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11월17일부터 우리는 인천항 제1여객터미널에서 중국산동성 석도항(취다우항)으로
출발하는 화동페리호 15000톤 배에 승선하였다.
이번여행은 우리나라와 제일가까운 중국 산동성 역사 유적지와 문화탐방으로 테마를 설정하여
여행하기로 계획을 세워 전체 인원 230 여명중 우리파평윤씨 대종회원 40 여명이 동참하였다
인천항에는 중국 보따리상 들과 여행객들로 북세통을 이루고잇다.
인천공항만 해외여행객들이 많은줄 알았는데 인천항만에도 중국 석도항,대련항,연태항등 여러군데로
떠나는 배들이 많다는것을 보고 놀랬다. 300 여명이 한번에 승선하고 하선하니 매우 복잡하였다
배에 승선하니 4인용 침실방을 배정받아 짐을 내려놓고,여장을 풀었다.
침실은 1인용 침대가 2층으로 양쪽으로 되어있다.침대에서 커틴을 닫으니까 안옥한 혼자만으 침실로
되어있어 하루밤 호탤이라 생각하고 취침하고 있으면 다음날 아침에 중국 석도항에 도착하게 된다.
우리가 떠나는 날은 파도가 5 -6 m의 높이로 이러서 배에 로링이 심해서 배멀미를 하는 사람이 많았다
석도항에 도착하니까,지도상으로는 아주 조그만한 항구인줄알았는데 꽤 큰항구이였다
석도항은 산동성 위해시에소속된 도시이다.
화동페리호에서 본 일몰 풍경
중국 산동성 석도항
선상에서본 석도항
선상에서본 석도항
선상에서 식사를 하기위하여 대기하며
선상에서의 식사관경
장보고유적지 전경
장보고 기념관전경
장보고 기념관전경
명신상에 드러가는 문
명 신
분수쇼관경 주위가 모두 분수로음악에마추어 물이올라간다
장보고기념관전경
장보고 해상 방문 기념비
방문객이 명신에게 기도하는 곳
장보고 조각상
장보고 동상
장보고... 본명은 궁복, 그러나 일본 승려 엔닌의 "입당구법순례행기"에는 장보고로 기록되어있다.
무예에 자질이 있어 당나라로 건너가 서주의 무령군 소장이 되었고,당에서 귀국한뒤 828년 홍덕왕
3년, 왕에게 청해를 진수 할것을 청했다, 당시 서남 해안에서는 당의 해적들이 신라인을 노략질하여
노비로 팔거나 무역선을 약탈하는 경우가 빈번했었다. 그는 왕의 허럭을 받아 1만명을 모아 청해진
(지금의 완도)을 건설하였다. 청해진은 7세기말에서 8세기초에 걸쳐 설치된 군진의 하나였으나 건설
당초부터 독자적인 성격이 강해 그에게 대사라는 직명이 내려졌다 한다.
장보고 기념탑.
중국에서 외국인의 기념탑을 세운것은 장보고 한사람 뿐이라 합니다.
청해진을 건설한뒤 그는 해적을 소탕하여 서남 해안의 해상권을 장악했고, 당.신라.일본을
잇는해상 무역로를 통한 무역활동을 주도하기 시작했다.
장보고기념관 내건물
장보고 기념관
기념관내 전시물
기념관내 전시물
법화원
눈 내린 장보고 유적지 전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