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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묵상 글 >
2020년 새해 새 아침에...
글 : 이 클라우디아(해인) 수녀
<성 베네딕도 수녀회>
새해의 시작도 새 하루부터 시작됩니다.
시작을 잘 해야만 빛나게 될 삶을 위해
겸손히 두 손 모으고 기도하는 아침이여...
어서 희망의 문을 열고 들어오십시오.
사철 내내 변치 않는 소나무빛 옷을 입고
기다리면서 기다리면서 우리를 키워온 희망.
힘들어도 웃으라고 잊을 것은 깨끗이 잊어버리고,
어서 앞으로 나아가라고 희망은 자꾸만 우리를 재촉하네요.
어서 기쁨의 문을 열고 들어오십시오...
어서 사랑의 문을 열고 들어오십시오...
사랑이란 이름으로 여기저기 팽개쳐진 상처들을
하얀 붕대로 싸매주라고 새롭게 주어진 시간,
만나는 사람들 한결같은 따뜻함으로 대하면
그것이 사랑의 시작이라고 눈부신 소금꽃이 말을 하네요.
시작을 잘 해야만 빛나게 될 삶을 위해 설레이는 첫 감사로 문을 여는 아침,
천년의 기다림이 비로소 시작되는 하늘빛 은총의 아침,
서로가 복을 빌어주는 동안에도 이미 새 사람으로 거듭나는 새해 새 아침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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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FB 영적지도신부 훈화 >
떠남, 성찰(省察), 새로움의 길에서...
윤 클레멘트 (양호) 신부님
<전주교구 소속 지도 신부>
적지 않은 시간들이 흘러갔다.
많은 날과 시간들이 지나갔다.
세월과 시간 속에서...
시간과 세월 속에서...
우리는 그렇게 세월과 시간들 속에서 살아간다.
시간과 세월들 속에서 길을 걸어간다.
인간과 삶의 길 위에서,
순례(巡禮)와 구도(求道)의 길 위에서...
조금은 오랜만에 길을 나서고, 또한 이 글들을 만난다.
일과 삶의 여유가 없었고,
삶과 일에서의 마음의 공간을 마련하기 쉽지 않았으리라.
그 일이 그 일들일 것이고,
그 삶이 그 삶들일 것인데도 우리가 이뤘던 일들이 그러하다.
우리가 살아간다는 삶이 그러하다.
지금은 다시 일들에서, 삶들에서 작은 길들을 나섰다.
삶의 길들을 떠난다.
묻히고 갇힌 채, 잠기어서 일하고 살아오기도 했던 날과 시간들,
만나고 사랑하며 갈등하기도 했던 그 모든 사람들, 일들로부터...
지금은 다시 조금 멀리에 서서 바라다보고 성찰(省察)하며 작은 기도를 드린다.
지나간 세월(歲月)의 길들을 회상(回想)한다.
어제, 오늘, 내일, 헤아리고 헤아리며 헤아릴 세월...
살고 살며 살아갈 날들, 지나고 지나며 지나갈 시간들...
사람들, 일, 관계성, 만남, 떠남, 망각, 봉헌기도, 새로움...
명예(名譽), 허무(虛無), 무상(無常), 빛, 어둠, 생명, 희망, 절망...
환희, 고통, 감사, 영원, 현세, 내세, 꿈, 현실(現實), 이상(理想)...
언제 어느 때쯤 길이 완성(完成)되고,
어느 땅 어디에서 희망(希望)을 이룰 수 있을까?
지금 이렇게 길에서 길을 찾으며 길 위에 있는데...
지금 여기에서 길에서 길을 물으며 길 위에서 사는데...
어느덧 이 땅과 세월위에 세모(歲暮)의 시간이 흐르고,
신년(新年)의 날이 왔다.
지난 세월과 날들에서,
지나간 시간과 흐름에서 사랑하고 괴로워하며,
기뻐하고 아파하며, 감사하고 안타까워하며,
행복해 하고 섭섭해 하던 그 모든 사람과 일들,
그 모든 것과 행함들...
그 모든 땅과 현실들도 이제는 여기에서 ‘안녕’을 고(告)한다.
‘잘 가라’고 인사한다.
과거는 가고 되돌아오지 않으며,
어제는 떠나고 다시 오지 않으리니...
오, 하느님 !
내 살아오던 날의 그 모든 행복하고 슬퍼하던 인간과 삶의 길을 성찰(省察)케 하소서.
기뻐하고 안타까워하던 그 모든 사람과 일들을 위하여 기도의 마음으로 머물게 하소서.
희망하고 절망스러워하던 그 모든 고마움과 관계성(關係性)에도
자유의 심혼(心魂)으로 살게 하소서.
새 하늘과 땅에서...
새 육신 마음으로, 새 정신 영혼(靈魂)으로, 새 희망 빛으로,
새 날과 걸음으로, 새 얼굴 시간들로 깨어 있게 하소서.
깨어 살게 하소서. 깨어 공부하게 하소서.
깨어 정진하게 하소서.
찬미와 감사로 흠숭하고, 어둠과 그늘에는 기다리며,
상처와 아픔은 용서하고, 고통과 절망에는 인내하며,
모해(謀害)와 몰이해(沒理解)는 묵묵히 간직한 채
길을 가면서 기도(祈禱)하게 하소서. 떠남이게 하소서.
회상이게 하소서. 새로움이게 하소서.
새롭게 밝은 무자년(戊子年).
이 새해 새벽에, 이 새해 아침에...
