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대문 골목 안 붉은색 돌담을 따라 걸으니 오랜 세월의 흔적이 엿보이는 나무 대문이 나타난다. 문을 열고 들어서면 할머니가 ‘어이구 내 새끼’ 하며 반겨주실 것만 같다. 육중한 문을 살그머니 열고 안을 들여다보는데 작은 아이가 생글생글 웃으며 취재팀을 반긴다. 알고 보니 언제나 기분 좋아 일명 ‘해피맨’이라 불리는 셋째 윤우다. 아이를 따라 들어선 마당을 ㅁ자 형태의 한옥이 포근히 감싸고 있다. 설날이나 추석 연휴에 먼 길을 달려 찾아갔던 시골 고향집이 떠오르는 정겨운 공간. 이곳이 조정구*김영희 부부와 그들의 네 아이가 살아가는 둥지이고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우리 집’이다. 경주시 보문단지 밀레니엄파크 내 한옥 호텔 ‘라궁’의 건축가로 2007년 대한민국 목조건축대전에서 대상을 수상한 구가도시건축의 조정구 대표는 한옥에 산다. 아내 김영희 씨와 여덟 살 남우, 여섯 살 순우, 세 살 연우와 생후 2개월된 딸 윤우와 함께.
한옥의 봄, 여름, 가을 그리고 겨울
북촌의 도시 한옥을 시작으로 원서동 궁중음식연구원, 가회동 선음재, 안동 군자마을 회관, 국내 최초의 한옥 호텔 ‘라궁’ 등 실용성을 겸비한 한옥을 설계한 조정구 건축가는 5년 동안 자신의 가족과 함께해온 서대문 한옥을 ‘교과서’라 부른다. 5년 전 북촌이나 효자동 근처의 집을 알아보러 다니던 중 서대문 사거리 언주로 변에 위치한 지금의 한옥을 발견했다. 이사오기 전 공사도 직접 관리해 작은 욕실 겸 화장실 하나를 안채에 두고, 대청에서 주방, 문간방까지 한옥의 느낌을 그대로 살려 유리문을 달아 통하게 했다. 크게 손을 대지 않아 40여 년 된 집의 정취를 고스란히 지킬 수 있었다. 한옥에 산다는 것. 춥고 조금은 불편할 수 있지만 그는 서대문 한옥에 살기 시작하면서 중요한 것들을 깨달았다. 콘크리트와 아스팔트, 유리벽 속에서는 느낄 수 없는 잔잔하고 소박한 기쁨들을 말이다. ‘마음에 드는 집에 사는 기쁨이 이런 것이구나’ 하는 것을 느꼈다는 조정구 대표는 서대문 한옥에 살면서 건축에 대한 깨달음도 얻었다.
“친구들이나 주변 사람들은 남과 달리 반대로 살아간다고 의아해합니다. 아파트같이 편리한 곳을 두고 한옥에서 살면 불편하지 않냐는 것이죠. 한옥에서는 방에 앉아서도 봄이면 움이 트고 새싹이 돋아나는 걸 느낄 수 있고, 무더운 여름에는 마당에서 아이들과 함께 물놀이를 즐깁니다. 모든 사람에게 한옥을 권하는 것은 아닙니다. 모두가 한옥에 산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니까요. 하지만 아이가 있다면 한옥은 아니더라도 마당이 있는 집에서 살아보라고 권하고 싶습니다. 아이에게 마당은 큰 선물이니까요.”
화려하지 않은 공간의
아름다움‘라궁’을 설계한 건축가가 네 아이를 키우며 한옥에 산다니 좋은 이야깃거리가 되겠다’고 생각했다. 잡지에 나온 모던한 도시 한옥 인테리어를 기대했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서대문 한옥에는 화려하거나 고풍스런 전통가구는 없다. 대신 아이들이 붙여놓은 자동차 스티커와 아빠가 아이들을 위해 그려준 그림이 벽면 하나를 가득 메운다. 집안 곳곳에서 사람 사는 냄새가 묻어나며 지극히 여유롭고 편안한 풍경 속에서 ‘삶이란 이런 거구나’ 싶었다. 조정구 건축가는 이렇게 인공적인 것이 더해지지 않은 이곳이 바로 자신이 전하고 싶은 ‘한옥’이라고 말한다. 마당으로 자연을 품고, 따스한 나무얼개로 가족을 감싸안은 집. 어떠한 공간도 조형도 자신을 드러내지 않지만 삶이 그 안에서 자연을 닮아 풍성해지는 집임을 강조하고 싶어한다.
