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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고교 교장의 죽음
1999년 2월 28일, 일본은 크게 술렁거렸다. 일본의 2월은 대부분의 학교가 졸업을 맞는 시기로 2월 28일은 히로시마(?島)현의 세라(世羅)고등학교가 졸업을 하루 앞둔 날이었다. 늦겨울의 스산함 속에서 예년과 다름없이 졸업을 준비하던 이
날, 학생들에게 찾아온 놀라운 사건은 목을 매고 숨진 채 발견된 교장의 자살 소식이었다.
이시카와 도시히로(石川敏浩, 58) 교장의 죽음.
히로시마는 2차대전 이후 일본에 불어닥친 평화주의 열풍의 본거지였다. 그런데
현의 교육위원회가 그 해 졸업식에서 일본의 국가 즉 기미가요(君が代)의 제창을
지시했다. 이에 '교원노조'는 히로시마 원폭을 불러온 제국주의의 침략성을 기리는 처사라며 반대했고 교장은 연일 회의를 열어 문제를 해결하고자 노력했지만
허사였다. 고민하던 그는 '다른 길은 없었다. 이젠 무엇이 옳고 그른지 모르겠다.'는 쪽지만을 남긴 채 목을 매어 자살했다.
한 생을 올곧게 살아온 한 평범한 교육자의 죽음이 던진 파문은 대단히 큰 것이었다. 이 사건으로 인해 일본인들에게 히노마루(日の丸)와 기미가요에 대한 확실한 결단을 요구하는 하나의 계기가 되었다. 지구상에 제대로 모양새를 갖춘 나라
중 어느 나라가 자신들의 국기와 국가에 대한 사랑에 감히 이의를 제기할 수 있을까? 그러나 일본의 특수한 상황은 국민이 애국적 상징에 대해 이상한 거부감을 느끼도록 만들어 놓았다. 일본의 국기와 국가에는 과연 어떠한 내력이 숨어
있는 것일까?
다양한 의미를 가졌던 히노마루
'일장기'라고 불리는 히노마루와 일본의 국가로 일컬어지는 기미가요는 불과 1년
전까지만 해도 공식적인 국기와 국가가 아니었다. 히노마루와 기미가요가 국기와 국가로 법제화된 것은 1999년 8월 9일이다. 히노마루와 기미가요가 이제껏 법적인 근거없이 일본인들에게 국기와 국가로서 확고한 입지를 구축하지 못한 것은 그들이 지니는 이미지가 침략적이고 제국주의적인 전쟁의 이미지와 맞물리기 때문에 이에 국민들의 호응을 얻지 못한 탓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그들이 생겨난 배경이나 쓰임새가 애초부터 국가적인 색채를 띠고 있거나 한 것이 아니었다는 점에서도 생각해 볼 수 있다.
예컨대 히노마루는 원래 일본을 나타내는 국가의 상징이 아니었다. 조정에 대항하는 적군을 토벌하러 나갈 때 관군의 표시로서 해와 달을 금과 은으로 수놓은
비단 기, 즉 '니시키노미하타(錦の御旗)'에 쓰였던 것이 그 시초라고 한다. 때문에
초기의 히노마루는 일본을 나타내는 국가의 상징이 아닌 권위와 권력의 핵심을
상징하는 존재였다. 게다가 당시의 히노마루는 그 색이 일정하지가 않아서 청색
· 흑색 · 백색 · 적색 · 금색 등 다양하게 쓰이기도 하고 동그라미가 여러 개
그려진 경우도 있었다. 흰 바탕에 붉은 동그라미가 그려진 오늘날의 히노마루가
등장한 것은 14세기 중엽으로 비단이 없어 천으로 대신 만들었던 깃발이 오늘날의 히노마루이다.
당시 난을 피해 수도에서 떨어진 민가로 피신한 천황은 '니시키노미하타'를 하사하려 했는데 직물의 산지에서 멀리 떨어진 피난처에서 달리 비단을 구할 수 없어
궁여지책으로 만들어 하사했던 깃발이 현재 쓰이고 있는 히노마루의 원형이라고 한다. 또 에도시대(江戶時代)에는 히노마루가 막부(幕府)를 표시하는 기능을
하여 주로 막부의 연공미를 나르는 운반선의 표시로서 쓰이기도 했다.