- 신부님의 '영성의 물가‘ 中에서 발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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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 공현 대축일
2020. 1. 5
마태오 2, 1~12
♠ 복음 공부 : 새로 태어난 왕에 대한 경배
☞ 들어가는 말 : 마태오 저자는 두 가지 상반된 주요 반응을 주의 깊게 다루고 있다. 첫 번째는 새로 태어난 왕에 대한 헤로데 임금의 반응과 불안. 갈등이다. 두 번째는 미래의 왕 을 영접하는 이방인들이다. 예수님의 탄생 소식은 이제 이스라엘 테두리를 벗어나 전 세 계의 민족들에게 받아드려지며, 특히 마태오는 다윗 왕과 신중하게 연관시켜 예수님의 탄생이 바로 왕의 탄생이며, 이는 하느님이 계획하고 성취시킨 일로 예수님은 바로 하느님 의 아들로써 동방 점성가들의 경배를 받은 예수님의 왕권에 주의를 이끌고자 한다.
* 1~8절 : 첫 절부터 예수님과 헤로데를 강하게 대비시킨다. 헤로데는 기원전 37년에서 4년 까지 집권했으며 예리코에서 병사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헤로데 생존 시에 탄생하셨다는(1절 22절) 언급으로 보아 예수님은 그 이전에 태어나셨다. 태어난 곳은 베틀레헴을 꼽는다. 베틀레헴은 ‘빵의 집’이란 뜻으로 다윗의 고향(1사무16장), 다윗의 후예인 ‘메시아’는 당연이 이곳에서 탄생한다는 속설이 있었다(미가5.1-2). 원문에는 동방에서 마고스(Magi)들이 예루살렘에 왔다고 한다. 마고스는 점쟁이인데, 신비로운 지혜를 지닌 자나 마술사를 뜻하는 단어이다. 문맥으로 봐서 ‘점성가’라 하겠다. 그런데 동방에서 찾아온 점성가들의 신분이나 숫자나 이름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는다. 서기 500년경에 서구 그리스도인들은 이들을 왕으로 추대하고, 황금과 유황, 몰약, 이 세 가지 예물에 준해서 임금을 셋으로 정했다. 그들의 이름을 ‘발타사르, 멜키오르, 가스파르’ 라 하였다. 헤로데는 이두메아 출신의 왕으로 유대인들의 지지를 받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로마인들의 앞잡이로 간주되었다. 그래서 자신의 족보를 위조하고 갖은 수단을 다해 왕권을 합리화하려 했지만, 소용이 없어 통치 기간 내내 불안했기 때문에 대규모 숙청을 단행하고, 자기 친자식을 암살하도록 명령했던 장본인은 ‘유대인의 왕 탄생 소식’은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동방 점성가들이 별을 보고 그 먼 길을 찾아 온 것은 ‘만국과 수많은 민족들이 하느님을 경배하기 위하여 몰려오리라’(이사2.2이하;60.1-66이하)는 구약의 예언을 성취시킬 왕이 오셨기 때문이다. 점성가들의 관심은 “유대인의 왕으로 오실 분이 어디 계십니까?‘ 라는 질문으로 집약된다.
* 9~12절 : 마태오는 메시아의 탄생 소식에 헤로데와 온 이스라엘이 술렁거렸다고 기록했다. 이 기록으로 보아 메시아가 탄생 당시부터 이스라엘 백성에게 받아들여지지 않고 배척당하여 하느님 나라는 유다인으로 부터 이방인들에게 넘어갈 것임을 예고한다. 헤로데는 동방 박사들의 질문에 학자들의 자문을 받아 태어날 곳을(미카5.1) 알아내어, 장소를 가르쳐주면서 아기를 찾거든 자기에게도 알려달라고 한다. 그도 경배를 하러 가겠다고 말하지만, 이방인들이 새로 탄생한 유대인의 왕을 경배하는 동 안 헤로데는 메시아를 죽일 묘책을 세우고 있었다.
♠ 복음 요약 : 그리스도의 탄생에 의견이 다양하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유다인의 왕 헤로데는 박해자가 되고 머나먼 동방에서 온 이교도들은 예수님을 경배하게 되었다. 찾고자 하는 이는 찾아 얻고, 갖고자 하는 이는 갖고 있는 것조차 잃어버린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가장 먼 이들이 가까운 이가 되고 가장 가까운 이들 이 가장 먼 이웃이 되는 이야기다. 동방 점성가들은 진실한 탐구자들로서 갈대아 (점성술에 뛰어났던 고대 바빌로니아 셈족의 일파) 사람으로 천계를 읽고 별들을 관찰하는 천문학적 계산과 법칙에 어긋나는 별을 관찰하던 중에 이 별은 자연적 이치로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초자연적인 현상에, 일찍이 모압 왕 발락이 갈대아 족의 대표자격인 발라함을 초대하여 이스라엘 백성에게 저주를 퍼부어 달라고 간청(민수22-24장 참조)하였으나 저주하기는커녕 여러 가지 축복을 한 후 “야곱에게서 별 하나가 솟고 이스라엘에게서 왕홀이 일어난다.”(민 수24.17)는 예언을 추적하여 연구와 탐구 끝에 드디어 별의 인도를 받아 한 아기와 그의 어머니 마리아를 만난다. 그들은 아기에게 엎드려 경배하고 준비해온 선물을 바치며 왕으로서의 예우를 다한다. 그들의 탐색은 주님을 찾고 경배하고 기뻐하면서 주님의 보호 아래 고향으로 돌아갔다. 다른 길로 간 여정은 사람들에게 신앙을 갖기 이전의 생활에 안주하기보다 새로운 삶의 길로 나갈 것을 대 그레고리우스는 촉구하고 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찾는 이들이 당신을 찾아 얻도록 돌보아주시고, 일생동안 하느님을 찾아뵙는 누구에게나 암흑에서 빛으로, 불안에서 기쁨으로 나아가는 길임을 알게 된다. 한편 헤로데는 국가의 권력으로 그리스도를 부정하고 박해한 최초의 인간으로 외관상의 위대함 뒤에 내면으로는 오직 자신의 욕망에 사로잡혀 간교한 계략과 폭력으로 대처했고, 동방 박사를 이용하여 정략적 계략을 꾸며 자기의 욕심을 채우려 했다.