(왼쪽) 조정구 대표에게 막내딸 윤우는 또 하나의 설렘이다.
(오른쪽) 꾸미지 않은 한옥의 순수함과 잘 어울리는 소반은 반다지 제품.
(왼쪽) 안방에서 부엌, 문간방까지 한옥의 느낌을 살린 유리문을 달았다.
(오른쪽) 천진난만하게 웃는 삼형제의 미소가 붕어빵처럼 꼭 닮았다.조정구 건축가가 한옥에 꽂힌 계기는 2001년 북촌마을 가구기 사업을 통해서다. 한옥 개*보수와 설계를 맡으며 한옥의 가능성을 발견했고, 2005년 라궁 등의 설계 작업에 들어가면서 본격적으로 관심을 갖게 됐다. 그가 한 잡지에 기고한 글을 보면 한옥에 대한 열정과 사랑이 얼마나 깊은지 알 수 있다.
“이사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모기장이 없어 남우 얼굴이 싸움 끝난 권투선수 얼굴이 되어버렸다. 그 후 여러 가지 모양으로 모기장을 연구하고 있다. 텐트형도 이동식에서 줄을 벽면에 매는 고정식으로, 창문에 대는 것도 쫄대를 쓰는 것에서 종이조각에 압정으로 눌러 고정하는 등의 변화를 거쳤다. 여름이면 빼놓지 않고 고무풀을 꺼내 물놀이를 한다. 낮에는 아이들과 친구들이, 밤에는 내가 들어가 물놀이를 한다.”
이렇듯 한옥에서의 평범한 일상 속에서 그는 집이 어떻게 땅과 관계를 맺는지 알아가고, 거친 자연환경 속에서 사람의 삶을 보호하는 것이 집임을 깨달았다. 그의 이런 생각은 라궁에도 고스란히 반영돼 있다. 신라 궁궐을 의미하는 라궁은 총 16채의 화랑으로 연결된 독채 가옥으로 16채가 서로 맞물려 이어지는 독창적인 구조를 가진 전통형 특급 호텔이다. 나무*돌*흙 등 자연 소재를 사용한 전통적 한옥 양식대로 지어 콘크리트 철골 구조로 만든 ‘겉만 한옥’과는 다르다.그래서인지 라궁을 보기 위해 경주를 찾는 사람들이 생겨났을 정도. 라궁 설계 당시 그는 자신의 가족과 집을 떠올렸다. ‘내 가족이 함께 머무를 수 있는 독립적인 공간을 짓고 싶다’는 바람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독채의 가옥 안에 가족끼리 함께 즐길 수 있는 독립 노천탕을 마련했다.
(왼쪽) 마당에 핀 꽃 한 송이, 나뭇잎 하나가 아이를 한 뼘 더 자라게 한다.
(오른쪽) 서까래 아래 고즈넉이 자리 잡은 조명이 여섯 식구를 따뜻하게 비춘다.
(왼쪽) 어릴 때부터 안고 잔다는 첫째 남우의 곰돌이 인형.
(오른쪽) 벽을 가득 채운 건축 잡지 <공간 SPACE>에서 역사가 느껴진다.
네 아이의 엄마로 산다는 것올해 4월 막내딸 윤우가 태어나기 전까지 김영희 씨는 세 아들의 엄마였다. 아들 둘 키우면 ‘깡패’ 된다는 우스갯소리가 있지만 아들 셋 키우는 엄마라고 하기엔 너무 고운 미소를 가진 그녀. 하지만 단 한 번도 아이들에게 ‘안 돼’라는 말을 한 적이 없는 부드러운 남편이기에 아내는 세 아이 키우는 일에 있어서만큼은 엄격하다. 그래서인지 집에서 키우는 강아지 둑이도 자신은 무서워하고 유독 남편을 잘 따른다고.
“남우와 순우를 키울 때까지는 그저 아이 키우는 일이 힘들기만 했어요. 하지만 셋째 연우를 낳고 키우면서 ‘아, 아이 키우는 일이 이런 거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때 처음 큰아들 남우가 다시 보였어요. 둘째와 셋째 키우느라 제대로 챙겨주지 못한 큰아이에게 미안한 마음이 크죠. 사실 ‘아이가 하나였다면 집중해서 더 잘해주었을 텐데’ 하는 생각에 아이들 모두에게 미안해요. 아이가 많아서 힘든 점은 없어요. 오히려 아이들과 다투고 싸우면서 후회하는 과정에서 많은 것을 배워나가는 것 같아요.”
