힘을 보여주세용 청향쌤~..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