♠ 대화 방향 : ① 동방 점성가들은 먼 곳에서 하나의 별빛 따라 긴 여정 끝에 아기 예수를 만납니다.
나는 누구 또는 무엇의 도움에 의지하여 하느님을 만날 수 있었으며, 그때의 기쁨을 어떻게 성장시켜 왔는지 나눠보세요.
② 동방 점성가들처럼 예수님을 알기 위해 찾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하는지요?
♠ 참고 문헌 : ▪ 마태오 복음서 ( 정양모 역주 / 분도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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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 세례 축일
2020. 1. 12
마태오 3, 13~17
♠ 복음 공부 : 세례를 받으신 예수님
☞ 들어가는 말 : 마태오는 마르코 1.9-11을 옮겨 쓰면서 세례자 요한과 예수님이 나눈 대화를 다소 고쳤다. 요한이 서기 27년경 요르단 강에서 회개의 세례를 베풀자, 예수님께서도 갈릴레아 나자렛을 떠나(마르1.9) 요한에게 가셔서 세례를 받으셨을 그때 하느님의 영, 하느님의 힘을 듬뿍 받아 나자렛에서의 사생활을 청산하고 메시아로서 공생활을 시작하신다. 이사야 예언서(11.1-2; 61.1)의 성취인데, 이해할 수 없는 두 사건이 함축되어 있다.
* 13~15절 : 첫째 사건은 죄 없는 예수님이 스스로 죄인들 가운데 회개의 세례를 받으셨다는 사실이다. 요한 자신도 놀라 세례 베풀기를 사양한다. 왜냐하면 11절의 말처럼 예수님은 자신보다 더 위대한 분이시고, 무죄하시므로 6절에서처럼 죄를 고백하며 세례를 받으실 필요가 없다고 극구 만류한다. 그러나 그분께서는 그렇게 하는 것이 하느님의 의로움을 이루는 일이라고 하며 요한에게 세례를 베풀 것을 명하신다. 여기서 의로움이란 하느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으로 죄 없는 이가 죄인의 편을 드는 것이 하느님의 명령이라는 것이다. 순결하신 분이 죄의 강물에 자신을 담그시어 죄인들의 공동체 안에 일원이 되신 것을 죄 중에 있는 인류 가운데 내려오심을 다시 확인해 주는 것이다. 또한 성경에서 예수님께서 “곧” 물에서 올라오셨다는 표현으로 죄 없는 그리스도께서 죄인을 일으켜 그리스도 안에서 합당하게 세례를 받은 사람은 죄인이 ‘하느님의 영적 자녀’ 라는 거룩한 지위로 들어 올려진다. (마태오 복음 미완성 작품).
* 16~17절 : 두 번째 사건은 하늘이 열렸다는 것이다. 이는 원죄로 하늘이 닫혔으나 그리스도로 인하여 하느님과 새롭게 통교할 가능성이 생겨 하늘과 땅이 상통하게 되고, 이제 인간과 하느님의 관계가 올바로 맺어지고 구원의 문이 열린다. 그리고 ‘성령이 내려 오셨다’ 는 것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주님의 영이 인류에게 돌아오신다. 성령께서 비둘기 모습으로 세상 창조 때 물 위에 맴돌았던 하느님의 영을 상기시키며(창1.1),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라고 공적으로 증언하는 하느님의 사랑받는 아들로 15절의 말씀처럼 오로지 하느님의 뜻만을 행하신 분임을 천명하는 것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아버지의 목소리로, 아들은 인간의 모습으로, 성령은 비들기의 모습으로 나타났다고 하여 세례 장면을 ‘삼위일체’ 와 연관시킨다.
♠ 복음 요약 :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베푸는 세례는 죽음과 부활을 상징하고 새로운 생명으로 옮아가는 은총을 베푸는 것임을 보여주고 있다. 생명을 주는 하느님의 영이 세례성사 때 흘러넘치기 때문이다. 우리들 역시 물을 매개로 세례를 받지만 성령의 은총과 힘이 넘치는 세례임을 예수님의 세례 장면을 통해서 알 수 있다. 죄를 없애기 위해 당신이 죄를 떠맡으시는 그리스도의 도움으로 하느님의 아들을 통하여 인간은 다시 하느님의 자녀가 되고, 하느님 마음에 드는 이분을 통해 사람들은 하느님의 총애를 받게 된다. 따라서 아들에 속하는 이들과 아들 안에 있는 모든 이들을 만족하게 여기신다. 그래서 이 분은 우리 하느님이시고 위대한 사건이며, 이곳에 빛나는 광채는 예수님의 생애에 빛날 것이고, 이곳에 울리고 있는 음성 또한 사라지지 않고, 불의한 이들을 의로운 이들로 만드시기 위하여 예수님의 세례는 하느님께서 당신 구원을 다른 누군가를 통해서가 아니라 당신 손수 당신의 백성과 함께 ‘우리의 역사’를 이루실 것임을 보여 주신다.