‘아이 하나 키우기가 얼마나 힘든데’라며 한 아이에 올인하는 경우가 대세인 요즘, 네 아이 키우는 일을 그저 물 흐르듯 자연스런 삶의 과정으로 담담히 받아들이기기까지 힘든 일도 많았으리라. 남보다 더 좋은 옷을 입히고, 좋은 학원에 보내며 좋은 집에 살려는 욕심 대신 ‘아이가 튼튼히 잘 자라고 자기가 원하는 일을 했으면 좋겠다’라는 소박한 바람을 이야기한다.
1 셋째 연우에게 강아지 둑이는 싸우다가도 함께 노는 형제 같은 존재다.
2 네 아이를 낳고 키우면서 엄마가 직접 만들었다는 인형.
3 둘이 모여 하나가 되고, 하나 된 둘이 이제는 여섯 가족이 되었다. “큰아이 키울 때 비싼 옷도 입혀보았지만 ‘옷 더럽히지 마’라고 앵무새처럼 되풀이하는 제 자신을 발견하곤 더 이상 값비싼 옷은 사주지 않았어요. 예쁜 옷을 사주거나 어릴 때부터 학원에 보내는 것도 엄마 마음 편하자고 하는 일인 것 같아요.”
조정구 대표만큼이나 아내 김영희 씨도 한옥 예찬론자다. 비록 아파트처럼 편리하지는 않지만 한옥은 마음에 여유를 주고 너그럽다. 겨울에는 추위를 견디기 위해 집안에서도 내복을 입어야 하지만 조금도 불편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지금까지 큰 병 한 번 앓은 적 없이 건강하고 씩씩하게 자라는 아이들을 보며 한옥의 소중함을 다시 한 번 느낀다.
이름처럼 넓고 동그랗게 살아가렴남우, 순우, 연우, 윤우. 소리 내어 불러보면 알겠지만 너무나 부드러운 이름이다. 조정구 대표가 직접 지은 이름에는 한결같이 ‘집 우(宇)’자가 들어간다. 집처럼 넓은 마음으로 세상을 살아가라는 의미에서 지은 이름이다. 첫째 남우는 정직하고 바른 생활 사나이로 사회성이 좋은 편이다. 둘째 순우는 창의적이고 감수성이 예민하며, 두 돌을 넘긴 셋째는 언제 어디서나 기분 좋고 항상 웃는 낙천주의자. 이름처럼 순한 아이들이지만 집에서는 영락없는 장난꾸러기라 화내고 소리 지를 일도 많다. 하지만 언제나 돌아서면 후회하고 미안해하는 것이 바로 엄마의 마음이다.
네 아이 키우는 노하우나 육아 원칙이 있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그런 거 없는데… ”라며 김영희 씨는 멋쩍은 미소를 짓지만 네 아이에 관한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내니 시간 가는 줄 모른다. 그저 현실에 최선을 다하고 아이와 함께하는 순간에 충실했다고 생각하지만, 아이들과 함께했던 지난 시간들을 다시 꺼내어보니 ‘잘해주지 못했구나’라는 미안한 마음이 크다고. 촉촉이 젖어가는 그녀의 눈은 ‘진정 아이를 위하는 것이 무엇일까’라는 진지한 고민에 대한 해답이었다.
4 넷째를 출산했을 당시 평소 친분 있는 임정진 동화작가에게 선물로 받은 앙증맞은 소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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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정구 김영희 부부의 네 아이 키우는 육아 방식
마당이 있는 집에서 산다 아이들은 할아버지나 큰아버지 댁에 가면 “뛰지 마라”라는 말을 자주 듣는다. 그래서인지 아이들은 언제든지 맘껏 뛰어놀 수 있는 한옥이 좋다고 말한다. 마당은 단순히 뛰어놀 수 있는 공간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자연을 배우고, 추억을 담는 공간이 바로 마당이다. 아이와 같이 보며 같이 생각한다 조정구 대표는 집에 있을 때면 거의 항상 아이들과 함께한다. 순우와 남우가 즐겨 하는 컴퓨터 게임을 할 때도 옆에서 지켜본다. 책을 읽어주거나 블록을 쌓는 등 아이와 함께 놀아주는 것은 ‘아이와 같이 보며 같이 생각한다’는 육아 원칙 때문. 건축 답사를 할 때 아이와 함께 간다 다른 부모들이 아이를 데리고 놀이동산에 간다면 부부는 아이들을 건축 답사 현장에 데려간다. 아이들에게 직접적으로 건축 이야기를 하진 않지만 아빠의 답사여행에 함께하면서 아이들은 자연스레 건축에 대해 알아가게 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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