장수를 기원하며 부르기 시작한 기미가요
그런가 하면 '기미가요'는 본래 장수(長壽)를 기원하며 부른 노래다. 기미가요라는 이름도 특별히 따로 제목을 붙인 것이 아니라 가사의 첫머리에 나오는 '기미가요와(君が代は)'에서 따온 것이다. 이 노래는 '君が代は千代に八千代にさざれ石の巖となりて笞のむすまで'라는 가사로 이루어져 '그대여, 작은 돌이 큰 돌이
되어 이끼가 낄 때까지 오래오래 사십시오'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기미가요의 원형은 10세기 초에 만들어진「고킨와카슈(古今和歌集)」라는 가사집에서 찾아 볼 수 있는데, 이 노래는 주로 연회 등에서 축가로 불리던 가사였다고 한다. 그것은 '기미(君)'가 여러 가지 의미를 함축하고 있어서 상황에 따라 주인이나 윗사람, 혹은 친구, 애인 등 다양한 의미로 쓰일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즉 '기미'가 처음부터 천황을 상징하는 의미로 쓰인 것은 아니었던 것이다.
이렇듯 히노마루와 기미가요는 애초에 그 쓰임새가 나라의 상징과는 성격이 달랐기 때문에 오늘날과 같은 국기나 국가로서 자리하게 되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히노마루만 해도 에도시대 말이 되어서야 처음으로 국기의 역할을 하게 되었다.
서양 열강들의 힘에 눌려 개국의 상황에 놓인 일본은 최초의 서양식 대형 군함인
쇼헤이마루(昌平丸)를 건조했는데, 이 때 외국 배와 혼동되지 않도록 흰 천에 붉은 색의 히노마루를 국장으로 사용하도록 하여 1854년 7월에 모든 배의 표시를
흰 바탕에 붉은 히노마루의 깃발을 달도록 포고했던 것이 시작이 되었다.
메이지(明治)시대에는 1870년에 태정관포고(太政官布告)라는 것을 통해 이윽고
히노마루를 우편선과 상선에 '국기'로서 게양하도록 규정하고, 그 규격을 정하여
일본을 상징하는 정식 국기로서 인정했다. 그러나 당시 국기에 관한 명령은 군선이나 상선 혹은 관청에 관한 것이 대부분이었고, 일반 국민에 대한 명령은 아니었기 때문에 국기에 대한 인식은 일반 민중들 사이에 여전히 뿌리내리지 못했다.
기미가요는 천황을 찬미하는 의례곡
한편 기미가요는 그것이 국가로 지칭되기까지 더 오랜 시간을 필요로 했다. 기미가요에 곡조가 붙은 것은 메이지유신 1년 후인 1869년이었다. 당시 사츠마(薩摩)
지방의 사무라이들에게 서양 음악을 가르치던 J. W. 펜톤(John William Fenton)이라는 영국인이 일본에도 국가가 필요하다는 의견을 낸 것이 계기가 되어 사츠마의 포병대장이었던 오야마 이와오(大山巖)가 사츠마 지방의 민요를 모은 '호라이산(蓬來山)'이란 시집에서 기미가요를 발췌해 펜톤에게 작곡을 의뢰했다. 그러나
일본의 가사에 맞지 않는 서투른 서양식 곡조 때문에 그 평은 그리 좋지 못했다.
이에 해군성은 궁내성 아악과에 기미가요의 작곡을 의뢰했는데, 당시 아악과 악장이었던 모리 히로모리(森廣守)가 곡조를 만들어 제출하자 여기에 해군의 외국인 교사였던 F. 에케르트(Franz von Eckert)라는 독일인이 서양의 화성을 붙여 오늘날의 기미가요를 완성하였다.