♠ 대화 방향 : ① 세례를 통해 예수님은 ‘사랑하는 아들’, ‘마음에 드는 아들’의 삶, 곧 하느님 의 뜻을 따르는 사명을 받아들입니다. 현재 나는 세례 때의 약속을 지키며 살려고 노력하는지 성찰해 봅시다.
② 하느님께서는 세례를 통해 우리가 자녀이고, 그분은 ‘우리 아버지 이십니다’. 나에게 있어 ‘우리 아버지이신가요?’ 아니면 거리감이 느껴지는 분인가요?
♠ 참고 문헌 : ▪ 마태오 복음 해설 (리카르트르 굿츠빌러 지음 / 김태준 역/성바오로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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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 2주일
2020. 1. 19
요한 1, 29~34
♠ 복음묵상
1. 구원의 희생양이신 그리스도
한편 오늘 복음에서처럼 신약 성경의 많은 저서 속에서, 그리스도서는 하느님의 어린 양으로 서술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구약에 그 근거를 두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 백성을 이집트로부터 구원하시고자 결정하셨을 때, 이스라엘 백성의 모든 가정이 “일 년 된 흠 없는 수컷”(탈출 12,5)인 어린 양을 잡도록 명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날 밤에 고기를 먹되 어린 양의 뼈를 부러뜨리지 말며, 그 피를 그들의 문설주에 바르도록 명하셨습니다.
2. 천사들이 이집트의 맏아들을 치러 올 때 이 흠 없는 어린 양의 피 덕택으로 그들은 그 난을 피할 수 있었습니다. 이집트 탈출 이후에 이스라엘 백성은 이 하느님의 구원을 기념하여 매년 과월절을 지냈습니다. 과월절의 어린 양이 성전에서 희생되는 바로 그 시간에 예수께서는 죽음에로 넘겨지셨으며, 예수님께서 숨을 거두신 후에 사람들은 처형된 다른 사람들의 다리는 꺾었으나 예수님의 다리는 꺾지 않았습니다. 사도 요한은 이러한 사실 속에서 과월절의 어린 양에 대한 규정이 예수님 안에서 실현되었다고 보고 있습니다. 아무런 죄도 없이 세상의 죄를 대신 짊어지고 가신 예수님이 계시기에, 그리고 그분을 닮아서 말없이 우리가 모르는 곳에서 희생하거나 고통 받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내가 이렇게 세상을 위해 아무런 일도 하지 않고 나만 생각하고 사는데도 불구하고 세상이 망하지 않는 것이고, 여전히 구원의 희망을 꿈꿀 수 있는 것이라는 데 생각이 이르면 저절로 고개가 숙여지고, 예수님께 감사하고, 미안한 마음만 들 수밖에 없습니다. 십자가의 희망, 세례자 요한이 “나도 저 분을 알지 못하였다”고 하였듯이, 정말로 몰랐던 그분의 사랑이 있음에 오늘도 제가 이렇게 '무임승차'하여 감사한 삶을 살 수 있음을 다시 생각해 봅니다. 그리고 그분의 삶을 닮아서 나도 세상의 구원과 희망에 어떻게 보탬이 될지 여전히 어려운 숙제 같지만, 주변에서 할 수 있는 작은 일 하나 생각해 보며 하루 보내볼까 합니다.
♠ 대화 방향 :
① 이분이 누구신가? 오늘 복음은 세례자 요한의 예수님에 대한 증언입니다.
ㄱ.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분 ㄴ. 내가 나기 전부터 계신 분 ㄷ.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 분
② 이 세 가지의 표현을 여러분은 어떻게 믿고 있습니까? 이 표현의 뜻을 하느님의 사랑과 연관시켜 각각 설명해 보십시오.
♠ 참고 문헌 : ▪ 보득솔 ( 청년 성서모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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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 3주일 / 하느님의 말씀 주일 / 해외 원조 주일
2020. 1. 26
마태오 4, 12~23
♠ 복음 공부
* 12절 : 예수님께서는 세례자 요한이 잡혔다는 말을 들으시고 갈릴레아로 가신다. 그리고 성장하셨던 고향 나자렛을 떠나 즈불룬과 납달리 지방 호숫가에 있는 카파르나움으로 가서 자리를 잡으신다.
* 13~16절 : 이사야서의 예언이 그대로 이루어진다. “즈불룬 땅과 납탈리 땅 바다로 가는 길, 요르단 건너편 이민족들의 갈릴레아, 어둠속에 앉아 있는 백성이 큰 빛을 보았다.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운 고장에 앉아있는 이들에게 빛이 떠올랐다. 주님은 빛이시기에 주님이 현존하시는 곳은 어둠이 빛으로 바뀐다.
* 17절 : 그때부터 예수님께서는 “회개하여라,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 하고 선포하기 시작하신다.
♠ 복음 요약 :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를 수 있는 것은 큰 은총이다. 구약성경이나 유다교 문헌 어디에서도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른 경우를 찾아볼 수 없다. 구약성경에 하느님의 이름인 ‘야훼’라는 단어가 나오지만, 유다인들은 하느님의 이름을 입으로 발음하지 않았다. 허물 많고 죄스런 인간의 입술로 거룩한 하느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을 불경한 일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표현한 경우가 구약성경에 15차례 등장하지만 은유적으로 쓰였을 뿐 직접 호칭을 사용한 적은 없다. 그러나 마태오 복음을 통해 예수님은 “‘하늘에 계신 저희 아버지’라고 기도하라”고 전하며, 우리가 하느님을 ‘아버지, 아빠’라고 부를 수 있게 허락하셨다. 이로써 우리는 하느님과 보다 깊이 있는 관계를 맺을 수 있게 됐다. 하느님이 아버지가 된다는 것은 어떤 위태로운 상황에서도 나를 지켜줄 수 있는 든든한 버팀목이 생긴다는 의미다. 「예수 - 우리의 발걸음을 아빠 하느님께로」를 펴낸 송봉모 신부(예수회 · 서강대학교 교수)는 “하느님을 아빠라 부르게 되면서 나를 이 세상에 낳으시고 돌봐 주시는 이는 궁극적으로 아빠 하느님이고 내가 그분을 떠나지 않는 한 나의 삶은 생명과 구원의 삶이라는 확신을 얻었다”고 밝힌다. 아울러 송 신부는 “우리의 발걸음을 사랑의 아빠 하느님께로 인도하는 것이 그리스도 예수님의 바람”이라고 강조하며 이 책을 통해 우리를 아빠 하느님께로 인도하고자 한다. 책에는 하느님과 가까워지기 위해 알아야 할 세 가지 가르침이 담겨있다. 첫 번째 가르침은 ‘아빠 하느님’이다. 송 신부는 성경의 비유와 예화를 통해 예수님이 알려주신 아빠 하느님이 어떤 분인지 서술한다. 저자는 “아빠 하느님은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한눈을 팔아도 언제나 우리 손을 놓지 않으신다” 며 “이런 아빠가 있기에 우리는 힘겨운 삶 속에서도 힘과 용기를 되찾을 수 있다”고 책을 통해 밝힌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주님의 기도’도 잊지 말아야 할 가르침이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영광이 온 세상에 드러나기 위해 자녀인 우리가 그분의 도구로서 살기를 바라셨고, 이러한 바람을 ‘주님의 기도’에 담았다. 두 번째 장에서는 ‘주님의 기도’의 각 구절에 어떤 의미가 담겼는지 설명하며 하나하나 마음에 새기며 기도해야 함을 강조한다. 마지막 가르침은 ‘행복 선언’이다. 예수님은 “회개하여라,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마태 4,17)라고 선포하며 제자들을 불러 산상설교를 했다. 이 때 예수님은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슬퍼하는 사람들, 온유한 사람들,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 자비로운 사람들,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의 행복을 빌었다. 송봉모 신부는 “주님과 일치됨으로써 우리는 참 행복을 누릴 수 있다” 며 예수님이 전한 행복 선언을 실천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가톨릭신문 민 기자)
♠ 대화 방향 : ① 뇌 과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사람이 행복감을 느낄 때 뇌에서 ‘세로토닌’ 이라는 물질이 나온다. 나와 가까운 곳에 있는 사람들은 가족이다. 주님을 모시고 가족끼리 서로 자주 보듬어 주면 뇌에 좋은 물질들이 쏟아진다. 그런 사람들은 주변에 있는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슬퍼하는 사람들을 위로해주고 자비를 베푸는 마음이 깨끗한 사람이 된다. 그리고 평화를 이루어간다.
♠ 참고 문헌 : ▪ 가톨릭신문 ( 민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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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회원 묵상자료 기고 >
“오실 분이 선생님이십니까... ? ”
< 마태오 복음 11장 2~11절 >
장 도미니꼬 사비오 (철호)
광주 / F‧B회원
찬미 예수님! 안녕하십니까? 성서형제회 형제 자매님들...
세례자 요한이 왜 이런 질문을 제자들을 시켜 예수님께 보내서 “오실 분이 선생님이십니까? 아니면 저희가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합니까?” 라는 질문을 했을까요?
세례자 요한과 예수님은 서로 모르는 분이었을까요?
‘굿뉴스’ 에 보면 답이 잘 나와 있습니다.
[ 세례자 요한과 예수님이 서로 모르는 사이로 성경에 기록된 것이 아니라,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을 아셨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나는 물로 세례를 준다. 그런데 너희 가운데에는 너희가 모르는 분이 서 계신다. 내 뒤에 오시는 분인데,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드리기에도 합당하지 않다." (요한 1,26-27 참조)
그리고 마태오복음서에서는 예수님께서 세례자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러 나오시자, 세례자 요한이 이렇게 고백합니다. "제가 선생님께 세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선생님께서 저에게 오시다니요?" 하면서 그분을 말렸다.(마태 3,14 참조)
그리고 더 직접적으로 요한복음에서 세례자 요한은 자신의 제자들에게 예수님을 이렇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튿날 요한이 자기 제자 두 사람과 함께 그곳에 다시 서 있다가, 예수님께서 지나가시는 것을 눈여겨보며 말하였다. “ 보라,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 그 두 제자는 요한이 말하는 것을 듣고서 예수님을 따라갔다." (요한 1,35-37 참조)
그런데 세례자 요한도 한계가 있는 인간인지라 자신이 헤로데의 감옥에 잡혔을 때, 예수님께서는 유다인들의 여러 고을에서 가르치시고 복음을 선포하시려고 그곳에서 떠나가셨습니다. 그런데 요한이,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을 감옥에서 전해 듣고 제자들을 보내어, "오실 분이 선생님이십니까? 아니면 저희가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합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마태 11, 1-3 참조)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시작하신 일이 세례자 요한과 그 당시 유다인들이 기다렸던 ‘메시아 상’과 전혀 달랐던 것입니다. 당시 유다인들은 메시아가 오셔서 로마를 무력항쟁으로 몰아내고 하느님의 나라를 이루실 것이라고 기대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모으시고 그들을 가르치시고 병든 이들을 고쳐주시고 복음을 선포하셨습니다. 그러니까 그들이 기대했던 메시아의 모습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세례자 요한이 자기 제자들을 보내어 예수님께 여쭈어 보는 것입니다. 그러자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요한에게 가서 너희가 보고 듣는 것을 전하여라. 눈먼 이들이 보고 다리 저는 이들이 제대로 걸으며, 나병 환자들이 깨끗해지고 귀먹은 이들이 들으며, 죽은 이들이 되살아나고 가난한 이들이 복음을 듣는다. 나에게 의심을 품지 않는 이는 행복하다." (마태 11, 4-5 참조)
그러니까, 마태 11,4-5의 말씀은 구약성경 이사 61,1-2의 예언의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이사야 예언서의 말씀들을 그대로 실행하고 계심을 너희가 보고 듣고 있지 않느냐? 그러니 가서 그대로 전하라” 는 말씀은 곧 예수님께서 이사야 예언서에 예언되어 오시기로 한 그분이시라는 말씀이 되는 것입니다.