이 곡은 '천황을 찬미하는 의례곡'으로서 1880년 11월 3일 천장절(天長節)에 궁중에서 처음으로 연주되어 극찬을 받았다. 그러나 당초의 기미가요는 국가로서 제정된 것이 아니었기에 천황을 위한 의례 연주곡에 머물러 있었다. 기미가요는 그
후로도 오랫동안 천황의 의례곡으로 쓰여 국가로서 기능하지 못했으며 발표된지 57년만인 1937년에야 비로서 국가의 칭호를 얻게 되었다.
민족적 우월성과 국민통합을 위해
그렇다면 왜 하필 히노마루와 기미가요였을까? 나라의 상징과는 전혀 무관하다면 무관하다고 할 수 있는 이 깃발과 가사는 국기와 국가로서 여전히 일반 민중에게는 흡수되기 힘든 존재였다. 그럼에도 히노마루와 기미가요에게 국기와 국가의 자격을 부여하고자 했던 일본의 진의는 무엇이었을까?
에도시대 말 외압에 못 이겨 개국을 해야만 했던 일본은 서구 열강의 거침없는
침투 속에서 스스로를 지키고 자신들의 우월성을 확보해 두지 않으면 안되었다.
이에 일본은 국민을 내부적으로 단단히 결속시킬 수 있는 하나의 매개체가 필요했다. 국민을 하나로 모으는 매개체. 일본 정부는 일본이 다른 민족과는 현격히
다른 우월한 민족임을 국민에게 심어줌으로써 국민들을 결속시킬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를 위해 일본이 선택한 방법은 신의 혈통을 이어받았다고 하는 천황의
신화를 이용하여 일본을 신의 나라로 만드는 것이었다. 메이지유신을 통한 근대국가로의 탈바꿈을 시도하면서 일본은 우선적으로 천황을 신의 자손으로 규정짓고 이를 제도화하여 근대국가의 지배이념으로서 국민을 하나로 통합하고자
했다.
여기에 태양을 나타내는 히노마루는 서구 열강에 대항하여 동양에서 떠오르는
태양이라는 의미로서 일본을 상징하는 데 더없이 좋은 표식이 되었고 천황의 치세를 염원하는 노래로서는 '천대 팔천대에 걸쳐 작은 돌이 큰 돌이 되어 이끼가
낄 때까지' 라는 기미가요의 가사만한 노래가 없었던 것이다.
99년에야 인정받은 국기와 국가
일본의 경우, 나라 원수의 애국에 대한 발언은 세계적인 망언으로 간주되고 정부
관료의 국가적 전통 신앙에 대한 경외는 구시대적이고도 제국주의적인 근성의
발로로 이야기된다. 이런 탓인지 국기와 국가에 대한 일사분란한 경애심이나 존경심 같은 것은 - 광적인 우익 단체라면 모를까 - 일본에서 기대하기가 어렵다.
국경일이면 집집마다 태극기를 내거는 우리나라와 같은 풍경도 일본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
90년대 중반 이후 좌파 진보 세력의 힘이 약해진 틈을 타 정부는 1999년 8월 9일
히노마루와 기미가요를 법제화하여 국기와 국가로서의 법적 근거를 마련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조례 행사 때 불리는 기미가요나 경기장에서 다른 나라 국기와
같이 게양되는 히노마루에 큰 의미를 부여하는 일본인은 여전히 별로 없다.
한 나라의 국기와 국가는 그 나라의 상징으로서 국민을 하나로 모으는 커다란 구심체의 역할을 한다. 국기와 국가가 올바른 구심체의 역할을 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은 두말할 나위없이 그 나라 정부의 과제이다. 이러한 점에서 일본 정부는 히노마루와 기미가요를 국기와 국가로 법제화함에 있어 그에 얽힌 국체 사상이나
평화주의와 제국주의, 그리고 우파와 좌파 간의 문제들을 시급히 매듭지어야 하는 커다랗고 막중한 과제를 안고 있다.
<히노마루(日の丸) 연표>
연도 |
내용 |
1185년 |
내전 시 천황측 관군들이 붉은 부채에 금색 동그라미를 그려서 반군과 구별했다. |
<기미가요(君が代) 연표>
연도 |
내용 |
1869년 |
사츠마(薩摩) 지방의 포병대장 오야마(大山)가 가사집(古今和歌集)에서 기미가요를 국가로 선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