루카복음 4장 16절에서 18절의 말씀을 보면,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 주시니, 주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이 바로 이사 61,1-2의 말씀으로, “하느님께서 메시아를 보내실 터인데, 그 메시아께서 그러한 일들을 하신다” 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 당신께서 바로 구약의 예언서에서 약속하신 메시아, 바로 그분이시라는 고백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세례자 요한과 당시 유다인들이 기대했던 메시아의 모습과 다른 모습으로 예수님께서 일을 시작하시니까, 순간 긴가민가 했던 것이지요. 아마도 세례자 요한은 제자들이 전해준 그 말을 듣고 의심이 풀렸을 것이고, 목이 잘려서 순교하셨을 때 행복하게 순교하셨을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고서요. ]
주님께서 오십니다. 제가 어렸을 때 광주의 충장로거리에 나가면 레코드사에서 은은하게 울려 나오는 크리스마스 캐롤이 길거리에 울려 퍼지고 있어서 ‘아 ! 성탄이 이제 곧 오는구나...’ 마음이 기뻤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그런 풍경이 사라져서 아쉽습니다. 아주 어렸을 때 동생이 다니던 집 가까운 광주중앙교회 유치원에서 크리스마스 성극을 보러갔던 일이 지금도 생생하게 떠오릅니다. 동생은 동방박사 세 명 중에 한 명이었습니다. 어린 제 눈에 보인 성극은 너무 아름답고 멋있게 느껴졌습니다. 저도 마음속으로 성극을 한번 해보았으면 하는 부러움도 있었습니다. 성극을 보러 온 동네 어린이들에게 단팥도너스와 우유를 한 개씩 나누어 주었습니다. 어린 저에게는 너무나 따뜻한 성탄이었습니다. 오랜 시간이 지난 후 저는 성서형제회에서 꿈이 이루어졌습니다. 아나스타시아 자매님과 함께 성극을 하게 되었습니다. 비록 성탄 성극은 아니었고 아브라함과 이사악 성극이었지만, 성극을 하면서 행복했습니다. 어린 시절로 돌아간 기분이었습니다. 가장 기억에 남는 성극은 나바위 성당에서 했던 이주민들 앞에서 했던 성극이 기억에 생생합니다. 아나스타시아 자매님 부탁합니다. 이젠 아브라함 성극 그만하고, 성탄 성극을 했으면 합니다. 저는 동방박사 세 명 중 한 사람 역을 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함박웃음을 웃고 기쁘게 성탄을 맞이할 것 같습니다. 마음속으로 생각만 해도 즐겁고 기쁩니다. 하느님 보시기에 우리 모두는 어린이가 되기를 바라실거라 생각합니다.
은총의 대림 주간이 되시길 기도드립니다.
+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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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FㆍB 봉사자 피정 스케치 >
F․B 설립 50주년 맞이 봉사자 준비 피정
전국 서기 : 권 토마 (순)
+ 찬미 예수님 !
먼저, 오래 전부터 예정된 중요한 가족행사가 있었음에도 저희 성서형제회를 위해서 준비해주시고, 차분히 피정지도해주신 정 아퀼레오(지풍) 신부님의 헌신에 깊이 감사드립니다.
좋은 날씨에 오래간만에 천안 나들이였다. 컴컴한 새벽을 가르며 첫 기차에 몸을 실었다. 열차는 안개 속으로 들어갔다.
방 레오 전국조정 말씀선포자의 도움을 받아서 아퀼레오 신부님댁으로 이동할 수 있었다. 집 안에는 미사제대를 중심으로 여러 사람이 앉을 수 있는 탁자가 마련되었다. 작년에도 수많은 시간을 할애해 주시고 우리를 영적으로 준비 시켜주셨는데, 우리 봉사자들은 과연 무엇을 해 왔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지난번에 신부님이 제시해주신 ‘성서형제회의 현황과 문제점’을 우리가 해결하기에는 너무나도 광범위하고 구체적이며 심도 있는 내용이어서인지 과제해결을 위한 접근조차도 못하는 상황들이 일어나곤 하였으니, 그 대표적인 것이 전주 공동체의 역할인 것이다.
전주 공동체에 대한 소식은 전국 봉사자모임에서 조차도 공식적으로 언급하기에는 무척 예민한 내용이라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분명히 멀지 않아 용기있는 누군가에 의해 전주 공동체는 다시 두 발로 굳건히 일어나서 활성화되리라 우리 모두가 믿고 있기에 함부로 판단하지 않고 침묵으로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신부님은 지난 하계 연수회 때는 원론적인 말씀을 하셨다면, 이번 피정에서는 실천적이고 기본적인 것에 대해서 충실히 말씀해 주셨다.
다만 이글을 쓰는 필자는 인문학에 문외한인지라
저의 눈에 보여지고 느껴지는 부분만이 기록됨을 이해해 주시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신부님은 간간히 성경말씀을 인용하셨지만, 피정 내용을 살펴보면 신앙인이 아닌 어떤 일반인 모임에서도 들어야 할 유익한 인문학적인 말씀이셨다.
신부님의 가족행사 일정으로 피정 시간을 한정적으로 활용될 수밖에 없었음에도 신부님은 귀에 쏙쏙 들어오게 말씀해 주셨다.
그 와중에도 Tea Time 그리고 김밥으로 간단한 Lunch Time을 가졌다. 떡과 호두과자, 과일 등이 풍성하게 차려졌다.
피정의 주된 내용은 공동체에 대한 말씀이셨다. 나 자신을 통해서 공동체를 일구어나갈 것을 주문하셨다. 요즈음 취업 상담에서 많이 쓰이는 성격유형검사에 대해서도 언급하셨다. 이는 그 자리에 참석한 이 리드비나(유경) 자매님에 의해서 다음 모임에 실행해보기로 했다.
제 노트에는 신부님의 하신 말씀을 빼곡히 적어왔지만, 제대로 이해되지 못한 내용을 여기에 언급하는 것이 괜찮을까 하는 염려를 하게 됐다. 다들 열심히 노트에 적거나 머릿속으로 기억하는 모습을 보곤 금방 그들의 방식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좋을 것 같아서 여기서는 그 내용을 자세히 언급하지 않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신부님은 지난번에도 언급하셨지만, 사제생활 초기에 있었던 '본당을 지으면서...' , 본당공동체와 함께 하신 일들... 여러 가지 일화들을 지금 막 이 자리에서 본 것처럼 소생하게 말씀하신다.
신부님은 특히 특유의 용어를 사용하여서 현장감있게 말씀하시지만 저의 머리로서는 표현할 방법이 없어 아쉽기만 하다. 지난 어떤 드라마에서 본 '향기를 보는 여자'에 대한 생각이 떠오른다.
성서형제회는 그 나름대로의 특성을 지닌 단체이기도 하나, 지금 50여년 가까이 오면서 우리 회원들이 지니고 있는 여러 가지의 향내와 장점들이 우리가 몸담고 있는 각 본당이나 교구공동체에서 분명 제대로 조명되거나 전달되지 못하고 있는 현실이다.
문뜩 필자의 머릿속에서 지난 원곡성당에 있을 때에 들려왔던 ‘사도 바오로의 고백’ 이 새로운 향기로 흘러나오고 있음을 느낀다.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의 지고한 가치 때문에 다른 모든 것을 해로운 것으로 여깁니다...
(그것은) 내가 그리스도를 얻고 그 분 안에 있으려는 것입니다.“
우리는 서로에게 미리 성탄의 기쁜 인사를 나누면서 내년 1월에 서울 당산동성당에서 만날 약속을 하면서 생활의 터전으로 돌아갔다.
아퀼레오 신부님과 가족들,,, 그리고 성서형제회 모든 봉사자들과 이들을 염려해주신 모든 회원들에게 주님의 은총이 가득하시기를 빕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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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회원 기고 >
F․B 설립 50주년을 준비하면서... - 제 6 부 -
권 토마 (순)
안산 원곡본당 FB
< 평신도의 성서사도직 활동의 한계점 출발 (상편) >
16세기에 공의회를 열어서 평신도가 성경을 소유하거나 읽는 것을 금했다. 오랫동안 이단으로 인하여 많은 어려움을 겪은 교회는 동서로마의 환경으로 정교회와 갈라지는 일이 생겨나고, 결국은 떨어져 나가는 교회가 생겨났으니, 종교분열이었다.
가톨릭은 성경 자체를 읽는 것을 엄격히 규제했으며, 이 모든 것을 사제나 수도자들의 교리교육 등을 통해 받아들이기를 바랬다.
20세기에 들어와서 제시된 성서문헌들은 성경을 읽는 우리 교회 내에 많은 것을 변화시켰다. 그것이 발단이 되었는지는 모르지만, 1960년대에 들어와서 제2차 바티칸공의회와 그 이후 교황에 의해서 여러 가지 문헌이 반포되었는데, 이들의 주요 내용은 ‘바티칸공의회 정신의 정착’ 이었다.
이런 일로 현 프란치스코 교황에 의해서 반포된 ‘복음의 기쁨’은 우리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지만, 교회 내에 그 정신이 스며드는 것은 여전히 어렵고 먼 길처럼 보인다.
제2차 바티간공의회는 ‘평신도 역할’에 대해서 할애되었지만, 여전히 평신도는 말씀을 알아차리는 ‘분별력’과 ‘복음의 생활화’가 현저히 떨어지기에 아직도 평신도가 성경을 직접 연구 분석하는 일이 지극히 위험하다는 생각이 지배적인 것 같다. 우리 교회 내에는 여러 가지 사회사업을 하고 있고, 비가톨릭 국가에서 하는 사회복지사업 중에는 대체로 비가톨릭인에 의해서 운영되기에 가톨릭 명칭을 사용하거나 교회 이름으로 활동하려면 반드시 교구의 승인을 받아야 한다.
뿐만 아니라, 교회 신앙 단체로서 교우들만의 단체일지라도 지도사제를 어렵게 모셨음에도 불구하고 단체를 인준 받기 위해서는 아주 까다로운 조건을 내걸고 있어서 교회 내에서 평신도가 신심단체 활동을 하는데 적지 않은 제약을 받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여호아의 증인’, ‘신천지’ 등과 같은 이단들의 교회 침투가 극성을 부리고 있고 성교회의 신앙교리를 혼란스럽게 하는 현세에서 우리 가톨릭교회 입장에서 취할 수 있는 가장 기본적인 방책일 것이다.
지금 교회 내에 여러 단체와 분과들이 있지만, 사실 가만히 들여다보면 말씀과 기도, 선교활동을 중심으로 하는 단체의 수도 적지만, 안타깝게 여기에 속한 회원의 수가 줄어들고 있을 뿐만 아니라 본당 공동체 생활을 기피하고 있는 모습이 안타깝다.
이러한 현상의 원인을 모조리 평신도들의 문제에서 찾으려고 하는 경향이 있지만, 근본적으로 다른 영역에서 찾아야만 할지도 모른다.
이와 맞물려 본당 내에서 성서형제회를 활성화하는데 많은 한계를 느낀다는 것이다. 다행히 요즘에 들어서는 성서교리 신학원을 다니면서 성경과 교리 신학을 공부하는 평신도가 늘어나고 있지만, 본당에서는 그들의 역할과 입지가 불분명한 대상이 될 뿐이라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몇 년 동안 힘들게 공부한 평신도 선교사 및 봉사자들이 본당 공동체의 활성화와 선교활동에서 가진 역량을 진취적으로 발휘할 기회나 터전이 마련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문제점들 중의 하나는, 소공동체가 몇 십 년이 지나도록 제자리걸음을 하는 이유가 무엇 때문일까...?
그 안에서 주님의 현존체험을 하는 교우들을 얼마나 될까...?
요즈음은 자기 돈을 들여서 성지순례를 한다든지, 또는 각종 신앙교육, 피정 등 많은 교육을 참가하고 있지만, 그동안 교육기관을 통해 양성된 평신도를 참여시키는 신앙 프로그램은 많지 않은 듯하다. 우리 교회 공동체가 활발하게 살아 움직일 수 있도록 본당 신부님은 평신도들을 사도직으로 양성해서 그리스도일을 하는데 많은 역할을 부여하고, 그들 스스로가 하느님일을 잘 할 수 있도록 동기를 부여해주며, 이를 바탕으로 사제나 수도자가 본당 사목 목표에 도달할 수 있도록 양성된 평신도들이 적극 참여해야 한다는 것이다. 지금과 같이 본당에서 지극히 제한적인 활동만으로 머무른다면 평신도 사도직의 활동영역은 갈수록 줄어 들어간다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지독한 전염병과 같은 공동체의 질병으로서, 본당사목 차원에서 가볍게 볼 일이 아닌 듯하다.
각 교구마다 선교사와 교리교사를 2년제 교리신학원 출신으로 받아들여 임명하게 되는데, 현재 사회 체감적 상황들을 고려하여 본당에서 지원형태로 누구나 참석할 수 있도록 해서 그 범위를 넓혀나가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 될 것이다.
지금은 우리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사회가 바쁘고 복잡다단하게 흘러가고 있다.
이런 문제를 사제나 수도자의 몫으로만 해결되기가 어려운 구조일 것이다.
이런 이유에서라도 본당신부님은 본당사목 협력자들인 평신도들을 사도직으로 양성시켜서 그 역할을 수행하도록 해야 할 것이다... 아멘 !
지금 본당의 봉사자들은 본당 신부님을 주위에만 머무르는 구조체이기에, 이 구조체 떨치고 세상에 파견되는 것을 주저하지 말라고 ‘복음의 기쁨’ 은 말하고 있는 것이다.
교회는 교회 밖, 세상 안으로 열심히 파견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아멘 !
본당에서 우리 성서형제회(F‧B)가 누구보다도 먼저 신부님의 이러한 사목활동을 충실하게 협조하고 사도직을 실천하는데 앞장서야 할 것이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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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회원 기고 >
성탄절 산타클로스 가정방문을 마치고...
남 파비올라 (은정)
당산동 성당 로고스 팀 FB
이번 12월 25일 성탄절, 당산동 성서형제회에서는 아기 예수님의 탄생을 함께 기뻐하며, 산타클로스 가정방문 행사를 진행하였습니다.
매년 해온 행사지만, 늘 설레이고 뿌듯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산타를 4개조로 나누어서 혼자 계시는 어르신 21분 대상으로 산타방문을 했는데요, 각 조마다 분위기가 어떤 지는 잘 모르겠지만, 기쁨과 웃음이 가득했을 거라 예상해 봅니다~^^
저희 조는 소피아 자매님, 가브리엘 형제님, 운전 봉사자들(루돌프 / 레지오 단원 협조)과 함께 했는데, ‘예수님, 어서오세요~’ 노래도 즐겁게 함께 부르고, 축복 기도와 그날의 성경 말씀을 함께 읽고, 그동안 못나눴던 따뜻한 이야기들을 나누었습니다.
비록 자주 찾아뵙지는 못하지만, 성탄절만이라도 홀로 계시는 어르신들과 성탄을 같이 할 수 있어서 의미가 있는 것 같습니다. 내년에도 기쁜 성탄을 기약하며... 올 한 해 마무리 잘 하시길 바라고, 내년에도 즐겁게 기쁘게 주님과 함께 하기를 바래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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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FBI 재정 회계 보고 >
☧ 매월 FB본부로 보내주시는 의연금은 본당별로 보내지 말고, 각 팀별로 회계 정산하시어,
금액이 많든 적든 매월 꾸준히 보내주셔야 합니다.…….
※ 2019년 11월 입출금 내역